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예수 안에 살기(요14장 8-10)
성경본문:요한복음 14: 8-10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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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한 번 예수님의 삶의 일정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잠에서 깨어나자, 지난밤 묵었던 조그마한 사랑방 창문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이른 아침 햇살이 보였다. 그리고 친구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분명히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마르다는 항상 산해진미로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리니까.
예수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사는 이 집에 머물기를 좋아했다. 하루쯤 휴가를 내서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예수는 ‘그러면 정말 좋겠군!’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탄은 절대 쉬는 법이 없지. 게다가 아버지는 나만 믿고 계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예수는 머릿속으로 오늘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위해 오늘은 뭘 하면 좋을까? 맞아, 점심에 설교를 한 번 해야겠군.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고 흡족해하시겠지.’
세수를 한 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중에도 그날의 계획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 이 일대는 병자가 많지. 오늘은 몇 명을 좀 고쳐 줘야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오늘은 축사도 좀 할까. 그것도 늘 중요한 사역이지.’
옷을 입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되면, 어느 장례식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겠군. 그래, 그래야겠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오늘 하루가 다 가겠고.’
새로운 하루를 맞으러 방을 나서기 전, 예수는 샌들을 신으며 기도했다. “아버지, 오늘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영광 받아 주세요.”
이 이야기는 스티브 맥베이가 쓴 [은혜가 다스리는 삶]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살아오면서 늘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지만,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늘 그의 머릿속에는 ‘할 일 목록’이 떠나지 않았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기뻤지만,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해야만 할 것이 많아져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는 물음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의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척 답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대답을 보세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9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뭔가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같고,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대상화”하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끊임없이 그것을 “내면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대상화하면 자꾸 우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이 내면화되면 그분과 함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부터 8번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은혜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 율법적인 신앙에 대하여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때로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아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술은 아픔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임을 명심하며, 그런 준비를 하고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신앙의 오류를 처음 예화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이야기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위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위나 의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세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뭔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자 이제 문제를 조금 쉽게 풀어가겠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무엇인가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요.
우리 모두에게는 착한 남자, 여자, 부모, 자식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콤플렉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점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단점을 이기려는 것이 적극적으로도 작용하지만, 늘 우리 가운데 상처로 자리 잡습니다. 왜냐하면, 콤플렉스를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콤플렉스는 그대로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콤플렉스는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하지요.
자식도 철이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자식이 되어야 하니까요?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선함과 노력이 그 삶을 그렇게 편안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힘들고 지쳐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절대로 그러한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지요.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그분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단순한 “섬김”에 기초한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생각 : 섬김 중심? 율법 중심!
오늘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그렇게 우리가 노력했던 섬김 중심의 신앙이 우리를 평안과 자유로 인도하기보다는 얼마나 율법에 얽매이게 했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섬김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면 자꾸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앞서게 되고, 그 노력이 불완전할 때마다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의 불안함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절)
어떻게 보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니면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중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수님 하시는 일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듣는 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싶은 거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괴리감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지요.
“섬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섬김이 나로 하여금 율법에 빠지게 합니다. 뭔가 목적이 있고, 바람이 있는 섬김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견딜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애쓰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났습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인데 아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세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바로 빌립처럼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요?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세요”. 아니 우리가 부모에게 이런 요구를 하지 않나요?
아빠. 엄마!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세요. 그때 부모는 참 답답하지 않을까요?
“얘들아! 꼭 그것을 보여줘야 알겠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하지 않니?”
빌립의 물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빌립아! 내가 늘 하나님과 함께 있어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시는데 무엇을 보이라는 것이니? 네가 나를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란다. 그냥 나와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없겠니?”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최고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늘 우리의 현재 속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스티브 맥베이가 [은혜가 다스리는 삶]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 무척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29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줄곧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성경을 읽었고 ‘법칙을 꼭 지키겠다!’라고 정기적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공표하곤 했지요.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의 삶이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뭔가 하려고 애쓰는 삶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그의 삶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기 위해 성경을 펼칠 때마다, 스스로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또 다른 계명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영적 수준까지는 너무나 먼 여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데 늘 쫓기는 자신의 모습 말입니다. 자신이 늘 원칙을 지키고 예수님을 ‘위해’ 살려는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이 스티브 멕베이만의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교인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교인들에게 자유함보다는 더욱 심각한 좌절감을 발견하고, 기도하고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기쁨보다는 더 큰 부담을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과연 이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나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나와 함께 살 수 없겠니?”라고 말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생각 : 순종과 복종의 차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오해가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이 복종하므로 열매를 맛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나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참 많은 결심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결단하며 끊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결단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보다 점점 더 무겁게 합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순종이 아닌 복종을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종은 우리의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시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옳은 일을 따라 살아가려는 시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종종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어느 날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말씀을 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결심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그런데 그 순간 제가 발견하는 것은 그 바쁜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 제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시인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기도할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 있었다면 결코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율법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지요.
