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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천국 문을 가로막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마23:13)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4.01.20|조회수112 목록 댓글 0

천국 문을 가로막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2313)

성경본문: 마태복음23:13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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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shut the kingdom of heaven in men's faces. You yourselves do not enter, nor will you let those enter who are trying to.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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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헬라어로 우아이라는 말은 오 슬프다’ ‘아이고 라는 탄식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하는 문장이 7가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저주선언을 7()선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7의 대상은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외식하는 자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외식하는 자위선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헬라어 히포크리타이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며 외식이라는 뜻으로 당시에 아주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욕적인 언어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하시는 이유는 지난 주 서론 부분에서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232-7절에 나오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외식이라는 단어를 입력했을 때, 나온 이미지 컷 몇 개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들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눌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나쁜 영향은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는데, 이들이 그 문을 막고 있으니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가요?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아서고 있는 자들이니 마땅히 화를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나눌 말씀을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지난 주에 다 다루지 못한 부분을 간단하게 나누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마태복음 233절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지키되라는 단어는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34절에서 율법을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성이나 막중한 의무 때문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 자체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자의적으로 그 율법을 해석하여,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들을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해서 규칙과 예법을 만든 것이죠. 율법의 생활규범 613개 조항이 그것이죠.

이는 규칙을 지키는 것도 무겁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노예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수년 전 <곡성>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후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뭣이 중한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 중에 뭣이 더 중한디?”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급한 것중요한 것중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데?”

 

손을 잘 씻고 먹자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율법들, 즉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그 아이들의 손과 발이 더럽고 얼굴에 때가 묻어 있으니 씻고 오라고 말한다면, 씻을 물도 없는 곳에서 때 묻은 손을 보면서 부정하다고 비난한다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모를 잘 돌보기 위해서 법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묵상 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무거운 율법의 짐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내게 믿음이 들어와 마음이 뜨거워져 아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 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아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내 마음대로 삼진 아웃제를 도입해 두 번까지 용서하고, 세 번째는 매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아들에게 성경을 가져오라고 했고, 잠언 1324절을 펴서 읽으라고 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함이라

아들이 그 말씀을 읽고 나면, 나는 왜 내가 매를 들어야 하는지 성경을 곡해하며 억지 이론을 폈다. 그리고 몇 대 맞을 것인지 물었다. 아들은 한 대요 라고 대답했고 나는 한 대로는 안 되지. 세 대는 맞아야 해라면서 내 마음대로 개수를 정해 때렸다.

그때는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다.

더 믿음이 들어와 그때보다 조금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보니 내가 엄청난 잘못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들은 이미 사춘기가 시작되어 단지 매로 다스리기 힘든 상태였다.

말씀의 능력도 어디 갔나 할 정도였다. 아들을 불러 조용히 이야기했다.

어릴 때 엄마가 잠언을 읽게 하고 매를 든 것을 기억하느냐고. 아들은 기억한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아들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하나님을 어설프게 잘못 알아 성경을 모독했고 너를 아프게 했다. 엄마를 용서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잘못 이해하지 말거라 다 내 잘못이다.하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 순간 나는 아들에게서 괜찮아요!’ 라는 대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아들은 무뚝뚝하게 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내가 그 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면 사춘기의 정점에 다다른 아들은 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욱 미워할 뻔 했다.

 

조금 더 천국을 가로막는 외식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5절 말씀입니다.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우리에게는 잘 와 닿는 구절은 아닙니다만,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은 기도의 끈을 만들어 차고 다녔습니다. 기도의 끈이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지만 차차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끈이 부적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부착할 때가 아침 쉐마 기도 때뿐이었는데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 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경건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된 크기보다 더 크게 만들어 눈에 띠게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옷 술에 경문을 달고 다니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 모습에서 적용점을 찾아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경건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경건의 모습이 꼭 넥타이를 매거나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목회자다운 옷차림과 모습이 중요하다고 해서 꼭 머리의 형태나 와이셔츠의 색깔, 양복의 스타일이 정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화적인 존중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잣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천국을 가로막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화 있을 진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 자들이여!

오늘 말씀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본문 말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13

13.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아마도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1152절을 보면 이 의미가 명확해 질 것 같습니다.

52.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일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종교 예식과 제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정하던 시기였죠.

이들의 문제는 수없이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도, 따를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막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박양규 교수가 쓴 중세 교회의 뒷골목 풍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당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살았는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죠.

1077년에 일어난 카노사의 굴욕은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4교황 그레고리 7가 파문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서로 권력을 가지려 했지만 결국 황제가 3일간 카노사의 눈밭에서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던, 유명한 교회와 세상권력 간의 갈등이었죠.

중요한 것은 황제도 교황도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했지만, 성경에 순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탐욕에 눈이 멀면 성경도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마련입니다.

14세기의 윌리엄 랭글런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순결하지만 전적으로 사랑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서 성직자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사람은 없다. 육체적으로 순결한 교구 신부들이라 해도 탐욕 아래 짓눌려 있고, 소유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해서 그들의 머리에서 이를 떼어낼 수가 없다.”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들이 취하려는 명예와 권력을 정당화 할 뿐입니다.

 

기독교가 중세기에 권력을 가지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단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자노는 유대인 친구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간청했다.

