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5 - 부모를 공경 하여라 장수하는 길이다(출20장12)
성경본문:출애굽기20:12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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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지난 6주 동안 살펴본 계명들이 ‘부정적 명령’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였다면 오늘의 계명은 ‘긍정적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긍정적 명령은 다음 주에 다루게 될 4번째 계명과 더불어 십계명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심에서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목적이 ‘규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왜 십계명에 ‘자식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만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5번째 계명부터는 인간들의 관계에서 지켜야 될 것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그렇습니다.
지켜야 할 법을 준다는 것은 그 만큼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기념일’이 있는 이유는 그렇게 정해놓아야 할 만큼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꾸 잊기 때문이죠.
우리는 참 부모의 마음을 잊고 살 때가 많은 듯합니다.
세상을 떠난 황수관 박사의 영상인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화1 황수관 박사 영상 발췌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와 아들과 까치의 이야기이다
83세 아버지와 53세 아들이 마루에 함께 앉아 있다가 마당에 까치가 날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으셨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대답한다. “까치예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또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또 대답한다. 퉁명스럽게... “까치예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또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짜증난 듯이 말한다. “저거 좀 아까 까치라고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세 번째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버럭 화를 내며 대답한다. “아까 까치라고 말했잖아요. 그것을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순간 서러워진 아버지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옛날 일기장을 꺼내 오셨다.
‘아들이 세 살 때 마당에 까치가 날아오자 아들이 묻는다. “아빠 저게 뭐예요?”
나는 말해 주었다. “응 저건 까치란다”
조금 있다가 또 아들이 묻는다. “아빠 저건 뭐에요?”
나는 또 대답해 주었다. “응 저건 까치란다.”
아들은 조금 있다가 또 같은 질문을 한다. “아빠 저건 뭐에요?”
이렇게 아들은 23번을 나에게 질문을 똑같이 했다.
아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대답해 주고는 꼭 안아 주었다.
이 글을 읽은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죄스러운 생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재혁 목사가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이와 비슷한 예화를 사용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금융그룹에서 광고로 나왔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40개월 미만의 아빠들을 불러서 몰래 카메라를 집어넣고 그들에게 시험을 해봅니다.
아동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 아버지들에게 설문조사를
시킵니다.
아버지 몇 분이 그 사무실에 들어와 설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설문지에 답하기 시작합니다.
그 설문지는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답을 신나게 써내려가는 아빠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차 핸드폰 책상 지갑에 아이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습니까? 전화를 뒤져서 몇 장이나 있는지 뒤져보기도 하면서 웃으며 기쁨으로 그 답을 써내려갑니다. 최근에 아이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기쁨으로 웃으며 그 모든 설문을 다 끝낸 아빠들에게 설문지를 걷고 다른 한 세트의 설문지를 줍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설문지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대상이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멈칫합니다. 아버지가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침묵이 흐릅니다. 차 핸드폰 책상 지갑에 아버지 사진 몇 장이나 있습니까?
가슴을 움켜쥡니다.
최근에 아버지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까?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립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오늘의 계명은 인간들이 지켜야 하는 계명의 첫 번째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또한 인간의 계명 중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첫 번째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의 시작이 ‘하나님 만’을 섬기는 것이었다면, 인간들의 관계에 있어서 시작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하는 일들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듯이,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는 일들이 세상에서 잘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과 부모가 모두 자격이 있기 때문에 공경하고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본의 감독 겸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평생을 함께 살다보니 가족이 ‘원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참 힘든 것은 가족이 아니면, 그저 지나가 버리거나 참으면 되는 일이지만 가족은 늘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옛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전생의 원수가 이생에서 가족으로 만난다.’라고 말이죠.
오늘 우리가 이 다섯 번째 계명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인데, 그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현상 중에 하나가 ‘존속 살해’라는 것이죠.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2008년 4%를 차지하던 존속 살해가 2010년에는 5.3%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2009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2% 프랑스가 2.8% 그리고 영국이 1%인 것에 비교하면 그 수치가 훨씬 높습니다.
