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조금 늦은 출발인 원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강의 시작, 얼마 후에 도착하였습니다.
터미널로 배웅나오신 형부가 "최승정 신부님 강의라면 평양까지 가겠어!"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저는 "맞아요 당연하죠." 하고 웃으며 답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원주 가톨릭 센터, 마리아홀 문을 살포시 열고 뒤편에 앉아 계신 수녀님께 미소 지으며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저역시 성호를 긋고 준비하였습니다.
탈출기에 관해서 이야기하시기 앞서 탈출기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성경은 한권으로 되어있어요. 성물 판매소에 가서 성경 73권을 달라고는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사실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창세기, 탈출기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와서 각각의 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그 책을 썼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의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영감을 주셨고, 그 영감을 받은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받은 영감을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오해를 피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쓰시고 땅으로 던져주시는 책이 아니다.
둘째 성경은 하느님께서 불러주시고 인간이 받아 쓴 책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영감은 라틴말로 inspiratio에서 영어의 inspiration가 나왔습니다. 그 단어 안에서
in : ~ 안에
spirit : 영(정신)
"인간의 영안으로"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동시에 육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온전히 이해했을 때 영과 육, 조금 다른 설명으로 보이는 것과 잴 수 있는 세계(물리적인 세계)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그 영적인 세계는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과 결합해 온전한 것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소위 말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잴 수 없는 것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물질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주의적인 생각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그 두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갈등구조에 있습니다. 물질주의적인 사고 안에서 자본주의도 있고 물질주의적인 사고 안에서 공산주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신부님은 자본주의를 쫓아 살아가십니까? 공산주의를 쫓아 살아가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신부님은 국민의 힘을 지지하십니까? 민주당을 지지하십니까? 어느 파이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그리스도 파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건에는 그것이 갖고 있는 육적인 것이 있고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계엄도 있었고 탄핵도 있었습니다. 곧 대통령 선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갖고 있는 영적인 관점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문제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시대의 징표를 보여주시나? 하고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영적인 측면이 있고 그 모든 것에는 육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두 가지가 서로 병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영적인 것만 추구하면 육적인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혹은 육적인 것만 추구하면 영적인 것이 약해지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라틴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anima sana in corpore sano"(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내면으로는 병들어 있으면서 육체만 건강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들면 우리 내면도 약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아프다 보니 육체적인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가 우리 사회의 영적인 건강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영적으로 병들면 많은 분들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성서 기자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은 성서 기자는 그 영감을 텍스트로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종교는 유다교와 이슬람교는 텍스트의 종교입니다.
믿기 어려워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들이 공부하는 신학 내지는 신앙은 그 대상이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신학교에 가면 신학원론이라는 과목을 배우게 되는데요. 신부님은 최창무 대주교님께 배우셨다고 합니다.
최창무 대주교님은 신학생들을 참 사랑하셨지만 점수는 객관적으로 주셨다고 해요. 답안지에 쓰인 대로 점수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때 신학원론 마지막 문제 중에 하나가,
"인간이 하느님에 관해서 학문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이셨습니다.
신부님의 선배님 중의 한분이 "인간은 하느님에 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에 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답하셨는데요. 장렬히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사라는 의미는 F를 맞으시고.... 신학교를 일 년을 더 다니셨다는...)
왜냐면? 좀 전에 말씀하신 부분은 신학적 이론으로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고 하는데, 불가지론은 이단입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에 관해서 말해?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라." 하는 말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이단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는 정도...."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둘 다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얼마큼 알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만큼 알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말의 동의어가 묵시입니다. 그 묵시(apocalypsis)와 계시(revelatio)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느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것에서부터 신학도 신앙도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것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고,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체험이 계시의 중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경,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텍스트를 통해서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느님이 자신을 텍스트로 고정시켰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는 올바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성서기자가 느끼거나 받았던 영감으로 갈 수 있는 텍스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문자로 고정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성경에 있는 텍스트는 그 자체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것을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여(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집착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제일 중요한 문제, 한국인에게 제일 중대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삼겹살을 못먹게 됩니다."
레위기에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삼겹살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그건 구약이잖아요." 하고 말씀하시지만, 구약이나 신약 모두 하느님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레위기에 말씀에 나오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그런 구약 전통을 우리와 공유하는 유다인들과 이슬람은 2025년 현재에도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이루어지는 음식의 규정과 조리방법들을 이슬람에서는 할랄, 유다에서는 코셔라고 하는데 그 할랄과 코셔 둘 다 돼지고기를 안 먹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문자적으로 그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먹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에 관해서, 레위기 저자가 레위기를 쓸때 돼지를 부정한 동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면 돼지고기를 먹고 사람들이 병이 났습니다.
