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은밀한 죄를 지었을 때(롬 8: 5-10)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2.01|조회수384 목록 댓글 0

은밀한 죄를 지었을 때(85-10)

성경본문:로마서 8:5-10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

 

속일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아주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라든지. “남들도 다 그래.” “우리는 원래 연약한 존재잖아.”

성경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연약함의 근본은 아무리 은혜를 받고 살아도, 영적인 우리의 삶에 육신의 소욕과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으로 들어가는 것의 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있지요?

예배를 드리면 그 마음 그대로 살고 싶은 것. 또 하나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우리만을 보신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삶에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것이죠.

심판의 문제 역시,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을 판단하시리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이 우리 인간에 대하여 뭐라 말씀하나요?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오늘 저는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도덕적 깨어짐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도덕적 결함을 속일 수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도덕적 깨어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가 깨어진 도덕성이 아닐까요?

도덕적 깨어짐이 육신의 생각으로 오는 것임도 알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지켜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도덕적 갈등이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서도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완벽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육신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진 도덕성 가운데 "있다!" "없다!"를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도덕적 깨어짐과 육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은 자의적 해석의도적 도피에 기인합니다.

우리 같이 "올레"라는 광고를 봅시다. 얼마나 편파적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우기는 사람은 그것을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의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자기 내면에서 정당성이라는 얼굴로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을 진실로 착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청년 중에 제일 많이 상담하는 것이 음주와 이성 문제입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죠?”

'왜 묻는데, 무엇이 잘못인지 아는데 왜 질문을 하는데?'

결국은 끊어내지 못한 육신의 소욕의 문제입니다.

지금 설교는 이렇게 쉽게 하지만, 우리가 모두 육신의 욕심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수없이 하지 않나요?

도덕적인 문제를 언급할 때 두 사람이 비교가 됩니다.

둘 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인데, 구약의 요셉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거절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자가 유혹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자신을 지킨 사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지만,

어쩔 수 없이이성의 유혹에 넘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삶의 업적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 다윗입니다.

 

참 인간은 신기합니다.

고난의 순간에는 영적인 삶을 사는데, 축복과 영광의 순간에 육적인 삶을 산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순간, 그 축복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모습 말입니다.

다윗은 참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양을 치던 때 그의 중심을 보시고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초대 왕 사울에 대하여는 준수하다.” 이런 표현이 있는데, 다윗에 대하여는 그냥 중심을 보셨다!”라고 하니까,

그의 외모에 대하여는 언급할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택하셨겠습니까?

 

그가 골리앗과 싸울 때 신앙의 고백을 보세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 왕이 되어 처음으로 한 일이 빼앗긴 여호와의 법궤를 찾아오는 일.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황혼 무렵 궁전의 옥상을 거닐다, 선데이 서울에서나 나올법한 죄를 짓습니다. 목욕하던 여인을 훔쳐보고는 데려다가 간음을 하고, 그 여인이 임신을 하자, 그 죄를 숨겨보려고 전쟁터에 나가 있는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야를 불러들여 특박을 주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리 해도 그의 죄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깨어진 도덕성은 단순히 죄의 문제 하나가 아닙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서 부하들에게 도덕적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고, 아버지로서의 영적 권위도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성적인 범죄, 깨어진 도덕성의 무서움은 그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덕적 깨어짐과 인간의 도덕적 욕망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략 다윗이 범죄했던 때가 그의 나이 47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제 어려운 시절을 다 지나고 먹고 살만한 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감사하며 누리고 살면 되는 때, 왜 육신의 정욕이 그를 찾아왔는지. 어쩌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다가 47세 전에 죽었더라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축복을 받고 축복을 누리는 때가 결코 축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깨어지는, 추락하는 많은 위대한 인물을 봅니다.

그들은 결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사실 설교를 하면서 저도 제 나이가 참 두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48세에 순교를 하고, 오스왈드 챔버스48세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20대 중반에 짐 엘리엇이 순교를 당한 것이 참 행복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 육신의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아니, 육신의 욕망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참 힘들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절박했기에.

