CAFE

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십계명 9 – 누구를 위한 정직인가(출20: 1-20)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09.06|조회수326 목록 댓글 0

십계명 9 누구를 위한 정직인가(201-20)

성경본문: 출애급기20:1-20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그동안 무고하신지요? 집안도 평안 하지요?

자꾸 돈을 부쳐달라고 편지를 써서 죄송합니다.

100만원을 부탁하는 제 마음은 참으로 부끄럽고 아프기까지 합니다.

고향을 향해 무릎 꿇어 용서를 빕니다.........

...후략...

 

추신,,

사실, 너무 마음에 걸려 우체부를 쫓아갔지요.

편지를 빼앗아 태우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정말 다시 회수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러나, 너무 늦어 우체부를 놓쳐 버렸습니다.

제 불찰을 용서 하십시요....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아들아~~!!

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나 보다.

네 편지를 못 받았다......그러니 잘 지내라~~~~~~"

 

거짓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 .

김지찬 교수가 쓴 [데칼로그]에서 호모 팔락스’(Homo Fallax)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이죠.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정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이는 인간이라는 말로 인간을 정의 하는 것이죠.

2002년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 심리학자 로버트 헬드먼 교수는 거짓말과 관련된 실험을 합니다.

실험 조를 2명씩 3개조로 만들어 상대방에게 10분씩 자신을 소개하도록 한 것이죠.

한 조에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 가급적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소개하도록,다른 한 조에서는 자신을 소개하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보여주라는 것이고,세 번째 그룹에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녹화 장면을 분석해 보니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한 조에서는 평균 2개의 거짓말을, 자신의 능력을 보이려고 한 조에서는 평균 2.3개의 거짓말을 한 반면,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은 참가자는 0.88개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참가자들이 녹화한 화면을 보면 자신들이 거짓말 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헬드먼 교수는 초등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 대부분이 엄청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언젠가 한 방송에서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이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지만, 그 중에 거짓말 1위는 말 할 때 마다 상대방을 향해 존경하는 000의원님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개인 블로그에 나와 있는 윈스턴 처칠의 일화를 하나 소개 합니다.

정치인의 자질을 비웃으면서 이야기할 때, 윈스턴 처칠의 일화를 든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우쭐해질 대로 우쭐해진 상태에서 기자들 앞에서 정치인의 자질을 풀어놓았다.

정치인은 내일을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한다. 내일, 그 다음 내일인 10년 후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처칠이 한마디 하니 모든 기자들이 진지하게 받아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메모하는 기자들을 향해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10년 후에 예측이 빗나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져야 정치인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이 일화를 정치인의 뻔뻔한 심성과 위선적 선동을 정치인의 자질과 능력으로 이미지를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설득력 있는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까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을 진실이라고 설득할 수 있다면 거짓말도 괜찮다는 말일까요?

[사람은 8분마다 가짓말을 한다]라는 책의 저자인 감바 와타루거짓말을 비난하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소통 방법의 하나로 우리에게 유용한 기술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쯤되면 호모 팔락스라는 말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합니다.

첫째로는 이웃을 해하려는 의도로 자행되는 나쁜 거짓말,

둘째로는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

셋째로는 예의로 하는 거짓말이 있을 수 있고,

넷째로는 불가피한 거짓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데,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모르고 하는 말들을 통하여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 9계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9 계명의 정신. . .

오늘 제 9 계명의 본래 의도와 정신은 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재판은 증언에 의존했기 때문에, 말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증을 피하기 위해 모든 재판에는 2인 이상의 증인이 요구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은 바로 위증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건의 무대는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이스르엘 성읍이었습니다.

경치가 좋고 기후가 좋은 이곳에 북 왕국의 왕들은 별장을 짓고는 소일을 하고 지냈는데, 바로 인접한 곳에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던 나봇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아합은 별장 궁전의 정원을 확장하기 위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열왕기상 216절에서,

6-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그러나 왕의 제안을 나봇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땅은 조상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것이요,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이방여인으로 왕비가 되었던 이세벨이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녀는 한통의 밀서를 이스르엘 성읍의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두 명의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고발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발을 근거로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세벨의 계략은 구약의 율법에 근거하여 합법성을 가장하였습니다.

