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된 자에게 복음을(눅 4장18-19)
성경본문:누가복음 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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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에 생각하기
페리 노블이 쓴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이 둘은 그 날 아침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걷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정보를 입수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의 대화 속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바삐 걸어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가 조금은 성가시지 않았을까요?
페리 노블의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소 귀찮게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바삐’ 어딘가로 가는 일인데 웬 낯선 사람이 자꾸만 말을 거니 말이다.
십중팔구 당신도 ‘바쁜’ 사람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다 바쁘니까 말이다. 나는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점심 및 저녁 약속과 온갖 행사, 예기치 못한 응급 상황까지 합치면 남는 시간 따위는 없다.
사탄이 선호하는 작전은 우리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쁘면 결국 나빠지기 때문이다. 바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뭔가를 할 시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너무 서두르고 자신의 일정에 온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알아보지 못했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단순히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아직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면 이따금 삶에 제동을 걸어야만 한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강절에 가장 적절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저에게 지난 몇 주 동안 있었던 예기치 못한 휴식의 시간,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제가 할 수 있었던 일보다 더 귀한 일을 생각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바쁜 시즌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이번 대강절은 잠시 삶의 ‘작전타임’의 시간이 되면 좋을 듯합니다. ‘작전타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위해 잠시 우리의 인생 경기를 멈추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대강절’이라는 말이 생소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강절에서부터 교회력이 시작하는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대강절’이라는 말은 ‘adventus’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그것은 ‘옴’ ‘도착’이라는 뜻입니다.
‘advent’ 가 ‘~에서 오다’ ‘내려오다’라는 뜻으로, 중요한 인물의 출현, 도래 등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가 말해주듯이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지키게 된 것은 A. D. 4세기경으로 추측되며, 오늘날의 대강절은 4주간에 걸쳐 네 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이는 그레고리 1세 때(A. D. 590년경) 정하여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4주를 지나고 나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대강절이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2023년 대강절을 준비하며 어떤 의미로 크리스마스를 맞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준비하다 오늘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4장 16~17절과 연결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그렇게 이사야에서 예언된 부분을 예수님 스스로 읽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4주간 묵상하며 가장 의미 있는 대강절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사야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39장까지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예언과 40~66장까지는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불림을 받은 이사야는 약 50년간 활동하며 가장 비참한 유대의 상황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앗수르와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때도 경험했고,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앗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을 당하며 유다의 존폐가 달린 일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고난의 시기에 유다는, 가난한 자였고, 억눌린 자였고, 눈먼 자였으며, 포로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가장 비참했던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암울했던 유대 땅에서 이사야의 말씀이 전해졌고, 이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만을 바라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고 그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종종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한 의지로 창조하셨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선한 세상에서 우리가 ‘악’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악’을 존재가 아닌 비존재로 혹은 선의 결핍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선한 영역이 줄어들면 악한 영역이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데 이렇게 큰 재앙이 일어날까요? 혹 어떤 이들은 믿음이 좋아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위로하기도 하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신다면 지금 당신이 당하는 고통과 재앙에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바로 이 말 때문에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문창극 씨가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역사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일제의 강점기도, 남과 북의 분단도, 6?25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문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고백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쉽게 인용하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조차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선용하시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극적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과 재앙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 사건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 악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악한 일을 통해 우리가 당하는 재앙 앞에서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도 아니지만, 그런 시련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저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 초창기 이 땅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글을 보면서 너무 쉽게 식민지 사관에 입각한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이 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의 눈에 양반과 관리들이 당리당략으로 인해 나라를 돌보지 않고 피폐해 가던 가난한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어떠했을까요?
서구 열강과 일본, 중국, 러시아에 짓밟히는 민중을 외면하는 관리들과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땅에서 삶을 체념해 버린 민중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 말입니다.
적어도 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던 그들의 눈에 희망은 복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체념을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기를 원했던 복음의 열정 말입니다.
선교사들은 희망이 없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깨워 배우도록 했고,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이 땅의 여자들도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역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잠자는 나라 조선 땅에서 가난을 딛고 부요케 하시리라는 믿음을 심어줬습니다.
가장 천대받던 백정도 공부를 하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아니라 먼저 배운 자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해방의 기쁨은 세계열강의 싸움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념적 지배를 받아야 했고, 이념의 싸움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 민족의 암울한 역사 가운데서도 골짜기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나라를 세워주셨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당시 권력에 눈이 먼 지도자들 때문에 축복이 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재앙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를 축복으로 받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 민족을 놓지 않으시고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제 이 민족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며 이렇게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곳곳에 엄청난 건물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이 땅의 문제와 구조적인 모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입니다.