언젠가 협성대 신학대학원 생들이 교회를 방문해서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 주에 몇 권을 읽으시나요?”
왜 제가 그런 사람으로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국민일보를 통해 ‘나의 서재’라는 코너에서 독서량이 많은 목사로 제가 소개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SBS에서 ‘명사의 책읽기’라는 코너에서 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학생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매주 책을 몇 권 읽어야 한다고 작정을 하고 살아가면 그 책 읽기가 행복하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책을 필요에 의해 읽습니다. 어느 주간 바쁘게 살아갈 때는 책에 손이 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식이 고갈되어 무언가 채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책을 읽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이 저에게 무척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책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책을 읽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책이 제 삶에서 일부분이 되어야지 그것이 부담이 되면 자유를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늘 부담으로 존재하는 한 여러분은 은혜가 아닌 율법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가장 비 신앙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변화산에는 우리의 의무감이 아니라 우리의 만남을 즐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 시간을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 시간에 여러분이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고백하는 것이 더욱 복된 일입니다.
자! 정리해 보겠습니다.
복종이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가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귀가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듣고 그중에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니까 복잡한 세상에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자꾸 버거워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것이 무척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들리는 소리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의 빌립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았지만, 다른 일이 많이 보이고, 다른 소리가 많이 들리니까 평안함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의심이 생기니 불안해진 것이지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며 성서를 원주민 말로 번역하는데 어려움에 부딪힌 선교사님이 있었답니다.‘순종’이란 단어를 대신해 쓸 말을 찾지 못한 것이지요.
하루는 그 선교사가 마을 광장 안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자신이 기르던 개가 옆길로 비켜가고 있었습니다.
그 개를 본 선교사는 휘파람을 불었고, 휘파람 소리에 개는 전속력으로 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옆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이 많은 원주민이 개의 즉각적인 반응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무이 아뎀 델레가우 계!"
이 말은 ‘당신 개는 귀만 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순간 선교사는 그 말의 뜻이 ‘당신 개는 열심히 듣는다.’ 즉 ‘순종이라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고, 그 원주민의 표현을 성경 번역할 때 순종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신속하게 반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귀가 여럿이면 말씀을 듣기는 하나 순종하기보다는 복종할 때가 많습니다. 복종하는 순간 순종할 때 느끼는 은혜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듣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사느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면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70년대 유명한 가수가 있습니다. 그는 대마초로 졸지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감옥에 살면서 억울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사형수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그의 진지함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사형수는 “당신은 곧 나가게 되겠지요.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 위해 못다 한 몫까지 합해서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감방에 들어와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비도 은혜도 경험하지 못하고 산 사람입니다.
그는 사형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대마초에서 해방을 받았고, 출소한 후에는 신학공부를 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사형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구원을 받았지만, 은혜를 누리고 살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 가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은혜로 세상을 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살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것인가?
아주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 교통경찰에게 법규를 위반해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부인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에 순순히 면허증을 내놓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바빠서, 모르고 실수를 했는데 한 봐 주실 수 없습니까?” 그때 교통경찰이 흔쾌히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잘못을 아신다니 한 번 봐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법규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일이 여러분에게서 일어난다면 ‘자비’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이러한 일은 교통경찰이 베풀어 준 자비이지 은혜는 아닙니다.
자비는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비’는 ‘공의’를 가지고 해결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공의대로 우리의 행동대로 우리의 생긴 모습대로 처분을 받는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고통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그런 자비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교통순경이 우리의 죄를 묵인해주고 용서해 준 것은 분명히 자비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아닙니다. 은혜는 그 교통순경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더니 “잠깐만요, 여기 10만 원이 있습니다. 오늘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자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응당 받아야 할 용서를 받은 것이고, 은혜는 그 이상의 것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자비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용서받은 감격에서 용서받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생명력 있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고 내일부터 하나하나 좀 더 자세히 은혜의 세계로 나가려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가가 있지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따라가신 발자취를 걷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은혜를 누리는 이런 삶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 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느니“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고 실제 시간을 재어보면서 서로 자기들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제 변화산을 주님과 함께 은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