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은 이런 것입니다(고전16장 1-12)
성경본문:고린도전서16: 1-12
1. 성도를 위한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가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
오늘로 우리가 지난 8개월 동안 함께 묵상하며 공부해 온 고린도전서의 마지막인 16장을 다루는 날입니다.
물론 크리스마스 예배와 송년 주일을 통해 나머지 부분을 다루겠지만, 지금까지 나눈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의 애정과 고민의 대상이었던 고린도 교회가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들과 교회들이 가진 보편적인 문제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나누었던 그 가르침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도 신앙의 값진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안타깝게 했던 것은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는 믿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옛 생활 습관과 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은사를 체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은사는 교회의 유익이 되지 못하고 또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은사와 사역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통해 크리스천의 모든 신앙이 부활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의 기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죄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기준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가 자유로 하는 일이 ‘덕’을 세우는 일인가? 다른 하나는, 사랑이 없이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정리하던 월요일 새벽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메이비 세대 (maybe generation) - 무엇을 포기했는가?"
요즘 젊은이들을 가리켜 '메이비 세대'라고 한답니다.
너무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애매함의 세대를 일컫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참 많이 듣던 이야기가 '다니엘'의 영웅담이었습니다.
그가 '뜻'을 정하여 우상의 음식을 거부했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는 직장 사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술'을 거부한 신앙적 영웅담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이야기들도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영웅담보다는 '술을 먹는 것이 죄인지, 신앙의 본질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세상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주일에도 '공부'하고 '일'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 자신이 율법주의자가 아니므로 어떤 것을 먹는 것이나, 무엇을 한다는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준'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위대한 신앙의 사람 다니엘을 이야기하며 '뜻을 정하여'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적어도 다니엘이 살았던 이방 땅에서 삶의 기준이 '느브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죠.
'선명한 기준' 선명하게 그은 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일정 부분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내 삶을 희생하고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 포기할 것도 희생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도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삶의 간증도 사라집니다.
간증이 없는 신앙인의 삶은 '능력'도 없습니다.
요즘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힘을 잃는 것은 명확한 선을 긋지 않으므로 포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의 삶에서 포기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 새벽 말씀을 붙들고 조용한 어머니 기도실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지지 않을 마음을 주세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시대'가 두렵고 '자신'이 두렵습니다.
명확한 기준이 세워지면 명확한 '결단'도 있을 듯합니다.
이번 한 주간 그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 봅시다. 아니, '살아 냅시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내가 포기할 것은 무엇인가!
연보에 대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신앙 가운데서 ‘이런 신앙인이 되라는’ 마지막 권면을 마치 부록과 같이, 아니 어떤 글의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연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돈’이라고 말입니다.
아니, 신앙인들에게 예수님과 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사실 가장 두려운 질문이 아닌가요?
이 부분에 분명한 대답이 어렵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제가 미국 살 때 흔히 듣던 말이 있습니다. ‘money talk’ 많은 부분에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하는 것은 대부분 돈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에서도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돈을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돈의 용도, 지갑의 쓰임이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인인지를 말해 주지요.
올해도 우리가 당회를 거쳐 직분자들을 뽑았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헌금’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 ‘두 렙돈’을 부자들의 어떤 헌금보다 귀하게 여기셨듯이, 교회에서는 헌금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를 헌금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단체도 멤버십을 유지하기 위해 ‘회비’를 냅니다.
이유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교회에서도 돈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느냐고 묻지만, 돈은 분명한 평가가 됩니다.
돈의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연보’에 대한 권면을 하는 것은, 이제 신앙인이 되었으면 이렇게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기도 하겠지요.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세요.
1. 성도를 위하여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연보’를 ‘헌금’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헌금은 ‘offering’이고 연보는 ‘collec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의 기본이 헌금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연보에 대하여 말하지요.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NIV성경에서는 ‘the collection for God's people’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relief offering for poor Christians that is being collected’라고 되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배 시에 드리는 봉헌의 예물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기본이요, 구약시대에는 살아있는 동물을 바치는 것으로, 동물의 죽음으로 자기 죽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보라고 하는 것은 봉헌의 예물이 아니라, 필요한 때 모으는 목적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건축할 때 하는 헌금은 엄격한 의미에서 헌금이 아니라 연보에 해당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하는 선교 헌금도 봉헌의 의미가 아니라 연보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요.
