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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이유가 있는 교회(고전 9:19-23)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5.02.19|조회수76 목록 댓글 0

이유가 있는 교회(고전 919-23)

성경본문:고린도전서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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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자기 사역의 방향을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우리 사역의 가장 큰 맹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르심의 이유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창립기념 주일을 지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부르신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정체성의 긴장감이 늘 떠나지 않습니다. 그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나 스스로 이 되었다는 의식입니다.

스스로 종 됨은 자유로 선택한 것이기에 더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이 되고자 원했던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커다란 사명 앞에서 사도 바울은 늘 자기 생각을 꺾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사명을 위해 자신의 고집을 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용기와 사명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사명선언 혹은 행동지침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교회의 오류는 진정한 용기와 사명, 그리고 비겁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고, 안식일도 제일 잘 지키며, 율법대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어쩌면 우리 교회가 그런 착각 속에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은 창립 33주년을 맞이하여 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지, 아니 왜 만나 교회가 세워진 지 33년이 지나고 나서 앞으로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정체성에 대한 물음

근래 저에게 교회에 대한 물음을 묻게 했던 책이 있습니다. 애틀랜타에 있는 North Point 교회 앤디 스탠리 목사가 쓴 [Deep and Wide]입니다.

소위 그는 성공한 목회자요, 부흥한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습니다. 이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자신이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의 마음이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었다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믿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함께 하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7-18)

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반석위에 세우실 것입니다.

옛날 건물은 주춧돌 혹은 머릿돌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기초에 따라 건물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 교회라는 정체성은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당시 공무의 목적으로 소집된 시민들의 모임이나 군사적 목적으로 불려 나온 군인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교회라는 뜻의 에클레시아는 특별한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불려 나온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앤디 스탠리의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단어를 쓰셨을 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잘 알아들었다.

내가 내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 것이며 이 새로운 모임의 기초는 바로 나다!”

교회 정체성을 흔드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모임의 목적이 장소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313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교회의 모임은 불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황제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주인으로 선포하는 것이었죠.

기독교인들은 모일 장소도 없었고, 아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삶의 거처와 재산과 지위도 잃어야 했습니다. 당시 황제 중에 10명의 시대를 가리켜 ‘10대 박해라 칭할 정도였죠.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 시대에 교회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가 제국을 통일하고 나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황제를 따라 신앙을 고백하면 얻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별로 격식이 없었던 교회와 예배는 이제 향불, 화려한 복장과 성가대 등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황제를 숭배할 때처럼 예수님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죠.

황제와 귀족들의 예배를 바라보는 일반 회중은 구경꾼이 되어 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죽어갔던 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자고 그들의 이름으로 기념 예배당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에클레시아는 회중의 모임이 아니라 장소로 변해갔습니다.

이제 이 모임은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바실리카라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 말의 뜻은 공공건물이나 공식 집회장을 뜻합니다. 이 말은 게르만 문화에서 키리카라 불리게 되는데, 후에 독일에서 교회를 뜻하는 키르케로 바뀌게 되죠. 이 단어 역시 의식을 위한 모임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제 교회의 개념이 전혀 다르게 써집니다.

모임이 목적인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자물쇠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임의 장소가 목적이 되어버린 교회는 누군가가 문을 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문을 닫는 자가 권력을 가지고 교회를 통제합니다. 그렇게 고대 교회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신앙과 성경조차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장소가 없어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신앙공동체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십자가가 걸리고 성직자들은 멋지게 가운을 걸쳤지만,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끔찍한 일들이 서슴지 않고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1세기의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은 것도 놀랍지만, 그 뒤로 오랜 세월의 제도화된 타락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더 놀라운 일이다.” (by Andy Stanley)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를 이슬람 사원으로 바꿨지만,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느낀 기독교 학자들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의 고대 사본들을 서유럽으로 가지고 피난을 하게 되었고 성경번역에 힘을 더하게 됩니다.

성경의 번역과 함께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사람들은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윌리엄 틴데일 위클리프와 같은 성공 번역자들이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에클레시아인가? 아니면 키르인가?”

지금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읽히도록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교회 안에서 간직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와 예배에 집중하고 있는가?”

 

질문1.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우리 교회” “우리 교인이라는 말의 용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지금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죠.

하지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성전을 지키고 있었던 그들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행해지는 곳에 계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말들에 대하여 위선이라고 할까요? 바로 그 바리새인들처럼 오늘의 교회 역시 세상을 향해 우리처럼 되어라!”고 외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가셨던 것처럼 이제 교회 안의 말씀이 건물을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같이 예배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질문2.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는 곳인가? 아니면 은혜를 선포하는 곳인가?”

그 동안 교회는 진리은혜라는 양 극단에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 보수주의라 불리는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규정해버렸습니다.

술과 담배, 이혼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물질적 탐욕에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회 안에 점점 위선자들이 가득 차게 된 것이죠.

은폐된 은혜가 그런 것이죠. 누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위선자들 말입니다. 막상 자신에게 필요한 은혜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혜만을 선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흔히 진보주의라는 진영에서는 정통적인 교단에서 말하는 교리의 수호보다는 자유로운 어떤 진리를 선포합니다. 개방과 수용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정작 당신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불편한 선언보다는 상대적 진리라는 개념 속에 죄의 개념을 약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보다는 실수라는 말로, 구원이라는 말보다는 교정이라는 말을 선호하게 된 것이죠.

우리의 문제는 늘 이 양극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요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것은 한쪽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양쪽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이클 야코넬리가 그의 책 [영성]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어느 한쪽에서 선명하게 서신 것이 아니었고, 모두에게 공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하지만 늘 은혜가 충만했고,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에 교회의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은혜만을 주장하거나 진리만을 주장한다면 참 쉬울 것 같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공평하거나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대개 은혜만을 주장하거나 진리만을 주장할 때는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양산해 냅니다.

