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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십자가로 족하다(요 3:14-16)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12.22|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십자가로 족하다(314-16)

성경본문:요한복음 314-16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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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목회자에게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절기 설교입니다. 부활절과 성탄절, 그리고 감사절에 전하는 메시지가 다양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매년 같은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무척 큽니다.

그런데 언젠가 조용기 목사님이 후배 목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설교가는 한 이야기를 안 한 것처럼 또 하는 사람입니다. 또 설교한다는 것은 불성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반복해서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절은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장 명확하게 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가장 진지하게 묵상하는 날 이기도 합니다.

부활절이 되면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기가 너무 쉽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이 좀 더 어려웠다면, 그 부활의 감격을 얻기 위해 우리의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면.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제가 언젠가 심방했던 노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가정은 좀 독특해서 할아버지는 교회를 다니는데 할머니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면서 이 할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영감은 꼭 교회를 나가야 해요. 얼마나 못되게 살았는지, 젊어서 나를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저 사람은 참 못된 사람이에요. 저런 사람은 꼭 교회 나가서 예수 믿고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나는 절대 교회 안 나가요. 저런 영감이 예수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다면 불공평하잖아요. 그런 예수 나는 안 믿어요.”

 

이 부활절에 우리가 구원을 생각한다면 어떤 이에게는 참 과분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 저런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냥 구원을 받는다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좀 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항변하고 싶으세요?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로 족하다!”

 

맥스 루케이도[내 생애 최고의 축복 3:16]라는 책에서 부활은 출산과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모든 수고를 엄마에게 맡기는 것처럼, 수고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부활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고민하던 니고데모의 문제는 뭔가 더 있을 텐데라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 말고

 

내가 좀 할 일이 없을까요?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뭐가 좀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행위보다 그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절이 되면 많이 애용되는 예화가 있습니다.

한 영국의 부흥사가 천막 전도 집회를 끝내고 텐트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청년이 다가와서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흥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너무 늦었네. 이미 늦었다니까.”

청년은 당황스럽고 너무나 간절한 마음에 다시 물었습니다.

집회에 너무 늦게 온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늦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때 부흥사가 웃으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게 아닐세. 자넨 구원받고 싶으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수천 년 전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상에서 완성되었네. 지금 자네가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다만 무릎 꿇고 그리스도께서 자네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네.”

부흥사의 이 말에 청년은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구원의 문제에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할 일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대가를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회복된 믿음 - 사랑이면 족하다!

십자가의 사건이 가장 명확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일이 바로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알지만 우리에게 오늘 부활의 사건이 다시 반복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에 감격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우리의 굳은 모습 때문입니다.

 

굳은 마음은 우리 신앙에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굳은 마음이 우리의 신앙에서 작동하는 순간 감동은 사라지고 노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노력으로 갚으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십자가로 족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수년 전 코스타에 참여해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 늘 이런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주시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나의 꿈이다!”

언제부터인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이 공허하기 들리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인가 그 사랑을 내가 그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십자가를 위해 내가 보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시나요?

그 순간부터 십자가는 은혜사랑이 아니고 끊임없는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만 보며 무겁게 느껴집니다. 십자가를 보면 언젠가부터 부담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아니, 나를 향한 십자가가 이제는 믿어지지도 않게 되지요.

 

기도를 예로 들어볼까요?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많은 응답을 바라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지요.

마태복음 7장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말씀이지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는 이루어지는 기도보다는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를 더 많이 경험합니다.

아니 어떤 아이는 심지어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아요. 제가 기도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아니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또 이런 것이 있지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일, 내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면 꼭 그 팀이 지는 것 같아서 응원하기가 겁이 납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일이 우리 책임이며 이런 것 때문에 부담을 가져야 하나요?

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그분을 즐기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주 간단하고도 중요한 원리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 기도만 하고, 우리 요구사항만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기도를 통해 교제하고 싶으신데, 우리는 일방적인 요구를 기도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한번 상상해 보셨어요?

이런 기도를 하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기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얼마나 지루하실까? 그저 내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하고 일어나는 기도를 말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 우리의 모습을 말입니다.

 

사실 마태복음 7장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11절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말씀의 중심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인간의 노력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자식이 구하지 않는다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 그것은 부모로서의 사랑이 없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그 순간에도 그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기대가 그대로 남아 있지요. 이것이 아주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 사건에서 그런 부모의 마음이 이미 그대로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에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마태복음 6장에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지요.

염려는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 우리가 쉼 없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까?

이방인들은 아버지가 없는 자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며,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 염려가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염려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염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미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것이지요.

 

명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하는 기도란 노동이 되지 않을까요?

노동이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참고 인내하는 시간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교제 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죠.

 

그렇습니다. 기도하기 때문에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시간에 이미 우리는 염려를 넘어선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데,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자책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그때, 제가 40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했는데 안 들어 주셨던 것 기억하시죠?”

