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언어에 대하여(고전14장 1-25)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4: 1-25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은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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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일어나는 참 많은 일이 ‘말’로 인한 것입니다. 특히 뭔가 신령한 것 같은 사람들의 말이 교회에서 참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령함’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운 덕이 함께 나타나는지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립니다.
얼마 전 참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 어떤 분이 제가 ‘람보르기니’를 탄다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떤 권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딸이 동네 어떤 모임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만나 교회 담임목사는 스포츠카를 몰래 숨겨두고 탄다고 그 차의 이름이 ‘부카티’라고 말이죠. 저도 그날 처음으로 그런 차가 있는 것을 들었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몇십 억이 넘는 차였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소문이 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연결고리가 하나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젊은 사업가의 공장에 심방을 하는데, 자신의 차를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가진 스포츠카로 저를 데려갔고, 서울의 사무실에는 또 하나의 스포츠카가 있어서 저에게 한 번 운전해 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으로 분당-수서 간 고속화도로에서 운전해 보았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앞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떼어버리고 ‘운전한’ 이야기만 기억한 것 같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소중하기는 하지만 무서운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이 오늘도 시작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악한 일’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들을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은사!”- 해로울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유익’이라는 말입니다.우리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당시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척 자기중심적이었고, 때로는 그들의 은사와 사역이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미루어보건대 가장 보편적인 은사는 방언과 예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고린도전서 13장과 연결될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신학과 사상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따라 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극단적으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길을 따르지 않는 은사는 소음과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보편적인 은사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특히 ‘방언’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방언의 정확한 뜻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하나님과의 기도에 필요한 것입니다. 즉, 영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기에 자신도 듣는 사람도 모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언은 3절에 보니까,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요, 예언을 통하여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권면하거나 위로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의 문제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4절)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에 사도 바울이 5절에서 권면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무슨 말인가요? 방언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방언이 필요합니다. 방언의 유익은 기도할 때 영적인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가도록 인도합니다.
그 단적인 면이 방언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방언에 대하여 조금 더 공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은 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방언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도록 도우시는 보혜사이시죠. 그분이 우리 안에 충만해질 때, 우리 영이 회복되어 방언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실제로 사탄은 우리가 방언을 하지 않기를 가장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왜냐하면, 방언은 사탄을 대적하는 영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2)
“우리가 방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하라고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적인 이해나 지난날의 경험, 신학적인 견해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 그것을 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 즉, ‘영적인 충전’입니다. 초대교회 때 그랬듯이 방언은 오늘날 지치고 무력해진 주님의 교회를 강하게 충전시키는 귀중한 에너지가 됩니다.
대천덕 신부님의 [성령세례]라는 간증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예수원 홈페이지)
저희 집안은 지난 100여 년간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할아버지 토레이 목사님(R. A. Torrey)도 오랜 기간 D. L 무디와 동역하셨는데, 두 분은 1875년경부터 성령세례에 대해 가르쳤고 이를 바탕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한 것은 대학생 때인 1936년이었습니다. 그때 제게는 신앙의 진실성 여부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강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가졌는데, 2년쯤 지나서 하나님의 제게 그분이 성경의 하나님이시며 실존하시며, 저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심을 확신시켜주셨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제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했을 때, 저의 아내 역시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했고, 그때 그녀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전에 받은 것이 성령세례가 아니라면 지금 제게 성령세례를 주시고, 만일 제가 받은 것이 성령세례가 맞다면 제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일이 있은 직후 성령세례를 위해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목사님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안수기도를 받았지만 방언의 은사는 없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너는 이미 네 안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가서 목회에 전념하라. 적합한 때에 방언의 은사도 열어주리라.”
저는 이것을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얼마 후 개인기도 중 방언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잔잔히 기쁨 가운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방언이라면 20년 전에도 할 수 있었을 것을….’
이후로 개인기도 시간에는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이 저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집회에 참석했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서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성령님은 갑자기 제가 그것을 통역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구한 적이 없었고, 통역할 내용 또한 당황스러워 피하려 했으나 주께서 강권하셨고 마침내 그것을 통역했을 때,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방언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며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지요. 몇 해 전 우리 한국 교회의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팔복>이라는 영상을 만든 김우현 감독과 규장 출판사의 전 직원이 한날 방언을 체험했던 사건이지요.
사실 이러한 사건은 그렇게 큰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사람이 동시에 방언을 받았지요.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 교회에서 하는 영성 훈련을 통해서도 일어난 일이고요. 또한, 변화산 기도회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도 방언은 하나님과의 기도 시간을 깊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방언은 꼭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어눌하지만 반복되면서 유창하게 나오고,처음에는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다 보면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게 됩니다. 또한, 방언기도를 하면서 언어가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요.
분명한 것은 방언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라는 것이요.
그 은사를 통해 기도의 줄이 열리고, 우리 신앙의 확신을 가진다는 점에서 아주 유익이 되죠.
그리고 방언을 통하여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아주 큰 유익 중의 하나입니다.
방언 기도는, 저의 경험에 의하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나의 언어와 혀를 맡기고 기도할 때 역사하며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방언 기도를 사모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 중에 이 방언을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공 예배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예배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여기저기서 하게 될 때 얼마나 예배가 시끄럽고 질서가 없었겠습니까?
결국, 방언은 예배와 기도 시에 자신에게는 유익이 될지 모르지만, 공동체에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분명한데, 그 은사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해를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1절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도 ‘사랑’이 없다면 ‘nothing’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 해가 되는 은사는 참다운 은사가 아니기에 능력이 될 수 없지요.