신부님 어린 시절에도 돼지고기를 먹고 설사하며 아프신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돼지고기를 잘 보관하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돼지가 좀 지저분해서 부정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과학적으로 연구하신 분들이 보니까 돼지가 피부가 너무 두꺼운 것이었어요. 그런 것 때문에 촉촉한 것을 보면 몸을 문지르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 돼지의 피부에 보습을 잘해주니 구정물 같은 곳에 잘 뒹굴지 않게 되었어요.
돼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부정한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신부님이 외국에서 학생신부이셨을 때 돼지를 애완돈으로 키우시는 분들을 봤는데, 돼지가 꽤 똑똑하고 인간과 공감 능력이 있다고 해요.
따라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는 레위기에서 돼지를 먹지 말아라, 하는 텍스트를 지워버려야 할까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가 갖고 있는 거룩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함부로 없애거나 바꾼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믿음에 중심에 있습니다.
16세기에 있었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키고 있는 이 텍스트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보태지도 빼서도 안된다는 공의회의 결정을 신부님은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저편, 너머의 것을 읽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다. 먹어서는 안 된다." 하고 읽지만, 알아듣는 의미로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부정한 것들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각각 저자들의 세계는 가부장적인 세계였습니다. 그 텍스트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는 하느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성서 기자들의 사회적 문화적 한계일까요?후자의 견해였을 것입니다.
신약의 바오로 서간을 읽다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인들은 남성들의 말에 복종하십시오."라는 말은 문자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그 문자를 해석하면 "여러분들이 혼인했다면 배우자를 존중해야 합니다."라는 뜻으로 올바로 알아듣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텍스트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는 여정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주어진 분량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읽고 해치워버려야겠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신부님이 본당 사목하셨을 때 "신부님 저는 성경을 일곱 번 통독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신자들을 보시곤 하셨는데, 좀 전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은 계량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계량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본당사목 하시면서 사목회와 자주 다투셨던 부분은 영명 축일에 "저는 영명 축일에 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사제들을 위해서 신자분들이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며 피정 같은 것을 가시곤 하셨는데 그다음 해에 사목회에서 "신부님, 영적 선물입니다." 하시면서 미사 몇 번, 묵주 기도 몇 단, 등의 선물을 건네셨다고 해요.
하지만 영적인 것은 계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세워서 드린다면요?
신부님은 "저는 신자들이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히 기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고 해요.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의 비공식적인 가르침이 있는데요.
누군가가 신부님을 위해서 미사 10번을 드린다고 묵주 기도 100단을 드린다고 영적 선물을 주셨을 때, 그것을 도중에 그것을 멈추시면 그 나머지는 신부님이 채워야 한다는 교회의 비공식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웃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시라고 ㅎㅎㅎ
따라서 성경의 텍스트와 함께 우리가 하느님의 영감에 도달하고자 할 때 제일 좋은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 텍스트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하느님, 제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부님은 가끔씩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시는데, 그렇게 감상을 하시다 보면은 어떤 작품 중에 하나가 신부님께 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멈추시고 그 작품과 대화를 하신다고 합니다.(신부님은 노멀 하시고 합리적인 분이세요.)
그리고 거기서 작품 감상을 끝내시고 나머지 작품을 보시진 않는다고 해요. 나머지는 볼 필요가 없다고 느끼시니까요..
여러분들이 성서를 읽으시다가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을 읽으시다가 5절에서 무언가 내 마음에 울림을 느끼게 된다면 그 부분에서 멈추시고 깊은 묵상을 하세요. 그걸로 충분합니다.(그때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몇 번을 읽었다는 숫자가 우리에게 인간적인 성취를 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것이니까요.
아무튼 그 한 권의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뉩니다. 구약은 옛 계약, 신약은 새로운 계약으로
그 구약을 우리가 크게 구분하면 유다교의 구분과 그리스도교의 구분이 조금 다릅니다.
유다교에서는 구약을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는 오경(모세 오경)
두 번째는 예언서
세 번째는 성문서
그 구약의 구분이 그리스도교로 넘어오면서는 조금 달라집니다.
첫 번째는 오경
두 번째는 역사서
세 번째는 시서와 지혜문학
네 번째는 예언문학
먼저 유다교적인 관점에서 보면은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뉘게 되는데, 이것은 신학적인 비중을 놓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오경이 제일 중심에 있고, 그리고 예언서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고, 성문서가 또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유다교의 탈무드를 보면은 '울타리를 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예언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예언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문서로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조금 다릅니다.
오경과 역사서가 구약의 전반부인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입니다.
시간적인 흐름을 갖고 있는 산문문학입니다.(역사 소설 같은..)
반대로 시서와 지혜문학 그리고 예언서로 넘어오면, 이것들은 시문학입니다.
