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사도) 바르나바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으로 사라질 듯 보였던 제자단은 성령강림 이후 오히려 죽음도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공동체로 무장됩니다.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지역 위·아래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안티오키아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기원후 30년대 중반(약 37년경)에 창립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이방 지역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최로로 불린 역사상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 의한 초대교회 탄생과 사도들의 활동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본문 초입에는 열두 사도가 소개된 뒤, 곧바로 바르나바 사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만큼 중요하고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입력자 임의로, 소개 순서와 업적에 대한 개인적 소회로, ’열세 번째 사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출신(현재 지중해성)으로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 마르코와 사촌이기도합니다(콜로 4,10). 탄탄한 가문, 단단한 학문, 수려한 용모(?), 부유한 재력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금수저 출신으로 대세남이었습니다.
히브리 이름은 요셉입니다. 교회는 그를 그리스어로 바르나바 즉 ’위로, 격려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기록했습니다. ’바르나바‘라는 그 이름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을 예수님과 그 가르침인 복음으로 인도하고 격려하는 뛰어난 능력과 자질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개종자 사울을 일으키고 세워서 주님과 교회의 주춧돌이 되게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두 번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 만큼(사도 14,4-5.14) 교회 공동체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제자인 열두 사도 일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만나고 통찰하는 깊은 영안을 가진 그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또한 “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그는 그 땅을 팔아 사도단과 공동체의 운영비로 바쳤습니다(사도 11,24). 인적 물적 자산을 아낌없이 모두 바친 분입니다. 세상과 재물에 자유인이 되고 예수와 그리스도교에 전력투구한 그는 초대교회의 사도로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단은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에 큰 기대와 관심을 두고, 또 한편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적임자 감독 한 명을 임명하여 파견하였니다. 그가 곧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또 다른 뛰어난 공적은 사도 바오로에 대한 통찰, 중재, 동반입니다. 바르나바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다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께 매 맞은 사울(개명:바오로)의 비범함을 통찰하고 일으켜 세우고, 예루살렘 사도단에 중재하여 바오로 사도가 이방 지역에 선교와 교회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울이 아직 바오로가 되기 전, 그는 스스로 예루살렘에 사도단과 어울리려고 시도했지만, 과거 그리스도인 박해 이력으로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사울의 사람됨을 알고 이미 교분을 가졌던 바르나바는 기꺼이 사울을 예루살렘 사도단에 소개하였습니다. 바르나바 사도 덕분에 ’사울‘은(큰, 기도하여 얻은 이) 그 일원으로 ’바오로‘(작은, 겸손한)가 되어, 어마어마한 업적의 복음 전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사도 9,26-31.갈라2,9).
내가 아무리 제대로 많이 준비되어 있어도 불러주지 않고 써 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의 위대한 사명과 업적은 사도 바르나바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입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바르나바와 사울은 복음 정신으로 의기투합하여,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예루살렘*타르소*안티오키아)를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마르코 사도가 두 사도를 동반하였습니다(사도12,24-25). 두 사도의 복음 전파 활동으로 교회 공동체는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신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믿음과 역량이 검증되자 예루살렘 사도단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이방인 지역 선교 전담‘으로 세워 사명을 위촉합니다. 49년경 두 사람은 소아시아와 갈라티아 지방 여러 곳을 전교하였습니다(사도 13,1-14,28). 소위, ’1차 바르나바와 바오로 선교 활동‘입니다.
사람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오로는 ’헤르메스‘라 불렀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주로 연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서적 신학적 지식은 바오로가 몇 수 위였나 봅니다.(사도 14,12) 더구나 바오로는 선교지역에 서한을 남겨 그의 사상과 발자취를 직접 간접으로 후대에 전했습니다.
바르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활동한 공동체는 별 무리 없이 사도의 지도대로 따랐기에 서한을 보낼 필요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 결과 위대한 공적이 베일에 싸여 많이 아쉽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기록은 남기에 영향력 있는 기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차 선교활동으로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는 내용은 전하는 본문에서 특이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두 사람의 이름 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종전까지는 ’바르나바-바오로‘ 순서였는데, 여기서 부터는 ’바오로- 바르나바‘로 바뀝니다. 사도행전 편집자의 기준에 바오로가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사도 14,21).
