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정 신부의 성서 백주간 11회 (죄와벌)

작성자빗방울|작성시간20.11.28|조회수147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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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게되는 아담과 하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과연 인간의 어떤 죄를 상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죄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벌은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1. 인간은 신이 될 수있는다? 신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분별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

: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왜 나쁜가? 우리는 성화(聖化-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를 꿈꾸며 살아가는데 왜 하느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가?

: '선악과'와 '성화'가 갖는 다른 의미는?

 

2.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내가 점점 커져 신이 없는 듯 살아가는 것!

: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3. 천사 이야기

: 옛날에 가르치던 천사의 등급

: 가톨릭 교회는 745년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4.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선악과'의 의미는?

: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바빌론 유배로 인해 하는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유다인들.

: 유배지인 바빌론에서 알게 된, 인간은 지혜를 얻음으로 행복해진다는 '지혜사상'

: 창세기의 저자는 지혜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당시의 지혜사상을 거부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선악과'를 지혜의 상징으로 표현해 두었다.

: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근본은?

 

5. 오늘날의 선악과는?

: 문명과 기술발전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현대 과학기술의 믿음

: 우리는 어떤 선악과를 따먹으려 하고 있나?

 

6.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 그리고 은총

: 죄의 본질은(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숨는 것이며. 이에 따른 벌은 우리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 하느님은 재판하지 않으시고 '너 어디 있느냐'며 우리를 찾고 계신다.

: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신부님 방송 강의 요약 자료 발췌합니다 )

 

*창세 3,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었다

-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죽을 운명이 된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십니다

- 옷을 입혀주시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래도 보호받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 아담과 하와(인간)가 지은 죄의 본질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선과악을 구별하는 무언가를 얻음으로써, 무언가를 함으로써, 후에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가 선교여행때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사람들이 신들이라 생각하자, 자신들의 옷을 찢어버리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도구일 뿐입니다'의 말을 하면서 이 부분과는 상응된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 복음 10,23-39절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인지에 관해서 의구심을 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시편 한 구절을 인용하며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요한복음 10,34) 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그 말씀과 관련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신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에 관한 갈등이 생긴다

성화(聖化, divinization) -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의미

- 신화(glorification,deification)와 성화는 같은 의미인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신화는 '내가 능력을 키워서 신을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죄' 하느님과 내가 대결 구도를 통해 신을 이겨서 몰아내는 모습

반대로 요한 복음 10,34-39절의 말씀처럼 나의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커지셔야 한다' 는 의미이다.

즉 성화, 신화란? 나는 점점 사라지고 하느님이 점점 그 자리를 채워 나가는것! - 하느님과 일치하여 친교를 이루는 것을 말함

- 신화 성화가 되는 것에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인 내가 점점 커져 신이 없는 듯 살아가는 것과 반대로 하느님이 나를 채워서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것이다

 

* 창세 3,24

- 커룹(하느님을 호위하는 천사) 복수형 케루빔, 스랍( 하느님을 찬양하는 천사,세라핌)

- 과거의 성서신학과 교의신학에서, 교의신학에 천사학(angel lore)이 있었는데(지금은 천사학이 없다), 중세때 천사학의 총론을 보면, 천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천사들(천국의 시민들)이 9등급으로 나뉘었다

- 천사등급( 세라핌- 케루빔- 좌품 - 주품 - 역품- 능품 - 권품 - 대천사 - 천사)

- 교회에서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745년 라테란 공의회), 유다 전통안에서는 많은 천사가 등장하고( 세 대천사의 이외에 '우리엘'이라는 대천사가 있었다)

 

* 선과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

-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서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자,바빌론 유배가 시작되었다( BC 597?~BC 538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유다 상위계층들이 포로가 되어간 사건)

유배간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지?  

- 유다인의 정체성 위기로 국가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 유배 생활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했다(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이스라엘의 존재에 관한 물음과도 같다)

- 그렇다면 하느님(야훼)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해명하면서 그 이전의 다신적 신관( 단지 야훼는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시다)에서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인들은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은 한분이시다.'라는 인류 최초로 유일신관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유다의 하느님이 바빌론의 신인 마르둑에게 싸워서 진게 아니라 이 세상의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오른팔인 바빌론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것이라는 생각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스라엘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이다! 