그러면 어떤 방언을 해야 유익하겠습니까?
사랑을 추구하며 상대방에게 알아듣도록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압니다. 사도들이 능력을 받고 말씀을 전할 때, 각 나라의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알아듣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은사는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공동체에 유익한가를 고려해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에 유명한 외국 설교자들을 잘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통역을 세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설교하기를 원하는 유명한 설교가들을 사양한 적이 많습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늘 교회의 유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몸이 아주 아파 몇 달을 설교하지 못하고 쉬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하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평소에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귀한 목사님들을 어렵게 초청했습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주일 강단을 비우고 저희 교회에 와 주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은혜를 받은 분도 많습니다. 특히 신앙의 연조가 오래된 사람들에게는 그분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 중에서, 우리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 가운데 그 기간에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유명한 분들의 설교는 방송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이 말 속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들이 설교를 잘해도 담임목사처럼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잘하고 못하고의 차원이 아니라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을 따라 구하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지요.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영성을 추구하십시오! - 무엇을 위해?
이제 사도 바울은 유익이 되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의 목회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맥이 있다면 바로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유익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예언을 통해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예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예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proclamation’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셨던 말씀, 즉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초대교회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오늘날처럼 성경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구술한 내용과 전승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요즘처럼 신학교가 없어서 정규 교육을 받은 신학자나 목회자도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누군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딱히 정해진 설교자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여러 사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므로 이 설교 역시 알아들을 만해야 하고, 공동체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보다는 예언이 유익하다고 한 말은, 은사 자체의 유익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공적 테두리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 주관적인 신앙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의 삶을 가르치고 권면해 주는 지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데 있어서 규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입니다.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지요.
말씀은 공적이고, 객관성이 있으며 공동체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정이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방언보다는 예언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무분별하게 행해지면 역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를 든다면 그 예언을 말하는 설교자가 자격이 있느냐입니다.
먼저는 객관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는 자격을 갖추어 사용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설교는 예언의 은사라는 것을 기억할 때, 평신도 모두가 이런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객관적인 자격만으로 인정되고,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그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2장부터 계속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은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말하지요.
본문의 두 번째 단락에서는 우리가 ‘은사’와 ‘영성’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8~25절을 요약해서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보다도 방언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예배하러 모인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횡설수설로 들릴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누구나 알아듣고 배울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을 하고 싶습니다. …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 몇 명이 우연히 교회에 들어왔는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듣기 쉽게 명확히 말하고 있다면, 그들이 여러분의 말을 듣다가 진리를 접하고 자기 마음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영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명확한 것,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이 전달되는 것이 진정한 영성 아닐까요?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수님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정말 실력이 좋은 교수들은 강의를 쉽게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봐도 알 수 없게 써 놓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치거나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이 안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 굉장히 학문적 지식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는 데, 사실은 기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자!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것을 2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씀을 유추하여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특히 방언하는데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성한 신앙’, ‘성숙한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배려’에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신분’에 걸맞은 ‘수준’은 신앙의 실천으로 만들어집니다. 수준에 안 맞는 신분은 천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사를 많이 가졌다 해도 품위와 질서를 지키지 못한다면 천박해집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떠오른 ‘해결되지 못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목회하며 특히 ‘정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완전할 수 없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죠.
군목 시절, 저에게는 참 많은 열정이 있었고, 열심히 사역하다 보니 지휘관이 저를 참 많이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둘이 독대를 하게 되었고, 그 시간을 통해 부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분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임 상사 중의 하나가 병사들이 먹어야 하는 부식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보고한 일로 인해 그 사람은 보직을 해임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불의한 일을 하거나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마음의 부담이 된 것은, 그 사람을 하나의 인격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려는 따뜻한 마음이 없이 그저 ‘단죄’했다는 것이었죠.
또 하나의 기억은 1년간 대전 통합병원에서 군목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잘 아는 권사님 한 분이 많은 선물을 싸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유인즉슨, 아들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군의관에게 잘 이야기해서 좀 더 병원에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군의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는 빨리 자대로 돌려보내야 정신을 차린다고 했죠. 그리고 그 병사는 자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한 것은 없는 데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던 ‘정의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는 정의감이 얼마나 유치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한 정의로운 일들이 그렇게 정의롭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마도 옳은 일을 행하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내 마음’대로 행한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고린도 교회에서도 은사는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함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믿는 이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신앙을 버리고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는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식당에 가서 기도할 때, 교인집 사업장에서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병원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특히 조심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모여서 식사하는데 뒤에서 바로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쾌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의 없음으로 세상 사람에게 불쾌하게 들린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은사를 받고 장성한 자의 지혜를 가졌다면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기를 원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이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첫 부분에서 예언의 정의를 내렸지요. 예언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언은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 24~25절의 말씀을 보세요.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우리는 그 동안 예언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아니, 많은 크리스천이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예언을 받으러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님, 기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말은 자신이 지금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언은 구약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의를 말함으로 공의롭지 못한 자들을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책망에 대하여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과 책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되든지, 아니면 두려움으로 인하여 핍박하며 하나님을 멀리하든지.
방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지만, 예언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임하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은사가 예언 아닐까요?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공의를 선포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 앞에서 반응하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 사람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구해야 할 은사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본문 24~25절 말씀입니다.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예언하는 공동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하게 선포하는 공동체.
진리 때문에 비 진리가 드러나는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