 

안락함과 정당성

어쩌면 다윗에게 안락함이 찾아왔을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육신의 안락함을 누릴 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안락함과 우리가 누릴 수 있다고 정당화하는 안락함의 방향입니다. 그가 죄를 짓기로 했다기보다는 그는 하나님을 적당히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여기에 무서운 깨어짐과 함정이 있습니다.

 

어윈 루쳐[회복의 하나님의 붙들라]에 나오는 글이 참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 죄를 지을 때 그는 결국 죄로 수치를 당하리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의 네 아들이 아비의 죄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 왕국이 붕괴되리라는 것도 미리 보지 못했다. 다윗이 자신의 부정한 행위로 어떤 파국이 닥칠지 미리 볼 수 있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 순간적인 욕정으로 결국 그가 중시하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졌다. 그러나 그 당시로써는 현재적 순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만 중요했다.

밧세바를 취하기를 결정했을 때 그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범죄 하고자 의도하지는 않았다.다만 잠시 하나님을 무시했을 뿐이었다.

다윗하나님도 싫고 그의 계명도 지키기 싫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시 그런 죄를 지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마음에 가득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다만 잠시 하나님을 망각할 뿐이다.

 

깨어진 도덕성의 문제는, 중요한 계명을 어기면 그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게 또 다른 계명을 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서진 관계와 깨어진 도덕성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예측하고 계획한 대로 덮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죄는 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고 그 후유증은 다른 관계들과 인생 영역들까지 고통으로 몰아갑니다.

 

어쩌면 다윗밧세바는 달콤한 밀월이 끝나고 예전처럼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만일 밧세바가 임신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엇보다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배우자에게 숨겨야 할 비밀을 안고 속여야 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을 한 번 넘으면 다시 그 선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복할 수 있다!

본문 9-10절입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를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라는 것이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를 압니다.

 

진리란 때로 예리한 칼과 같아서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고, 환부를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거짓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아프지만 거짓이 드러나야 합니다.

진리 앞에서 얼마나 힘들고 민망스러운지는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감출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엄폐하려고 다윗은 결국 거짓과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힘들기는 했어도 깨어진 도덕성으로 죄의 결과를 털어놓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야를 불러놓고, 사실을 이야기하고 대책을 세웠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힘들고 어려운 문제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려운 해결의 방법보다는 쉬운 길을 택했고, 진리를 벗어난 해결의 방법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죄를 불러일으킬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삶에 무너진 도덕성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절망이 아니고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세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납니다.

 

가만히 말씀을 묵상해 보세요. 무슨 의미일까요?

깨어진 도덕성으로 육의 몸이 심하게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납니다.

깨어짐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에도 살아나는 진리를 믿습니다.”

이 진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우리의 연약함과 추악함을 고백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회복의 대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상처의 흔적은 남겠지만, 아물게 될 것입니다. 그 흔적을 볼 때마다 아프고 힘든 기억이 되살아나겠지만, 치유된 흔적일 것입니다.

누군가 건들 때마다 예리하게 신경을 건드리겠지만, 십자가로 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회복은 외면하거나 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 앞에서 맞닥뜨려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명확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복음 앞에 우리의 깨어진 도덕성이 직면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아는 새로운 단어가 있습니다. 주폭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면에서 조폭과 다를 것이 없고, 보복이 두려워서 사람들이 신고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폭이나 조폭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잘못에 대한 인식과 적절한 처벌입니다.

처벌되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는 도덕성은 해결되지 못한 치명적 상처를 지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도덕적 위기가 무엇입니까?

깨어짐 가운데, 정의와 진리 앞에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토미 테니데이빗 케이프가 쓴 [종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피신해야 할 영역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족이고, 둘째는 구원이다. 실패에 처했을 때 당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당신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돌아가는 것은 후퇴로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실패가 아니다. 당신의 인생 풍파에서 지켜 줄 지상의 관계와 천상의 관계를 개발하라."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내 친구 가운데 청년사역에 헌신한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죄를 자각시키고, 위로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사역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자매와 은밀한 죄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는 임신했습니다.

