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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사랑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십시오(요1서2: 1-6)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0.08|조회수190 목록 댓글 0

사랑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십시오(121-6)

성경본문; 요한12: 1-6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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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었을지라도

나의 자녀들아로 시작하는 오늘의 말씀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녀들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린이를 지칭하는 파이디온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을 부를 때 쓰는 따뜻한 가족적인 용어 테크니아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일 텐데, 자녀가 잘못되기를 원하지 않기에 권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죄로 인해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분위기를 바꾸어 가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요한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 1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전체의 주제가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한 하나님과 사귐인데, 죄는 하나님과 사귐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분명한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려면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죄짓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그렇지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에 있습니다.

죄짓지 말라는 말은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해결할 길이 없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대언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파라클레톤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격려하거나, 위로하거나, 중재하기 위해 선임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을 위하여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사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대언자에 대하여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 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셔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우리를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참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죄에 대하여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변호사’(advocate)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아주 법률적인 의미가 있기에, 당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죄를 참소하느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10절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참소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는 죄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그 죄의 증거가 분명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재판의 과정에서 어떤 변호사를 쓰느냐에 따라 형량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비싼 수임료를 감수하는 것이죠.

하지만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능력이 있는 변호사는 없습니다.

더구나 변호사보다 유능하고 강력하게 죄를 증명한다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이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변호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 있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분은 이 임무를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그분의 임무를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발생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크리스천들에게 죄를 짓지 않고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믿는 자들이 죄를 지어도 해결함을 받을 수 있지만, 자꾸 죄를 지으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불안과 초조함이 찾아옵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불안한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누림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과 감격은 죄와 싸워 이기는 능력을 체험할 때입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찾아오는 확신입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능력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2절에는 우리가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더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이죠. 영어 단어에서는 ‘sacrifice’를 쓰고 있는데,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말입니다.

화목 제물온전하게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는 피해 보상이고, 다른 하나는 화를 누그러뜨리는 일입니다.

 

아무리 보상을 해도 상대방이 화가 나 있다면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화목제물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시대의 제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자신을 벌하는 대신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을 바침으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양과 소를 죽임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소와 양이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 더는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제물로 드려지는 동물들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흠이 없어서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육체는 원죄가 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흠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대신 죽으셔야 하죠.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9절에서 아주 감격스러운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신앙은 바로 이 어린양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보았던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어린양 예수였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그가 요한 공동체에 성화의 길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말입니다.

 

1절과 연관해서 본다면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가 되셔서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시대의 제사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대신 희생제물을 드리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여 드렸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깨어진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범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했던 죄의 흔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간에 지도자 다툼이 일어났을 때, 열두 지파를 대표하여 지팡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모두 위와 아래를 다 잘랐는데 유독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났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론을 세우셨다는 권위를 입증하셨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항거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수없이 행했던 불평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상징인 만나에도, 싫증 난 만나 때문에 불평했던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죠. 축복을 원망으로 받았던 죄의 흔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리게 되는 재앙을 맞게 됩니다.

이 죄의 흔적이 들어있는 법궤를 들여다보는 자는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즉 범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죄소 안에서 피가 뿌려집니다. 흘린 피가 법궤를 덮어 흐르게 됩니다. 그 피로 모든 죄를 덮었다는 말이고, 그 피를 흘린 제물이 대신하여 희생의 화목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함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선행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온 세상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오직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는 중요한 숙제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거할 수 있나요?

오늘 말씀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들여다보신다면, 그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를 피로 덮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거짓은 아닌지 구별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본문 3절과 4절에서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들의 마땅한 행위가 있다는 것이죠.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이 부분에서 우리를 혼란케 하는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인해 참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믿음을 고백하는데, 그들의 삶이 믿음을 고백하는 자의 삶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죠.

누군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계명을 지킨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곳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부담 혹은 거부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유함이라는 말로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이 아니라 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여행할 때, 짐을 많이 가져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짐을 줄여보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그렇게 짐을 줄이고 나면 여행에서 불편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서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깨닫는 것은 분명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이 아니라 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들어 가장 필요한 것이 신발이라는 생각이 들죠.

부피가 크기는 하지만 필요한 장소에 맞는 신발이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지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짐이 아니라 힘이라는 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공식적인 만찬에 초대를 받고 옷을 입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정복을 입고 훈장을 달고 모자를 쓰고.

