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능력으로 온전하여 질 것입니다(요1서 4장7-21)
성경본문: 요한1서 4: 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신앙에는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아는 것이죠.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거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처음 은혜를 받으면 한없이 기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은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기적과 풍성함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서 “왜 요한 1서가 나중 순서에 오게 되었을까?”를 그냥 상상해 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사랑을 알고 깨닫고 행하게 되면, 깊고, 아픈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밤중에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잠에서 깬 엄마가 갓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불에 싸서 안고 불길을 헤치며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전신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얼굴과 온몸에 징그러운 흔적이 남았습니다.
아들은 성장하면서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싫었습니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엄마가 학교를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아들을 불러 앉히고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불 속에서 아들을 구했으나 엄마는 화상을 입어 추한 모습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눈물이 아들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아들은 엄마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진작 말해 주지 그랬느냐고, 그랬으면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엄마가 아들에게 그 사실을 숨겨온 것은 다만 아들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고 밝게 자라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철이 들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해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자초지종을 말해 준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이후로 이 아들은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아니면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간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죠.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10절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그런데 이 말이 영어 성경에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This is love’
그리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랑을 이해하려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강력한 것은,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 사랑을 말해도 가짜라고 말하는 시대에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가짜인 것은, ‘if’ 혹은 ‘because of’ 아니면, ‘in spite of’의 사랑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의심이 많고, 손해 보기를 싫어하는 우리가 가장 많이 품는 마음이죠.
‘제가 사랑한다면’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마음에는 사랑에 대한 상처가 많습니다. 나는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겠다는 방어적인 태도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예쁘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죠. 그러면 그 예쁜 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결혼할 대상을 찾을 때도 ‘돈이 있으니까’ 사랑을 시작하면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랑도 끝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의 사랑을 가리켜 흔히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런 부모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 빗나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데도 한없이 사랑하는데,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며 그 사랑의 결과를 얻으려는 조건들 때문에 또 하나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죠.
이런 가짜 사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중세시대 프랑스의 수도사였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단계를 넷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둘째,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채워지면 금방 식는 사랑입니다.
☞셋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기쁘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넷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잘 이해하기 힘들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말씀 10절에서 말씀하는 사랑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나를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죠.
조금 현학적인 말 같이 들리겠지만, ‘나를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죠.
베르나르가 묵상했던 글들이 우리 찬송가에 세 개가 있습니다.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중에 85장 가사를 볼까요?
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주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서로 사랑함이 마땅합니다.
11절 말씀과 연관해 생각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소중한 존재로 느껴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나에 대한 존엄성(dignity)이 없는데, 어떻게 존엄한 행동이 나올 수 있을까요?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교만과 자존감의 차이 같은 것입니다.
교만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자존감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신에 대한 신앙적 고백에서 나오는 것이죠.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건강한 자존감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누군가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을 자랑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고 듣는 우리가 불편하다면 ‘교만’ 혹은 ‘자랑질’ 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듣는 우리의 마음도 기쁘다면 틀림없이 ‘자존감’으로 인한 신앙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 영어로는 ‘ought to love’를 쓰고 있습니다.
조금 더 묵상하며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비장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무감이 단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오늘 본문으로 한 최석원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나는 19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주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사건에 대해 읽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그만 로프에 걸려 차갑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허우적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는 헤엄을 칠 수도 없었고 물 위에 오래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멀리서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구하러 오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와주세요, 난 헤엄칠 수 없어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익사자의 가족은 그토록 무관심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판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족이 패소하고 만 것입니다.
약간 거리낌이 있었지만, 법정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무관심’을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을 ‘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초해 본다면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특징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절대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보이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 있고,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김선주 목사가 쓴 [목사 사용 설명서]라는 책에 보면, 목회 현장에서 깨달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정갈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서 송이버섯을 잘 따는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에게 ‘송이버섯 많이 나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곳 물항 계곡의 사람들이 능이와 송이버섯만 따서 보름 동안 천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알려준 장소란 특정한 곳이 아니라, 어디 어디 봉우리, 어디 어디 골짜기였다고 합니다.
