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속으로(출20장 1-2)
성경본문: 출애굽기20: 1-2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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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계명은 상징이 아닌 실제입니다.
J. 존이 지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법 십계명] 서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어로 300 단어도 안 되는 십계명이 영국 법체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고, 인류가 그동안 만든 3,264만 7,389개의 법조항이 십계명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십계명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십계명을 잘 모른다. 15세부터 35세 사이의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조사결과, 대부분의 응답자가 십계명 중 두 계명 이상을 대지 못했고, 몇 계명의 내용을 설명하자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십계명 강연을 하면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십계명에 대한 무지였고, 하나는 십계명을 더 알고 싶다는 관심이었다.”
여러분 십계명을 다 외우십니까?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께서 아주 쉽게 외우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신 우 이 안 부 살 간 도 증 탐]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규칙을 정해 주신 것이 십계명이라는 것을 믿는다면,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10가지의 계명이 아무리 불편하다 할지라도,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말씀의 시리즈를 시작하는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십계명에 대한 이러한 항변을 듣습니다.
유목민으로 있던 시절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유효하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인류역사를 통해서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우리의 조상들이 가진 악한 본성을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 시대에 주신 계명 역시 우리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J. 존이 그의 책에서 한 말 가운데 가장 강하게 와 닿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십계명을 던져 버렸으나, 그 대가로 자유를 잃었다.
개인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오래된 법을 치워 버린 결과 도덕적 진공 상태가 생겨났고, 이제는 밤에 집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도, 아이들이 거리에서 안심하고 뛰어놀 수도 없다. . 최근까지만 해도 감시카메라는 경계가 삼엄한 교도소 수감자들을 찍던 물건이었건만, 이제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연스럽게 찍어 대고 있다. 흥미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으로 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 않은가?
유석경이 쓴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한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생을 얻는 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냥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하셨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21절 말씀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을 권하고 싶다.
그런데 이 구절이 진짜 자신의 전 재산의 처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다. 그가 100퍼센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 팔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실 그런 뜻이 아닐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성경은 다 진리인데 말이다.
나는 목사님들이 왜 그렇게 설교하시는지 안다. 자신도 다 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다 팔라고 설교하면 교인이 다 떠나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과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이 말씀이 주시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장 재산을 팔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물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풍성함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오늘 새로운 말씀 시리즈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아주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말씀의 여정을 출발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십계명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한 문장을 간단하지만 온전한 문장으로 다시 쓴다면, ‘나는 너의 하나님’ 이 되겠죠.
조금 더 살을 붙인다면, ‘나는 너를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쯤 되겠고,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시 쓰기 위해 덧붙인다면,‘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가 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십계명이라는 규율이 협박이나 억압이 아니라 ‘인도하심의 과정’이고 또 인격적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너’라는 말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명하게 지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십계명을 듣고 있는 ‘너’ 개인, 인격을 향한 말씀이라고 말이죠.
우리는 때때로 말씀을 너무 비인격화하거나 객관화하지 않나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삼자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말씀을 준비하면서 접하게 된 글인데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 서승동 -
어느 날, 아내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잠을 청하는데 잠도 오지 않습니다.
기도해야겠다며 겨우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내를 기다리냐?”
“네, 주님.”
“졸리냐?”
“아니요. 제가 지금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는 나를 기다릴 때는 왜 그렇게 잠을 잘 자냐?”
그 순간 생각지 못한 영적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는 왜 졸리는 걸까? 그것은 주님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내가 주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아내를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때는 사모함으로 기다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 만나면 되고, 내일 못 만나면 모래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이 시간에 하나님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약속하면 언제나 먼저 와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게로 나오면 언제든지 너를 만나 주겠다. 나와 더불어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요?
이방 땅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시며, 이제 가나안을 앞에 두고 이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들이 다시는 이방 땅에서 노예가 되지 않고, 거짓된 우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죄에 종노릇하지 않도록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격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계명, 즉 율법과 규율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격은 책임과 권한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전제에서 출발 합니다.
인간의 자유 중심에 ‘법’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십계명은 성경에서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가 앞으로 11주 동안 본문으로 삼은 출애굽기 20장이고, 다른 하나는 신명기 5장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계명은 B.C. 1450년 경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땅에서 지켜야 하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4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죠.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림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5-9계명까지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J. 존은 제 10계명을 따로 분류해서, ‘우리의 생각’을 다룬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나누게 될 말씀은 J. 존이 그의 책에서 제안한 대로 10계명에서 출발해 1계명으로 가는 순서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계명에서 다루는 죄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문제의 핵심,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계명을 지킬 것인지를 제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주변에서 시작해 핵심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심장부를 향해 나갈 것입니다. 사실 모든 계명이 1계명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1계명만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나머지 9계명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지 않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있다면 어떤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출발점은 10계명을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켜야 할 지’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팀 겔러 목사님이 쓴 [내가 만든 신]에 보면 우상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우상이다!’
예를 들어서 자식을 너무 많이 사랑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소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드러난 것은 그가 평생의 소원으로 생각한 것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의 소원이었던 아들 이삭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은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이 무엇이고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삭을 지칭하는 말이 의미가 있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시험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숭배’로 변한 것에 대한 결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아브라함의 삶에서 그의 아들 이삭이 ‘숭배’로 변한 것.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선택’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논쟁’이 아니라 규칙과 ‘순종’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결단은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시작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의 본문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요구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5절.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구체적인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지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맹신’한 게 아니다. ‘이건 미친 짓이고 살인이지만 그래도 나는 하겠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안다.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이번에도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보이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깨닫게 된 것은,하나님의 시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아들 이삭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를 알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이 이렇게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부분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을 하신 것은 그의 삶을 곤고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이삭을 향한 사람이 우상숭배였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십계명을 통해 우리 인생의 잘못된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10계명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써, 이 모든 것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10단계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 하나 적용되기 시작할 때, 얼마나 힘든 것을 깨닫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지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고백했던 거처럼,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하나 하나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는 지를 증명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와 사람들에게서도 동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남의 것을 탐내거나, 도적질 하고, 간음하고, 거짓 증거를 하게 될까요?