[데칼로그]에서 김지찬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외국보다 가족끼리 부대끼는 비율이 높다 보니 갈등이 더 커질 위험이 높다는 지적에서, 생명을 주고받는 사이인 부모와 자녀관계도 얼마든지 천박해질 가능성이 있고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위험이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가족관계에서 더 무서운 것은 단순한 ‘살인’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방치’하는 무관심의 문제가 아닐까요?
언젠가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 실렸던 글을 소개 합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가 칠십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하게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보았습니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본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오늘 다섯 번째 계명이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혹시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은 그 만큼 지키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경의 대상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은 여러 군데서 “사랑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 어디에서도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인용된 예화인데, 오늘의 계명, 그리고 ‘부모 공경’과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텍사스의 한 사내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30년 후 그는 무일푼으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은 자신을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분개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가 아버지로, 어머니의 남편으로 우리에게 해준 것들이 뭐가 있어?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신앙심 깊은 큰아들은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 등을 저당 잡혀가며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말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쓰여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경외”라는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대한 것입니다.
잠언 1장 7절과 29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와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을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기 때문이다”(왕하17: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입니다.
레위기 19장 3절에 보니까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하나님과 함께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 부모는 경외해야할 대상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부모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어는 정도는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분 때문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앙에서 볼 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불경은 곧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책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니까“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의 존재가 가능케 되는 것, 축복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 그 것이 하나님과 부모의 동일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부모가 자식을 향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를 아시는 분이시지요.
몇 년 전 분당 중앙교회를 담임하는 최종천 목사님을 초청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새벽 예배를 갈 때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들은 모르지만 언제나 지켜보고 챙기는 아버지의 심정에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우리를 늘 덮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
언젠가 제주도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갔는데, 도착하는 순간부터 쫑알쫑알 대고 싸우는 아이들을 다 챙겨 가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래 하나님은 웬만큼 깽판을 쳐도 나를 버리시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누구나가 경험하는 것이지만,차 안에서 싸우는 아이들을 수없이 협박하면서, “너희들 싸우면 여기에다 내려놓고 갈 거야.”라고 했지만, 한 번도 내려놔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너희들 셋을 셀 때까지 기회를 준다.” 그러면서 숫자를 카운트 할 때, 한 번도 “하나, 둘, 셋”을 빠르게 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져 줄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것이 또한 부모의 사랑과 동일하다는 것이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그 이유만으로, 공경 받기에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갔기에 말을 할 수 있지만 만나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6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중에 하나가 아버지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이전에 같은 목사이기에 목회적인 비전의 차이도 있고, 아버지와의 다른 삶의 경험들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 때에는 ‘갈등’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와 생각이 다른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힘들어도 제가 늘 이겼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늘 져 주시는 분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부모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에게 범한 죄는 하나님께 범한 죄와 같은 형벌로 대단히 엄하게 처벌되고 있습니다.
즉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5, 17절의 말씀,“15-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7-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1장 18-21절 말씀에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술 취해 방탕한 아들은 투석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악한 자식이라고 해도 돌에 맞는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 자식을 고발할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잔인한 영화이지만 부모를 죽인 패륜아와 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으면서도 애를 썼던 부모의 모습이 대조가 되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통해 오늘의 말씀을 묵상했던 한 권사님 이런 묵상 글을 썼더군요.
묵상1 문지윤 권사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서 느낀 것이다.
아들은 부모님이 큰 재산을 자신의 뜻은 상관없이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니 부모님을 살해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급기야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
밤에 몰래 부모님의 집에 들어가 무참히 살해하고, 그 와 중에 아들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무언가를 땅에서 주워 입으로 가져가 삼킨다.
나중에 형사가 현장검증을 하고 시체부검을 하여 그 어머니의 목에서 발견된 것은 아들의 부러진 손톱이었다.
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면서도 아들의 죄가 드러날까 죽어 가면서까지 그 부러진 아들의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 삼키다가 죽음을 맞으며 목에 걸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아들은 그 순간에는 당연히 몰랐고 나중에야 알게 된다.