물론 예언서 중에서 중간중간, 예를 들어 이사야서 36장에서부터는 산문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은 시문학입니다.
앞의 오경과 역사서에서 보면 시문학이 나옵니다. 탈출기에서도 "모세의 노래" "미르얌의 노래"가 나오지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은 산문문학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그리스도교는 구약 전체를 문학적 형태로 구분했습니다.
앞부분에는 산문문학, 뒷부분에는 시문학.
그리고 그것을 시간적으로 배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중간 중간 따지고 보면 '시간적인 구분이야?'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시간적으로 구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틀 위에서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인 배열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첫 부분인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의 책이 있는데,
지금은 오경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모세가 저자일 것이라고 교회나 유다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모세오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저자가 자기 죽는 이야기까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교우들도 유다교의 랍비들도, "모세 정도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죽음정도는 쓸 수 있었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요즘에는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납득이 좀 안 가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후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더니 모세가 "그거 정말 내가 쓴 거야."라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확률이 낮다는 것뿐이고 아직까지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가르침, 로마에 가면 성서 위원회가 있는데, 그곳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없다."는 것이 공식적인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모세오경? 모세가 저자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모세오경의 중심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주인공입니다. 물론 더 주인공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카운터파트로서 인간 측의 주인공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의 다섯 권의 책 중에서 신명기가 조금 이상한 책이에요. 신명기는 어떻게 보면 없어도 되는.... 왜냐? 신명기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어요.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의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래서 신명기의 라틴어 제목이 "데우테로노미온"
여기서 듀테로는 두 번째라는 의미이고, 노미온은 법이라는 의미예요. 즉 둘째 법, 첫째 법을 한번 더 리메이크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서 첫째 법을 새로 썼다.라는 정도의 의미를 신명기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창세기에는 모세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모세오경의 다섯 권의 책 중에서 첫 번째 책과 마지막 책은 사실은 없어도 될, 내지는 몸통이라고 볼 수 없는, 보통은 중요한 몸통의 것이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인데...
탈출기, 레위기를 준비하는 것이 창세기고, 레위기와 민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는 책이 신명기입니다.
우리에게 일단 다섯 권의 책이 다 중요합니다만, 특히나 신명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어떤 분이 신부님에게 와서 "신부님, 제가 구약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데.. 우선 급하게나마, 빨리빨리 읽어야 한다면 어떤 부분을 읽어야 할까요?" 하고 물으신다면,
두 가지를 추천하신다고 하셨어요. "신명기를 읽으시고요. 이사야 예언서 40장부터 52장을 읽으세요. 산문문학 중에서는 신명기를 읽으시고, 시문학 중에서는 이사야서 40장~52장을 읽으세요."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으시고요. 그리고 로마서를 읽으세요."라고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구약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뼈대가 되는 부분이라고 보시기에, 시간이 충분하다면 처음부터 천천히 끝까지 읽어가시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탈출기를 들어가기 위해서 앞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요.
하느님의 세상 창조 : 1장~ 11장
성조사 : 12장~50장
1장~11장을 신부님께 5분 동안 설명해 주세요. 하고 누군가가 말씀하신다면...
"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보시니, 참 좋았다.' 그런데 그 창조의 협조자로 불림을 받은 인간이 협조는 안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죄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인간의 타락, 둘째 인간의 폭력.
타락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는 윤리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타락은 ' 하느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저질러지는 죄입니다. 반면에 폭력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죄입니다. 묘하죠? 십자가 모양이 나와요.
타락은 수직선입니다. 폭력은 수평선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구약에 있는 율법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고 물으니
예수님이 신명기 6장을 인용하십니다.
"네 마음과 네 생각과 네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수직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을 인용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라."
인간의 죄가 수직적인 죄와 수평적인 죄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 죄로부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서 수직적인 죄를 치유하는 하느님 사랑, 수평적인 죄인 폭력을 치유하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심으로써 죄에 상처받은 세상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말씀이에요.
그럼으로써 그 죄가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로 계속 반복돼요. 그러다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을 후회하시고 홍수가 일어납니다. 노아의 홍수.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나서 세상이 새롭게 출발해요. 함과 셋 그리고 야펫과 함께
그리고 나서 세상이 좋아졌을까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탑을 쌓아 올리는데 탑을 쌓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본질적으로 아담과 하와와 지은 죄와 같아요. 아담과 하와는 왜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죄와 바벨탑의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다음 문장을 완성해 보십시오. 우리가 속물이라고 가정하면서
"돈만 있으면 다 돼."
가끔 이런 멋진 말을 하는 분들이 있으시죠?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어."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돈이 좀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ㅎ
이상하게도 강의가 끝나면 이런 것만 기억하세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누굽니까? 하느님!
