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예언서(열두 소예언서)
열두 소예언서를 쭈욱 보고 있습니다.
말라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지난 시간에 요나 예언서는 이야기 책으로 비교적 쉬웠습니다. 텍스트를 가지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이 있는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요나의 저자가 그 텍스트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나?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미카 예언서에서 다시 시문학으로 넘어왔어요. 그런데 텍스트를 알아듣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어요.
미카 예언서를 연구한 사람들이 그 미카 예언서를 알아듣는 방법이 갖가지예요. 신부님도 누구를 쫓아갈까? 하고 보다가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신부님 방식대로 텍스트를 읽어나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셨어요.
오늘 신부님의 미카 예언서에 대한 설명과 이해는
지금 현재의 신부님의 생각과 이해로 설명해 주시는 것이고, 내일은 텍스트를 보는 생각과 이해가 조금 다를 수 있으니 조금 유연하고 열린 사고로 이해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그냥 저는 쭈욱 믿고 듣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천사가 있죠?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물론 그 외에도 우리가 엘자로 끝나는 말들을 알고 있어요. 다니엘, 임마누엘..
엘: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시기보다는 신, (물론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카에서,
미 : 누가?(의문대명사)
카 : 무엇무엇과 같으냐?
미카엘 : 누가 하느님 같으냐?(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라는 하느님 찬미)
가브 : 용사
가브리엘 : 하느님의 전사
라프: 무언가를 치유한다
라파엘 : 하느님의 어떤 치유에 손길
한강성당 신부님이 본당신부님도 하시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칠때 도움을 주는 병원사목도 하십니다. 그 병원 이름이 라파엘 클리닉이라고 해요.
미카?
이름 자체에서도 뒤에 엘자가 나오지는 않지만 누가 우리 하느님 같으냐? 우리 하느님같은 신은 없어?라는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고백이 그 이름 안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세상에 우리 하느님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다신적인 신관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카 예언서의 문학적 구조
1,2- 3,12 심판(심판 예고) => 주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내용. 역사적인 미카 예언자를 만나게 된다
4,1- 5,14 구원
6,1- 7,7 심판
7,8- 20 구원
문학적인 구조가 심판, 구원, 심판,구원의 패턴으로, 우리에게 조금 이상하죠? 예전에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비슷한 구조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왜? 심판을 한데 몰아넣지 않고 구원도 한데 몰아넣지 않았을까?에 대한 학자들의 토론이 있다고 합니다.
일단 그 당시에 미카 예언자만 있는게 아니라 미카 예언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카 예언서를 수집해서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1-3장까지의 심판 예고에는 역사적인 미카 예언자 자신의 예언이 몰려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는 후반에 작성된 것 같고
6,1-7,7의 심판은 미카 예언자를 따르던 예언자들이 미카 예언자의 문체와 신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확장해 놓은 것.
7,8-20장은 하나의 신학적 결론으로서 구원
미카 예언자는 주전 8세기 예언자인데, 미카 예언서에는 주전 8세기부터 주전 6세기까지 유배이후 까지의 예언들, 편집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카 예언서를 연구한 사람들은 일단 텍스트를 보고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건 도대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누가 누구를 향해 한 말인가?" 라는 것으로 구분해 내는 것들이 전문가들의 영역입니다.
오늘은 신부님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신 것 가운데(새벽 3시 30분까지 보셨다고 합니다)
결론이 나지 않아서 다양한 의견들을 보고서 내린 구조로서 미카 예언서는 둘로 나뉘더라.
심판 - 구원 - 심판 -구원
그중에 역사적인 미카 예언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1-3장이고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어떤 확장이라던가, 아니면 편집이라던가,..그런 것들로 들어 볼수 있습니다.
1-3장에서 미카 예언자를 만나지만, 미카 예언자가 일년 산 사람이 아니죠? 그는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언자로서 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보통 서른 무렵의 생각과 육십이 되어서 드는 생각이 다르겠죠?
미카 예언자의 초반부를 보면 북이스라엘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남유다에 관한 경고성 예언들이 많습니다.
미카 예언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읽고 있는 그 텍스트가 예언자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 처했을 때 작성했겠는가?하는 질문과 함께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석가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겠죠? 텍스트를 기록할 때 미카 예언자가 '이건 내가 몇년 무슨 사건을 겪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라는 것을 기록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렇지 않았어요.(친절하지 않는 텍스트)
미카 예언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기본적인기준은 1,2과 6,1절입니다.