 

- 바빌론 유배당시의 그들이 본 바빌론은 새로운 신문화였다(1950년대의 사람들이 뉴욕을 보는 느낌?), 바빌론의 신문화에 잠식된 그들은 당시의 바빌론문화의 지혜사상에 관심갖게 되었다.

- 지혜사상 : 인간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상,(철학에서 행복은 종교에서 구원과 동의어, 행복= 구원)

지혜사상이 말하는 지혜의 정점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의 가장 중요한 정점도 분별하는것(discernment),식별하는 것이 목표인데 지혜사상도 옳은 것과 그른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그렇치 않은 선과악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창세기 2장-3장의 저자(편집자)들은 그러한 지혜사상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사상에서는 지혜를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고, 지혜를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불행은 지혜에서 시작되었고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지혜가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사상을 부정한다(지금까지의 모든 불행이 잘못된 지혜사상에서 온 것이다, 라는)

 

- 따라서 창세기 2-3장의 저자는 지혜사상과 야훼신앙을 적대적 관계로 놓고 있다( 진정 행복하려면 무엇을 쫓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후에 구약성경의 지혜문학( 욥기,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에서는 창세기 2-3장의 지혜처럼 비판하지는 않는다

코헬렛의 '헛되고 헛되도다(헤벨 하발림)'의 내용으로 비추었을 때 지혜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듯 하지만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데 있다고 말하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구약에서 '의인')이라고 설명한다. 기존의 예루살렘에서 잘 지켜왔던 토라(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해왔던 것을 잘지키며 살아가면 된다)라고 설명하며 지혜사상을 신학화한다.

 

신학적 개념들

* 죄

* 벌

* 은총 : "너 어디에 있느냐?"

* 구원

 

- 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숨는것(멀어지는 것)이다.

- 벌은?

이에 따른 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벌은 하느님이 내리지 않고, 인간 스스로 초래한다(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벌은 공간적인 개념이고, 오늘날 윤리 신학자들은 '천국과 지옥은 다른곳이 아닌 같은 곳이다'라고 말한다. 단지 하느님 나라에 가게되면, 하느님의 영광으로 자신이 감추려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 환하게 드러나 버린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향하였던 사람은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향하지 못하였던 이는 부끄러워 하느님으로 부터 멀리 어둠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는

- 은총?

죄지은 인간을 "너 어디에 있느냐?" 라고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모습 바로 은총이다

인간을 찾다가 찾다가 스스로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본질

창세기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은 재판관이 아니라 부모처럼 우리를 몸소 찾아나서시는 하느님이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 구원?

찾아나서시는 하느님(은총)을 통해 우리들은 구원을 받고 행복해 질 수 있다. 은총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예"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그리스도 구원론의 출발점이고 마지막 결론이다)

 

* 생태신학의 관점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창세 3,17) - 인간의 죄는 생태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이해한다. 예전에는 생태(eco)라는 말보다 환경(environment)이란 인간중심적이고 기술과 환경중심적 접근인 환경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생태라는 말은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출발점을 시작으로 인간의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면까지 보아, 인간중심적인 창세기 부터 반성을 해야한다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창조는 가장 마지막이고 창세기 2장에서 등장하는 인간창조는 처음에 등장한다. 처음과 마지막에 있다는 것도 또한 창세기가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기록되어있다고 설명한다

 

나무

* 생명 나무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 무화과 나무

* 고퍼 나무( 전나무라 하지만 정확히 모른다)

* 십자 나무

 

- 생태신학의 관점에서 선악과(지혜를 얻는것)에 대한 기록을 현대 문명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 문명과 기술 발전을 통해 원하는 것이라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을 비판한다

- 생명 나무에서 십자 나무까지 인간의 불행에서 구원까지는 나무의 문제였다( 환경의 문제 해결안으로 나무를 많이 심는것~)

 

지금 내 안의 자리잡고 있는 생각들이 하느님께로 향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느님께 그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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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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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1.03.22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3.2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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