그래 바로 그때 일을 나도 기억한다!”

하나님! 그런데 왜 그때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나요?”

그래 나도 그때 일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단다. 하루만 더 기도했으면 들어 주었을 것을 네가 40일을 하고 말았구나!”

우리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실까요?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믿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요한복음 21장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니?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옛 사람과 삶을 생각나게 하는 질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생각나도록 세 번을 물으시며 과거를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먼저 감동하세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잖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니?”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십시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십자가가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고, 십자가가 수치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러운 이유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이고, 수치스러운 이유는 십자가가 아직 패배의 상징이기 때문이지요.

남자들이 그렇게 하고 또 해도 군대 이야기를 즐기는 이유는 군 생활을 잘 마쳤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과장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겨 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로 족한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즐기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억울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렸지만, 오히려 내가 세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로 인해 모든 사망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모든 것을 이긴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란?십자가를 지지 않고 쉽게 살아가는 삶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결코 이길 수 없고, 견딜 수 없었던 삶의 승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가려는 어떤 시도나 신앙의 길이 있다면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족한 길입니다.

 

자 다시 본문의 말씀을 한 번 확증합시다.

십자가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증하시고, 그 사랑을 믿으십니까?

누구든지 그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사랑하지 않아도 천국에 갑니까? 아니면 못갑니까?

 

십자가의 사랑을 자랑하며 산다는 것은, 그 사랑을 우리 삶에서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요?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 삶에서 그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교회에서 정말 마음 놓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를 믿으면 마음 놓고 싸울 용기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에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723절을 보세요.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믿었는데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는 믿었는데 거짓으로 잘못 믿었다는 말입니다.

 

요한 1310절을 보세요.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거짓말입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보세요.

성경이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용서와 사랑이 축복이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를 담임하고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셨답니다. 목회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탈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너 왜 이렇게 애를 쓰니, 교회 부흥을 시키고 교회 사역을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물었답니다.

하나님! 그럼 저는 무엇을 하나요?”

그랬더니 이렇게 응답을 주시더랍니다.

너는 그저 사랑만 해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더랍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는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구나!’

 

고든 맥도날드가 쓴 [영적 성장의 길]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싱가포르 항공기 비행기 좌석을 구하지 못해 홍콩에서 발이 묶인 채 기다려야 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몇 시간째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항공사 직원을 찾아가 항의를 합니다. 입에 다물 수 없는 욕들이 오갑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손에는 항공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랑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합니다.

"비결을 말씀드리죠. 나는 카운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다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좌석을 내놓지 않으면 다시는 이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티켓을 자랑하고는 선생님도 가서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나도 그 항공사 직원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정말 치사하고 야비하게 굴면 탑승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무시하고 욕설을 해대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좀 도와주시겠어요?"

 

물론, 그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고, 나는 홍콩에서 하루 반을 더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숙한 인격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격을 가지려는 이유는 득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고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것이며, 마지막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부활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에게 물으시는 그 물음과 우리를 향한 확증!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너는 나를 사랑하니?”라는 물음 앞에 삶을 드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 앞에서 우리 인격과 삶을 통해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에서 오늘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가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늘 그 십자가 앞에서, 그 부활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삶의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몇 년 전 여러분에게 조금은 충격적인 설교 내용을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미국에 한 유명한 목사님의 이야기 말입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New Life ChurchTed Haggard 목사님의 성적인 scandal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어떻게 회복시키셨는지 Overcome이라는 찬양과 함께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2009128일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Haggard 목사님부시 대통령과 거의 매주 만나 조언을 해주었던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던 복음주의자요, 그의 설교를 듣는 시청자가 3천만 명이 넘었기에 그가 지난 3년 동안 마약을 하고 남자를 돈으로 사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엄청나게 큰 사건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목사님,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던 목사님이 어떻게 그 시련을 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다섯 명의 자녀와 아내가 남편과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회복되었는지를 밝히는 방송이었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 동성연애에 대하여 강단에서 강하게 잘못되었다고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동성연애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는 잘못된 관계들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마치 내가 이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실제로 이혼이 있는 것처럼.”

 

Ted는 그의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이제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에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증오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위대한 인물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무섭게 노력해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 없었던 그 일에 대하여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단지 나에게는 아직 그런 죄를 지을 상황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고, 나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Ted 목사님의 일이 발각되기 전, 그가 한밤중에 성전을 찾아가 처절하게 부르짖고 기도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멸로 이르게 될 텐데.”

그런데 그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었던 패배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님을 찾으려 했을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제 가장 낮은 자인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알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패배와 실패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날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무너짐을 통해 그분이 찾아오신 그 사랑 때문에, 나도 누구를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음을 고백하는 순간,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도 그 사랑을 믿고 살아갑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 그저 사랑하는 일이라면, 오늘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저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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