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으로 가는 길(빌 3장12-14)
성경본문:빌립보서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우리가 가는 길이 분명한가?
2024년 한 해를 “radical”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생각하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radical’이란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때 붙잡은 말씀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후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이, “그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가?”라는 것이었죠.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명에 충실한가?”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푯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푯대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입니다.
사명이란 모든 교회와 사람에게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충실한가?”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passport’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신분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경을 드나들 때면 ‘passport control’에서 ‘stamp’를 찍어 줍니다. 그 스탬프만 보면 우리가 걸어온 족적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분명한 신원확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2025년은 “action passport”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가장 합당한 족적을 남기는 해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 각자에게 개인적인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만나’ 공동체에 부르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앤디 스탠리 목사가 쓴 [노스포인트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거룩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교회 중에 그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유가 지금도 분명한가?’
모든 교회가 함으로 우리 교회도 하는 것, 모두가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가 정확하게 이 말씀을 준비하는 시간이 지난해 8월 2일 캐나다 밴쿠버에서입니다.
20일 가까이 Trinity Western University에 있는 게스트룸에 머물면서 2025년 설교 구상을 하고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몇 목사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하고 좋은 목사님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나 즐겁지만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머무는 목적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르면 하고 싶은 일도 다릅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같이 맞춰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성격이라 먹는 것에 대한 갈등이 전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힘들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돌아가면서 솔직하게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합시다.
한 목사님은 “탕수육”, 그 사모님은 중국식 “딤섬”, 그리고 제 아내도 “딤섬”, 저는 한국식 “짬뽕” 그리고 한 사모님은 무조건 “한식” 그리고 그 목사님은 그 한식집의 “냉면” 그렇게 둘씩 세 군데 식당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모님이 한식은 중국집에서도 먹을 수 있다는 제안에 따라 식당이 정해졌습니다.세 가정이 한 끼 식사를 결정하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만나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지난해 “M-vision project”를 진행하며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원하는 교회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좋게 이야기하면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에 너무나 헌신적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묵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교회의 자랑이 “나무생각”이고 묵상을 더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만나교회의 단점이라고 말합니다. 해외선교에 열심인 사람들은 왜 만나교회는 선교에 무관심하냐고 말합니다.
BTD, MDTS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는 영성훈련과 제자 훈련에 더 헌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부서에서 열심이지만, 소그룹에 들어있지 않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소그룹에 들어가라고 하는지 그것이 부담스럽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다시 확인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라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교회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사명”을 향해 가는지를 확인해야겠다고 말입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교회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서로 옳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맞는 사명자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교회를 존중하고, 다른 교인들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교인들이 나와 생각이 다름에도,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앞을 향해 가고 있는가?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런 말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지금 우리가 잡은 것이 전부가 아니고 앞으로 달려갈 길을 가기 위해 놓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만나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가기 위해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0년 전 [비전 2025]을 시작했고, 지난해 [M-Vision Project]를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 가고 있는 길, 그리고 가야 할 푯대가 분명한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가 놓아야 하는 것 때문에 아플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때문에 헌신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교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어느 주일 저는 예배 전과 후에 로비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이 누군가에게는 참 불편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부르신 이유와 참 많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씀 준비를 참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예배에 참여하는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의 방향을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설교는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이 교회를 계속 다닐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환경”입니다.
사실 만나교회에서 예배를 1~5부까지 다른 형식으로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에 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숙해지기 위해 만든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사명은 예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원하거나 담임목사가 원하거나 기존 신자들이 원하는 예배가 아니라 아직 예배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예배입니다.
지난해 M-Vision Project를 통해 많은 사람이 “만나교회 예배는 이벤트가 많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벤트’가 목적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로 회중을 들어오게 하려고 최선의 방법을 찾고 고민한 흔적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프로그램이 옳다거나 그것을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의 다양한 변화는, “변화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비전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묻는 물음은 “이것이 우리의 사명을 위해 최선입니까?” 이러한 물음은 늘 같지만, 그 답은 늘 다른 프로그램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돌아가신 전대의 목사님께서 예배를 마칠 때 부른 찬송이 35년 동안 변함없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20년을 똑같이 “주만 바라볼지라!”를 부르고 있다고 말이죠.
그 교회는 신앙에 익숙한 교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늘 이런 고민을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교회가 아니라, 오늘 처음 온 사람들에게 친숙한 교회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난해 미국에서 막 건축을 마친 한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건축을 다 끝내놓고 이 교회에 사람이 차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설교자가 아니라 예배를 처음 드리기 위해 방문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표정을 보고 다시는 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복음이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수단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환경”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환경”일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지요.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교회 중 어느 교회가 더 선교적인 교회일까요?”
