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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법대로 한다고요?(고전 6: 1-11)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1.18|조회수291 목록 댓글 0

법대로 한다고요?(고전 61-11)

성경본문:고린도전서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이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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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합시다!”라는 말이 들리는 곳이면 예외 없이 불법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교회 대부분이 법으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죠.

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지 않고 세상의 법정으로 나갈까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 자신이 손해 볼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가 특히 금전적인 것이라면 말입니다.

마태복음 540~42절에 보면 예수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말씀을 언뜻 보면 지난주에 묵상한 5장 말씀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발생한 음행의 문제를 질책하다 갑자기 성도들의 송사문제를 다루니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헬라 문화를 보면 음행의 문제와 더불어 송사의 문제는 당시 헬라 사람들이 즐기던 방식입니다.

유럽의 헬라 유적지를 돌다 보면 유난히 공공극장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것을 듣고 말하는 것을 즐겼을 뿐 아니라, 재판하는 것도 즐겼다고 합니다.

즉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듯하게 설득하는 쪽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당시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기준이 되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인정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우리는 세상 풍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세상 풍조가 들어 온 것이죠.

언젠가 한 장로님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 우리 교회도 확실한 규정을 만들어 놓아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비를 해야죠!”

제가 이런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로님! 저도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교회에서 법이 필요한 때가 된다면 이미 끝난 교회가 아닐까요?”

 

분명히 법은 약자를 보호하고 공의를 실현하자는 것인데, 정작 법이 적용되는 곳에 정의는 사라지고 마는 듯합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세상 법정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판단해야 할 교회가 세상에 판단을 맡기게 된 것이 아주 잘못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하는 말이 의미 있게 들리죠.

말이 됩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세상 법정에 문제를 끌고 간 교인들을 질책하는 사도 바울의 일성이 더욱 와 닿는 듯합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족인 교회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을 전혀 모르는 세상 법정으로 앞장서 가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다른 면에서는 신뢰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겨 판결을 받으려고 합니까?

정의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이 어찌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이런 법정 다툼은 여러분의 공동체에 흉한 오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차라리 부당한 취급을 받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잊어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벌이고 있는 일은, 더 많은 부당행위와 불의가 일어나도록 기름을 끼얹는 격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공동체에 속한 가족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안겨 줄 뿐입니다.”

 

지금 이 말에는 많은 반론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은혜로 덮자는 말입니까?

은혜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판을 쳐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안 될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문제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그냥 놔두자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에 대한 질책입니다.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어떻게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은 교회와 세상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죠.

교회가 세상 사람 앞에서 문제를 가지고 판단을 받으려 하는 순간 교회의 능력이 상실되기 때문이죠.

세상을 판단해줘야 하는 교회가 세상의 판단을 받다니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는 순간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구나!’

 

우리가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불의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세상의 재판관들이 불의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도 표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마저 판단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교회에서 경히 여기는 자에게 우리를 판단하도록 맡길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성도들의 자존심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질이 급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나이가 마을버스를 탔다. 그런데 마을버스는 떠나지 않고 계속 서 있는 것이었다.

왜 안 떠나는 거야?”

참다못한 그 사나이는 운전기사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이 똥차 언제 떠나요?”

그 말을 들은 운전기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똥이 다 차면 떠납니다.”

 

우리가 어떤 취급을 받느냐? 자존심의 문제가 아닐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으로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동안 지켜야 하는 자존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손해를 볼 것이냐?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성도의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을 보세요.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적어도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세상에 의해 판단 받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을 보니까, 성도들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사람에게 나가서 판단을 받으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과 거짓을 판가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 사람에게 판단을 받습니까?

 

성도들의 지혜는 세상 것과 다른 것이지요. 세상의 기준과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세상 사람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을 받습니까?

이것이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기준이 무엇입니까?

용서 아닙니까?”

성도들이, 교회가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관용하지 못하며 세상에 문제를 가지고 나간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소송 사건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아십니까?

요즘 교회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해 공증해 놓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의 규칙들을 세세하게 만들어 놓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당회를 할 때였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다 온 목사님이 저에게 항의 비슷한 말을 합니다.

목사님! 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회의 진행을 못 합니까? 미리 준비하면 잘할 수 있는데요.”