끝까지 악역을 맡은 배우는 아주 나쁜 아들의 역할을 잘 연기했지만, 과연 저런 부모님에게 어떻게 저리도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되었던 영화였다.
부모님의 사랑은 한도 끝도 없다.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는 자식에게 무엇을 퍼 주어도 아깝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부모님께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늘 좋은 것을 주고자 함을 아는 나는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당연히 공경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분명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 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장 15-26절에는 열두 가지 종류의 저주받을 행동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우상숭배요, 두 번째가 부모에 대한 죄입니다.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6)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공경’이 단순히 자녀들에게 부여된 의무의 차원을 넘어서, 공경을 받아야 하는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언제까지 자식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도 없고, 언제나 부모로만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그 부모도 누구의 자식이었으니까 말이죠.
제 5계명은 자식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니라, 동시에 부모에게 향한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즉 공경을 받을 수 있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그리고 좋은 환경을 주었다고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에게 공경을 받을 만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이며, 부모는 가장 훌륭한 종교 교육가가 되어야 합니다.(신명기 6장 6-9절)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벌써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입니다.
아이들이 기말고사를 치르는 첫날이라, 아침에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하시고, 공부한 대로 실력을 잘 발휘하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이놈이 학교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공부한 대로 시험 보게 해 주세요. 그런데 공부한 것보다 조금 만 더 잘 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점수가 좋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너 설교 시간에 점수를 공개한다.”라고 했더니 협박하기를 “그러면 교회 옮길 거예요”라는 겁니다.
물론 제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좋지만, 저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기도하고 시험을 보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 되도 된다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대단히 주저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루터가 그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신앙교육에 책임을 다할 때,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에베소서는 자녀 교육의 원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장 4절에서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키워야 합니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며 최선을 다한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양육하므로 인해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부모들의 위상이 세워지고, 부모들의 삶에 걸맞게 아이들이 자라주기를 원하는 마음들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 자녀들이 공부를 잘 못하거나,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므로 인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자녀들을 질책하는 모습들을 말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숨이 막혀 합니다.
어쩌면 이런 부모들의 모습들 때문에 아름답게 창조된 하나님의 본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라고 기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그대로 품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을 훈계할 때,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그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로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열린 가정 소책자에 나온 아들의 눈물”이라는 짧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경 미화원인 아버지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 그리고 외아들이 사는 가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주 고급 상표의 청바지를 사들과 왔는데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며칠을 추궁한 결과 아들은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손지갑을 훔쳤어요.”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들이 돈을 훔친 것이 견딜 수 없었고, 아들을 설득하여 경찰서에 자수를 시켰습니다.
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다른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지게 되었고 ,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일은 그 아버지가 아들의 행위를 마음 아파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게 된 것입니다.
재판이 열린 날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남편의 뜻대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판사는 아주 의외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기소 판정을 내리면서 판사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에, 이 아들이 평생 이러한 아버지의 교훈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믿기에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님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자녀들의 잘못을 감싸거나 모르는 척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키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또 우울하게 교회학교가 지나갑니다.
중, 고등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르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시험에 드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학생이 청소년부에 있는 선배에게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를 했답니다.
“언니, 나 교회 가고 싶은데 엄마가 못 가게 해, 시험 공부하라고, 그리고 엄마는 일찍 교회 봉사하러 갔어.”
이 세상의 행복은 공부를 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님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십니까?
공부만을 하도록 키운 아이들은, 이다음에 커서 절대로 부모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신들이 언제까지 자녀들을 돌보아 주리라고 생각합니까?
결국은 당신들의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올 텐데, 이기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결단코 부모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성경은 “장수”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3절에 보면,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에서 장수한다는 말씀은 단순히 한 생명이 길게 인생을 산다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한 자식들은 그 다음 세대에 공경을 받을 것이며,공경을 받도록 자녀를 교육한 부모들로 인하여 자손이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지요.
십계명에 오직 부모에 대한 말씀만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결국 가정 전체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의 부모가 공경의 대상이 못 된다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들 가운데 있는 “부모에 대한 증오심” 아니, 증오심은 아니더라도 “부모님이 공경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혹시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들, 혹은 자녀들에게 불의한 일을 시키는 부모에게도 공경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공경하라”는 말과 “따르라”는 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부모를 따르라고 하기 보다는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비록 부모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부모에 대한 비중을 높이 두라는 것입니다.