제가 목회하면서 조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헌금을 용도에 맞게 잘 써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절기에 드렸던 헌금이 요즘에 와서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드렸던 특별한 헌금들이 현대에 와서는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창립기념일, 초하루 기도회 헌금의 용도를 구분했습니다. 드려진 헌금들이 용도에 맞게 잘 쓰여야 하기 때문이죠. 모든 목적헌금은 모든 목적에 맞도록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십의 일조는 하나님께, 그리고 삼십 분의 일은 가난한 자를 위해 드리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 교회가 1인 1사역 1후원을 하는 것은 바로 크리스천의 의무와 건강하고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사는 삶에 대한 부분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전 2023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일 중의 하나가, 이상적인 예산을 실현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들이 하나님의 뜻에 잘 맞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그 돈에 대하여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본문 3~4절에서 연보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그리고 그 모은 연보를 어떻게 사용할지, 자신이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연보의 용도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같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사사로이 도움을 받는 일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모아 놓은 연보를 쓰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참 멋지지 않습니까?
바울을 위한 연보가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는 확신이 말입니다.
요즘 신앙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을 무슨 ‘의’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기복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헌금과 연보는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하는 신앙적 결단입다.
헌금이 하나님께 생명을 대신하여 드리는 제물의 의미가 있다면, 헌금은 드려지는 순간 우리의 손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생명에 관한 권한이 나에게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드려진 헌금에 대하여는 내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회를 통해 그 헌금이 잘 쓰이기를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들의 생명이 드려진 헌금을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하게 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지요.
두려운 것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드린 헌금이 교회 리더십의 잘못된 판단이나, 목회자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이는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온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헌금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자체 감사도 받고 회계 법인을 통해 감사보고도 받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재정적인 신뢰가 깨어지므로 인해 그냥 ‘믿어주세요’라는 말로 헌금이 사용되지 않도록, 재정관리 위원들과 부장들이 각 부서에서 고민하여 예산을 짭니다.
아무리 담임목사라고 해도 헌금을 비자금으로 두고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모든 헌금이 사용된 곳에는 정확하게 영수증을 첨부해 관리하도록 합니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십에서부터 정확하게 헌금이 쓰이도록 노력하고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겠습니까?
연보의 경우는 대개가 구제를 위하여 필요한 때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왜 이런 연보를 해야 할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 중의 하나는 2절에 있는 “수입에 따라”라는 말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 보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라도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사업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해서든지 수입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돕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리더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등록된 교인들의 숫자만 해도 3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주일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림잡아도 1만6천 명 정도 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헌금을 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르므로, 중지를 모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 교회의 담임자인 저를 통해 보게 하고, 만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쪽에 헌금이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담임목사인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바른 것을 보고 듣도록,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결정을 내리도록 말이죠.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제일 힘들었던 것이, 선교지를 정하고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 연결된 곳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준비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비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비전과 사명에는 우리의 열정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죠.
우리 교회가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한 것을 잘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민족이 다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나보다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돕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해 돕는다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신 가요?
선한 목자 교회 유기성 목사님이 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순종의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다 지갑을 꺼내라고 하고는 물었답니다.
"그 지갑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이니만큼 알아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하는 데 두 사람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하면 돈을 다 꺼내서 헌금하라고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개중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이라도 적게 넣어서 올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다음 또 물었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통장 있으시지요? 그 통장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두 사람 정도만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또 물었답니다.
"집문서, 땅문서 있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낯빛이 변했습니다.
목사가 성경공부를 하다말고 난데없이 있는 것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치라고 할까 봐 놀란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가진 재산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혹시 그렇게 대답했다가 하나님이 진짜 전부 바치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됩니까?
이런 걱정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가 가진 것을 다 가져가시겠다고 작정하셨으면 내 허락 따위는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고 매달리며 "하나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기로 작정하셨으면 다 거두어 가십니다.
모두가 경험해 보셨겠지만, 우리의 생명,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지 않습니까?
사실 신앙적인 결단이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저축할 수 있는 것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명하시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보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은 덕이 있어야 하고, 덕은 하나님 말씀의 지식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을 돕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자기 재산의 50% 이상을 돕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과도한 나눔은 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자식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분노하고 한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이런 덕과 지식 가운데 연보를 할 수 있다면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또한, 연보라는 것은 때때로 ‘대상 동기’에 따라 행해지는 것입니다.
꼭 이(利)를 얻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돈이 있건 없건, 장사가 됐건 안 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흉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안디옥 교회가 도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루살렘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보다 훨씬 부자 교회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내가 돕지 않으면 고통을 당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내 생각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저는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믿음의 행위라면, 그 믿음의 씨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11장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당시에 어려움에 부닥쳐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돕고자 했다는 것이 3절에 분명히 나와 있고요. 2절에는 ‘각 사람’이 연보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때는 여유의 있고 없음이 문제가 아니라, 다 동참하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많이 걱정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교회 예산도 줄고 할 일을 하지 못할까 봐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늘 여유가 있어서 존재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 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어려운 때에,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증명할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빛나는 때는,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을 때 순종하기 어려운 때 순종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연보’의 원칙을 또 하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고린도 교인 중에 그 교회를 창립한 사도 바울이 갔을 때, 체면 때문에 연보를 하는 사람도 생기고,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돈을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결국 ‘도움’이라는 것은 신앙적인 행위이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도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당시 유대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정중하게 일어서서 상대방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최대한 정중하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도움의 수준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도움은 어려운 사람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서로 모르게 도와주는 것, 그리고 가장 낮은 수준의 도움은 1대1로 매치하여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돕는 방식들이 대개는 가장 낮은 수준의 방식입니다.