자네는 내가 기독교도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지? 나도 그래 볼까 생각하는데, 그 약속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로마로 가서 자네가 말하는 그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분을 만나보고 그분의 품위와 태도 그리고 형제 뻘 되는 추기경들의 품위와 태도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네. 그리고 자네의 말과 견주어 본 뒤에 자네가 나한테 들려주었듯 자네의 종교가 내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방금 말했듯 나도 기독교도가 되겠네.“

 

이 말을 들은 자노는 매우 실망하며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을 개종시킬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고생도 물거품으로 돌아가려는가 보군. 로마 교황청에 가서 성직자들의 더러운 악덕 생활을 보게 된다면 기독교도가 되기는커녕 진작 기독교로 개종을 했더라도 다시 유대교도로 돌아가고 말 테니.”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 지식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지식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에게 지식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잘 사용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13

13.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인해 누군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적용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숭배의 문제.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질책한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문제는 평신도나 초신자에게 발생하기 보다는 뭔가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지적교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1-3절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제물 논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무슨 말인가요?

성경에 관한 지식과 믿음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겸손함과 자기포기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들어가는 순간, 아니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교만이 찾아옵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 믿음을 자랑하며 누군가를 핍박하는 사람이 되느냐?

지성이 겸손하게 나타나느냐, 아니면 지성이 교만하게 나타나느냐?

자신의 믿음과 지성에 확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중요한 말입니다. 자신의 확신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 보다는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이 없는 지식은 늘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사용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 안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거나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지식에 대한 확신은 있으나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결핍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을 가로막고 있는 바리새인들처럼, 고린도 교회에서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가지고 천국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4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오랜 신앙을 통해 지식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우상제물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진리에 기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있어서 우상은 단순한 피조물이요, 어떤 영적 능력도 없기에 거기에 드려진 제물역시 먹거나 말거나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방인들이 여전히 우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연의 위대함을 두려워하며 숭배하고 몸에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위안을 삼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그냥 음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제물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있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87절에 나오는 양심이란 말은 아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신약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이 세상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것을 따르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영적 지식이 많아지면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 즉 영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양심을 가지게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습관과 관습의 틀로 인해 소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가책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느끼는 죄책감으로 인해 죄인이 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약한 성도들에게 해가 되거나 피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보는 성숙한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한 자가 하는 것을 다 내버려 두어 제멋대로 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함은 사실이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철저하게 목회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사상을 그리스도에 중심한 은혜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누군가에게도 흘러가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제입니다.

지식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천국의 문을 여는 자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의 교만으로 천국 문을 닫는 자들이 될 것인가?

 

교만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최고인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교만이 우리 신앙에 치명적인 것은 합병증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뇨병은 그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합병증이 무서운 것이죠.

당뇨의 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교만하면 자신의 모습도 주변의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제 멋대로 살아가다가 패망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생명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지혜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선비는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선비는 강 나루터에 다다르고 한 뱃사공의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사공에게 으스대며 뻐기듯이 말했습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

"글 자체를 몰라 지을 줄 모릅니다."

 

"그럼 세상사는 맛을 모르겠구먼 그려. 그럼 자네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가?"

"그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쯧쯧... 자네는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구먼. 그럼 자네는 글을 읽을 줄 아는가?"

"아닙니다. 저는 까막눈입죠.“

"아니, 이런 세상에나, 자네는 도대체 왜 사는가?"

 

이 때 사공의 배가 갑자기 암초에 부딪쳐 물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사공은 느긋했지만 선비는 다급해졌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사공이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선비님, 헤엄치실 줄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난 헤엄칠 줄 모르네."

"그럼 선비님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보게, 살려주게."

"아니, 선비님은 그 나이 때까지 뭐하고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상처받는 교인들입니다. 설교할 때는 상처를 준다고 다 받느냐? 받은 상처를 돌려주라!고 말하지만 사실 무의식중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것들이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정확하게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이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선적인 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으로 인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연약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는데,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당당했습니다.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경멸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이 충분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떠올랐던 일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분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조금 당황스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주인이 목사님이라고 인사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맥주와 와인을 주문하는 그 목사님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맥주와 와인이 사람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당에서 목회하는 저에게는 저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식당이었기에 말이죠.

그 분의 눈빛은 뭐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 .”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것을 먹고 안 먹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 분의 태도가 문제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목회자가 식사를 하면서 술을 먹는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사를 볼 수 있는 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술은 먹는 목회자의 모습 때문에 은혜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지식을 내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독선과 교만이 아닐까요?”

그 교만이 누군가에게 천국을 가로막는 죄가 될 수 있다면 말이죠.

오스왈드 챔버스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천국을 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나요?

그런데 이 결단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없이 정죄하고 괴롭혔습니다.

주로 안식일을 어기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받으셨죠.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걸으시며 안식일에 밀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며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이렇게 되묻습니다.

안식일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을 주기 위해 안식일을 주셨는데,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무관심한 채로 안식일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잃은 것이죠.

안식일에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이죠.

또 한 가지 물음을 가져보세요.

제가 주일에 설교를 하는 것은 일까요? 일까요?

우리 교회의 직원이나 목회자들은 주일에 일을 하고 있으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일까요?

식당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일에 문을 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당직을 서는 사람들은 괜찮은 것인가요?

 

우리의 지식이 자기중심적인 테두리에서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 판단하거나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율법만 지키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안식일에 다른 의미가 더 중요한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교만한 지성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과, 그 교만은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대로 살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 아프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교만해지려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나의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에서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나의 기준으로 인해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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