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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말씀으로 이 땅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요 1: 1- 5)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2.20|조회수105 목록 댓글 0

말씀으로 이 땅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11- 5)

성경본문:요한복음 1: 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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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격동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말씀

이번에 국내 성지를 돌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알려진 아펜젤러언더우드 목사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이 땅에 말씀이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어둠 가운데 전해졌던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선교의 역사는 본문 1절과 5절 말씀을 가지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계신 말씀을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거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 우리 선교의 역사라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그 신비한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 민족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셨고, 어떻게 말씀이 역사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성경번역의 역사는 조선 선교 역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는 로스 선교사이응찬이라는 인물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던 로스는 만주 봉황성 고려문에서 의주에서 온 조선인들을 처음 만나 전도하였습니다. 그 만남을 계기로 1874년부터 로스는 의주 상인들을 만나 한국어를 익히고 조선에 대한 선교를 계획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응찬은 홍삼을 사서 장사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물건을 몽땅 잃어버리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사람을 구한다는 서양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로스를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말씀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보이도록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선교사 로스 이응찬과 함께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였고 1882년 봉천에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오게 됩니다.

바로 그해 역사적으로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당시 상황을 로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 한글 성서 발행이 조미조약 체결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완고한 고려문이 열린 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이 민족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성경이 의주 출신들의 도움으로 인해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어린양 같은 말은 하나님의 양새끼라고 번역되기도 하면서 복음의 토착화 과정이 시작된 것이죠.

 

또 한 인물 로스 선교사 백홍준의 만남도 한국 선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1876년 늦가을 만주 봉천 근처 고려문 국경 지역에서 로스는 조선 상인들에게 초와 한문 성경 전달하였는데, 백홍준은 자신이 받은 성경책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뜻을 같이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봉천에 거하는 선교사를 찾아갑니다. 당시 안식년이었던 로스를 대신하여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대신 세례를 주었습니다.

 

1879년에는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만주에서 인쇄된 성경이 국내로 유입되었습니다. 아직 한글은 아니었지만, 고려문을 통해 들어온 성경은 불온문서’(?)처럼 유통되며 새로운 도에 관심을 둔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의주와 소래, 서울에서 백여 명에 가까운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1879년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선교사가 들어오기 6년 전입니다. 이렇게 세례지원자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으로 이 민족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아직 어둠 가운데 보이지 않았을 뿐이죠. 2년 뒤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만주에서 인쇄되어 쪽 복음으로 한국에 은밀히 유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쇄국 분위기에서 성경을 반입하고 나누어 준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1882로스 목사에게 세례받고 정식 매서인으로 임명받았던 서상륜은 그해 10월 성경 500권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고려문 검문소에 걸려 모두 압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상륜과 같은 매서인들을 통해 1884년까지 조선에 들어온 성경은 이미 9,500여 권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선 선교의 독특성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땅에 말씀이 들어왔다는 것이고, 1885년 제물포항에 선교사들이 첫발을 내딛고 이 땅에 들어왔을 때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나 아직 어둠이 깨닫지 못했을 때 그 작은 빛들이 조선을 밝히는 횃불로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빛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빛입니다.

 

요즘 저에게는 그런 마음의 열망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가 진정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가정이 깨어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불의한 일들에 연루되는 이 세상에서, 정말 복음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선교 초기 말씀으로 이 땅의 문을 두드리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의 암울함 가운데 역시 빛으로, 복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복음이 전해지던 당시 구한말 조선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암울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복음의 역사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둠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빗자루로 막 쓸어버리면 어둠이 도망갈까요? 총과 대포로 쏜다고 어둠이 달아날까요?

소리를 지른다고 없어질까요?

간단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됩니다. 빛이 비치는 곳에 자연스럽게 어둠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들어온 것은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담아내고, 말씀을 전파하고,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세워진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죠.

교회라는 건물이 생명과 빛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잃어버린, 말씀이 더는 역사하지 않는 곳에서 그 어떤 빛도 비치지 못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빛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교회가 존재하고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그 말씀이 역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한말에는 말씀의 빛이 이미 땅에 있었으나 세상이 빛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어둠이었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왜 깨닫지 못할까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런데 5절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 정상인데, 왜 어둠이 깨닫지 못할까요?

이 부분은 빛을 빛으로 인정하지 않는 의지적인 부분이 아닐까요?

어둠에 빛이 비치는데 깨닫지 못한다면, 빛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면 이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거부하는 세력은 무엇일까요?