그렇게 돈만 있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어.
그래서 그것을 물신주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넓은 길, 넓은 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그리고 바벨탑의 죄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중독된 우리의 본질적인 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하느님 백성에게 있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삶에 의미는?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은 점점 커지시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반대로 가는 유혹에 자주 휩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입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우선 내 뜻부터, 하느님 우선 들어주시고 그러면 생각해 볼게요."하고 신앙을 일종의 거래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스스로의 신앙생활을 성찰해 보면, 신부님도 역시 그렇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셨던 것 같다고....
그렇게 하느님의 자리를, 하느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죄가 반복이 되고,
창세기 1장~11장만 놓고 보면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실패하셨어요.
하느님은 포기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으셨을까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12장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11장의 내용은 문학적으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면? 왜? 하느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신의 축복을 세상에 전해야 했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창세기 1장~11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2장, 성조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성조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절까지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셋째 날 땅이 드러나는 부분이고, 여섯 째날 그 땅 위 사는 동물과 인간이 창조되는 사건입니다.
"땅" 나중에 시나이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도 "약속의 땅"
따라서 구약은 부동산에 관련되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동산이 아니라 "내가 뿌리를 내리는 땅"
내가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된다는 것.
그들은 자기 땅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아브라함이 양 떼를 몰고 가다 풀좀 먹이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풀을 먹일 수 있었고, 물도 얻어서 양 떼들의 목을 축였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양 떼가 불어나면 땅주인들이 좋아했을까요? 싫어했겠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야곱과 에사우가 처음에는 싸웠지만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부터 돌아와서 둘이 함께 있다가 결국은 헤어질 수 밖에 없었어요. 에사우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에사우의 후손들이 에돔민족이 되어요.
야곱은 스켐지역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자리를 잡았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자, 무리를 해서 아내 사라를 묻을 곳을 사는데 막펠라라는 곳에 땅을 샀어요.
야곱이 스켐이라는 곳에 땅을 사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보면 감동적으로 적혀있어요.
왜냐면 그곳이 그들이 가졌던 첫 번째 땅이었으니까요.
나중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져 나가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이 번성한 시기에 있다가 솔로몬이 죽고 나서 왕국이 갈라져버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중심이 스켐, 남왕국의 중심이 예루살렘이지만, 남왕국의 왕들이 즉위식을 하는 곳은 헤브론인데 그곳이 바로 막펠라입니다.
따라서 북왕국의 수도는 나중에 사마리아가 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고향은 바로 스켐이었어요.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고향은 헤브론(막펠라)이에요.
왜? 이곳들이 그렇게 중요한가?
창세기는 성조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12장~50장)
그런데 그 별 볼 일 없는 성조들이, 어느 정도로 별볼일이 없었냐면요.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가서 파라오가 "같이 다니는 여자가 상당히 아름다운데, 누구야?"
"제 누이입니다."하고 대답했어요. 사실 거짓말은 아니죠. 사라가 사촌이니까.
그렇지만 부인이죠.
아비벨렉이 또 한 번 물어보니, 아브라함이 또 "제 누이입니다." 그리고 이사악도 아내였던 레베카를 "제 누이입니다." 하고 대답했었죠.
(라반의 딸이니 누이가 맞지만, 부인이죠)
이런 남자들에게 딸을 주시겠습니까? 곤란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인을 지킬 힘도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렇지만 하느님의 축복은 지켜냈어요. 이것이 그들이 성조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을 지켜내는 것이었죠.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에 하나가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자, 요셉은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 성조사 전체가 그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성경에서 이런 부분이 많아요. 예를 들어, 예수님 부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초점을 맞추지만 누군가 신부님에게 물어본다면....
2025년 5월, 예수님 부활 사건에 제일 감동적인 부분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라뿌니"하고 부르는 장면과 또는 토마스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말하는 부분이라고 하셨어요.
그 한마디 탄성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을까? 신부님께서 20~30년 동안 부활시기에 묵상하는 그 한마디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조사에서는 요셉의 한 문장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와 함께.
그러고 나서 요셉이 팔려가죠. 이집트로 팔려가고,
가나안 쪽에 기근이 들자 야곱이 열두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는데,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일흔 명과 일흔두 명이 되는데요.
70이라고 세고 나서 요셉과 야곱은 따로 세워야 한다고 해서 72로 세는 사람들이 있고, 70이라고 세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현상이 몇 번 등장합니다.
마태오나 마르코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카복음을 보면은, 예수님이 일흔 명의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수사본에서는 70이 아니라 72라고 나와요(예전에는 루카복음을 손으로 썼을 겁니다. 인쇄술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구약성경을 히브리말에서 그리스말로 번역할 때, 일흔 명의 사람들이 번역했다고 해서 셉뚜아진따, 70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70명이 아니라 72명이라는 정보를 주는 옛날 문헌도 있어요.