 

우리 교인들은 별로 당회라든지 교회 회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회의에 나올 때 규칙들을 다 읽어보고 숙지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분이 법에 의하면.이라고 말하면 저는 대부분 제가 모른다거나 죄송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회 문제를 법을 가지고 해석하고 따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치리하는 데 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법을 따지기 시작하면 이미 그 안에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법이 적용되지 않아야 가장 교회다운 교회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인들을 법을 가지고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법을 가지고 이기면, 다른 사람 역시 법을 가지고 저를 이기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법리 논쟁이 돼 버리면 교회에는 하나님의 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법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서로를 정죄하는 것도 이러할진대, 만일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의 법정에 나간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마이클 웰스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분노란 테니스 경기의 공과 같다. 양쪽의 경기자가 그 공을 계속 받아치기 시작하면 공의 속도는 증가하고 마침내 한 쪽이 패해야 끝이 난다.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자아 경기에서는 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육을 나타낼 때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반응한다면 그는 하나의 실패자를 따라 동시에 또 다른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흉한 것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받아들이면 모든 문제가 진행을 곧 멈추고 승리자로 끝나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자를 통하여 승리자가 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다. 그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패배한 자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질책하며 이야기합니다. 그런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는 손해를 받는 것이 낫다는 것이지요.

본문 7~8절의 말씀입니다.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단어를 보게 됩니다. 형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한 가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육신적인 혈육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든 가정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도 바울의 관점이 중요한데, 종말론적신앙관입니다.

종말론은 이 세상이 다 망할 테니 대충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는데, 금전적인 문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언젠가 아주 인상적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왕회장이라 불리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일어났던 왕자의 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제3자들은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실질적인 장자였던 정몽구 씨와 가장 총애했던 아들 정몽헌 씨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결국, 정몽구 씨 <현대자동차>, 정몽헌 씨<현대건설>을 물려받았지만, 그 가족이 서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현대건설이 어려웠던 시절 손을 내민 정몽헌 씨를 도와주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대북 사업을 하던 정몽헌 씨가 정부의 압박으로 12층 현대사옥에서 자살하고 난 후 사후 처리를 하는 형의 눈에 고인 눈물, 그리고 이제는 현대가의 장남이 되어 먼저 떠난 형과 다른 동생들의 자손들을 돌보는 정몽구 씨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몽헌 씨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는 모습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형제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란 저런 것이구나!’

싸워서 이겨도 절대로 영광스럽지 않고, 아무리 이겼어도 아픔을 당하는 형제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생명을 얻은 한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한 형제라고 할 때는 잃어도 얻어도 손해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면 동생이 이익을 볼 것입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익을 보면 동생이 손해를 봅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프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임을 알 때, 이기고 지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서로 형제라는 의식이 없고, 실제 형제임에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남남처럼 살기 때문에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편하고 저 사람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즐겁다면 이미 형제가 아니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 놓고 무릎을 꿇리고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남편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권위도 체통도 다 떨어진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자꾸 이기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문제의 중심에는 불행스럽게도 금전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금전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돈을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아닌가요?

 

대학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돈이 해결책이 되나요?

이미 금이 가버린 가정에 돈이 해결책이 되나요?

더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문제고 감정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형제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서로 이기고 지고, 서로 얻고 잃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 7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차라리 당하는 것이 낫다. 차라리 당해라!”

베드로후서 15~7절의 말씀을 보세요.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결국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요, 형제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삶을 통해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덕도 없고, 지식도 없고, 절제도 없고, 인내와 경건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아니 불의한 일을 당하면 변명을 해야 하고 나 자신의 의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무능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고 죄인 취급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을 당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여러분은 분노하고, 누군가 싸우고 있습니까?

사실 많은 부분에서 여러분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가장 억울하고 분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죄가 없는데 가장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징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가장 무능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내려오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며 소리칩니다. 뛰어내리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십자가 아래로 뛰어내리면 모든 오해와 무능력, 조롱을 한꺼번에 이길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쪽을 택하셨습니다.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가졌던 로마 시민의 권리,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학식,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는 지위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모든 권리를 사용했으면 그렇게 핍박을 당하거나 매를 맞지 않았어도 될 것입니다. 바보같이 미련한 삶을 살았습니다.

차라리 당하는 것만큼 성숙한 삶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왕년에 황해도에서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본래 키가 크고 힘이 세서 그 사람하고 악수를 하면 큰 키와 손의 악력 때문에 기가 질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분이 부흥사가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그 옛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십 리씩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무척 더운 여름날 높은 언덕을 넘어가다 잠시 땀을 식히고 쉬기 위해 옷을 훌훌 벗고는 앉아 있는데, 술 취한 청년 하나가 목사님 앞에 오더니 다짜고짜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하면서 때리기 시작합니다.

 

시합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매를 맞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대항하지 않고 매를 맞았습니다.

청년이 제풀에 지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 청년을 향해 형씨 다 때렸소?” 하면서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김익두! 예수는 내가 믿었는데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말합니다.