왕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면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고 (24:15-16), 이런 연유로 인하여 범죄자가 처형되었을 경우에는 모든 재산을 왕실에 귀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두 명의 증인이었습니다. 신명기 176-7절 말씀에 보면,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본래 율법의 의도는 신중 하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증언으로 인하여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형 판결이 이루어지면 그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증인이 앞장서서 형을 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직접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증이 판명될 경우에는 해당하는 형을 위증한 사람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형에 해당하는 위증을 한다면 그 사람이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9: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것이 판명되면 19: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또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로 말하지 않는 행위 역시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의로 사실을 말하지 않으므로 인해 역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51절의 말씀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제 9 계명을 만들어 주신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함입니다.

누구도 말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증인들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거짓된 혀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일 중에 하나가, 잘못된 소문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일 것입니다.

또한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일들도 많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의로 잘못된 말을 퍼뜨리므로 인해 상처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3절 말씀에,1.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그러면 성경은 모든 거짓말을 금하고 있는가?

사실 우리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면 솔직한 것이 모두 좋은 것인가?

 

이웃을 해하려고!!!”

오늘 말씀에 보니까,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 앞에 붙어 있는 말이 중요합니다.

네 이웃을 해하려고라는 전제 조항입니다.

사실 정의와 정직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랑 은혜가 없는 정의는 위험한 칼과 같습니다.

제가 군에서 군목으로 근무하던 시절, 좋은 지휘관을 만나서 행복한 군 생활을 했습니다.

매주 2시간 정도는 꼭 지휘관과 독대하는 시간이 있었고, 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일로 보고도 하고, 건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으로 인해 부대의 주임상사 2명이 보직해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정의감이라는 것 말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몰래 부식을 빼내거나,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보고하므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일에 대한 후회감이 앞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의감은 있었지만, 그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었던 것을 스스로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진실을 이야기 했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한 것이지요. 거짓이 사람을 죽이듯이, 정직이라는 말로 동일하게 사람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전 통합병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만나교회의 권사님 아들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고, 퇴원할 때쯤 되어서 부모님이 저희 집에 먹을 것과 선물을 한아름 싸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아들이 그냥 병원에서 지내다가 군 생활을 마칠 수 있도록 군의관에게 잘 말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교인이었던 군의관에게 잘 말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화가 났습니다.

지금 고생하는 군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느냐고. . .

그래서 저는 그날 오후에 군의관을 찾아가서 이 아이는 꼭 자대에 돌아가서 군 생활을 해야 하니까, 하루라도 빨리 보내 달라고 반대로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의 기분은 의기양양이었습니다.

소위 뇌물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정의를 행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후회가 되는 것은, 그 당시에 그 부모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의 정의감과 정직함이 얼마나 메마른 목회자의 심정이었나 하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고민을 많이 합니다. 많은 일들을 결정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서 어떤 인사문제를 결정할 때입니다. 가끔 목회자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면서 교인들이 목사님은 사랑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많은 부분들을 고민하며 얻은 결론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을 섬기기 위해 목회자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목회자의 잘못을 그냥 묵인한다면 많은 영혼들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조금 무섭게 대하는 스타일입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맡고 있는 목회자 하나가 잘못된다면, 구체적으로 말을 해서,어떤 부서를 맡겨놓았는데, 학생들이 준다든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그냥 둘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 사람을 사랑하므로 인해 많은 영혼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결정하고,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묵상하면서 결국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정직하고 신실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지요. 시편 152절의 말씀에 따르면,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자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신앙의 자세는,나에게 해가 된다 할지라도 정직을 말하며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이웃을 해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는 것, 사랑이 그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정직하고 진실한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거짓으로 인해 이웃에게 해가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진실만이 좋은 것인가?

다른 말로 한다면, 과연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인가?

 

모호한 상황들. . .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 느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면 사회생활은 불가능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몇 가지 모호한 상황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왜 안 된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 성경에서 용인되는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무엘상 20장 이하에 등장하는 요나단이 사랑하는 친구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인 사울 왕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사울 왕이 요나단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었을 때, 병적인 질투심과 편집증을 가지고 있는, 아니 이미 악한 영이 들어있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사랑하는 친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일이었기에 거짓을 고합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이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또한 사무엘상 16장 이하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할 왕을 찾으러 갈 때,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 1장 이하에는 모세 가족의 거짓말로 인하여 모세의 목숨을 건지게 되는 것도 보게 됩니다.

