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란 이런 것입니다(히10장24-25)
성경본문: 히브리서10:24-25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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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생각하기. . .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가 쓴 책 「하나님이 내게 반하셨다」에 나오는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 작가이자 설교자인 토니 캠폴로는 한 기독여성회가 후원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기독여성회 회장이 한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낭독했는데, 그 선교사에겐 4천 달러가 절박하게 필요했다. 가슴을 여미는 그 편지를 읽고 난 후 회장은 말했다.
“그럼, 오늘 설교를 해주신 캠폴로 형제님이 그 선교사님이 필요한 금액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캠폴로 형제님, 우리를 대표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아니오.”
토니의 이 같은 대답에 기독여성회 회장은 깜짝 놀랐다.
“나는 선교사님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을 할지 말씀드리지요. 저는 지금 제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현금 전부를 탁자 위에 내놓겠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그렇게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모은 돈이 4천 달러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 하나님께 채워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토니는 지갑을 모두 비웠다. 그러자 3백 명의 사람들도 지갑과 가방을 모두 비웠다. 탁자에 모인 돈은 4천 달러가 훨씬 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여기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내어 놓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주셔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서로의 필요를 바라보고, 우리의 가진 것을 내려놓는 일이 아닐까요?
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라는 말로 공동체성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공동체’라는 말은 무엇보다 ‘상대방’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인생을 다이내믹하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할 일이 생길 때가 아닐까요?
공동체라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이지만 개인적일 수 없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누가 교회의 존재에 대하여 이런 표현을 썼더군요.
“교회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혼자인 사람’은 없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해 부활절을 기억하시죠? 조류독감으로 인해 닭을 살처분 함으로 달걀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계란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 계란을 나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업자들이 교회를 상대로, 아니 부활을 상대로 돈을 벌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의미가 장사치들의 농간에 희석되지 않도록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부활절 계란을 ‘먹은 셈치고’ 그 돈으로 부활의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해 보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죠.
그래서 페이스 북에 의미 있는 일을 위한 아이디어를 공모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나왔는데 한 분이 이런 글을 썼더군요.
“목사님, 의미는 알지만 부활절을 맞아 계란을 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어떤 양계장 주인에게는 참 힘든 일이 되겠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
막 ‘공동체’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던 때, 일어난 일이기에 ‘공동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좀 더 세밀하게 ‘서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죠.
서로에게 유익한 공동체인가?
존 웨슬리는 “고독한 그리스도인보다 더 비기독교적인 것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때로 고독의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과 어쩔 수 없이 지속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교제는 정상적인 성장 수단이요 고독은 부차적인 성장 수단이다.”
공동체가 중요한 것은 그 곳에서 우리는 믿음의 양분을 얻고 지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지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체가 여럿이듯 교회의 몸인 우리도 각자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서로의 유익을 누린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서로의 은사를 통해 유익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주는 것뿐만 아니라 받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가 얻은 통찰을 나누고,이 공동체에서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죄를 고백합니다.
지난 2015년 <M-Vision Project>를 통해 저는 참 의외의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왜 부담스러워할까?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꼭 해야 하는 것일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목자로서, 교회의 리더로서 해야 할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교인들이 가장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그래서 좋은 목자란 목회자 중심이 아니고, 교인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언젠가 시카고 윌로우 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한 이야기를 저는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는 교인들을 위하여 복음 이외에 모든 것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나무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된 것이죠. 소그룹 모임이 ‘복음’과 관계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인들을 바꾸어서라도 가야만 하는 목표가 분명한가? 그리고 그 목표는 목회자인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의 구별은 만나교회의 사명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는 일입니다.
이 구별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를 판단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속에 내려진 결론입니다.
우리가 나무공동체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잘못 생각하도록 만든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공동체는 ‘모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모임을 통해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우리의 삶에는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그룹 모임이기에, 이것은 설득과 권면의 차원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사역이었다면 나무 공동체는 우리들 삶에 대한 문제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다루는 사역입니다.
여기서 잠깐 모르는 분을 위해 나무 공동체를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단마다 교회마다 소그룹 모임이 있지만 그 명칭이 조금씩 차이가 있고, 그 이름에 따라 모임의 특성이 조금씩은 다른 것 같습니다.
만나교회에서는 ‘나무’라는 소그룹을 통해 풍성한 삶과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사역의 목적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고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열매의 씨앗은 또 다른 나무를 만들어 갑니다.
만나교회에서는 나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을 ‘열매’라 부르고, 그 나무를 잘 가꾸어 나가는 사람(인도자)을 ‘나무 리더’라고 부릅니다. 이 나무들이 모여서 동산을 이루게 되는데, 만나교회에서 청년동산과 새가족 동산을 포함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이름을 딴 동산들이 있습니다.
각 동산에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사님과 동산을 지키는 평신도 ‘동산지기’가 있고, 동산 구역마다 책임지는 ‘코치’ 그리고 동산구역 안에 나무 리더와 열매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 각 나무에는 다음 나무를 책임질 인턴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건강한 나무는 새로운 리더와 함께 번식해 나갑니다.