평생 산을 타며 산 사람이야 알겠지만, 목사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도 그 권사님이 섭섭해할까 봐 버섯을 따려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답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을 번득이며 지팡이 끝으로 버섯이 있을 만한 곳을 찔러봤지만, 버섯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랍니다.
급기야 버섯을 포기하고, 목적을 버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아니 진작에 불고 있던 바람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능이와 송이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주변의 많은 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심지어 바위틈에 기생하는 이끼류 하나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버섯, 독버섯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이라는 인간의 수식어를 버리면 세상에 아름다운 버섯이 참 많습니다.
돈 되는 버섯, 먹을 수 있는 버섯이라는 이기적인 목적을 버리면 독버섯마저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주 흥미롭게 글을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보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니 사랑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우리가 이기적이니 그렇게 이기적인 일들만 보이는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의미이겠구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목적’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 삶의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겠구나!’
내 목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에서 전혀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하는 이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 사도가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성경을 묵상하니, 바로 전에 있는 11절이 더욱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역으로 1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반복할 때는 뭔가를 강조하기 위함이지요.
바로 ‘사랑’을 강조하고,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사랑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갑자기 그런 광고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삼성에 대한 이야기도 설교시간에 했으니 애플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카피가 있습니다.
“아이폰이 아니라는 건, 아이폰이 아니라는 것”
애플이 자사 제품에 대한 대단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선전하는 것이죠.
‘아이폰’이 스마트 폰의 대명사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스마트 폰을 사용해도 그것이 ‘아이폰’이 아니면, 아이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드웨어는 그럴듯하게 만들어 선전할 수 있지만, 진짜 아이폰은 아이폰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폰이 아니라는 건 아예폰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온전한 사랑이란
오늘 말씀의 결론적인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참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것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귀한 것은 조건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두 개의 온전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18절을 보겠습니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문맥상으로 볼 때, 17절의 말씀은 16절의 결과고, 18절은 17절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온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데, 그 담대함으로 인해 ‘두려움’이 물러납니다.
다시 설명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 안에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증거요,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락 성결교회 지형은 목사님이 아주 흥미로운 설교를 했습니다.
“두 개의 16절”이라는 제목인데, 요한복음 3장 16절과 요한 1서 4장 16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한 것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말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1서4:16)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말씀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구원에 대한 질문했을 때, 대답해 주신 내용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더니,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중심 단어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에 들어갔다면, ‘삶으로’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성화’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최종적인 목적은 ‘칭의’를 넘어서 ‘성화’로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믿음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있으나 두려움 가운데 소망을 붙들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절)
그 사랑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룸을 믿는 우리에게 어떻게 두려움이 거할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이 찾아올 수는 있으나, 그 두려움이 우리 안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아주 멋진 표현을 하나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사랑의 소비자인 동시에 사랑의 생산자다!”
칭의와 성화가 소비와 생간의 관계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 삶을 허락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인생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삶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사건중심으로 삶을 볼 수도 있고 과정중심으로 인생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에게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삶을 좌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은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인도해 가시는 ‘과정’에서 해석되고 고백됩니다.
사건으로 인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가운데 소망을 보게 되는 것이죠.
결국, 믿음과 소망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한 신앙의 공식이 완성됩니다.
김영봉 교수가 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라는 책에 보면, 사랑과 두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랑과 두려움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뭔가 짝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한 엘리바제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와 데이빗 케슬러(David Kessler)는 <인생수업>(Life Lessons)이라는 책에서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뿌리에서 두 개의 감정에 닿아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행복, 만족, 평안 그리고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캐어 들어가면 그 뿌리가 사랑에 닿아 있고, 반면 분노, 증오, 근심, 가책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두려움에 닿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랑 혹은 두려움, 둘 중 어느 하나가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면 두려움이 자리를 잡습니다.
마치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들어차듯, 사랑이 떠나 없는 곳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완전한 사랑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을 수긍하기가 힘들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두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 의심이 생기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을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19절부터 21절의 말씀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그 완전한 사랑 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의지의 한계를 벗어나면 그 사랑도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다는 증거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사랑이 형제 사랑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그때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들이 ‘사랑해지는’ 순간에 우리가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