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시작된 기적(요11장17-44)
성경본문:요한복음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 죽음 앞에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는 보편적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죠. 그리고 인간들이 철저하게 이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기적, 그리고 오늘의 신앙적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그런 상황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본문 36~37절입니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보편적 죽음의 문제를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혹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경험합니다.
죽음을 타자의 일로 만나는 경우는 주로 사회적인 이슈로 매스컴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혹은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죽음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같은 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아픈 죽음의 기억입니다. 특히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의해 희생된 ‘강남역 10번 출구’로 기억되는 연약한 여성의 이유 없는 죽음 역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커다란 아픔, 커다란 사건.
또한, 우리 교인들에게는 매주 빠짐없이 접하는 ‘부고’가 있습니다.
저도 참 많은 장례식에 가 보지만 고인의 영정 앞에서 잠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내내 유족들이 경험하는 감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문하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만 뺀다면 죽음과 관계없는 표정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자신과 직접 관계된 일이라면 죽음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특별한 아픔의 기억과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이 아픔은 ‘상실의 고통’일 뿐 아니라, 무력함에 대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피해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분노’의 이유는 아닐까요?
이제 자명한 것은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죽음 앞에 선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가장 큰 기적의 사건입니다.
항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던 죽음 중의 하나가 이어령 박사의 딸 이민아 목사의 죽음입니다.
정작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를 통해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를 신앙으로 이끌었지만, 신앙을 가진 아버지가 경험해야 했던 사랑하는 딸의 죽음 이야기죠.
그런데 그 죽음 역시 한 아버지가 경험했던 사랑하는 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건입니다.
세상이 아파하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2012년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린 이어령 박사의 마음입니다.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 ‘성서 스토리텔링’ 대담에 나선 이어령 박사가 전하는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현실의 부재입니다. 사랑하는 손자와 딸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고 아픔입니다.
옛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마음속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내 딸로서만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믿는 많은 형제자매, 같은 크리스천들이 저보다 많이 애도해 주시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조사도 쓰시고 그렇게 떠났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데 굉장한 위안이 돼 지금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육체를 떠나면, 오히려 죽음이 그 아픔을 치유하고 하나님 곁에 가는 거니 오히려 축복 아니냐는 말씀을 크리스천들이 가끔 하시는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참 슬픈 것입니다.
오늘 베다니에서 일어난 기적의 사건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어도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더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는 상실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격렬하게 슬퍼하며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인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모습 역시 당연합니다.
슬픈 것은 슬픈 겁니다.
이어령 박사는 대담에서 가장 마음 아픈 일 중의 하나가 ‘핸드폰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딸의 단축번호를 누르면 언제나 통화가 됐는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되고, ‘아빠 아파’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더는 전화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상적인 이어령 씨의 말입니다.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딸이 휴대전화 번호에 저장되어 있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그것이 죽음”이라며 “아무리 떼를 써도 되지 않는, 이 죽음에서부터 종교는 시작된다.”
바로 이런 인간이 실존 앞에서, 오늘 본문은 ‘죽음’이라는 사건만을 놓고 보았을 때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고, 또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 때때로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시간과 장소 가운데 참 아쉬운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데,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계시지 않은 것 때문에 참 아쉽습니다.
마르다는 본문 21~22절에서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지만 이 무엇이든지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말로는 주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마르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요. 23절과 24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그렇게 원했던 일이 제 오라비가 사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늦게 오셨습니다. 실망스럽지만, 주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주님은 그녀의 기대대로 오라비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지만 마르다는 믿지 않습니다.
아니, 마음이 가려져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한번 우리의 눈이 가려지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관계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마르다가 듣는 말이 달라집니다.
“현실과 영광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든 기적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들은 절망의 끝에서 문을 닫습니다. 더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죠.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 모든 이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무덤이 돌로 막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에서 소망의 문을 여시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냄새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심으로 지금 이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러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예수님의 관점 사이에서의 괴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인간의 현실이 절망이라면, 예수님의 관점은 ‘영광’이었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치유의 기적’이라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부활의 기적’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문제는 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늦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때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무지한가요?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아프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잘 계산해 보세요. 예수님이 거하시던 곳과 베다니는 하루쯤 걸리는 거리고, 요한복음 11장 6절에 보니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틀을 유하시고 하루 걸려 오셨는데,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죽은 다음입니다.
시간에 쫓기거나 구애를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계시죠.
꼭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급하다고 안달하지만, 무관심한 듯 신경 쓰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 말입니다.
느긋한 주님의 시간표는 이미 의학적으로 ‘절망’조차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본문 21절에서,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본문 32절에서 마리아는,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 과거의 사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은 ‘지금’에 머물러 있습니다. 25~26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과거의 절망이 아닌, 지금 부활의 주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장소’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오시기 전 그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때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집에 찾아와 위문하고 있었습니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제 마리아도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뵙습니다.
그녀에게는 참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비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마리아가 나갈 때, 오라비의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30~31절을 보세요.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저는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파서 앓던 장소에도, 그가 죽어 묻힌 장소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의 앓던 장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쉽고, 위문하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직’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신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적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이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무덤으로 향하십니다.