분단된 이 민족의 남쪽에서 또 다시 보수와 진보로, 지역감정으로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악한 일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좋은 예화가 될 듯합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한 영화 [작은 전쟁]의 한 장면에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이 나온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 용사였던 한 사람이 광산 사고를 당한 친구를 구하려다 죽었을 때 그의 아내가 아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은 아빠를 그분의 곁에 두기 원하셨던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맞아요, 하지만 내가 아빠를 더 원해요.”
이 아이의 엄마가 한 말보다 차라리 “이 망할 것, 사망아!”라고 말한 시카고 장례식장의 목사 같은 반응이 더 낫고, 신학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극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나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실까?”라고 생각해 본다.
대강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나요?” “하나님은 왜 가만 계시나요?”를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를 물어야 합니다.
아마도 오늘 말씀은 우리 인류가 안는 보편적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인류가 안는 가난의 문제, 억압의 문제, 질병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답해야 합니다.
보편적 고통의 문제들
오늘 말씀에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주 명백하죠?
가난은 우리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복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가난 가운데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가난은 우리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가난 자체가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온갖 죄악으로 인해 악이 성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무엇일까요?
죽음과 슬픔과 고통과 가난의 모든 억압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거나,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너무나 쉽게 던졌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이런 설교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장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나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이분의 죽음은 그만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지금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해답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그렇게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잘못된 상황과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선을 만들어 가시는 손길을 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죽음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큰 사고를 당하고 주변의 많은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신앙적이고 잔인한 말은 없는 듯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당신만 보호해 주시고 다른 사람은 보호해 주시지 않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도 누군가의 잘못으로 희생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테러로 WTC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신실한 신앙인들도 수없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악한 일을 저지른 것이죠.
버스가 전복되어 대형사고로 누군가 죽었다면, 상대방 차량의 과실이거나 운전사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잘못된 결과입니다.
예수님도 악한 로마 병정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그런 죽음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죽음이 아프고 힘든 것이지만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믿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죽음은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음의 축복이 아니라 부활의 축복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만일 누군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면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함께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가진 보편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간 제가 많은 교인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많은 교인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던 그 시간이 그렇게 위험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심장 스텐트 시술은 아주 보편화 되었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은 시술하기 전 심장 CT 결과를 보고 놀랐습니다. 조금은 위험하게 막혀 있어서 시간을 미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문제가 생겼다면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지체하지 않고 시술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국에서 머리가 너무 아파 응급실에 갔지만,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스케줄을 취소하고 한국에 돌아온 일, 공항에서 바로 병원으로 가 입원하고 진통제를 맞으며 며칠을 지내고 검사했지만, 이상을 찾을 수 없었던 일,
그리고 우연히 교인이기에 제 방에 들른 우리 교회 교인을 통해 심장을 한번 찍어보자는 권면, 하지만 저는 스스로 너무나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했기에 다음을 약속하고 그냥 퇴원했던 일,
그렇지만 계속되는 통증으로 인해 검사를 받게 되었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너무나 드라마처럼 모든 상황을 만드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고, 시술도 잘 됐고, 앞으로 몸 관리도 잘하라고.
분명히 저와 저를 생각하는 사람, 제 가족들에게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저와 같은 처지에서 병을 발견하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 교인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아픈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요?
저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은혜임과 동시에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죽음을 이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슬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도 역시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일 저녁 제 아내가 같이 심방했으면 하는 교인들의 이름을 이야기합니다.
너무 힘든 가정 형편으로, 자식을 먼저 세상으로 보내고 대신 키우던 손자를 빼앗겨 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했지만 더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장로님과 권사님, 어떤 분은 병원에서도 이제는 받아줄 수 없노라고, 어떤 분은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민간요법에 의지해 보겠다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신 이유는 그 모든 아픔과 고통 가운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으로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자유’라는 말로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진리의 영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비 진리를 멸하실 것입니다. 아니 끝까지 비 진리로 인해 억압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아마도 모든 나라의 가장 축복할 만한 날이 “자유를 얻은 날”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을 기념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전승기념일을 성대하게 지킵니다. 미국에서도 매년 7월 4일이 되면 독립기념일로 지킵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 (Ancien Regime)을 무너지게 하는 시민 혁명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4가지 자유, “four essential human freedoms”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1) 첫째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입니다.
2) 둘째는 신앙의 자유입니다. “freedom of every person to worship God.”
3) 셋째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경제적 자유를 말합니다.
“freedom from want” 사실 절대 빈곤에 빠진 사람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사는 나라는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야 합니다.