 

두 사람은 당황했고 부끄러웠으며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둘은 공모하여 완벽한 계획을 짰습니다. 마침 그녀는 곧 해외로 취업을 나갈 예정이었기에, 거기서 아이를 낳아 입양 기관에 맡기면 다 끝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도피 수단을 마련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친구는 젊은이들에게 순결과 고결함에 대해 권고할 때마다 그의 속에서 위선이라는 자각이 끓어오름을 느꼈습니다. 청년들에게 투명성에 대해 권고할 때면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수풀 뒤에 웅크리고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단지 핑계와 은폐의 책략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체들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들이 저지른 행동의 대가를 감당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 결과로 형제는 사역의 현장에서 은퇴했으며 자매는 아이를 낳았고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지금 겸손과 능력으로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책임 있는 고백은 진정한 자유와 회복의 은혜를 가져오는 법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말씀에 좀 더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잘못된 기준입니다.

'쉽고 어려운 길' 중에 선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옳고 그른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삶의 자연인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행하려고 할 때 제동을 걸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든지 성령님이 알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덕적으로 깨어졌느냐?의 문제보다 깨어진 다음에 어떻게 살아가며 삶의 결단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도덕적으로 깨어진 상처가 부끄러워 자꾸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악순환입니다. 하나님을 피한 인간의 도덕성은 점점 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 다윗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여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을 때, 당시의 선지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죄를 짓고 사리 판단이 잘 안 되는 상황이기에 직설적이기보다는 완곡하게 죄를 지적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한 나그네가 양과 소가 매우 많은 부잣집을 방문했는데, 그 부자는 자기 집의 가축을 잡아 그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집에 하나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대접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다윗왕은 진노하여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지만,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화가 났습니다.

단지 자신이 그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감추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그 나쁜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그 순간 다윗은 질책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합니다.

숨기려 했던 자신의 죄와 깨어진 도덕성이 아프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가 은밀하게 죄를 지었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 앞에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서게 됩니다.

그 일로 다윗은 참으로 처절하고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은 은밀하게 지은 죄로 그쳤지만, 대낮에 그의 아내들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배다른 어머니인 왕의 첩실들을 옥상에서 범하는 무서운 일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하지만 심판만 보인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하나님께 바로 돌아와 회개하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올바른 방법을 찾았다면 이렇게 무서운 비극에 이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비극, 결과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정적으로 다윗의 가정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서지 않음으로, 신앙적 본을 보이지 못하므로 깨어진 가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가운데서 다윗이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명백하게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역시 너무나 명백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다윗밧세바 사이에서 난 첫아이가 죽었지만, 그의 소생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한 여자와의 사랑을 지키지 못함으로 여러 여자에게서 난 소생들의 다툼이 있었지만, 그의 왕위를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이 실수했지만, 패배자는 아니었습니다. 시편 321절의 그의 고백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어쩌면 험악한 인생의 질곡을 겪어야 했던 그에게, 사함 받은 은총이 감사로 고백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실패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인간이 죄의 산을 쌓아올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에 뒤질세라 더 높은 은혜의 산을 쌓아올리신다.

인간이 높디높은 죄의 언덕들을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은 열 배나 더 풍성한 은혜로 그 언덕들을 덮어버리신다.

죄와 은혜의 이런 시합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산을 뿌리째 뽑아 그 아래 인간의 죄를 묻어버리실 때까지 계속된다.

마치 파리 한 마리가 거대한 산 아래 묻혀 버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큰 죄도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지는 못한다.

 

다윗은 어쩌면 평생을 사는 동안 자신의 죄로 아파하고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어찌 기억이 다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의 죄를 상기하지 않으시고 잊으셨습니다.

이사야 118절입니다.

18-"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깨어진 도덕성으로 망가진 인생이 아니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깨어짐으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확신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세요.

해변을 걸으면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에 지나온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한번 밀려오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와 같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바라보며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9)

 

혹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렸다 해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고통 받는 그 누군가도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대가 생길 것이며, 당신의 고통 중에도 다시 시작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 깨어짐 가운데도, 그로 말미암은 아픔 가운데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누구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불완전함으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보다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