첫째, 죄를 범한 인간들의 특징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즐기기 위해 빛을 차단하는 것이죠. 의지적으로 말입니다.

둘째는, 빛이 들어오면 주변이 밝아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빛 앞에서 드러나는 죄에 대하여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죠,

노출된 죄를 고치든가, 두려움으로 피하든가.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고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드러날 죄들을 일단 부인하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다 아는데, 다 모를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CCTV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모든 범행이 CCTV에 찍혀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밝혀질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명백하게 펼쳐놓으실 우리의 삶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불의가 득세할수록 진리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핍박할수록 많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죄를, 어둠은 더 어두운 곳으로 인도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빛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빛은 아닙니다. 그러나 받은 빛을 비출 수는 있습니다.

유명한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 중 하나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달이 태양의 거울이듯,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꼈다. 그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었고, 그의 언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였다.

 

아프리카의 남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어떤 선교사의 묘비에는 그 지역 원주민들에 의해서 새겨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왔을 때,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유명한 스탠리 존스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태양이 나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빛만큼 그리스도와 복음을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도 보입니다. 특히 어두운 동굴에서 저 멀리 보이는 터널의 끝이 작지만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다가갈수록 주변이 점점 밝아집니다.

 

이 민족의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던 사람들, 아직은 어둠이지만 그 빛이 어둠을 물리치리라는 복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언더우드 목사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빛의 이야기입니다.

주여!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첫 복음이 들어 올 때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초대 교회 말씀이 전해지던 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첫 복음이 들어오던 때의 감격과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요한계시록 24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그러나라는 접속사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모임에 대한 열심과 예배가 있었고, 수고하며 헌신하는 많은 일꾼이 있었지만,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마음 즉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첫사랑 하면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설렘이 아닌가요?

가슴 저리는 그 어떤 이야기가 아닌가요?

어떤 사람에게는 첫사랑이 추억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첫사랑이 끝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가슴 설레던 그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잠깐 말씀과 연관이 되는, 그러면서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예화를 하나 들까요?

2016326일 자 ‘weekly biz’에 유명한 장난감 회사 레고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12년째 CEO를 맡은 에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kundstorp,)와의 인터뷰였습니다.

 

<레고>2015년 기준으로 영국 브랜드 평가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1위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글과 애플보다 영업 이익률이 높은 (34.1%) 회사가 된 것이죠. 그리고 기업 혁신의 교과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레고>10여 년 전 혁신 과잉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회사입니다. 더는 아이들이 <레고>레고 블록과 같은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최신 유행하는 미국 만화의 주인공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레고>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레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블록을 생각했기 때문이죠. 기업의 위기 가운데서 혁신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블록에 집중하고 나머지를 다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블록을 기억했던 핵심 고객층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디자인을 바꾸고 쉽게 블록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레고가 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레고다운 것에서 사람들은 다시 레고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창업 때부터 내려오던 정신인 최고만이 최선이다라는 말, 밟아도 깨어지지 않는 장난감을 만드는 것으로 레고는 최고 브랜드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고의 CEO인 크누스토르프에게 앞으로의 전략에 관하여 물었을 때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저희는 미래 성장 목표에 대한 정확한 숫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계의 더 많은 어린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게 하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레고의 이야기를 했을까요?

복음이 들어왔을 때의 그 ’, 이 땅 조선의 어둠을 물리쳤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세상이 변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변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복음이 역사하겠어!”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여전히 복음으로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주 기자들과 우리가 1024일에 준비하는 만나 컨퍼런스 ‘Think Next’에 대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을 너무 배려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육은 배려가 아닌데, 우리는 배려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만 것입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고,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과 배려가 더해져야 하죠.

 

레고의 목표가 참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숫자가 아니라, 이 세상이 빛으로 바뀌는 것이고, 복음으로 인해 이 땅의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복음으로 얼마나 빛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첫 사랑의 상실입니다.

상실된 첫사랑은 형식만 남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유지하는 사랑은 어는 순간부터인가 고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복음을 접한 사람들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말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느꼈던 사랑이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는 누군가에게 흘러갈 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책 [큐티 365]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네팔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계시는 강원희 선교사님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고 불립니다.