4)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freedom from fear”
이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억압의 문제가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 모든 억압이 우리를 억누르는 욕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억압의 사슬을 푸셨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가난은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욕심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예레미야 기자는 17장 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 사용해야 할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변하여, 이제는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져버린 이 세상은 불평등과 가난 그리고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데이비드 레터맨 (David Michael Letterman)의 연봉이 공립학교 교사의 연봉보다 70배나 많은 것이 정당한 일인가?” 레터맨은 CBS의 미국의 심야 토크 쇼인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사실 얼마 전 일본에서 샌델의 강의가 어느 극장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때에 수많은 사람이 많이 모여서 입장 ticket이 금방 매진되었습니다.
그래서 암표가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샌델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암표를 사서 이곳에 들어와 정의에 대하여 강의를 듣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샌델이 중국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샌델이 중국의 칭화대와 푸단대에서 강연할 때에는 이런 사례를 갖고 학생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폭설 후 눈을 치우는 삽의 가격을 올리는 것이 정당한가?”
마이클 샌델의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정의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타락한 우리의 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죠.
만나 교회의 슬로건은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입니다.
교회의 건물이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 세상 속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복음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포로 된 자가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난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비하하는 자기 학대의 억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학대당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필연적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비 진리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사회 변혁이 일어났던 이유입니다. 만일 복음이 있는 곳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복음이 역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대강절이 왜 우리에게 기대될까요?
주님이 오시면 강력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자유케 하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유함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결박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는 이야기리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조류학자가 사람의 노래를 잘 따라 부르는 앵무새 새끼 한 마리를 새장에 넣어 놓고 말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습니다.
“Good Morning. How are you? I love you.” 등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많이 배우고 난 후에, 그 앵무새가 가장 먼저 한 말이 “Give me freedom.”
주인이 앵무새를 아끼고, 먹을 것을 잘 주고 사랑으로 키웠지만, 그러나 새가 가장 원했던 것은 새장에서 풀려나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모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어떤 분이 저에게 카톡 메시지로 이런 글을 보냈습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이고
두 번째가 남의 돈을 내 주머니에 넣는 일이다.
첫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두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어려운 두 가지 일을 한 방에 다하는 사람을 “마누라”라 부른다.
그러므로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은 배우기 싫은 것이고,사장님에게 대드는 것은 돈 벌기 싫은 것이고,마누라에게 대드는 것은 살기 싫다는 것이다.
왜 이 땅의 많은 남편이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마도 자신이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모든 남자를 미치게 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벤트를 아내에게 해주는 사람들 말이죠.
만일 그 일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삼는 이유는 억압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자유를 자유롭게 사용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혹시 [빠삐용]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명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주인공 빠삐용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극한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입니다.
탈출의 이유는 너무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빠삐용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검사에게 보복하기 위해 수없이 탈옥을 감행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호의 탈출 기회를 맞게 된 빠삐용에게 드가라는 친구가 말합니다.
“이 섬에서 탈출하더라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증오가 가득 차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빠삐용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영화는 끝이 나지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끝났지만, 뒷이야기가 있다고 하죠?
남미로 가서 돈을 번 빠삐용은 검사를 찾아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합니다. 빠삐용은 친구 드가의 말처럼 자유로운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검사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살아갑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 빠삐용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 들어가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던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가득 차 있던 원한과 울분과 복수심이 사라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빠삐용은 “주님, 그를 용서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하며 비로소 참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빠삐용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포로로 삼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포로됨”을 이렇게 정의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우리의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가난의 포로가 되면 우리는 늘 곤고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세상의 물질이 우리를 얼마든지 가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난함의 포로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 가난에서 자유함을 얻을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모건 프리먼이라는 유명한 흑인 배우가 있습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여줬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 <브루스 올마이티>, <버킷 리스트>.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전설적인 배우입니다.
어느 날 그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XXX”라는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건 프리먼의 반응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무반응!
인터뷰하는 기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고 저 사람의 문제입니다. 난 그런 존재가 아니므로 저 사람의 말에 상관할 필요가 없죠.”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무엇을 생각하게 하나요?
흑인이라는 사실이 더는 그를 포로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모건 프리먼이 처음 데뷔한 해가 1964년입니다.
마틴 루터 킹목사가 암살당한 해가 1968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인종차별이 심한 때 그가 활동을 시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건 프리먼이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았을까? “자유함”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가진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지만,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그의 삶 가운데 주의 은혜가 임하므로 자유함을 고백한 것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나요?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무서운 억압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내면의 감옥에 자기를 가두어 둔 사람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내면의 감옥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사슬을 잘라버리시는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를 주의 이름으로 풀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