미카 1,2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슬러 증인으로
나서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나오신다.
미카 6,1
너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일어나 산들 앞에서 고소 내용을 밝히고
언덕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여라."
여기서 "들어라"가 나오는데 무엇을 들으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라.(히브리어로 셔마: 무언가를 열심히 듣는 태도)
물론 누구, 누구야 들어라는 3,1.9; 6,9에도 나오는데 이것들은 전체적인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인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1,2와 6,1절에 나오는 들어라!
1,2에서 민족들이 잘 듣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5,14에서 "나는 또한 복종하지 않는 민족들에게 분노와 진노로 보복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오고 6,1절에서 새로 들어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미카 예언자의 최종 편집자가(미카 예언자는 이미 죽고난 후) 두 번에 걸쳐 들어라는 배치하였는데 첫번째 들어라는 잘 듣지 않아서 두 번째 또 들어라! 하는 형식의 배치를 하였다는 것.
최종적인 미카 예언서의 마지막 7,18-20장은 결론이나 마찬가지지만 미리 보기로 합니다.
미카 7,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히브리어로는 미엘 커모카?입니다)
미카 예언자가 자신의 이름과 연관해서 "이건 내가 쓴 예언서야."하는 자신의 시그니처를 남긴듯한 마지막 구절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미카 예언자가 하느님에게 드린 말입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하느님을 향해서 이야기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돌아서서 이야기합니다.
미카 7,18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미카 7,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그리고 다시 하느님께 말합니다.
미카 7,19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7,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을 떠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하느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엾게 여겨달라고 간청을 드리는 예언자의 중재적 요청이 미카 예언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발달한 신학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예언서의 발달한 신학은,
누군가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심판을 받아요. 그런데 심판을 통해서 정화를 해요. 그렇게 정화는 그들을 하느님께서 다시 품어 안아주시는 것이 이스라엘 예언문학에서 발달한 신학입니다.
그런데 미카 예언서에서는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시는데 조금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리고 너희 이스라엘은 회개해야돼!"하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고 하니까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했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니네베에 대한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여기서도 그들의 허물을 심판하시고 정화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죄를 못본체 해주시는 당신 같은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야곱과 맺은 계약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예언자의 중재적인 요청)
야곱에 뒤따른 단어는 : 계약
아브라함에 뒤따르는 단어는 : 축복
이 부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심판이 아직 실현되기 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심판이 되었다면 이미 정화가 이루어졌을테니 "이제 이민족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나올텐데....그 전단계의 신학을 우리는 엿볼수 있습니다.
물론 미카 예언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른 모습도 보게됩니다.
이런 미카 예언서에 관한 신학이 구약 전체, 특히 오경에서 어떤식으로 자리잡았는가?를 보면
탈출 34,6에서 나오는 하느님에 관한 고백은 미카 예언서의 신학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 발전한 신학입니다.
탈출 34,6 『주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34,7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와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미카의 신관은 여기까지!!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대까지 벌한다."》
유다의 므나쎄라는 임금이 유다라는 나라를 망쳐 놓았기 때문에 결국 그로부터 삼 대 사 대가 지나고 나서 유다는 망한다!라는 이야기(하느님의 심판이 실현된다) 하느님은 자애로우시지만 꼭 셈은 하신다!
요나서에서 나오는 신학은 미카 예언서와 흡사합니다.
요나 3,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니네베의 임금이 백성들에게 한 말)
그리고 하느님께서 니네베에 대한 심판을 거두셨을 때 요나 예언자가 불평합니다.
요나 4,2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참 이상한 예언자에요. 저게 불만이에요...^^
하느님 너무 하세요. 너무 자비하신 것 아니세요? 니네베를 벌주신다고 하시더니, 안주시면 어떡해요!!!
미카서 1,1절을 봅시다!
1,1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카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
그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다.
말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씀은 귀로 듣는 것입니다. 환시는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두개가 하나로 겹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정보입니다.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요탐의 아들은 아하즈고 아하즈의 아들은 히즈키야에요.