70과 72가 항상 왔다 갔다 하는 숫자처럼 등장합니다.
나중에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는 몇 명이 나왔을까요? 60만명이 나왔어요.
믿을 수 있으세요? 70명이 들어가서 60만명으로!
시간으로 보면 400년에서 430년 정도인데, 그것이 60만명으로 된다? 신부님도 처음에는 못믿으셨다고 해요. 그런데 본당 사목을 하시다가 그것을 믿게 되셨다고 해요. 할머니 봉성체를 가셔서 가족 사진을 보시게 되었는데, 그 사진 안에 약 70~80명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따져보니까 7~8명을 낳았고, 그 7~8명이 또 나중에 일곱여덟 명을 낳았다면..
"아! 육십만 명 가능해!!"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성조들,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을 때(창세기 15장과 17장)와 야곱과도 계약을 맺는 장면에서 하느님의 축복은 "너의 자손이
첫째 하늘의 별처럼,
둘째 바다의 모래알처럼,
셋째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해 주겠다."라는 말씀이셨어요. 그래서 축복이 실현이 돼버린 것이에요.
창세기 시작하면서 탈출기로 들어가는 명단이 한번 나오고 나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그들이 그렇게 수가 많아지고 강해졌다.라는 것으로 탈출기가 시작을 해요.
그런데 그 축복이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것을 무서워합니다.
탈출기 1장을 기억해 보세요.
"이집트에 새로운 파라오가 나왔다." 그런데 그 새로운 파라오를 묘사하면서 "그는 요셉을 알지 못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이 또한 성경을 관통하는 말입니다.
"알다" 히브리말로 "야다"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째 날 "빛이 있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창세기 저자에게 있어서 창조 이전의 세계와 창조 이후의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창조 이전에는 빛이 없었는데 창조 이후에는 "빛이 있었다"입니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좋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빛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인지 내지는 인식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라는 말씀은 단지 빛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 소리, 그 밖의 모든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창세기 저자가 "빛이 있어라"하는 하느님의 명령을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그 안에 감춰두고 있는 것이에요.
궁극적으로 인간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들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보다, 듣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옵니다. 그 모양을 그리스말 텍스트로 직역하자면 "혀모양의 불"이에요.
왜? 혀모양일까요? 바로 소리에요. 뜨거운 소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히브리말에서는 보다와 듣다,라는 동사가 서로 왔다 갔다 쓰입니다. 누가 말하는 것을 볼 수도 있어요(인지한다는 것)
그렇게 보고 듣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바로 "알다"입니다.
"보다와 듣다"가 레벨 1에 해당하는 동사라면,
"알다와 같은 차원인 믿다"가 레벨 2에 해당합니다.
레벨 1에 해당하고 그것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부분을 인용하는 신약에서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레벨 2인 두 번째 차원에 들어가야지 올바른 신앙에 닿은 것이겠죠. 하느님을 아는 것.
요셉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아는 것.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내가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아듣는 것.
신앙생활에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알아가지만 더불어 그 가운데 우리가 받게 되는 선물이 바로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또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어요.
신부님께서 육학년이 되시면서부터 갑자기 주변의 친구들에게 전화가 많이 온다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동창들, 중고등학교 동창들, 그리고 대학동창들.
육학년이 되면서 그분들도 은퇴를 하셨잖아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신부님을 찾아와서 좋은 이야기도 하시지만 열분 중에 일곱여덟 분은 "아, 요즘에 인생이 참 허무한 것 같아." 그럴때 신부님은 냉정하게 대답하신다고 해요. "인생이 허무한 것은, 네가 지금까지 허무한 것을 쫓아 살아서 그래."
신부님은 이렇게 직구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허무하지 않은 것을 쫓아 살아봐. 그럼 삶이 달라질 거야."
신자분들 중에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언가 바꿔야 할 것이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적어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앗! 나는 오늘 하느님과 함께 어떤 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찬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신자분들 앞에서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는 모습이 우울해 보이십니까? 신나 보이십니까? 하고 물으시자
"신나 보여요." 하고 답하시는 교우분들.
파라오가 요셉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 인생의 과정에서 성조들은 알아가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의 "알다, 안다"의 말씀이셨습니다.
파라오가 요셉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점점 수가 많아지고 강해지니 파라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파라오의 두려움의 기저에는 "무지"가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에요.