조금은 번거로운 것 같은 그 차림들이 공식적인 만찬에 초대받고 들어가는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본질은 아니지만,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별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특별히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배우겠지만, 요한 1서에 나오는 그의 계명이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간단하게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거짓된 교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1:6).

거짓된 성결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1:8).

거짓된 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10).

 

거짓된 순종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2:4).

거짓된 생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2:6).

거짓된 형제 사랑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2:9).

거짓된 하나님 사랑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4:20).

 

말씀은 말씀으로 증거합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지킴행함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5절의 지킨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을 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여졌구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키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공식이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기로 그 말씀을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무와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당위적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발적 순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29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명백한 증거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바로 이런 깊은 애정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닐까요? 그래서 요한복음 1415, 21,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계명과 말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계명은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계명을 포함한 더 넓은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명은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을 지시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신앙이 성숙하면 계명을 따르기보다, 말씀을 사랑함으로 더 많은 것과 더 큰 것을 스스로 지키게 됩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행동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과 말씀의 차이를 또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명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지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하신 일들은 계명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계명을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계명이 완성됩니다.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형식적으로 믿던 거짓을 극복하겠다는 것입니다. 박정근 목사가 쓴 [최고의 선물, 그리스도의 복음]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에서 우리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교 농구팀에서 활동했습니다. 하루는 큰아들의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상대 팀은 유대인 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농구팀을 보고 놀랐습니다. 농구 가운을 걸치고, 짧은 바지에 러닝셔츠를 입고 나온 유대인 학교 선수 전원이 모자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평소에 이 키파(Kippa)라고 하는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그런데 농구 시합할 때도 쓰고 나왔던 것입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농구를 하면서 상대 팀 선수와 부딪혀서 모자가 떨어지면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킵니다.

그리고 그 선수가 키파를 다시 쓸 때까지 기다립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안 하면 그들이 시합을 안 한다고 합니다.

본래 키파는 좋은 것입니다. 키파에는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키파를 쓰고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으스댑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가는 것,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주장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죄를 이기는 능력이란

이제 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가 행하시는 대로라는 말을 NIV 성경에서는 ‘walk as Jesus di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깨끗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임무를 소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끗하게 살도록 가르치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고립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지킬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인들이 교회 건물 속으로 얼마나 모이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 얼마나 예수님처럼 살았느냐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잘 알려진 남북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186110링컨 대통령 맥클레런을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병사들을 모집하고 조직하고 훈련시켰습니다.

18617월 그는 새로 편성된 포토맥 부대의 수장이 되었고, 그의 능력 아래서 병력은 5만에서 168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병사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의 상관들 역시 그의 능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가 총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어느새 그의 군대는 적군의 수에 비해 두 배가 넘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의 부대가 약점을 노출하고 속수무책으로 있는데도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링컨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으로 전격 교체를 하게 됩니다. 전술적인 능력에서 그는 맥클레런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군인의 가장 큰 자산은 싸우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른 건 모두 무용지물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악한 것들에 대하여 능히 싸울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자녀 교육의 문제에서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성경공부를 시키고, 예배에 참여시키고, 성경을 외우게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신앙에서 도전정신을 가지거나, 신앙적 모험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흥미진진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한참 때를 지나가는 자녀들에게는 말이죠.

우리가 부모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세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신앙에 대한 흥미를 잃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영적 모험을 일으키는 현장에 서 있어 보았나요?

어떤 사역으로 흥미진진한 영적 세상을 자녀들에게 경험하도록 해 보셨나요?

그저 자신을 지키도록, 이 세상에서 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말고 말입니다.

 

존 파이퍼는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험으로의 부름이다. 모험의 삶을 살든지 삶을 허비하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험을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담장을 넘는 크리스천 p.247]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6)

그의 안에 산다는 것과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은 아주 모험적인 일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가슴 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조바심과 초조함이 아니라, 담대함과 가슴 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것은 세상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논리와 상식에 근거해 살아간다면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사랑입니다. 참 많이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랑은 자신의 마음에 근거한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 된 세상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일들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행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고,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자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능력인 것은,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죄와 싸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죄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시고 중보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하나님과의 사귐가운데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귐 속에 있는 자의 삶이 위대한 것은 모험적인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에도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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