하지만 은혜와 진리를 동시에 주장하게 되면, 전혀 공평하지 않은 일을 전심으로 하게 만들어줍니다.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지만, 그 어떤 사람에게 은혜로운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지만, 그 사람에게만 적용할 때 은혜와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전혀 공평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와 진리를 적용하셨습니다.

양 극단을 주장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분명한 은혜와 분명한 진리를 위해 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법을 만들기보다는 정해진 법을 깨기를 원하셨고, 법을 적용하기보다는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교회는 법이 적용되는 세상과는 조금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을 따지기 시작할 때는 분명히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는, 뭔가 썩고 구린 것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하기 싫다는 인간적 본성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법이 있어도 법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믿는 교회,법을 만들기보다는 법이 적용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너무나 과격한 은혜를 이야기 함에도 진리가 사라지지 않고, 불변의 진리를 주장함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교회 말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교회가 가능합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가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완전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갔느냐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교회에 실패는 없습니다. 단지 어디까지 성공했느냐만 존재할 것입니다.

질문 3.

우리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편안한가? 불편한가?”

이 질문이 단순히 편리성에 대한 것이 아님을 먼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라 불릴 수 있는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가장 큰 갈등의 문제는 먼저 믿은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도 않았고, 그들의 생활에서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크리스천들에게 이방인들은 너무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예수를 쉽게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며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린 이렇게 힘들게 믿었는데 너희는 너무 쉽게 믿어!’

마치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다른 사람의 은혜가 커 보이면 감사를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참 이성적이지 않은 대목입니다.

이방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이 불만족스럽지만, 자신들 역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합니다. 단지 그들보다 조금 더 잘 지킨다는 것이죠.

또 한 가지는 기존의 신앙인들이 회심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이죠.

회심이란 우리의 삶에서 주인으로 삼던 것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고,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마치 우리는 누군가 회심했다고 말하며 신앙공동체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처럼믿어야 한다는 생활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오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지역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찾는 모든 곳에서 같이 일어나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형제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어렵게] 하지 말고(15:19)

이제 예루살렘 공의회는 단 두 가지만을 결정합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15:29)

참 중요한 기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어렵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가족 교육을 합니다. 몇 주 동안 말입니다.

하지만 그 교육이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죠. 새신자반 교육치고는 참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렇게 짧게 결정한 이유는 이들이 좋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소식이 이방 교회에 퍼졌을 때 많이들 좋아합니다. 특히 남자들이 좋아합니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 누군가에게는 참 낯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찾는 이들 중에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신앙공동체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가 만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면 교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명에 헌신하는가?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는 자유인이었음에도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19).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은 기독교의 2,000년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 다 순교했습니다. 중국 땅에서, 인도에서,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보며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사명에 헌신하는 인생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어떤 교회도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을 방문했을 때 가슴이 아팠던 것은 선교사들이 이름이 새겨진 묘역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이름도 없는 유아들의 무덤이었습니다. 부모들이야 자신의 선택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이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렇게 아픔 가슴을 부여잡고 기도하며 헌신했던 사람들이 기도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1956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가 에콰도르 아우카 족을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짐은 위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요, 모두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쿠랄라이 강에서 피살되었습니다. 당시 [LIFE]지는 이렇게 기사를 썼습니다.

아우카 족은 수백 년 동안 자기들에게 접근하는 외부인들을 모두 다 죽여 왔다.

다른 인디언들은 그들을 두려워했으나 그 선교사들은 아우카 족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What an unnecessary waste!)”

그러나 5년 후 아우카 족의 추장이 당시 선교사였던 짐 엘리엇의 부인이었던 엘리자베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서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우카 족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짐을 죽였던 남자 중의 하나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짐은 아무 성과 없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피와 죽음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 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니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낭비라 불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낭비를 하면서 살까요?

그러나 이들의 헌신이 절대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들의 헌신이 천국에서 빛날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것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그는 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몇 년 전 <단동 병원>에서 자비량으로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수련회를 하면서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병원이 세워지고 수년이 흐르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고, 북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강퍅해지려는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맹인들이 점자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고 무뎌지므로 민감성을 유지하려고 손가락을 수시로 갈아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박세록 장로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년 전 한 탈북 여성이 거의 숨이 넘어갈 상태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답니다. 성병으로 뱃속에 고름이 가득한 상태에서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고 있었답니다.

북에 두고 온 식구들을 위해 중국에 가서 몸을 팔아 돈을 보냈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았습니다. 더는 돈을 벌어야 하는 소망을 잃어버린 이 여인은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답니다.

낮에는 다닐 수 없어서 밤에 이동을 했는데, 같은 처지에 있는 남자 셋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그런데 안심은 잠깐이고, 매일 이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시달리게 되었고, 단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뱃속에는 성병으로 고름이 가득 찬 상태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박세록 장로님은 그 여인에게 항생제를 주고 기도를 했지만, 더는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살아나면서 이 여인이 성경을 외우기 시작했고, 삶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헐떡이는 죽음 앞에서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또 그들은 북쪽을 향해 기도합니다.

저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정치적인 논리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음을 압니다.

영성집회를 하면서 한 선교사가 이런 기도를 한 기억이 납니다.

이분은 호주에서 회계사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단동에 와 북쪽의 영혼들을 가슴 아파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북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파요.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변하지 않는 그들을 바라보면서요.

하나님 가족들이 보고 싶어 가슴이 아파요,

하나님 대면하는 상황들이 너무 힘들어 가슴이 아파요.”

우리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헌신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한 그 어떤 것도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끝까지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일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쓰실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이 만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부르신 이유와 사명이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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