요탐의 아버지는 우찌야에요. 유다 역사 전체를 통해서 우찌야 시대는 주변국들이 약했던 시기로 유다가 번영했던 시기고, 유다 자신의 영토도 넓어졌던 시기였어요. 그 이후 우찌야가 죽고 나서 요탐의 시기에 유다에게 위기가 닥쳐와요. 그리고 아하즈의 시기에 큰 위기가 닥쳐오고 히즈키야의 시기에도 격동의 시간을 보내는데......
요탐의 시기를 전후에서 신아시리아라는 제국이 등장했는데 네 명의 임금들이 등장해요. 티글랏 필에세르 3세, 살만 에세르 5세, 사르곤 2세 그리고 산헤립
남유다와 아시리아
요탐(739-735) 티글랏 필에세르(745-727)
734-732
아하즈(735-716)
735 살만 에세르 5세(727-722)
722
사르곤2세 (722-705)
히즈키야(716-687) 산헤립(705-681)
701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아버지고 살만 에세르 5세가 아들이에요. 그리고 사르곤 2세는 살만 에세르 5세의 형제인데, 살만 에세르 5세를 암살하고 임금이 된 것 같아요. 단지 아시리아 기록에 나와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추측할 뿐이에요.
왜? 왕위가 형제쪽으로 건너갔지?
그리고 사르곤 2세의 아들이 산헤립이에요.
이 시기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연도는 735년이에요.
735년?
북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시리아)이 서로 동맹을 맺은 다음에 남유다에 쳐내려오는 시기에요. 그리고 아하즈에게 와서
"우리,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동맹을 맺었는데 그 목적은 이제 막 점점 커지는 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희 남유다도 이 동맹에 참여해!"
그 말에 남유다의 임금이었던 아하즈는 어떤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해요.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군대가 남유다를 쳐내려오고 결국 아하즈가 곤혹을 당합니다.(남유다 백성들의 많은 수가 포로로 붙잡혀 가요) 결코 강한 나라가 아니었던 남유다.
이 시기가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를 찾아갔던 시기였어요. 이사야는 아하즈를 찾아가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오복음에 있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젊은 여인 하나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7,14에도 등장)
그러자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734-732), 2년에 걸쳐서 아람 왕국(시리아)과 북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결국 시리아는 망하게 되고....
북이스라엘은 거의 영토의 많은 부분을 뺏기고 단지 사마리아는 함락되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습니다. 이때가 미카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에요.
미카 예언자는 남유다 사람이에요.
그런데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을 해서 남유다를 쳐내려온거에요. 미카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을 좋게 봤을까요? 나쁘게 봤어요.
미카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이었어요.
살만 에세르 5세에 결국 사마리아도 멸망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도 멸망해 버립니다.
미카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에게 했던 적대적인 예언들이 실현되는 거죠.
그리고 사르곤 2세가 남긴 아시리아의 기록을 보면, "내가 사마리아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다음에 사마리아를 내가 다시 재건했어. 본래의 사마리아 보다도 훨씬 더 크고 화려하게, 그리고 내가 정복한 땅에서 다양한 민족들을 그곳에 살게 했어."라는 것이 남아 있어요.
아하즈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펴지 않아서 남유다는 비교적 아시리아로부터 보호를 받는 입장이 됩니다.(물론 조공을 받쳤겠죠)
하지만 히즈키야의 시대에 다시 반아시리아 동맹을 만드려고 노력해요. 그러자 이번에는 산헤립이 남유다를 쳐내려옵니다.(701년)
그리고 남유다를 초토화시킵니다. 이것도 역시 아시리아 기록에 남아있는데요.
남유다의 도시 중에 46개를 허물어 버려요. 단지 그 46개의 도시 명단에 예루살렘은 빠져 있어요. 산헤립도 예루살렘은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죠.
산헤립이 쳐들어오니까 히즈키야가 이사야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니까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그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견디는 것이죠. 국토의 대부분은 잃었지만,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신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때에 미카 예언자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의 마지막 시기인 것 같아요. 하지만 미카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이 망했듯이 똑같은 길을 남유다도 걷고 있다고 신랄한 비판을 합니다.