신부님은 영화를 보실 때 괴기 영화를 보시지는 않으신다고 해요. 돈을 내고 즐거워야지, 굳이 무서운 것을 보아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는 사람들 때문에 무서운 영화를 보시게 되면, 그 무서운 영화는 보통 괴물이 등장할 때까지 무서워요. 괴물의 정체를 모를 때까지. 그 괴물이 등장하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뀡이라는 동물이 있죠? 여우가 그 꿩을 잡으러 쫓아가면 꿩이 도망가다가 이상한 짓을 해요. 바로 숲에 머리를 박아요. 그리고 결국 잡아먹히는 것이죠. 인간도 비슷해요. 극장에 가서 보면은 아이들이 무서운 장면을 보면 눈을 가려요. 내가 안 보면 상대방도 나를 못 본다고 생각하는 꿩의 어리석음을 우리도 비슷하게 행하죠.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할 때 눈을 감아버리죠.
하지만 위험을 피하려면 그것을 직시해야 해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해요.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의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파라오의 두려움은 무지에서부터 옵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기 시작해요. 그들에게 무거운 노동을 시킵니다. 억압이 한차원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 또한 상승해요. 탈출기 1장, 2장.. 등을 읽어보면, 한 차원 낮은 단계에서 시작했는데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이 불어나자 그 노동의 단계를 더 높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주로 나타나는 특징인데요. 진흙이나 지푸라기를 가지고 벽돌을 만들었어요.
처음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벽돌을 만들라고 노동을 시켰다가 나중에는 "지푸라기까지 너희가 마련해."라고 노동의 강도를 높입니다. 착취가 점점 상승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몰래 죽여버리라고 산파들에게 명령을 했는데, 나중에는 공개적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라고 명령하였어요. 그 또한 상승의 표현.
그러면서 이스라엘인들이 파라오의 억압에 대해서 부르짖자,
그 부르짖음의 소리가 하느님께까지 들리자,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찬미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당신은 기억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다신적인 신관이 있긴 합니다.
"저 다른 민족들의 신은 자기들이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는 신들인데, 당신은 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라는 의미로서,
하지만 하느님의 기억력이 좋으신 것이 때로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기억하시는 부분이 탈출기 20장의 십계명의 텍스트에서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관대하신 분이시지만 하지만 삼대 사대가 되도록 끝까지 그것을 기억하시고 셈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는 달리 똑똑하신 분이시다.라는 고백이 나와요.
그래서 이제부터 그 역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탈출기의 서두입니다.
10분의 휴식 시간을 보내고 시작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앉아계셔서 가까이 가시고 싶은 마음에 무선 마이크를 드시고 왔다 갔다 하셨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뭐래?" 하니까 할아버지가 "몰라"
신부님께서도 가끔은 "난 이런 것도 알아요." 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때도 있으신데, 그런 유혹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본당 사목을 하시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신자분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첫 번째 시간의 그런 억압의 단계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읽으셨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남자 아이가 레위지파에서 태어나는데 파라오의 명령에 따르면 남자아이를 죽여야 해요. 그렇지만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어요.
탈출기의 저자는 그 남자아이를 죽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잘생겨서,
예나 지금이나 잘생기면... 모세는 신생아 때도 잘생겼나봅니다^^
여기서 잘생겼다는 말을 히브리말 형용사로 하면 tov/tob 라고 쓰이기도 하는데 이 형용사가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시니 참 좋았다.라는 부분을 "바이야르 티토브" "보시니 좋았다"
따라서 여기서 모세가 잘생겼다는 말은 "좋은 모습이었다" 그 좋다라는 말 안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우리가 끌어온다면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진, 선, 미"
토브라는 것은 진선미라는 덕목을 갖추었을 때 가능합니다.(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웠을 때)
모세가 어느 정도 자라다 더이상 키울 수 없게 되어서 바구니에 아이를 넣어서 강가에다 띄우는데 파라오의 딸이 그 아이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아기 모세를 태운 바구니를 히브리 말로 테바라고 합니다.
그 테바는 노아의 방주, 그 방주도 테바입니다. 테바라는 것은 무언가에 역청을 발라서 물에 빠지지 않은 것(정수처리)일 텐데 그것에 담긴 신학적 함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중에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실 때 땅을 약속하셨어요, 창세기에서도 그 땅은 생명을 의미하는데
반대로 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땅과 물의 갈등,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창세기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창조설화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설화 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땅과 물의 갈등 구조 안에서, 땅이 세상에 자리잡는가? 그렇지 않은가? 가 독자들에게 주는 긴장감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이 가능해졌는가? 그렇지 않은가? 에 대한 문제예요.
따라서 모세가 그런 테바를 통해서 물에 빠지지 않는 것.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산으로 갈 때, 그 중간에 있는 바다를 지나가는데,
▶홍해 : 히브리 말을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히브리 말 텍스트에서는 바다 또는 갈대 바다라고 합니다. 갈대라는 말이 때론 안 나옵니다.
