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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십자가 아래서 부활의 증인이 되다(마27:54;28:1-10)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4.01.15|조회수320 목록 댓글 0

십자가 아래서 부활의 증인이 되다(2754;281-10)

성경본문: 마태복음27:54;28:1-10

27:54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28: 1-10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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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오늘 수난의 파사드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작품이 아주 역동적입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말을 급히 세우고 있습니다. 말에 제동을 걸기 위해 고삐를 힘차게 잡고 있는 로마 군사와 급제동으로 인해 힘겹게 정지하려고 애쓰는 말의 모습니다.

그의 한 손에는 칼이 들려 있는데, 칼이 성전에 박혀 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롱기누스입니다.

로마제국의 병사였던 롱기누스는 당시 심각한 백내장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님이었다는 설도 있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순간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피가 그의 눈에 튀였고, 그의 눈이 감쪽같이 낫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한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 및 선교자로 기록됩니다. 롱기누스는 후에 카파도키아(터키)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오늘 작품을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적을 경험한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삶의 방향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급작스럽게 고삐를 당겼는지 말의 목이 틀어져 있고, 얼마나 힘 있게 고삐를 당기고 있는지 그의 몸이 들려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상징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의 칼이 파밀리아 성당 벽에 박혀 있는 모습이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전에 칼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허리에 칼을 찔렀던 그의 과거 행적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54절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어떤 이유에서든지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일들을 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 사건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확신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를 믿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렇구나!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예배를 참석하고, 선한 일과 봉사를 하고, 말씀을 듣고 읽어도 십자가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자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만남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현장과 무덤에 있던 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부활을 생각하기 전 십자가 죽음의 현장을 잠시 되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량의 차이, 그리고 관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두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도 예수님의 수난의 이야기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23-27절에 보면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먼저 롱기누스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본다면, 십자가 아래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악역을 담당했던 로마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이 일이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누구 흔쾌히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망나니들은 사람의 목을 치기 전에 술을 먹고, 총으로 사형을 시킬 때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총을 쏴서 사형을 집행해 누구 총에 맞아 죽었는지를 모르게 하고,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집행 할 때도 사형수의 눈을 보지 않도록 보자기를 씌우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 군인들 역시 명령을 받았으니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왜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때리며 수치스럽게 했을까요?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거나 양민을 학살하기 전에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일부러 이성을 잃으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두려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일들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로마 군인들이 한 일은 시편 2218절에 예언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말씀을 이루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인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찔렀던 사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3일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고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악한 짓을 하며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들도 십자가 아래서 변화를 받고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바로 그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어쩌면 로마 병정들의 변화야 말로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또 다른 두 개의 십자가에 두 명의 강도가 매달렸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왼편의 강도는 게스타이라는 사람이고 우편의 강도는 데스마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두 명의 강도를 매달았을까요?

이런 예측이 가능합니다. 가능하면 예수님을 더 모욕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요.

당연히 죽어야 하는 강도와 함께 매달려야 예수님의 죽음을 정당화 하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의도한 대로,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모욕하고 죽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이 놀아도 교회에서 놀아야 소망이 있고, 나쁜 짓을 해도 교회와 믿음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나쁜 짓을 하거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도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자꾸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하지 말고, 가능하면 십자가 아래로 인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또 다른 사람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이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그 길을 같이 걸었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그 아래에서 애통해 했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 후에도 찾아와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복되도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제가 시카고에서 공부하던 때, 마이클 조던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와서 시카고의 자랑인 불스3회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그 당시 농구장 티켓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 경기를 보기 위해 밤을 새며 텐트를 치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애플에서 아이폰 신형을 출시하면 제일 먼저 사서 사용하려고 밤새 줄을 서서 매장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정도의 수고와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십자가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으로 가슴을 쥐어짰던 사람들.

그러고 보니 그 여인들은 다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인생이 변화됐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구나!

십자가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구나! 그 감격을 지니고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구나!

여인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죠. 주님으로 인해 고침을 받았던 여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베로니카는 열 두해를 혈루병으로 앓았던 여인이라고 전해 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하도 많아 누군지 명확하지 않지만, 향유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도 그들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5절 말씀.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겠다고 예언했지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켰던 바로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일하게 그 자리를 지켰던 제자 사도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끝까지 지켰던 요한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켰던 자에게 사명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앞에선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 제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십자가를 외면할 때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우리들이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십자가를 지켜야 사명도 받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순교한 사람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니지만, 오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다 순교하고 바울도 순교한 후에 초대교회가 흔들릴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일컬음을 받으며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쓰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까지 초대교회를 지켰던 귀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부활은 돌이킴이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성 파밀리아 성당에서 수난의 파사드 작품 설명을 들으며 가장 은혜스럽게 듣고 감격했던 장면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롱기누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역동적인 모습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상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멀었던 눈보다 더 큰 상처는 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칼로 예수님을 찔렀던 마음의 상처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자진의 구주로 고백했을 때, 그가 했던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깊은 아픔과 상처만큼이나 큰 은혜로 인해 그는 먼 터키 땅에서 선교사로 살다 순교까지 하게 됐을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여인들도 동일했습니다.

