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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사랑의 능력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십시오(요1서 3: 1-12)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0.02|조회수118 목록 댓글 0

사랑의 능력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십시오(131-12)

성경본문; 요한13: 1-12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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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요?

아주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자신처럼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는, 왜곡된 의지로 인해 우리의 삶에 죄가 나타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악한 세상과 사탄의 권세가 우리를 창조의 목적대로 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라는 근거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아마도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허리가 아파서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들에게 참 보편적이죠.

그런데 조금 아픈 것을 참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괜찮아지기도 하는데, 결국 못 참고 병원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진찰도 하고 검사를 합니다. X-Ray를 찍기도 하고, CTMRI 촬영도 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진단해줍니다.

참 신기하죠. 몸은 내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아프고, 어디가 아프며,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의사가 알려주니 말입니다.

내 몸이 아픈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보는 의사에게 맡기다니.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고민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면 방법이 나올 텐데,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그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도록 하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행위의 무질서가 오는 것입니다.”

 

종종 해외를 여행할 때면 그런 장난을 칩니다.

식당에서든 공항에서든 재미있게 떠들다가 좀 민망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 사람으로 알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외국 사람이 지나갈 때, 갑자기 니 하오를 하든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는 인사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유를 아시겠죠?

왜 사람들은 어떤 단체를 만들면 먼저 로고를 만들까요?

왜 모든 단체는 새로운 사람이 가입하면 배지를 만들어 달아주고, 사용하는 물건에 로고를 새겨 줄까요?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사도 요한이 지금 얼마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1)

이 한마디에 참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러니, 2~3절을 보세요.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지금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당하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의 모습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죄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왜 죄를 짓지 않아야 하나요?

이 이유도 우리가 그러하도다!”라는 말과 연관해서 보겠습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결혼한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회사에서 회식할 때면 일정한 시간에 집에 들어갑니다. 아마도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회사 동료가 이렇게 묻습니다.

마누라가 그렇게 무서워?”

그러자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주셨다는 그 사실을 깊숙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 그리고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을 가진 자들이 그 소망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처럼, 그 소망으로 인해 깨끗함도 나타납니다.

종종 듣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고상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말이 아닐까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야 정상이 아닐까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소망을 가진 사람의 기쁨과 깨끗함이 아닐까요?

 

이런 우리를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1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르고,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인 줄 압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 [내 평생에 가는 길]에 보면 이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가장 절묘한 교차로인 현재에 처해 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 끼여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안전한 한쪽 그네를 놓고 공중으로 날아가 반대쪽 그네를 붙들어야 하는 그네타기 곡예사와 같다. 양쪽 그네에는 안전이 있다.

그러나 한순간 곡예사는 어느 쪽도 붙잡고 있지 않다. 안전과 안전 사이에 믿음의 행위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상 생활도 그 공중의 순간과 같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순간은, 우리가 반대쪽에 닿아 그네를 놓치지 않게 꽉 붙잡을 때에야 비로소 막을 내린다.”

이미아직사이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긴장을 유지해 주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죄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소망을 두고 깨끗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죄의 문제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죄가 경험되고 목격된다는 것이죠.

이제 죄가 무엇인지, 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죄를 통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문제로 삼는 것은 죄를 지은 행위가 아니라, 자신은 재수가 없어서 죄가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감옥에는 들통 난 죄인들이 들어가고, 지금 우리는 들키지 않은 죄로 인해 여기 있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해 보니, 죄가 드러나고 나면 한 생각이 듭니다. 자신만 재수 없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심각한 것은 8절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는 본질에서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하시지만,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조금 모순점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실 9절 말씀이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구절인데요.

아무리 묵상해도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자신을 비추어 보면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다면 저는 아직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그런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읽다 보니, 죄를 짓는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습관처럼 죄를 짓는 사람

그리고 NIV 성경을 봤더니 9절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하나님께로 난 자는 계속해서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깊이 이 말씀을 묵상하여 보겠습니다.

라는 것은 아직 형체가 아니다. 어쩌면 생명체로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죽은 줄 알았던 씨에서 생명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20104월에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2009년에 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성산 산성을 발굴하다 옛날 연못으로 짐작되는 퇴적층에서 연 씨 10알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2개를 한국지질학회에 보내 성분을 분석해 연대를 알아보니 한 알은 약 650년 전에, 다른 하나는 760년 전에 있었던 씨앗입니다.

그리고 남은 다섯 알은 함안군 농업기술센터에서, 3알은 함안박물관에서 싹을 틔웠는데, 각각 2알과 1알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씨가 남아 있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하는 말이 거한다라는 단어인데, 헬라어 원어에 보면 메노라는 말입니다. 설명해 놓은 책에 보니,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늘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꼭 잡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죄를 짓느냐가 아니라 죄 가운데있느냐가 아닐까요? 그러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전에 참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라는 제목입니다.