가장 천박한 도움의 방식이 오늘날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움이 신앙적 헌신과 순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율법적 형태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신문에서 소개한 짧은 영상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 만들어 배포한 것인데, 한 어린아이가 눈먼 아버지와 함께 국수를 먹으러 식당을 찾았습니다.
국수를 주문하고는 어린아이가 주인에게 뭐라고 귀에 속삭입니다.
조금 뒤 주문한 국수가 나왔는데, 눈먼 아버지의 국수에만 소고기가 듬뿍 올려 있고 아들의 국수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국수를 먹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국수 그릇에 고기를 올려주고, 아들은 또 몰래 고기를 아버지의 그릇에 올려줍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는 고기를 한 접시 가져다줍니다.
아이는 자기가 주문한 적이 없다고 하자 주인은 그냥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는 남은 고기를 비닐봉지에 소중하게 담아서 갑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떠난 뒤 그릇을 치우던 주인아주머니는 그릇 밑에 놓여있는 돈을 발견합니다.
아이는 고기값을 놓고 나간 것이죠.
아마도 아이가 받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지 동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서로 돌보는 사랑.
이런 이야기가 중국에 감동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도움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돌아갈 도움이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돕는 것에도 도움을 받는 것에도 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연보는 믿음의 행위와 하나님의 명령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냥 물 위에 던지십시오.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믿음으로, 신앙적 결단으로 던지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믿음은 ‘씨알의 기적을 믿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순종과 이런 믿음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을 가지셨나요?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몇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참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고난 가운데서 힘이 되었고, 그의 사역을 완주했을지 모릅니다.
그가 죽을 수 있었던 순교의 용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그의 일을 함께할 좋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민족이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을 때 함석헌 옹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詩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도 바울은 누가 뭐래도 자신을 대신하여 사역할 사람, 영의 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고린도 교회에 그를 추천했고, 디모데 편에 편지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이 추천하는 디모데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세요.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부탁하는 한 가지는 “잘 돌봐 주어라”라는 것이지요.
디모데는 어리지만, 사도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누구에게든지 추천할 만한 그런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내가 아니어도 이 사람 때문에 아무 문제없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국, 이 시대의 문제, 한국 교회의 리더십이 바뀌어 가는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함께 동역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몇 년 전 연말 기획위원회를 단양에서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잠깐 남는 시간에 대성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중간쯤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십시오!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십시오!”
참 좋은 말이지요. 격려와 인정이 없이 어떤 누구의 관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존 맥스웰이 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격려]라는 책에서도 이런 글이 나옵니다.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얼음물 위에서 사람이 얼마나 견디는지.놀라운 일은 혼자 있을 때보다 같이 있을 때 배 이상 오래 견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충성도 알아주고, 헌신도 알아주고, 진실도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함께 갈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만나 교회에서 평생을 함께할 신앙의 동역자를 얻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권과 관계없이 서로 격려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참 행복한 목회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성공한 목회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린도 교인들을 훈계하고 잘못을 지적하며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사역을 이어갈 영적 아들이 있다는 것과 그와 동역한 사역자가 있다는 것이죠.
누구에게 소개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이간질해도 끝까지 형제라 부를 수 있는 믿을 만한 동역자가 있는 것 말입니다.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누군가 기다려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람을 만날 기대감이 있다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저에게는 ‘형제’라는 말이 참 따뜻하게 들립니다.
‘형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늘 논쟁이 되었던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서 아볼로를 더 앞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그는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관계들이 주변 사람들로 인해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누군가 말을 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운한 일들이 생기고 그것이 쌓이다 보면 멀어집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믿어주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교인들은 누가 최고인지를 놓고 바울과 아볼로의 이름을 오르고 내릴 때도, 이들이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것 때문에 끝까지 형제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겟세마네에서 배신자 유다를 향해 불렀던 말이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26장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은 끝까지 ‘친구’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영의 아들’ 디모데가, 그리고 ‘형제’ 아볼로가 있었기에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 공동체에서 사도 바울에게 힘을 주는 형제가 있었듯이, 우리가 누군가에게 형제가 되어주고, 우리에게 형제가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사명을 안고 달려가는 길에 고난을 함께할 동역자가 있다는 것,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늘나라에 함께 갈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