그 여인들 역시 상처흔적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죠.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았던, 귀신들렸던, 간음했던, 그 시대에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 시대에 누구에게도 치료받지 못했던 아프고 힘든 상처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회복되었던 간증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던 그 여인들로, 그리고 그 롱기누스와 같은 사람들은 부활의 현장 앞에서 그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돌이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단어인 돌이킴이 일회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부활의 돌이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상처와 부활의 흔적들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을 보다 제 눈에 띈 단어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7-9.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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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en go quickly

8 So the women hurried away from the tomb, afraid yet filled with joy, and ran to tell his disciples.

9 Suddenly Jesus met them. "Greetings," he said. They came to him, clasped his feet and worshipe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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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세요.

‘quickly’‘hurried away from the tomb’‘afraid yet filled with joy’‘ran to tell his disciples’‘suddenly’‘came to him’‘clasped his feet and worshiped him’

 

저에게는 부활의 그런 느낌입니다. 새벽에 일어난 정적인 일이 아니라, 무척이나 극적이고 역동적인 일입니다.

수난의 파사드인 롱기누스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급브레이크를 밟고 삶을 돌이키는 모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빈 무덤을 보고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하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분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이 좀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7., 어서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여라.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너희는 거기서 그분을 뵐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내가 전하는 소식이다."

8-10.

여자들은 크게 놀라고 기쁨에 겨워,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무덤을 떠났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멈추어 세우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 있었느냐?”

 

여자들은 무릎을 꿇고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붙잡고 있구나!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여라. 거기서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향하던 여인들의 발걸음을 갈릴리로 가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확인하러 온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기쁨이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냐?’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실망이 소망으로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각기 다른 체험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어떠하든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돌이킨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냐고 말입니다.

 

영수

출처: disciple 6월호 25p 오생락 목사(하늘평안교회)

초기 한국 교회사에 영수라는 직책이 있었다. 영수는 당시 조직화되지 않은 교회에서 교회를 관리하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경동제일교회에서 그 직책을 감당하던 엄영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왕손을 모시는 마부였다. 하루는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 길에 나으리, 예수 믿으시죠.” 하고 전도를 했다.

이어 왕손이 물었다. 아니, 너는 예수를 믿느냐?”

, 그렇습니다. 3년 됐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마음이 너무 기쁩니다.”

 

그 말을 들은 왕손이 마부에게 빈정거렸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더냐?”

그때 엄영수가 대답했다.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이 왕손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줬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고, 훗날 승동교회의 목사가 됐다고 한다.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가치 있게 동참하는 우리들에게 부활은 어떻게 너희 인생을 돌이켜 살아갈 것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죠.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는 그의 책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문다는 것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렇죠.

넓은 문은 쉬운 길이고 좁은 분은 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넓은 문이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좁은 문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따른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가는 이유는, 그 길이 참 자유와 놀라운 생명력이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가치가 있는 것은 소비적인 인생이 아니라 생산적인 삶이기 때문이죠. ,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은, 제자가 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그 길이 쉽다고, 빨리 가는 지름길이라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2. 속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본 작품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말을 멈추고 있는 롱기누스의 모습니다.

그의 인생이 바뀌었는지 아닌지 겉모습을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가 입고 있는 군복,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찔렀던 칼, 그리고 타고 다니던 말에 앉은 모습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인 자아가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것이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는 이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라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좁은 문에 들어서서 어려운 길을 인내하며 가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삶을 향해 달려가는 말을 잡고 멈춰 서려는 힘겨운 노력과 아직 성화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안고 고뇌하는 삶에서 나오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란,단순히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키던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54.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 오직 하나의 길을 향해.

말을 멈추는 롱기누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 역동적인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을 멈춰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 수훈을 통해 주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은 말과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고백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롱기누스는 왜 그렇게 힘겹게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을까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대변하고 있는 말이 가고 있는 방향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죠.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라고 믿었는데,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준비하던 아침에 오스왈드 챔버스[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잘못된 믿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졌던 믿음의 강점은 하나님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와 반대가 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면 밀고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신념을 위한 헌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신념의 종이었다면 그는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천사의 음성을 마귀의 음성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큰 헌신과 확신이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순간에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결정한 고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는 것을 보시고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언제든지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꺾을 수 있었던 순종에 의해 증명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신념을 아름답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신념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주님과 죽는 자리까지 가겠습니다를 옳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뭐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부활하신 주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내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맞추기 위해 인생의 고삐를 잡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의 뜻을 얼마나 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힘찬 롱기누스의 고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이 어떠해야 할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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