1.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2.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3.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하도 못하네.

4.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우리의 문제는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으나 계속해서 짓지 말아야 하고,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은 오늘 말씀 가운데 있는데,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 5~6절입니다.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이 땅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은 예수를 영접하고 죄를 씻는 것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설명할 때 늘 연탄을 비유로 듭니다.

까만 연탄은 닦아도 닦아도 까맣습니다.

까만 연탄이 하얀 재로 변하는 길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불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접이라는 말이 나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을 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어성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receive’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이 설교에서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할 것 같습니다.

손님이 여러분의 집에 와서 딩동딩동초인종을 누를 때 뛰어나가서 문을 활짝 열고 어서 들어오세요.’하고 손님을 반갑게 모셔 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해요.

그와 같이 예수님이 내 마음의 문 앞에서 똑똑 두드리실 때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맞이하는 것이 바로 영접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런 건 관심도 없어요. 교회를 오기는 왔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예수님을 정말 믿는 마음도 없어요. 그냥 구경삼아, 재미로, 친구 따라, 엄마가 가니까, 선생님이 전화해서 오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왔어요.

그런 친구는 교회를 오기는 했지만,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의 문은 예수님만 두드리시는 게 아니에요. 마귀도 찾아와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기쁨이 넘쳐요. 사랑이 넘쳐요. 그래서 서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럴 수 있게 되어요.

하지만 마귀를 마음에 둔 사람은 미워하고, 화내고, 짜증 부리고, 욕하고, 남을 속이고, 욕심부리게 되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오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13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5절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이 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많이 배우고 들었던 사영리에 나오는 그림이 있지요.

내 삶의 의자에 내가앉아 있을 때는 소망이 없지만, 그 의자에 주님이 앉으실 때, 더는 죄의 권세 아래 놓이지 않게 됩니다.

 

6절 말씀에, 그 안에 있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더는 우리 인생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신 주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삶의 작은 일에도

주님을 닮기 원하네.’

 

주님을 닮기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에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단의 순간입니다. 놓을 것을 놓고 잡을 것을 잡는 것입니다. 본문 7~8절을 보세요.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영접한다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지가 생기는데, 죄와 어둠이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선한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계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마귀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의를 행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계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교리 가운데 조금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아주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선행은총이 주관적 은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의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밥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의지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의지적으로 밥을 떠먹을 때, 영양분이 됩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의지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려진 밥상이 없다면 밥을 먹겠다는 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의지적 결단에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인지?

김형석 교수가 쓴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오래전 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큰 교회의 한 젊은이로부터 선생님, 우리 교회에서 차지철 씨의 장례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가지곤 했는데, 이번에 삼풍 백화점의 회장이 우리 교회의 교우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우리 교회가 어딘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었다. 나는 그 젊은이가 자기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을 보면서 어떤 교회에서 어떤 잘못된 사람이 나왔다는 것으로 평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통하여 어떤 인물과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훌륭한 목사와 교인들이라면, 소위 말하는 목회의 성공이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졌는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제 성구로 뽑은 것이 10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납니다.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고 강조하는데, 빛에서 어둠이 물러나고, 더러움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씀은 또한 우리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 말씀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존재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다면 두 가지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쪼갠다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조목조목 쪼개기 시작하면 틈새에 숨어 있던 것까지 모두 드러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3)

모든 것이 드러나면 두려운 마음과 수치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분노로 표출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정체로 인해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깨닫게 되는 정체가 무엇일까요?

아주 근본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도 죄의 문제로 참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죄에 대한 고민은 죄 짓는 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로마서 719~20절을 보세요.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죄를 계속해서 짓게 되는 이유는 자신 속에 있는 때문입니다.

이제 논리적으로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계속해서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원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면, 우리 속에 있는 때문입니다. 즉 우리 속에, 말씀의 씨, , 하나님의 마음이 없으면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죠.

 

이제 말씀이 들어오면, 결국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떠한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오며 죄에 대하여 예민하게 됩니다. 죄가 가까이 오면 긴장합니다. 실수 혹은 어쩔 수 없는 죄를 지었을 때 무척 당황하고 진땀을 흘리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런 반응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씨가 없으면, 죄를 대할 때 무감각합니다. 별로 당황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죄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나라한 본성을 보게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대항한다는 것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를 거부하면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일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수입이 적어지고, 세상에서 즐기던 쾌락도 사라지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장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순간 밥을 굶을 염려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과 걱정을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31절에서,“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다면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더는 마귀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당장 이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겁니까?

여러분이 내일부터 시작할 한 주간의 시작을 무엇으로, 어떻게 시작할 것입니까?

죄를 지을 계획도 결국은 여러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죄를 짓는 순간, 여러분은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여러분이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심한 삶을 다시 다짐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심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우심을 구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 의지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믿는 것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택함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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