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여라(마 5장38-42)
성경본문: 마태복음 5:38-4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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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산상수훈 말씀을 묵상하며 특징적인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화법이죠. 산상수훈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상식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늘나라의 법을 따라야 할 새로운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모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소망은 빨리 시집가서 집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보다 고통이 훨씬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신앙이 깊어져서 성령님이 그 고통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출타하고 사모님이 잠깐 외출했을 때 시어머니가 냉장고에서 1000mL 우유를 꺼내 다 마시고 설사를 했습니다.
사모님이 집에 와 보니까 시어머니가 온통 오물에 범벅이 되어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모님의 입에서 짜증 대신에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 찬송을 하며 종일 오물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 몸은 힘들었지만, 성령님이 시어머니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산상수훈은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전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크게 두 개의 대지로 나눠봤습니다.
하나는 “원수를 대하는 태도” 다른 하나는, “무리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복수!’
오늘 본문 38절을 읽으며 떠오르는 단어가 아닐까요?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율법에서 규정한 것이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복수’로 이해한다면 율법을 조금 오해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주제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복수’입니다.
사실 많은 영화 중의 중요한 모티브도 복수극이지요. 어쩌면 복수에 대하여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논리, 그리고 악인이 심판받는다는 사필귀정의 원리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복수는 절대로 그냥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복수 역시 누군가에게 받은 원한을 갚는 것이라면, ‘복수’는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됩니다. 더욱이 복수한 자들이 안고 살아야 심적 부담과 죄의식 역시 복수의 후유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율법은 이렇게 통쾌한 복수를 하라고 규정한 법이 아닙니다. 당시 근동지방의 법이 소위 발하는 ‘보복법’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조폭 영화의 보복의 사슬 같은 것이죠.
폭력에 의한 보복은 절대로 만족과 해결이 없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 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본래의 정신은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법은 개인들에게 행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이 법은 한 대 맞은 사람에게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법이 아니라 개인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정당하게 보상하도록 한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도 하소연할 곳 없이 그대로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다.
절대 보복을 용납하거나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법을 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잘못 사용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준 이 법이 본래의 의도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법으로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강자의 처지에서는 그냥 잊고 용서해주라는 말입니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고아와 과부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무력감이나 피해의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식의 피해자로 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수를 포기함으로써 용서와 사랑을 실천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복수를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가치가 훼손된 것은 어떻게 하지요?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사도 바울 역시 복수는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밸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밸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제목의 어떤 목사님의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아직 목회자가 되기 전 남편은 사업을 하고 있었고 거래하던 대리점 사장이 부도를 내고 도망가 3억을 손해 보게 되었답니다. 그 절망의 나락에서 남편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삶의 절망의 나락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남편을 생각하게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주님!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 저는 따뜻한 집도 있어요. 저에게는 아직 너무 많아요.
주님이 분을 품고 잠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매일 밤 분을 품었어요.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을 벗어 주라 하셨는데,저는 그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어떻게 다시 빼앗아 오나 매일 궁리했어요.
매시간 그를 저주하고 미워했어요. 그러나 이젠 됐어요. 남편을 예수 믿게 해준 것으로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이튿날 우리 매장 근처 다방에서 대리점 사장을 만났다.
그 또한 우리에게 빚진 죄인이어서 초췌한 얼굴을 깊이 숙이고 교도소로 가는 것이 편하니 어서 보내 달라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3억의 부도 수표를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찢었다.
“3억의 부도 수표에서 자유하세요. 당신은 우리에게 빚이 없어요. 이 돈이 당신에게 빚이었다고 생각되거든 나중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갚으세요. 우리는 하나님께 이 돈을 받았으니 당신은 하나님께 갚으세요.”
그때까지 나는 몰랐다.
주님께서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주님은 그 사람을 3억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부부를 3억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이었다.
무리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태도
오늘 본문 39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몇 가지의 주제로 나뉩니다. 모두가 무리한 일들, 혹은 억울한 일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제시합니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결국,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방법은 하나입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나서서 베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강도 만난 기분으로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국, 줄 것인데도 잔소리를 하면서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빼앗기지 말고 기분 좋게 주십시오.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 했으니 더 얹어서 넉넉히 주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주며’ 그랬으니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주십시오.