48-49년경 두 사람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도 함께 참석하여 혁혁한 활동을 보고 했습니다(사도15,1-41),
바오로는 제2차 선교활동 시작 즉, 1차로 전교한 교회들 사목 방문과 더불어 추가 이방 지역 선교를 제의하였습니다. 이때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도 동반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팜필리아에서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나 함께 일하러 다니지 않은 요한 마르코를 동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견해와 감정이 격해져 서로 갈라졌고,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키프로스로, 바오로는 실라스를 선택하여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뒷 날 마르코는 사사로운 관계를 떠나 바오로의 든든한 조력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옥중에서 티모테오에게 서한을 발송하며 마르코를 두고,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2티모 4,11)이라고 합니다. 마르코는 주님께도 요긴한 사도였습니다. 주옥과 같은 복음서를 가장 먼저 집필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르나바 사도는 더 이상 사도행전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서로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후 사도행전 기록의 초점이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맞춰지며 지면에 드러나는 비중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 하나..., 본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바르나바 사도의 복음 업적도 사라지거나 줄어 들었을까요?
54-58년경 저술된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서간에서는 사도 바르나바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추가해 줍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가 파벌로 분열하는 상황에 대해, 본인이야말로 정통 사도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 ....우리는(바오로와 바르나바)은 그러한 ’권리(독신,자급자족)‘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1코린 9,6.12).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일찍이 예루살렘 사도단이 바르나바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성경 이후 전승에 따르면 그는 고향이 키프로스 섬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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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성무일도 아침 찬미가)
바르나바 승리하심 경축하오니
위대한 공로 화관 찬란하도다
주님께 향한 사랑 불타오르고
혹독히 주님 위해 수난하셨네
가졌던 전답마져 버리신 후에
신앙과 자선 사업 한데 묶어서
새로운 기쁜생활 보여주시며
주님을 믿는 백성 생기주셨네
위대한 바오로를 알게 되신 후
기꺼이 모시면서 협력하시고
성령의 인도받아 함께 다니며
무수한 해변 고을 누비셨도다
자신을 아낌없이 주께 바치고
주님께 많은 사람 불러 모으사
그들을 보살피다 순교하시니
피 흘려 승리 팔마 얻으셨도다
하느님 그의 전구 들어 주시고
우리도 용감하게 구원 길 걸어
영원한 천국 본향 다다른 후에
찬미의 기쁜 노래 없게 하소서
아멘!
2026년 6월 11일 오늘 사도 바르나바 기념일입니다. 당연히 미사 전례로 제대에 촛대가 축일급 두 개일 줄 알았는데 달랑 1개만 올려져 보니 기념일입니다. 이제와 새삼 교회의 전례등급 처리에 당황과 서운함을 느껴봅니다. 아니 바르나바 사도를?... 평소 공경에 오늘 더욱 가슴 더운 공경과 감사에 머물러 봅니다.
바오로 사도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교회의 대접입니다. 그런데 장발 루코비코(1901~2001) 장발은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이며 성서백주간을 한국에 도입 정착시킨 고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님의 숙부가 되십니다. 그분은 1925년~1927년 사이에 이 대작을 그리며 12사도에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를 더해 14명을 남겼습니다.
’열 네 분이라니,,,,‘ 장익 주교님 가문의 성경적 이해와 수용에 깜놀 마음입니다. 그나마 참 다행이구요. 각 사도의 발 아래 한글과 라틴어로 이름이 적어 두었습니다. 좌우 7명씩 배치했는데 신자석席을 중심으로 왼쪽 첫 번째는 베드로 사도 우측 첫 번째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우측 일곱 번째 있고,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각 사도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데, 바르나바 사도는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사도의 권위와 쉼없이 주님과 말씀을 전한 바르나바 사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11/pM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