하지만 기적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장소와 시간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나고, 통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생명’의 언어를 말씀하십니다. 23절에서 ‘살아나리라’ 25절에는 ‘생명’, ‘부활’, ‘살겠고’ 26절에는 ‘살아서’, ‘죽지 아니하리니’
부정의 언어와 긍정의 언어가 아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나요?
죽음 앞에서: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차이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죽음과 친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과 친해진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의 사망 권세를 물리치신 주님과 함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여인이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계속해서 마르다는 ‘안다’라는 말을 사용하자, 예수님께서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무덤 앞에서 오간 대화에 다시 집중해 보기 바랍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마르다가 믿는다고 고백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분명히 부활을 믿는다고 했는데, 죽어서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고 성경도 읽는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환자와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고치시기로, 그리고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소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암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리시기 원하시면 살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암으로 죽어가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 조용기 목사님과 옥한음 목사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낫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죠.
조 목사님은 본인의 믿음대로 파킨슨병으로 고생할 때 기도하며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옥 목사님은 죽음의 그 순간까지 영광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믿음의 영웅인 것을 우리가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믿음도,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안다는 지적인 동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만 믿는다는 확신은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마르다 사이에 오갔던 ‘살리심’의 관점이 달랐던 것도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음을 이긴 자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 말씀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나사로를 살리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5~26절을 보세요.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는 또 죽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한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통해서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들이 드리워진 세상에서 두려움에 떨고, 소망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희망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어둠 가운데 소망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돌문을 막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절망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큰소리’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큰소리는 이 세상의 죄악과 악한 세력에 대하여 물리치시는 신적인 권위의 상징입니다.
누가복음 4장과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실 때 귀신이 쫓겨나갔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실 때 병이 떠나갔으며,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실 때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큰소리는 항상 사망의 세력에 대한 완벽한 최후의 공격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누워 있는 무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오늘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드디어 걸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사망의 문은 단숨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사망의 큰 권세 앞에서 절망하던 수많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믿음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44절에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으며 일어나는 영광스러운 삶에 대한 선포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헨리 나우웬이 쓴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라는 책에 보면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서 죽음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우웬은 비유로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모태 안에 남녀 쌍둥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나는 출생 후의 삶이 있다고 믿어.”
그러자 남자아이가 극렬히 반대합니다.
“아니, 이게 전부야, 여기가 아늑하고 좋아, 우린 밥줄인 탯줄에 매달려 있기만 하면 되잖아.”
여자 아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어두운 곳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만 해, 뭔가 다른 것, 움직일 자유가 있는 밝은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여자아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합니다.
“할 말이 더 있어. 넌 이것도 믿지 않겠지만,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남자 아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엄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엄마를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잖아. 누가 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넣은 거지?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한텐 이곳이 전부야, 넌 왜 항상 그 이상을 원하니? 여기가 그다지 나쁜 데는 아니잖아, 필요한 건 다 있어,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하자.”
한참을 지나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다시 말을 합니다.
“가끔 이 안이 꽉 조여 오는 게 느껴지지 않아? 꽤 거북하고 어떨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하잖아.”
남자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여자아이가 말합니다.
“난 이 조여 오는 것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여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말이야. 넌 가슴이 설레지도 않니?”
이 이야기를 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태속에서 나오면 모든 것이 끝나는 두려움으로 여긴다면, 우리 이생의 삶이 참 두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세상과 참 자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면, 이 어머니의 태속과 같은 세상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으리라는 것,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절망이지만, 준비된 죽음은 영광과 소망이 아닐까요?
우리는 애써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 죽음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코프 뵈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기 전에 미리 죽지 않는 자는 죽을 때 망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죽음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우울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임과 우리를 향한 예비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빠른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은 아닐까요?
모든 사람이 후회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서 왜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왜 내가 용서받지 못했을까?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먼저 경험하고 죽음과 친해지는 순간, 우리의 삶이 단순해지고 명쾌해질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오던 우리의 삶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안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안전하단다. 내가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는 나에게 속하였고, 나는 너에게 속하였단다. 네 앞에 많은 성도도 이처럼 살았단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교통하게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리 주님이 커다랗게 외치셨던 이유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을 풀어 주어라!”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죽음 가운데 있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 확신하며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적으로 충만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욕심과 어둠, 절망과 유혹에서부터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살아 숨 쉬고 있으나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천 조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 내려보고, 세상을 얻기 위해 마귀에게 절하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행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다니에서 일어났던 기적의 핵심은, 나사로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눈물과 죽음을 향한 꾸짖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그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아이가 된다는 의미.
어린아이의 특징은 ‘의존’입니다. 부모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어 늙어 가면 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그렇게 의존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절대 의존’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손길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노라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주님은 ‘바로 여기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이 기적의 시작이고,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현장입니다.
1892년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한 민로아 선교사 부부는 자녀가 없어 고민하였는데 입국 6년 만에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첫아들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양화진(선교사들의 묘지)에 묻고, 3년 뒤 아픔이 아물어갈 때쯤 둘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1902년 3월 7일 드디어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루 만에 이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1년 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
그들의 물음에 선교사는 대답 대신 찬송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원망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노래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