결국은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이 경영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오는 결과들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미 우리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데,세상을 바라보며 비교하기 시작하면 부족한 것들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에도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는데, 그리고 우리를 붙잡고 있는 허상과 가짜 신들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쉬운 길로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애굽땅, 죄와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순간,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이슨 미첼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 단순히 ‘믿기만’ 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따르기’ 전까지는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믿기만 하는 것보다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가 경험해 보니 단순히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를 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을 믿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우연히 믿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우연히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의식적인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마음 알아가기
오늘부터 시작하는 ‘십계명’의 이야기는 단순한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의 마음과 함께 친밀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주어진 율법이 ‘지키는 것’이라면, 신약시대의 율법의 완성이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원리입니다.
율법과 친밀함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나와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죠.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흔히 말씀을 해석했던 방식에 의하면 마리아는 신실한 사람이요, 마르다는 ‘일’로 인해 예수님께 질책을 받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40절에 있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라는 말이 실제로 그렇게 부정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디아코네오’라는 단어가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교회를 돕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 집사를 칭할 때 디모데 전서 3장 8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충실하게 예수님을 맞이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두 번 부르신 것 역시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셈 언어에서 사용되는 애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꾸짖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교훈을 주시고자 애정어린 투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스캇 솔즈는 그의 책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나를 통해 네가 변해야 한다.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먼저 네가 내게 영향을 받아야 한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를 섬기고 먹이려면 먼저 내가 너를 섬기고 먹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쁜 몸’이 아니라 섬김의 마음 이었던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다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준 사랑이 아닐까요?
마르다는 힘든 노동을 통해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 그 인정이 아니라, 이미 마르다를 인정하시고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죠.
오늘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왜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계명은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버거워하고 탈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지키도록 인도해 주시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결혼할 때 들은 이야기가, 제 아내에게 통금시간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고부터 좀 해제가 됐는데, 여러분 보세요. 딸에게 아버지가 “너 여덟시까지 들어와! 이거 통금 시간이야!”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통금시간만 눈에 들어오고, 그 통금시간만 주제로 느껴지면 아버지하고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겠어요.
그런데 그 딸을 보호하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면 그 지키는게 어렵잖아요. 대학생이 어떻게 8시까지 집에 들어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그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보이면 힘들어도 지키고 이유가 있는 것인데, 아버지의 마음이 보여 지지 않으면 그것이 힘든 것으로 끝나는 거에요.
오늘부터 우리가 시작하는 이 말씀들은 어떻게 그 계명을 지킬 것이냐에 집중하느냐가 아니라, 그 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속에 정말 예수님을 환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정신없이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준비보다 기다리던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십계명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알고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과 42절 말씀을 보세요.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의 맥락을 보면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오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42절에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질책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신 것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율법을 지키는 노력보다 그 율법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악한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칭찬을 받은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다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27편 4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는데 마르다가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던 마리아가 훨씬 더 충성된 삶과 헌신적인 삶을 살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이번에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하는 시간보다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주신 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실 힘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캇 솔즈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그분으로 전염된다. 마르다는 예수님 ‘처럼’ 되려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마리아는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함께 하는 동안 그분처럼 변해 갔다.”
십계명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진정 말씀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교리와 사랑 사이에서. . .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통해 비유를 한다면 마리아는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마리아와 같은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개 교리와 법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동하도록 만들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지 교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교리와 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 아래 앉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교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가르침과 관계없이 살 수 있다는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죽은 교리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교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공부하는데 아주 중요한 통찰인데, 스캇 솔즈의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
“교리는 우리 믿음의 뼈대와도 같다. 몸의 나머지 부분을 세우고 지탱하려면 뼈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뼈만 보이면 그 몸은 영양실조에 걸린 몸이거나 죽은 몸이다. 교리도 마찬가지다. 교리만 보인다면 그 기독교는 병들었거나 죽은 기독교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은 딱딱한 뼈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건강한 지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덧입은 계명이 우리들에게 주는 부요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굳이 한 번더 십계명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나오는 글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명령’, ‘규례’, ‘계명’, ‘율법’ 등의 단어에 대한 당신의 첫인상은 부정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본질의 표현입니다.
다음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계명들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0:12~13).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당신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분을 의지할 때 당신은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인생은 당신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도 있고, 당신의 삶을 망쳐 버릴 수도 있는 지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관계에 있어 풍성한 것을 손해 보지 않도록 삶의 지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주시는 최선의 것들을 당신이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당신의 인생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22:37~40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다시 반복되는 말이지만, 율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잃게 되면 그 중심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율법이 우리를 바리새인처럼 만드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비로소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데, 그 법에 ‘사랑’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랑하는 남녀가 있습니다.
이 둘이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법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죽기 살기로 그 법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아직 죄인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다면 죽기 살기로 지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결코 다른 신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만들기 보다는 우리가 예배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이,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야 지켜지는 것일까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켜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을 두 번째 강령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졌듯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게 되는 것도,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지키는 것도,다른 사람의 육체적 순결을 지키는 것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요?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하는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더 이상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켜지는 율법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지키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