이제 우리는 생각의 오류를 내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있었지만, 복음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수고가 없었다면 방향을 한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만족하고 사명을 다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고민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아직은 복음에 익숙하지 못한, 어쩌면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 어려서 부모의 강요로 교회를 다녔지만, 이제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무서운 일인데,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눈에는 아주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 보인다는 것은 ‘옳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익숙하고 편리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LA의 갈보리 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는 1960년대에 모든 교회가 꺼렸던 ‘히피족’을 위한 목회를 선언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머리를 지저분하게 기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꺼릴 때, 갈보리 교회는 그들을 위해 깨끗한 카펫을 걷었던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홍대 근처의 클럽이나 카페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생겨납니다. 예배에 거부감을 가지는 세대를 위해 모든 형식을 없애고 성경 하나만 들고 말씀을 나누는 예배도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예배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예배가 어떤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드려지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예배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사실이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에 충실한 교회라면, 우리 교회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과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예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선입니까?
사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3장 전체를 보아야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지만 3장 8~9절만으로도 사도 바울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는 듯합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고상한 교양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해 우리의 마음을 참 아프게 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그맨이었다가 목사가 된 서세원 씨, 그리고 32년을 함께 살며 신앙고백을 했고 간증을 했던 아내 서정희 씨의 사건입니다. 변화된 사람으로, 신앙인으로 간증하러 다녔던 사람들이기에 드러난 그들의 삶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회심’이라는 사건이 그동안 우리의 마음을 참 아프게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정작 우리의 삶에 결단이 없어서 그 고백이 수치스럽게 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심은 했지만, 여전히 이전이 삶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진실한 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고, 가장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고귀하지 않은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용기와 행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을 시작하면서 ‘Action Plan’을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와 우리 만나교회에 묻는 말입니다.
정말 “최선입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언젠가 읽었던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그 만남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우리는 흔히 우연한 만남에서 일어난 회심으로 알지만, 예수님의 의도적 행보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도 그 여인의 회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적 접근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우연한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예배 환경은 최선입니까?
누군가 이 예배를 다시 찾아오게 하는 예배이고, 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예배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 우물가에 영적 갈급함을 가졌던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까지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 여인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사마리아로 통과하셔야 하는지, 굳이 그 여인에게 왜 물을 달라고 하시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 예배가 여러분을 만족하게 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음 세대, 혹은 교회를 처음 찾는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만나교회를 찾아온 분이 이와 같은 강력한 사명을 가지고 찾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강력하게 요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나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불가항력”의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예배와 사역의 비전을 함께 나누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만나교회의 예배와 사역이 우리 교회와 교인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중심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찬양이 있지요?
“예배자”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헌신하지 않는 그곳에서, 증거하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나와 같은 예배자가 되지 못한 것을 비난하기보다는, 영적 예배자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겠니?”
저는 종종 제가 영월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농본기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예배를 드려 달라던 사람들을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교회를 나온 사람들에게 저는 저의 기준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목회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들이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신앙을 가진 이들을 위해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일하라 나가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그들도 믿음이 들어가면 일하는 것보다 예배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길 텐데.
우리는 언제까지 주차장 때문에 불만을 가져야 합니까?
지난 M-Vision 설문에서 가장 큰 불만이 “주차장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처음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을 위해,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내가 기꺼이 가까운 주차장을 포기할 용의는 없는 것인가요?
가장 편안한 주차장을 처음 오는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준비하고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이죠.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위해 준비된 교회라면 기꺼이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교육관을 지나가며 부모들에게 얼마나 교회가 당신의 자녀들을 생각하는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지적을 하면서 말씀을 마치고 12주 동안 ‘Action Plan’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금 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자면, 예수님이 이 여인을 처음 만나셨을 때, “물을 달라”고 하시며, 이 여인의 갈급함에 대해 말씀을 이끌어 내십니다.
예수님을 보면 똑같은 방법이 아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제시하셨던 것을 봅니다.
소위 말하는 “User”의 입장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때마다 진리를 수호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방법이 틀렸소!”라고 지적하지요.
가끔 방법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발합니다.
“교회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는 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물음의 답이 과연 “진리”의 문제일까요?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으며 복음을 전하지 않는 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릭 워렌 목사가 지적한 대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졸게 만드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이 기적이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대한 사명과 비전을 가지고 물어야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진리로 끌어들이는 제시 방법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말씀을 전하시고 나면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난 후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은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진리를 말씀하시고 옳은 것을 가르치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진리로 들리도록 가르치시는 방법을 다양화하셨죠.
교육학자인 하워드 핸드릭스가 즐기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지루하게 하는 것은 죄다!”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의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늘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제시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예배 시간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노스포인트교회 이야기]에서 앤디 스탠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형교회에 대한 신화 중에 이런 게 있다. 대형 교회가 큰 이유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 복음을 타협하고 제자도의 본분을 희석하며, 까다로운 이슈들을 피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경우도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이 규범은 아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복음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것을 오히려 당연시한다. 복음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 설교자로서의 나의 책임이다.우리가 주차장, 복도, 자녀를 맡기는 곳, 예배의 앞부분에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쓰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음 주에 다시 와서 또 한 번 불쾌해지기를 원한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사명을 이루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누군가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일들과 전해지는 말씀에 불쾌해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복음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씀을 듣고 가장 고귀한 것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이곳에서 고백했던 가장 고귀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끝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더 이상 잡지 말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