이왕 줄 것이면 빼앗기지 말고 주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39절)
유대 랍비의 가르침에 보면 뺨을 때리는 것은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모욕을 받았을 때, 복수나 분노로 대하지 말고 왼편 뺨까지 돌려댈 만큼 여유로 대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유심히 보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른뺨을 때리려면 어떤 손을 써야 할까요? “상대방의 왼손”이죠? 그러면 때리는 사람이 왜 왼손으로 때릴까요? 불편한데.
‘오른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오른손 등’으로 때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한 뺨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의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중상과 모략입니다. 그때 참을 수 없어서 우리의 분노를 표출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저 누구에게 변명하려고 얼굴이 새파래져 되어 흥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냐고!” 그렇게 넘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 억울한 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억울함이라는 것이 누구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고, 나 자신이 절대로 기준이 될 수 없다면, 그렇게 모욕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식.
☛둘째,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이 말씀은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통으로 짠 속옷과 길이가 약 2미터 폭이 약 1미터 쯤 되는 모포형의 ‘히마티온’이라는 겉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속옷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지고 있던 옷이고, 겉옷은 낮에는 옷으로 걸치고, 밤에는 모포처럼 깔고 자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속옷은 빚값으로 빼앗아도 되지만, 겉옷은 빼앗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 보면,“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즉 겉옷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권리, 마치 집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듯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겉옷을 내어주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까지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최소한의 권리,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도 포기하라는 말이죠.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어떤 말이 떠오르시나요?
“바보같이!”
우리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권리조차도 주장하지 마라!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감동을 주는 말은 사랑하는 이에게 듣는 이런 말이 아닐까요? “너만 믿어준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난 견딜 수 있어.”
☛셋째,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1절)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지쳐서 십자가를 질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로마병정 중의 하나가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라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재수 없는 일인가요?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창을 들이대고 가자고 하면 가야 합니다. 짐을 운반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힘을 가지고 우리를 누르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할 때, 분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십 리를 가라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원수는 때로 축복의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사모님의 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양주군 신암리는 제가 군목으로 근무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초년병시절 아들을 면회하러 군에 갔습니다.
씩씩하게 보이던 아들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사실은 저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요. 저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상관이 저를 얼마나 못살게 구는 지 한 번 붙고 말 거예요.
매일 연병장을 뛰고 자기에게 와서 보고한 뒤 밥을 먹으래요.
제가 천식이 있어서 아침 일찍 뛰는 것이 고통스럽고 다 뛰고 가면 시간이 끝나서 밥을 못 먹어요.”
아픔 마음에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상관이 아무래도 자기가 졸병일 때에 비해 네가 편해 보여서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연병장을 더 잘 돌아라. 괴로워하며 억지로 돌지 말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돌아라. 다 돌거든 상관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많은 사람 중에 너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고마운 것이 아니냐.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잖니?”
그러던 어느 날 아들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에서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날로 단번에 끝장을 낼 생각마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 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구보 때는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다 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관을 통하여 저의 지병인 천식을 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상관이 매우 고마워서 고맙다고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저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할렐루야!’ 소리쳐 보내 드립니다. 어머니! 제 목소리 들리면 기뻐해 주세요.
본문 41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와 “억지로 …가게 하거든”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함께 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문맥상 “억지로 …가게 하거든” 다음에 생략된 말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제 생각에는 “기꺼이 혹은 기쁨으로”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다른 기준입니다.
이왕 내가 견뎌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합시다.
☛넷째,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절)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누가 너를 억울하게 이용하거든,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아라. 똑같이 갚아 주는 것은 이제 그만하여라. 너그럽게 살아라.”
권석 PD가 쓴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라는 책에 보면 연예계의 재미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세밑의 방송국은 유난히 바쁘다. 연말 시상식 시즌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고질병’이란 표현이 딱 맞는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손대지 못하는 명이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방속국마다 시원하게 밝힐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이젠 공공연한 비밀이 됐지만, 수상자는 자신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시상식장에 나타난다.