그런 나무 공동체가 만나교회 안에서 900 여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풍성한 만남과 열매를 위해 다양한 나무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떠올랐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의 말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서로’라는 말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서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공동체를 통해 ‘서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돌아보아’그 누군가 함께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서로를 돌아보아’라는 말은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consider'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더 깊이 고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들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돌봄 들이 피상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단순히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까지 돌아볼 수 있는 안목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미 출발점이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워야 하는 힘겨운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단순히 게으르기 때문에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절고 있는 아이에게 열심히 뛰라고 격려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서로를 돌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분당이라는 지역에 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열심’이라는 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열심을 낼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참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은 아닐까요?
스캇 솔즈는 그의 책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에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태어날 때 받은 카드와 큰 관련이 있다. 에이스 네 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투페어를 갖고 태어난 사람을 이길 확률은 매우 높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로 돌아본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서로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면 정말 쉽지 않은 관계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서로 돌아보는”이유가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공동체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바꿔줄 만한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우리 삶에 가장 축복된 일이 무엇일까요?
신앙 안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내 삶이 바뀐 그런 이야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만남들 말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꼭 우리의 인생에서 처절한 위기를 경험하는 순간에 만나는 도움과 같은 것이 아니어도, 잔잔하게 우리의 삶에 봄비처럼 적셔주는 그런 만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그 모임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그렇게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해서 기꺼이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때 말입니다.
1996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하이오에서 유학하던 시절, 저는 콜럼부스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파트타임이지만 대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고, 일주일에 2-3번 교회에 가야 했습니다. 거리가 꽤 있어서 고속도로로 1시간 반 정도를 가야하는 거리였기에 쉬운 사역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이 되어 눈이 많이 올 때면 오고가는 여정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고 저도 유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서로 귀한 시간을 내서 만나는 그 시간이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를 가야하는데 도저히 몸살로 인해 갈 수 없던 상황이라 포기하고 학생들에게 모두 컴퓨터 앞으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인터넷이 그렇게 발달 됐던 때도 아니고, 카톡이 있던 때도 아니었죠.
느린 컴퓨터 앞에서 글로 나눔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글로 공부를 하니 얼굴을 보고는 쉽게 할 수 없는 말들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먼 거리를 그렇게 자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시간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학생들을 보면서 가지는 기대감과 그들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나누고, “얘들아, 내가 너희들을 정말 사랑하나보다!”라고 글을 쓰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그날의 경험이 참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저도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마지막 논문 디펜스를 위해 다시 미국에 가야 했던 때였습니다.
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동안 목사님이 매번 교회로 왔으니, 이번에는 자신들이 제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모이던 성경공부가 끝나면 학생들과 함께 볼링을 하고 늦게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힘들고 졸립지만 주말에만 만나는 학생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함께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일이었죠.
제 이야기를 듣던 학생들이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 금요일 밤에 우리가 얼마나 피곤한지 아세요. 그런데 늘 혼자 한 시간 반을 운전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목사님이 너무 외로울까봐 우리도 졸린 눈을 비비며 목사님과 놀아준 거예요!”
그 소리를 서로 들으면서, “왜 우리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지!”라는 자책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힘들었던 일들 때문에 가슴이 먹먹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졸음을 쫓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면서 운전을 했던 기억이 났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찡해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또 그렇게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때 함께 했던 학생들이 이제는 교수가 되어, 엄연한 사회인이 되어 지금 만나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함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공동체에 대한 경험하면 떼놓을 수 없는 귀한 기억입니다.
서로를 생각하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든 것을 참았던 경험 말입니다. 만일 서로를 ‘consider’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교회공동체에서 만나 그 기억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말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을, 그 교회를, 그 부부를, 그 장로님을. . . .”같은 이야기들이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섭리적 관계와 삶을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섭리적 관계는 예배 공동체 보다는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그룹은 ‘예배’가 아닙니다.
누군가 설교를 하거나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도 아닙니다. 혹시 인도자(리더)들에게 그런 부담이 있다면 뭔가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는 여러분들보다 제가 더 전문가고, 성경공부는 목사님들이 여러분들보다 훨씬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일은 목회자들보다 세상의 삶을 살며 믿음을 지켜나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선배들이 더 잘 하고 잘 가르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를 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처음 신앙생활을 하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회사에서의 회식은 너무나 힘든 자리었다고 합니다. 술자리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인식이 되어있었으면 좋을 텐데,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하죠.
그 때 한 신앙의 선배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답니다. 회식자리에 가면 꼭 기도를 하되 오래하라고. . .처음에는 사람들이 권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정하게 될 거라고. . .
시어머니가 같은 교회의 권사인 어떤 며느리는 어느 날, 나무 공동체 모임에서 너무나 어렵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답니다.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 시어머니가 집에서는 자신을 너무너무 힘들게 하는데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노라고. . .
