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너희에게 권하노니(벧전 2장11-17)
성경분문: 베드로전서 2:11-17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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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면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추석 연휴에 [안시성]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기 전 홍보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기자가 주연을 맡은 조인성에게 이렇게 묻더군요.
“역사적인 사실, 결말을 아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흥미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조인성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결과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겼는지를 흥미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아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물론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여러 소재들을 더했겠지만, 그 과정을 다시 보는 것이 잘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재미를 더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결과를 아는 싸움을 어떻게 싸울지. . .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세상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대비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옛 습관을 가진 사람과 새롭게 된 우리가 달라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거룩한 족속인 우리들을 이렇게 정의 하고 있습니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이라고 말이죠.
거류민도 나그네도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무책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말씀이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두고 그렇게 급하게 지나갔던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나그네처럼’ ‘행인처럼’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상황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며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영혼을 거슬러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 11절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 against, abstain, 그리고 sinful desire 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죄악 된 욕망이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욕망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은 ‘전쟁 (war)’과 같은 것입니다.
죄 된 욕망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전쟁이라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인터넷에 나오는 예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어느 슈퍼마켓에서 한 남자가 쇼핑카트에 아들을 태우고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징징 울면서 고함을 지르고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아주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흥분하지 마라, 혁수야, 소리 지르면 안 돼 혁수야…가만히 있어. 혁수야. 참아야 된다 혁수야”
그 모습을 보던 옆에 있는 아줌마가 이 남자의 인내심에 감동을 받아 말했다.
“아들을 참을성 있게 달래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훌륭한 아빠네요. 아들 이름이 혁수인가 보죠?”
그러자 남자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혁수는 아들이 아니라 제 이름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아닌가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일 것 같습니다.
싸우려 하지 않으면, 회피하려고 하는데, 우리 육신의 정욕이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절하게 싸우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치밀하게 공격하기 때문이죠.
로마서 13장 12-1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악을 이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부정적인 접근보다는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
‘행실을 선하게 가져. .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방인 중에서’라는 말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것만큼 힘든 것이 ‘이방인 중에서’선한 행실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묻어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모두가 같은 모양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냥 나도 그렇게 가면 되는 일인데,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선함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신앙의 오류는 이런 ‘선함’을 하나님께 미룰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이슨 미첼은 그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셔츠’에 눈물과 화장 자국이 묻기를 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종종 영성훈련을 인도하거나, 집회를 참석하고 난 후에 하염없이 우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참 곤란하기는 한데, 화장을 짙게 한 분들이 울 때면 그리고 그 화장 자국과 눈물이 어깨에 묻을 때면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눈물과 화장 자국을 내 옷에 묻히기 싫어서 하나님께 미루지는 않았는지. . .
누군가를 위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결국은 우리의 옷에 눈물과 화장 자국을 묻히지 않으려는 모습, 혹은 쉬운 방편을 찾으려는 얄팍한 모습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혹시 우리는 기도만 하느라 실제로 위로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결국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쉬운 예수를 믿는 마음과 어려운 예수를 따르려는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연민을 느끼며 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연민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않으실까요?
이 부분을 평신도 묵상팀에서 이렇게 나눔을 가졌더군요.
김병동 권사 나눔)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을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내 큰 아이가 고3이었고 둘째가 중2이었다. 뉴스를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기도 시간에 주님께 물었다.
“주님 왜 그러세요. 주님은 왜 일하지 않으세요.
사탄은 지금도 자신 일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고 유혹해서 이렇게 사건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확장시켜 나아가는데 대체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저 수 백 명의 학생들의 생명은 어찌하고 왜 이런 일이 나도록 두고만 보셨습니까?” 하고 속상할 만큼 상해 있어 막 울며 기도 했을 때 주님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환상은 “주님이 그 세월호를 안고 큰 소리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왜 우세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일꾼 300명을 너희들에게 보냈건만 너희는 너희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 일꾼 300명을 내게로 도로 돌려보내는구나. 너희 아비들은 돈을 사랑하여 수많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마침내 이단들과 손을 잡고 자신의 영토가 그들에게 점령되어 가는 것도 모르고 행한 결과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그런 일을 할 때 교회는 무엇을 위해 일하였느냐.