의대를 졸업한 뒤 계속 꾸려온 개업병원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며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48세가 되던 해, 느닷없이 병원과 가산을 정리하고 아내 최화순 사모님과 함께 <네팔>로 의료선교를 떠났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귀한 시절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하루에 15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계십니다. 팔이 아파 손을 들기 힘들면 진통제를 맞고 진료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강 선교사님30년을 오지에서 아픈 사람들을 위해 진료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들 선교사님 부부의 지나온 삶과 인생은 소명 3’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 부부는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어떤 관련 활동도 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네팔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소명이 생겼습니까?’라는 질문에 강 선교사님예수님을 믿으면서부터 이미 소명은 시작됐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소명은 곧 숙명입니다. 단지 실천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상 소명은 예수님을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소명을 갖고, 실천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제 사랑이 아닌 익숙함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늘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드리던 예배, 늘 해오던 봉사들 말입니다.

저는 교인들과 함께 국내 성지를 방문하며 얻은 커다란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3 R'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Remember

Repent

Restore

소아시아 7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첫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던 때,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 교회에 촛불이었습니다.

말씀이 빛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둠에 묻혀버리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를 기억하는 유익을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회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면, 다른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은 사명을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명이 없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를 상실해 버렸다면 말입니다.

가장 무서운 경고가 아닐까요?

 

사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저는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구한말에는 사람들이 무지해서, 구별하지 못해서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애써 외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말씀의 가뭄 가운데 어둠이었다면, 지금은 말씀의 홍수 가운데 어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비가 오지 않는 가뭄보다, 홍수가 나서 먹을 물이 없는 가뭄이 더욱 무섭다는 것입니다.

가뭄은 물을 찾으면 해결이 되지만, 홍수 속에 먹을 물이 없다는 것은 지금 옆에 있는 넘치는 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넘쳐나는 물을 먹고 전염병에 걸리고, 죽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꼭 말해주는 것 같지 않나요?

TV를 틀어도 인터넷 스마트 폰으로도, 어디를 가다 그냥 교회를 들어가도 말씀이 넘쳐나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캄캄한 어둠입니까?

아니, 왜 말씀의 생명력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나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생명과 같은 말씀의 물꼬를 텄던 사람이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복음을 갈구하던 한 사람의 열정을 통해 복음의 물꼬가 터졌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수정이란 인물은 바울의 전도 여정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던 마케도니아인이 손짓하는 환상 속의 인물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 했지만, 계속해서 길이 막히게 되죠. 그때 꿈속에서 환상을 봅니다. 아시아를 향해 드로아까지 내려갔으나 결국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진로를 유럽으로 바꾸게 됩니다.

 

1882년 우리 역사에서 임오군란으로 인해 명성황후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이수정이란 사람의 공로로 목숨을 지키게 됩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배려로 그 사건 후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죠.

 

이수정은 개화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 츠다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감리교 교인이었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츠다센의 집에 걸려 있는 산상수훈 한문 족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족자에 대하여 대화를 하다 이수정은 성경을 선물로 받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탐구하며 내용에 대한 질문을 위해 다시 츠다센을 찾게 됩니다. 이수정에게 성경은 새로운 진리였고 마침내 1883429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1884년 우리말이 달린 형태로 4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쇄되었습니다. 18852월에는 마가복음도 우리말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이 땅에 복음이 필요함을 호소하는 편지였죠. 그래서 이수정을 환상 중에 손짓하던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 같은 미국의 유력 선교 잡지에 실려 소개되었습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참된 하나님의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퍼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망은 1년 만에 이루어져 1885년 부활절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복음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누군가의 기도와 꾸준한 두드림이 있었기에 이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죠.

 

어둠 때문에 빛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타임스퀘어 교회>는 뉴욕의 3대 복음주의 교회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 교회를 개척한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님은 어느 날 뉴욕의 번화가를 걷다가 교회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986년 맨해튼 42번가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과 마약 중독자들, 그리고 넘쳐나는 게이바 등을 보며 그곳에 빛을 비추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은 실제 갱단들과 마약 중독자, 직업여성들을 찾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 많은 갱단의 두목과 단원들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이곳에 빛을 비추라고, 복음으로 어둠의 문을 두드리라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성령님의 도전입니다.

이 땅의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빛이 우리 교회를 통해 넘쳐 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자가 되어 제2이수정이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어둡지만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다시 복음의 빛이 어둠을 물러가게 할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가운데 우리가 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빛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그 빛은 이미 말씀으로 이 땅에 거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빛이고 말씀을 가슴에 품은 자들입니다.

아직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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