그 때 같은 공동체에서 동일한 문제로 고민했던 신앙의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를 받았노라고. . .
오늘 본문 말씀은 참다운 교회의 기능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에 대한 생명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라는 말은 ‘의도적’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돌아본다”는 것은 피상적 만남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진지한 만남으로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서로’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죠.
‘서로’라는 공동체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나교회의 나무공동체가 ‘사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공동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 세상의 모든 지체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 있는 ‘지체의 비유’를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우리 몸의 어떤 것도 서로에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란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갑니다. 호수 한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 드릴을 가지고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자리에만 구멍을 뚫으니까 염려하지 마!”
그런데 정말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요?
죄는 절대로 혼자 짓지 않습니다. 공동체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영향력이 확산 됩니다.
이 땅의 문제는 한 사람의 부정적 영향력으로 망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하고 추하고 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조차도 우리가 붙들어 주므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4장 9-11절 말씀,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공동체란 좋은 일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험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순간은 우리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죄의 위협아래 있을 때이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춥고 서러운 곳일 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자멸하는 것이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악의 위협가운데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을 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깐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냈던 편지를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2-7절의 말씀인데요,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 . .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마도 빌립보교회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이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편지를 쓴 것을 보면,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절에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말한 것을 보니 그들 가운데 기쁨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 공동체에 사도 바울이 권면한 것이 무엇이냐면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조금 더 양보하는 마음, 조금 더 배려하는 마음, 조금 더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말씀에도 동일한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모이기를 더욱 힘쓰자!”는 것이죠.
본문에서는 역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우리가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공동체가 좋아지리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모임은 서로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인데,연예인 중에 하나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노총각입니다.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아버지! 결혼하면 좋아요?”
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연애는 서로 만나서 좋은 것을 같이 하는 거야! 그러나 결혼은 서로 만나서 힘든 것을 같이 하는 것이지!”
참다운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가 되고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허물도 보고 어려움도 같이 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자신만을 만족’ 시키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지만 서로서로 만나야 합니다. 만남의 횟수만큼이나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만남을 위해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땅의 마지막이 가까워 옴을 감지하는 때입니다.
참아야 할 때입니다.
더욱 힘을 내야 할 때입니다.
지난 해 성도들과 함께 고난주간 제주도 성지순례를 하며, 함께 걸으며 생각했던 것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며 ‘리더가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젊었던 시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앞서서 무언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
리더가 된다는 것은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고,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사람을 보살펴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지난 고난주간 교인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신앙 선배들의 여정을 따라가는‘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힘든 여정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걷고 또 예배를 드리는 그런 일정 이었죠.
물론 교역자들이 미리 수고해 잘 짜여진 일정으로 길을 걷는 것이었지만, 모든 연령층에 맞게 일정을 진행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맨 앞에는 젊은 목회자가 깃발을 들고 길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맨 뒤에는 또 다른 젊은 목회자가 낙오되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며 따라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교인들 틈에서 함께 걸으며 사정들을 보고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 틈에서 제가 제일 많이 한 말이 있습니다.
“천천히 가자! 같이 가자”
고난 주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함께 걸어가는 교인들의 모습이 들어오게 한 것이고, 리더로서의 자격을 다시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죄 많은 인간들과 함께 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가셨던 길 말입니다.
그 길에 모든 군상(群像)들이 다 있었죠.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도 있었고, 그 만남을 통해서 딱딱하게 굳어진 ‘돌 같은 마음’을 녹이셨죠.
그렇구나!앞서가기 보다는 함께 가고,따라오라고 하기 보다는 기다려 주고,나를 보라고 하기 보다는 다가가 보듬어 주는 것.오늘은 멀리 강화도에서 오랜 기간 교회에 출석하는 장로님을 심방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갑니다.
시간이 되면 점심 먹고 산행도 하려고 하는데, 그런 리더십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을 보면 안쓰럽고 고맙고 그런 마음이 많이 교차합니다.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오늘이 시간이‘고행’이 아니라 ‘동행’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또 오늘 하루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동행’의 기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교회 전체를 리모델링했습니다.
교회에 숨어 있는 모든 공간을 다 찾아내 만든 것이 소그룹 룸입니다. 근래 들어 제가 한 일중에 가장 잘한 일이 3층을 묵상하고 만날 수 있는 ‘북 카페’를 만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니 기도실을 비롯해 이곳 저곳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삶을 나눌 수 있는 방을 만든 것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카페 파구스 10호점, 그리고 목사님들의 숙소인 파구스 빌에 카페가 있습니다. 원하는 우리 교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커피를 사먹지 않아도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의를 지켜줘야 합니다. 음식을 싸가지고 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러 개의 소그룹 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함께 모이는 것이 참 쉽지 않은 때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지난 해 말에 다시 한 번 우리 교회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나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교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모범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더욱 그리하자. . .”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참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으로 격려하며 더욱 애쓰자는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