결국 정직이라는 것이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요, 사람을 살리는 거짓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이웃을 해하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2) 모든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잘못은 주관적 사실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을 정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유태교 전승에 의하면 랍비들이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하는 신부의 모습을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묘사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경우에 신부는 신부이기에 가장 아름다워야 하고, 신랑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솔직하다는 이유로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같이 물건을 사러갔는데,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그리고 이미 구입한 경우에 한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사실인양 이야기하므로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경우입니다.

성경의 정신에 의하면, 이런 경우에 자신의 솔직함 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신앙적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정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죠.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중에 하나인데, 생각 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출처 : 이준구의 희망찾기 / 십계명 강해20 / 2008.1. 수요예배 설교>

.대표적인 잘못된 이해가 정직을 비난과 동일시하는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정직한 말이라고 착각합니다.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제 사이에 이런 비난의 말들이 오고가면서 스스로 정직한 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말은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비난의 말입니다.

정직은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허물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직해지는 것이지 내가 보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정직은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격려를 부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내 이름을 바꿔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래에서 사라로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래는 귀부인이란 뜻이고, 사라는 민족들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사래는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명칭이고, 사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명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래를 사라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니까 영원히 자식을 못 낳는 여인으로 취급하지 말고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격려해주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래를 가리켜 사라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정직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말을 부정직한 말이라고 부르지 않고 격려의 말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격려의 말을 부정직한 말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시몬은 갈대입니다. 베드로는 남의 말에 의해서 좌우되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변덕이 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시몬을 반석이란 의미의 베드로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마다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말과 비난의 말을 구분해야 하고, 격려의 말과 부정직한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정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정직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격려의 말들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3)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우리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우리의 생각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일 자신이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한다면 이 사회 생활이 아마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주관적인 인식이며 반드시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제주에서 집회를 마치고 올라올 때였습니다. 유난히 제주에서, 공항에서, 비행기 안에서 저를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쯤 되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합니다.

젊은 부부였기에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는데, 저하고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가 목사님을 아주 잘 압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두 가지 감동을 받았다고 말을 하더군요.

하나는, 큰 교회 목사님이 자신들과 같은 좌석에 앉았다는 것,다른 하나는, 제가 비행하는 내내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을 보면서, 설교 원고를 직접 쓰는 것에 놀랐다고 말이죠.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지만, 때로는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를 하거나, 항공사 사정에 따라 비즈니스에 타는 때도 많은데, 지금 제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목사님들이 설교 준비를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지 모르지만, 큰 교회 목회자들이 부목사들에게 원고를 쓰도록 하거나, 설교 준비를 시킨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참 주의 해야 할 부분인데,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사실이 실체적 진실이 아닌 경우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렇게 다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진실이라는 말로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4) 완전하지 않지만 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선과 구별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심지어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선량한 척 그리고 종교적인 척 하지만 내면으로는 사악한 사람들을 향하여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위선은 거짓에 해당합니다.

한홍 목사가 쓴 [칼과 칼집]이라는 책에 보면, 위선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위선은 한자로 거짓 위()’착할 선()’을 쓴다. 즉 선한 것인 양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선이란 결국 도덕적 결벽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 서부의 한 대형 교회에서 과거에 치명적인 도덕적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이들 중 대부분이 평소에 나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도덕적 결벽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을 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새 역사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의의 칼을 높이 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이 하는 설교를 자신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목자의 자격을 갖게 된다. 남편이 잘못했다고 사과할 때 아내는 비로소 남편을 존경하고 위하게 된다. 부모가 말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자녀들이 제대로 못 크고 있음을 인정할 때, 그 자녀는 비로소 부모의 마음으로 몰입해 들어온다.

 

하지만, 부족함을 시인하면서, 완벽한 척 하지는 않지만 완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 부분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입니다.

 

정직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축복

9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화된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의미가 있고 행복한 것입니다.