‘공경’이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카베드’(kabed)입니다
이 말의 근본 의미는 “무겁게 여기다” “비중 있게 생각하다” “중요하게 여긴다”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에서 부모의 위치를 비중 있게 둔다. ‘부모를 고려한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에 명령하고 있지만, 한 가지 예외 사항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주안에서” 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도 보면,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구별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구실로, 부모님께 공경과 순종을 다하지 않는 구실로 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데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모님에게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간혹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의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9-13절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게을리 해도 된다고 정당화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당신들의 부모가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의 육체적인 삶이 힘들어진다 할지라도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 라고 소리를 하면 그 물질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금전적으로 부모님께 봉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이 계명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말씀에 보면 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 이제 분명해 진 것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며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순종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 삶에 나타나는 순종의 흔적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당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므로 삶에 각인되어 있는 분명한 흔적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힘이 없어, 자식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모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삶에 상처가 난 경제적인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삶을 희생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당신들의 의지가 꺾이는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예화2 부모 효도 10계명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도란 부모님을 방구석에 가만히 모셔만 놓는 것이 아닙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특히 가정에서 취미 활동을 하시도록 협조해 드리십시오.
4.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십니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지고, 잔소리도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파악하십시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미리 알아 해드리십시오.
6. 가족끼리 외출할 때 노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린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한 후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리십시오.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이라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입니다.
10. 부모님께 신앙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국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했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로 논쟁이 있을 때, 그의 삶에 예수로 인하여 죽고, 예수로 인하여 한 흔적이 있노라고, 나에게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말라던 자신감 있는 신앙인의 이야기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 순종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흔적” 즉 “상처”는 피 흘릴 때까지 반복하여, 그리고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반복해야 생기는 것이요,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오른손 중지에 보면, 연필을 하도 많이 써서 박힌 굳은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손과 발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 12회 호암상 수상자 중에 예술부문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있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인 강씨는 ‘강철나비처럼 강하고 아름답다’라는 평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쁘고 화려함 뒤에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형편없이 변한 발 모양 사진이었습니다.
1986년에 슈투트가르트의 최연소 단원으로 들어가서 10년 만에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기까지,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연습하는 날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한 시즌에만 150개가 넘는 토슈즈가 닳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골퍼 구옥희는 하루에 1000개 이상의 골프공을 쳤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농구의 황제라고 불리는 마이클 조단은 고등학교 때까지 별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된 비결을 물으면, 그는 대답하기를 “practice, practice. . .”라고 대답을 합니다.
삶의 프로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연습과, 굳어진 흔적, 그리고 피가 흐른 뒤 남는 상처를 가질 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감정적 차원으로 끝이 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새겨진 그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의 부모님을 위해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이 있을 때, 우리들의 삶에 축복으로 연결됩니다.
놀라운 일은, 이 축복이 자손에게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삶의 공경과 순종의 흔적은 부모를 향한 도리를 다하는 것일 뿐 아니라,당신의 자녀들이 바로 그 흔적을 보면서 가슴에 새기게 되고, 따라하게 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이지요.
결국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의 축복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것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모든 세대 간을 연결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부모가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인해 자녀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 간의 관계가 아름답게 연결될 때, 땅에서 장수하고 잘 되는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들이 인간적인 자격으로 본다면, 그 세대 간의 연결은 곧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부모이기에 공경하고, 부모이기에 희생하고 섬기고, 중히 여김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길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장수의 축복”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문이 잘 되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부모일지라도 내가 공경하고 섬기므로 내 자녀들이 나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자면,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에게 생명을 있게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도 경외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당신이 존경받는 부모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자라기 힘들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녀에게 책임이 있듯이,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의 성도들 모두에게 장수의 축복과 땅에서 잘 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도 자녀들에게 경홀히 여김을 받는 부모가 없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도 부모님을 경히 여기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