그 안에서도 초자연적이 현상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주는 신학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가르고 마른땅(생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는 것으로 신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 있어라." 하시고 혼자 기도하시다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실 때.
그것은 예수님의 신통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너머 제자들에게 오시는 모습. 아직 죽고 부활하시기 전이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죽음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것.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자, 정말 물 위를 베드로가 걷다가 풍랑이 불어오자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도 빠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건져내시면서 "왜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습 안에서 우리들은 '쯧쯧, 베드로... 왜 그랬어.'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너희들은 이제껏 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 하리라."라는 말씀은,
우리들은 물속에 살고 있습니다. 즉 죽음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바로 그들을 생명으로,
따라서 우리들의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영적인 직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인간적인 이야기로 한다면, 사람 낚는 어부.
죽음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하늘나라로 구출해 내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구원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왕궁에서 자라다가 이집트인이 이스라엘 사람을 아마도 성경에서는 "때린다"라고 이야기했는데, 히브리말 텍스트를 보면 때려죽인 것 같아요. 그러자 모세가 그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입니다.(동태복수법으로)
살인으로 보기보다 구약성경 의미에서 정의와 공정의 기저에는 동태복수법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이 한 명 죽었으니, 이집트 사람도 한명 죽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동태복수법이 갖고 있는 의미는? 누가 너를 때려서 눈 하나를 멀게 했으면 너도 복수할 수 있는데 상대방도 눈 하나까지만 멀게 해야 해.
누가 너를 때려서 이빨 하나가 부러졌으면, 너도 상대방의 이빨 하나만 부러뜨릴 수 있어.
동태복수법의 예로서 눈, 이, 이러한 회복불가능한 것들입니다. 회복가능할 경우에는 예를 들어 금전적인 손실을 입어 보상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동태복수의 대상이 안됩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더 이상 보상받을 수 없을 때, 그때에 동태복수법이 허용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우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처럼 어떻게 보면 열 배의 복수가 사회적인 모습이 아닌가로 가끔씩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동태복수법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또 언제 드러나냐고 한다면, 이집트에 열가지 재앙이 내릴 때 마지막 재앙이 바로 이집트의 맏아들을 죽이는 것이에요. 그 부분에서 우리는 "하느님 너무해..." 그렇지만 "아닙니다." 그 안에서 내적으로 흐르는 것은 동태복수법이니까요.
탈출기 시작하면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죽였듯이, 구약의 논리 안에서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것을 되갚아 주셨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서에 가면, "내 보상은 주님께 있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내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잘했다면 그 보상은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을 거야.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내가 보답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제일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또한 이것 중에 하나라고 하셨어요. ㅎ
본당 사목을 하셨을 때 작게 남아 좋은 일을 하시면, 신자들은 엄청난 모습으로 되갚아 주셨다고 해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셔서 저축해 놓으신 게 없으실 까봐....여기서 열배로 받으셔서^^
"나의 보상은 주님께 있다." 그런데 그 히브리말 단어가 보상뿐만 아니라 복수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내가 굳이 복수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하느님께서 복수해 주시니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셈해주시고 하느님께서 복수해주시니 내가 복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의 삶도 자기 구제를, 법적으로 우리는 금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법원으로 가야합니다. 판사가 공권력을 가지고 그 사람의 잘못을 헤아려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그런 체험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AI의 등장으로 미국에서 어떤 설문조사를 했는데, "AI가 도입되어야만 하는 특정한 직업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일등으로 뽑힌 것이 "판사"였습니다.
미국인들도 재판에 대해서 공정하다고 못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겠죠. 특히나 미국은 어떤 변호사를 쓰느냐에 따라서 재판의 결과가 다르다는 이야기하기도 해요. 우리나라에서도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 부분에 관해서 우리가 계속 기도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뢰라는 것이 쌓기는 어려운데, 허무는 것은 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비단 사법부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부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강의를 하실 때 마다 신부님의 앞선 세대의 신부님들이 어렵게 쌓은 신뢰를 우리 세대가 무너뜨린게 아닌가?라는 성찰을 자주 하시게 된다는 말씀을 자주 신부님들께 드리게 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천주교 사제들이 신자분들에게 받았던 신뢰가 요즘에는 많이 약해지고 있는데, 그것에 가장 큰 책임은 신부님,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그 우물가에서 미디안의 사제의 딸들을 만나고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습니다. 중요한 묵상의 주제인 우물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을 때 신부님은 조마조마하셨다고 합니다. 옛날 고대 사회에서는 유다 사람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난다는 것은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그곳에서 생명의 물에 관한 긴 대화를 하셨어요.
모세는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고 생활하다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게 되는데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지 않는다는 내용에서 모세가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신부님께서는 떨기나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고, 불은 천상이에요.