정직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정직한 삶을 산 자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정직했기 때문에, 물질적인 보상이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직에 보상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직하면 언제나 보상이 따른다고 배운 한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봤는데, 실제 점수보다 많은 점수가 나왔고, 선생님에게 가서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선생님은 점수를 조정하여 낮은 점수를 매기면서 정직한 학생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선생님! 정직하게 말씀드렸는데 점수를 그대로 주실 겁니까?”

아마도 이 학생은 정직함의 대가로 높은 점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이겠지요.

이런 정직이라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정직한 삶을 살면, 분명히 손해를 보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정직함과 진실함 때문에 만사형통하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어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정직한 삶을 살기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1996<뉴스위크지>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미 해군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생도들이 퇴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부모가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다고 보도했습니다. 한 생도는 함께 연루된 생도들이 함께 거짓말을 하도록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라고 종용했지만 거짓을 거부하고 퇴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털어 놓은 후 자격심사위원회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어떤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이곳에 와서 제 양심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마음이 훨씬 홀가분합니다. 그뿐입니다

그는 분명히 해군 장교로서의 미래를 잃어버려야 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남은 인생에 대한 값진 투자를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2007년 초에 방송인 백지연씨저도 이 상품을 구입했어요라는 광고 멘트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억 원의 CF를 거절한 일이었죠.

담당자는 CF 촬영 후에 그 보험 상품을 구입하면 되지 않겠는야고 설득을 했지만 끝내 백지연씨는 광고촬영을 거부하고 돈을 포기합니다.

그녀가 <오마이 뉴스>와 했던 인터뷰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 상품을 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데 샀다고 말하는 건 나 스스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아닌가요?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신뢰성에 문제가 되는 행동이죠. 그리고 CF를 찍기 전에 구입한 것과 CF를 찍고 구입하는 건 엄연히 다르죠. . .”[데칼로그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축복과 의미가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자신에게도 떳떳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늘 보상을 바라다가 치사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할 마땅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 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3: 18)

이방의 왕 앞에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므로, 이방신에 절하지 아니하므로 풀무불 속에 던지어지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올바로 행할 것을 행하겠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정직한 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화된 자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축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이 계명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이웃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 지켜지지가 않는 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경험해 왔습니까?

로마서 520절에 보니까,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바로 죄책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로 사람들을 해하고, 나의 말의 실수로 인하여 영혼에 상처를 주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아주 오래된 농담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세분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뜨겁게 신앙의 열정이 살아난 이 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내어놓고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장로님이 먼저 고백을 합니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몰래 숨어서 담배를 폈습니다. 그렇게 끊을 수 없었던 나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아래 내려놓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그러자 나머지 두 장로님들은 얼마나 이 분이 이 문제로 힘이 들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음 장로님이 결심을 한 듯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사실은 저에게 숨겨논 여자가 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지 모릅니다.”

그러자 다른 두 분의 장로님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분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장로님의 기도제목을 내려놓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로님이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의 비밀을 들으면 참지 못하고 동네 방네 다니면서 떠벌리고 다니는 단점이 있습니다.” . .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제 9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다라는 차원에서 머무른다면, 그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죄책감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의 삶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 은혜를 아는 백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구약에서는 증인이라는 말이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위증으로 인해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신약에 등장하는 증인은 단순한 범죄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증인들의 역사라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 받은 자의 삶은 거짓을 증거 하지 않기 위한 삶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삶이 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부활의 증인 (24:48)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장에서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의 배신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를 보충 할 때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증인(1:22)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난 후에 행한 설교에 초점은 자신이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5: 32; 10:41)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증인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martus'라는 말인데, 바로 순교자를 이야기하는 martyr"의 어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정직입니다.

교회는 바로 순교자들의 피 위에, 그들의 증언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능력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사실을 증거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요, 그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증거자의 삶을 사는 자그것이 축복이요 능력입니다.

참된 증거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몇 해 전입니다.

중국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저는 참 감격적인 집회를 했습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난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청년들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구별된 나실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나실인으로 살기위해 어떤 부분을 하나님과 약속할 수 있는 지 결단을 요구하며 그들과 함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지금 기도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나라와 민족을 움직일 만한 위대한 인물들이 나오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쓰임 받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오게 하여주십시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요청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 속에 그 뜨거운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말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정직과 여러분들의 진실함, 그리고 여러분들의 피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축복이 임하기를 말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