이 땅에 거짓된 진리가 뿌리 내리지 못하게 내게 기도한 적이 있더냐. 나는 너희들에게 수없이 말했지만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의 귀에 내말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냐?”
나는 이 말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들의 선한 행실이 아닌 돈의 노예가 된 결과로 생긴 이 일을 누구에게 탓하겠는가? 지금도 옳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 그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즉 이방인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연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민 위에 더해지는 ‘행동’ 때문이겠죠.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행동을 옮기고, 실제적인 도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참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악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 힘든 것은, 악한 자들이 선한 사람들을 향해 ‘비방’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때가옵니다.
우리의 선행이 드러나는 때는 우리에게 임하실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 그 영광중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권면 2: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이제 13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당시 인간이 만든 제도와 권력으로 인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인데 ‘순종’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게다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특히 세상의 제도와 신앙의 제도가 상충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더욱 힘들지 않을까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저에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충돌’이 아닌 ‘변혁’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 또한 순종해야 하는 것들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목숨을 내 놓고 불의한 세상의 권력에 대항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를 위하여’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조금 우리가 손해를 보면 주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모든 제도’라는 말 가운데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도 포함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제도 때문에 신앙의 제도를 이탈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고민이 되는 일들이 ‘주일’에 이루어지는 공적인 행사, 시험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우리가 공직에 나가기 위해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주일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요?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단순히 사람들이 만든 ‘주일 예배’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고, 자신들은 ‘어느 산’에서 예배한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 그리고 다니엘의 신앙을 알고 있습니다.
이방 땅에 잡혀와 교육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바벨론의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그들에게,예루살렘을 갈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리는 날도 정해지지 않은 그들에게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있는 그 곳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유대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제도권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중요한 위치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제도 속에서도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듯이, 신앙적 조직 안에서 주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한사람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나눔을 소개합니다.문지윤 권사 나눔)
교회에서 1인 1사역의 운동이 있었는데,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도 1인 1봉사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교회의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무모임을 갔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임원을 맡아 그 집사님도 임원이 되어 열심히 학교일을 봉사한다고 했다.
딸로 인해 열심히 하는 학교 일에 비하면, 교회는 주일 예배만 드리는 상황이었다.
그 집사님이 나무 예배에서 자신이 학교 임원 엄마로서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들은 필수적으로 1인 1봉사를 꼭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좀 아이러니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교회 일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을까?
아이가 크면 언젠가 그 열심이 교회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성도이면, 세상일도 얌체같이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이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녹색 어머니를 자원하여 횡단보도에서 열심히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와주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두 일을 조화롭게 잘해 나가는 것이 아마 평생의 숙제일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제도’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 당시 보다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주 필요 적절한 지침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당시보다 우리는 훨씬 다양한 정치적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지도자를 뽑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제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는데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를 위하여’라는 부분이 아주 중요할 듯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정당 혹은 인물이 우상이 되어 ‘두려움’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참 신기하죠.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자신이 지지했던 사람이 떨어지면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니 말입니다.
사실은 같은 나라에서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 ‘일치되는 것’ 보다는 ‘불일치’되는 것으로 인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로 일치되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요?
정치권력이 우상화 되었다는 말은 ‘주님’의 계획이나 간섭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지지하거나 동조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반대했던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우리의 대통령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반대했던 사람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이 종교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할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해법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이율배반적으로 들리는 말인데,인간이 세운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세운 이념이나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불의한 일에 순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자신을 ‘절대 선’으로 생각하는 오만과 편견에서부터 자유 하겠다는 말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윤리학자 중에 하나인 니버가 이런 주의를 당부합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권력과 번영을 무조건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관심사를 거부한다면 폭력과 불의가 당연하게 자행될 수 있다.”
<파시즘, <나치즘>, <중화사상>, <수퍼히오리즘>, <순혈주의> 같은 것들이 이런 범주에 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악이 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교회 안에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성도들 가운데 존재하는 교만과 우월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7-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팀 켈러 목사가 그의 책 [내가 만든 신]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을 나눠보겠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수많은 사례 연구를 통해 예증했듯이 우리의 성공은 다분히 환경의 소산이다.