수상식에 대한 보안이 중요하다 해도 상 받는 사람이 없는 시상식을 만들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에둘러 암시해 준다.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뭐 이런 식이다.
대 놓고 묻지는 못하겠고 간접적으로 확인하려는 부류도 있다. 후보가 누구누구냐고 묻는다. 명단을 불러주면 그중에서 상 받을 것 같은 유력 후보자가 참석하느냐고 다시 물어온다.
그가 참석한다면 자기 쪽이 못 받는 거란 계산이다. 결국, 경쟁 후보자가 불참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수상을 확신하고 출연을 약속한다.
그런데 시상식 당일 일이 터졌다. 배우 A가 생방송 직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작가가 매니저에게 연락해보니 방송국 근처 공원을 차로 빙빙 돌고 있단다. 그러면서 대상 수상 여부를 알려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떼쓰기 시작했다.
결국, “시상식 이후에도 저랑 좋은 얼굴로 계속 볼 거예요.” 하고 수상을 암시해주고 방송국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또 일이 생겼다. 스튜디오에 안 나타나는 거다. 배우 B가 나타난 것에 불안을 느낀 그는 대상을 못 타는 것 아니냐며 방송국 지하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마지막 광고가 끝나기 직전 배우 A가 드디어 스튜디오에 올라왔다. 물론 수상 사실을 확인받은 다음이다.
그리고는 대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도 이런 꼼수가 남아 있으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다. 그 후로 작가와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절대로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알면서도 손해 좀 봐줘라! 누군가 손해 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말이죠. 누군가 손해를 본다면 풀려질 일입니다.
위의 예화와 관계해서 유명한 김기덕 감독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칸 영화제에 작품을 내고 최종 심사를 남겨놓았는데 유명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과 함께 경쟁 부분에 올라가게 되었답니다. 최종심사 발표 전에 수상작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우회적으로 연락이 온답니다. 이번 시상식에 참석해 주세요.”
그렇게 연락을 받고 참석을 했고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객석에서 정장을 입고 자신을 축하해 주는 임권택 감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틀림없이 수상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후배를 축하해주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그렇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답니다.
“나 같았으면, 하늘 같은 선배도 존경하는 사람이 수상하는 자리도 아닌데, 내 친구와 후배를 위해 남아서 축하해 줄 수 있었을까?”
그의 삶에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는 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누군가를 원수로 삼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이웃으로 만들 것이냐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원수’와 ‘사랑’이라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먼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가 가능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상황,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절대 지치지 않고 후원해주며, 절대 믿음을 잃지 않고, 절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을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과 연관시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사랑한다면….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할 자격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초대교부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존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13장 7절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소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가치 없는 자라도 끊임없이 바로잡아주고 공급해주고 돌보아주는 것이다.”
소망을 버린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은 바라는 것이고, 원수일지라도 죄에 빠진 사람이 복음을 믿게 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어진 관계에서 회복될 것을 바랍니다. 나의 죄를 거듭 용서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끊임없는 용서의 은혜가 임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문제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드러나야 할 것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진노와 심판을 미뤄주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을 낳습니다. 사실 믿음보다 사랑이 더욱 소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뭐라 물었습니까?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믿음도 소중하지만, 더 깊은 믿음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의미가 이토록 퇴색되었습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가볍게 하고 사랑이란 이름을 빌려 잘못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개를 사랑한 주인이 우유가 좋다는 말을 듣고 개의 머리를 잡고 우유를 먹였습니다. 개가 싫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주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개의 머리를 더욱 꼭 붙잡고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유 컵이 땅에 떨어져 우유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까 개가 땅에 흩어진 우유를 핥아 먹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개가 싫어했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랑해도 방법이 틀리면 구속이 됩니다.
부모의 사랑 중에는 그런 사랑이 많습니다.
이제 바르고 현명한 사랑 법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이 있는 곳을 밝게 만드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도 달라졌고, 요한도 달라졌고, 세리와 창녀도 다 달라졌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계셨던 나사렛도 달라졌고, 갈릴리도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 예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반경을 바꾸는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