천상과 지상이 겹치니까 떨기나무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기나무는 불붙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두 가지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있는 것이에요.
천상적인 이미지의 불과 지상적인 이미지의 떨기나무,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집트로 돌아와서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모세입니다.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파라오가 모세의 말을 믿도록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이 부분의 탈출기 텍스트를 자세히 읽어보면, 재앙을 내리실 때 매번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재앙을 내리는 이유가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이 내가 야훼라는 것을 알도록."
재앙이라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이 하느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방 사건이 아니라, 이집트에게도 해방 사건입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노예로 부리면서 착취하고 억압하는 구조로부터 이집트도 해방되는 것이에요. 또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불평등한 상황에 있다가 그런 불평등한 상황이 바로 잡히는 것은 여성들에게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해방사건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것입니다.
반면에 이 열 가지 재앙은, 열 번째인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아홉 가지 사건입니다.
아홉가지 사건이 세 번씩 돌아가고 있어요. 1,2,3 / 4,5,6 / 7,8,9라는 세 바퀴의 형태로.
하지만 그 세 번의 사이클이 돌아가면서 전체적으로 상승합니다. 마지막 동태복수적인 의미에서 맏아들과 맏배가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나갑니다.
그렇게 나갔는데 파라오는 포기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쫓아오다가 갈대바다 사건에서 자신의 군대를 다 잃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이 이집트에 대해서 언급되는 탈출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의 여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부분을 신학교에서 가르치실 때 '파라오의 딜레마'라고 하셨는데,
파라오가 악한 사람이라서 열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나가지 않게 했을까요? 단지 그것을 파라오의 악함과 무지함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실물 경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이집트의 경제는 노예 경제였습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그리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당시의 이집트 경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들이 나가버리자 파라오는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경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사실 파라오는 열가지 표징들을 보면서 세 번째, 네 번째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나가라고 허락도 했다가 마음을 바꾸곤 하였지만, 바로 그 기저에는 이집트의 실물 경제인 노예 경제에 대안이 없다는 거였어요.
십년 전쯤에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 금지되었어요. 신부님은 체벌금지에 찬성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폭력을 통해서 인간이 교정될 수 있다.라고 하면 체벌을 하는 것이 맞겠지만 폭력을 통해서 인간이 교정되지 않는다고 하고 그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하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죠.
그런데 당시에 체벌을 통해서 학생들을 훈육하던 교사들에게 대안 없이 체벌 금지를 하는 바람에 교권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대안을 마련하면서 점차적으로 시행했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어 버린 것이에요.
교사들은 굉장히 당황스러웠겠죠. 그런 경우에는 지도자의 어떤 지혜로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어요.
똑같은 문제가 훨씬 더 중대한 차원에서 21세기 우리들의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실상 공산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이런저런 형태의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자본주의란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조금 더 생산하고 조금 더 소비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끊임없이 플러스죠? 예전에는 10? 몇 프로였다면 요즘에는 한 2~3 프로씩, 그것이 마이너스가 되면 난리가 납니다.
그렇다면 플러스라는 말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많은 쓰레기가 생겨나고 더 많은 에너지가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지구라는 작은 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그런데 그 뻔한 일을 우리 모두가 보고 있으면서 바꾸질 못합니다. 왜냐면 대안이 없으니까요.
물론 몇몇 학자들이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입니다.라고 국민들 앞에서 용기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시면서 정말 마음이 아프셨던 것은 이런 생태문제에 대한 공약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었어요. 이것은 대통령 후보자들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국민들의 생태의식이 깨어있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은 그것을 공약에 내어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표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국민들이 탐욕스러우면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이 뽑힙니다. 국민들이 생태적이면 생태적인 지도자가 뽑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의 생태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의식을 얼마나 높이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 그리고 우리들이 사랑하는 다음 세대의 생존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갈대바다를 건너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약속합니다.
구약이 구약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하였다는 것.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신약이 신약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구약에서 모세의 역할과 비슷하십니다.
신약은 하느님과 교회와 맺은 계약입니다.
하느님은 교회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저희가 세례를 받을 때, 사제가 세례를 받는 신자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다시 사제가 묻습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들이 오경 안에서 텍스트로 정리가 되었는데 그것을 유다교의 랍비들이 넘버링을 했습니다. 613가지가 나옵니다.
십계명을 포함해서 613가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질문이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요.....
또한 그 질문은 누가 대신 풀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에요.
내가 나의 삶의 여정에서 맞닦뜨리는 질문이에요.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정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갖고 살아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떠오르는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에 질문을 쭈욱 써서 내려갈 때, 그 문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느님이라는 낱말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질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생활에 교정할 부분이 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 또한 이런 성서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을 더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생각하면서, 삶전체의 과정이라 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는 당부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