일례로 모두 1930년 전후에 태어난 뉴욕의 많은 유대인 변호사들은‘시간의 우연’덕분에 온갖 혜택을 누렸다.
우선 학교에 학생 수가 적어 교사의 주목을 더 많이 받았다. 다시 그들에게는 매우 양질이면서도 비싸지 않은 대학과 법률 교육의 문이 열려 있었다.
또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에 백인 상류층 로펌에서 배제된 그들은 기성 변호사가 맡지 않던 주주총회의 위임장 쟁탈전 같은 특수 분야로 부득이 빠졌는데, 덕분에 적대적 인수합병이 시작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쟁력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했다. 결국 모두 돈방석에 앉았다.
나라면 글래드웰과 달리 유전과 환경과 본인의 선택이라는 3대요인에 똑같은 비중을 두겠지만, 그래도 그 책에 충분히 논증된 사실이 있다.
우리 성공은 생각만큼 그렇게 자신이 잘나서 된 게 아니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요인은 다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권면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 .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어떤 권면을 하든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들은 복음의 가장 큰 특권은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즉,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죠.
자유를 가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그 자유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본문 16-7절)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의 핵심은 ‘뭇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인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경과 존중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조심하여 상대방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단순한 선행의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황금률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은 7장 12절 말씀을 보세요.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람들 중에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존중이 ‘힘과 돈’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죠.
요즘 우리 사회의 ‘갑질 논란’이 그런 것이 아닌가요?
소위 갑의 위치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무작정 존중받으려는 것이죠.
문제는 자신이 바라는 기대만큼 존중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을’로 대하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거나 학대한다는 것이죠.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재벌 2세들의 행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존중받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법과 동기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존중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먼저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은 ‘갑과 을의 논리’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형제자매이기 때문에,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참 아름답고 귀한 일들이 아닐까요?
또 ‘공경’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요?
상대방에 대한 가치는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영성이란 어떤 고차원적인 학식이나, 고립무원의 땅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영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말씀이 발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성이 살아있는 사회일수록 살만한 세상이 된다고 말입니다. 살아가는 삶이 소망이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을 갑과 을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복종을 강요하고, 억압을 일삼는데,신앙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모두를 존중하고 배려하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세상에서는 무시당하는 사람도 없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존중받는 그 모든 일들이, 먼저 내가 신앙적인 삶의 태도로 존중한 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열매 맺는 삶’이 아닐까요?
심은 대로 거두는, 무엇보다 먼저 땅에 떨어져 썩은 밀알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선한 일들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인생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공’이란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많이 공경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선한 행실과 자유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16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유를 쓰십시오. 당신의 자유를 가지고 어떤 규칙을 깨는데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뭇사람을 공경하고,형제를 사랑하며,하나님을 두려워하며,왕을 존대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기꺼이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 뿐 아니라, 주인의 본성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6절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을 자유로 부르셨는데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종과 같이’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인의 성품을 아는 종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시편 103편 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 . .
제이슨 미첼은 그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망각한 결과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를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필요 없다며 마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간다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우연히’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우연히’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런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가 성경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용서와 사랑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을 잘 설명하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말 하나를 가슴에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종의 가장 큰 직무는 자신이 모시는 분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노릇하지 않는 증거는 참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사학법 개정을 놓고 우리가 벌이는 투쟁을 보면 참 신앙적인 것 같은데, 불신앙 적이죠.
십자가를 들고 데모를 하며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지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 사학’이라는 이름의 문제보다 투명하게 재정을 사용하지 못한 책임들이 있지 않을까요?
조세 문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문제는 왜 세상이 교회를 납세의 대상으로 보고, 조세의 투명성이 필요한 단체로 보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종과 같이,순수하게 종과 같이,섬김의 대상이 아닌, 섬기려는 교회가 되라는 권면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당시 교인들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권했던 말씀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간절하게 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순례자로,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흥미로운 것은 그 길을 ‘어떻게’가느냐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독하신 역사에 캐스팅된 우리들에게 물으시고 권면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