청년은 김익두는 말에 놀랐고, 그다음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못 알아듣겠나?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다 묘 쓰고 말았을 거야. 내가 예수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으니.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은 것이 아닌가?”

 

김익두의 말에 청년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청년을 목사님은 부흥회에 데려가게 되었고 그 길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지 이해가 됩니까?

언젠가 보았던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 보면 참으로 패륜아인 아들이 나오지요. 재산 때문에 부모를 칼로 무자비하게 죽인 아들 말입니다.

그런데 몸싸움하는 와중에 아들의 손톱이 떨어져 나갔는데,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손톱을 삼킵니다.

혹시라도 아들이 범인인 것이 밝혀질까 봐 말입니다.

이 어머니의 행동에 공의가 없습니다. 정직도 없습니다. 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어머니가 차라리 당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나쁜 자식이 자기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는 조롱하기보다는 큰 인내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이 감동을 주는 것은 성숙함과 사랑 때문입니다. 차라리 당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교회를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형제간에 다투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형이 동생이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면, 동생이 형을 욕한다면 아버지가 누구의 편을 들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은 옳은 자식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식 때문에 아픈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손해 보지 않으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손해 보고 누명을 쓰는 것이 기쁨과 영광이 됩니다. 내가 죄인이 되어 형제를 의인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어 보여 상대방이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입을 것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는 것, 사랑이기는 하지만 큰 사랑이 아닙니다.

큰 사랑은 나의 를 주는 것입니다. 나의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바보처럼 되어 저 사람을 좋은 사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19~20절의 말씀을 보세요.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오늘 말씀의 결론이 아주 무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의한 자가 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곳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의한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를 누려야 하는 우리가 불의한 일을 행하면 가장 비참해집니다.

죽어서 영생을 이루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릴 복이 없습니다.

 

기억하시나요?

크림빵을 사 들고 임신한 아내를 위해 집으로 가던 남편을 치고 뺑소니를 쳤던 남자를, 아마 운전하기 전에 소주를 4병이나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술을 먹고 운전하다 적발되는 유명인을 보면 참 의아하지 않나요? 왜 자신이 가진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더욱 아프고 힘든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가진 명예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이 나열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의 죄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속받은 사람들이라면 아직도 그런 잘못된 삶을 사는 것이 정상일까요?

물론 구원받은 자도 실수하고 범죄 할 수 있으나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러 죄의 낙을 즐기면서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속는 생각입니다.

 

첫째는 음란입니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결혼 이외의 모든 성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둘째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뿐 아니라, 형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절하는 모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우상이 무엇입니까?

셋째는 간음이 무엇인가요?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넷째 탐색(貪色)과 다섯째 남색은 비슷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이 malakoi;) 여자 같은 남자들, 동성애자들을 뜻하며, 미동(美童) 혹은 남창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다섯째는 도적질입니다.

누군가를 속여 취한 재물은 사람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늘 투기와 투자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의 눈에 눈물이 나거나 손해를 끼치면서 얻으려는 것은 투기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며 심는 것은 투자입니다.

성도는 돈 관계에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빌린 돈은 꼭 갚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돈을 꿔준다면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돈 관계는 서로를 도적으로 만드는 가장 나쁜 관계입니다.

여섯째는 탐람(貪婪) 곧 탐욕입니다.

이 말의 뜻은 더 가지려는 욕심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5절에서 가지려는 마음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갈망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술 취하는 것입니다.

술 취함이 성경에서 죄가 되는 것은 올바른 정신을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로 인해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꼭 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온전한 마음을 흩트리는 것에 대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아홉째는 모욕하는 것입니다.

후욕은 남을 거짓되게 비난하고 욕하는 것입니다. 때로 살다 보면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단점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른 이에 대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죠.

열째는 남의 것을 속여 빼앗는 것입니다.

저도 순진하게 당한 일이 종종 있습니다. 속여 빼앗으면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도 많이 다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무서운 질책은 빨리 이들이 거룩한 교회로 되돌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 가운데 이러한 죄악 가운데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무엇인가요?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이전에는 불의한 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으로 의롭게 변화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꼭 우리 공동체를 향해 하시는 말이 아닐까요?

이제는 다시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란, 눈앞의 이익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말론적인 삶이 가장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해 많은 잡음을 만들었던 한 전도사의 해프닝을 기억하시나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테니,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테니 모든 것을 정리해서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신앙인의 태도일 수 있을까요?

그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모를까? 단지 이 세상인데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종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를 예비하여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과 선물은 순결함 아닐까요?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느냐가 아니라,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가 크리스천의 영향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자존심만 살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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