남유다는 견뎠는데 북이스라엘은 왜 멸망했을까? 남유다의 임금들과 북이스라엘의 임금들을 비교해 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우찌야(783-742) 예로보암 2세(793-753)
763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음 즈카르야(753-752)
살룸(752)
요탐(742-735) 므나헴(752-742)
프카흐야(742-740)
아하즈(735-716) 페카(740-732)
호세아(732-722)
히즈키야(716-687)
오늘 하신 연대구성이라고 하셨어요. 구약 시대의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워낙 진폭이 넓어서 심지어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북이스라엘의 임금이 호세아인데, 당시 남유다의 임금이 아하즈가 아니라 히즈키야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많다고 합니다.
따라서 히즈키야가 언제부터 왕이었겠느냐?라는 것을 따지기가 굉장히 힘이 들어요.
신부님이 신부가 되시고 첫번째 본당이 오류동 성당이었는데, 그 바로 옆에 있는 개신교회가 오류동 성당에 땅을 되찾겠다고 법적인 문서를 보내왔어요. 그들이 측량을 해보니 오류동 성당이 한 10미터 정도 침범을 했다고.....그래서 조사를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땅을 측량한 방식으로 오류동 성당이 10미터 정도를 내주게 되면, 오류동 성당부터 그 지역 전체가 10미터씩 밀리게 되는 거에요. 거의 구로까지.
그래서 신부님은 구청에 말을 했고, 구청에서 예전의 측량이 잘못된 것이 있어서 지금 경계선을 놓고 유지한다고 결정을 했어요.
여기서도 우찌야의 시기를 783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763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거기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면 20년정도 다 밀리기 시작하고 올라가고.....이상한 현상이 구약에서 있어요.
"아무튼 호세아의 시기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했는데 그때 남유다의 임금은 아하즈일수도 있고 히즈키야일수도 있다!
학자들이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 정확하게 학문적인 결과가 없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찌야와 예로보암 2세입니다.
남유다에 우찌야가 임금일 때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 2세가 임금이었고 이때는 가나안 주변에 다른 나라의 모든 세력이 약해졌을 때였어요. 그래서 예로보암 2세때에도 북이스라엘이 굉장히 번영을 누렸던 시기입니다.
예로보암 2세와 우찌야의 시기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번영을 누렸던 시기로 모두에게 좋은 시간.
그 좋은 시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찌야 전이나 예로보암 2세 전에는 다른 나라들이 쳐들어오고 국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막으면서 다같이 못살았지만 집 한칸에서 다섯 여섯 식구가 함께 밥먹고 함께 자고 한 가족이었는데, 집이 넓어지고 방이 늘어나자 가족들이 서로 얼굴을 볼수가 없는 거에요.
사회적으로 이야기 해보면 사회적으로 계층이 생겨난 거죠.
그래서 우찌야 시기와 예로보암 2세의 시기를 보면 고고학적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소농들이 소작농들이 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땅을 많이 갖는 대농들이 생기게 되요.
우리나라도 1950년대~ 60년대에는 다같이 못살았어요. 그런데 80년대를 지나면서 엄청나게 잘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중산층이 있었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시기가 도래한 거죠. 그러면서 사회적인 양극화가 심해진 시기들...
우찌야의 시대나 예로보암 2세 시대는 외적으로 보면 번영을 누렸던 시기인데 그 번영의 과실을 따먹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 과실을 따먹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우찌야와 예로보암 2세의 시기가 끝나면서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의 아들 즈카르야가 잠깐 임금이 되었다가(2년정도),
살룸이 반란을 일으켜서 임금이 되고
그 살룸을 므나헴이 죽여서 임금이 되고
므나헴에서 프카흐야(므나헴의 아들).
프카흐야를 페카가 죽여서 임금이 되고
페카를 호세아가 죽여서 임금이 됩니다.
쿠테타가 4번 일어나요.
이런 시기에 북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혼란한 양상들.
사회적 계층이 생기고 다른 나라들이 쳐들어와서 군사적으로 막아야 하고, 정복당하면 조공도 바쳐야 하고...그랬을 때 사회적인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착취를 당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것을 내놓지 않아요.
반년 전에 프랑스에 어떤 경제학자가 "지금 2025년 전 세계의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있다.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고 그걸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면 된다."하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한 나라가 운영되기 위해서 당연한 이야기인것 같은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막기위해서는 부자들이 세금을 조금더 많은 것들을 부담하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되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다면 그런 문제가 없을텐데, 물론 그 안에는 단순하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있기도 해서....
그래서 프랑스에서 그 경제학자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려했는데 프랑스의 부자들이 엄청나게 반발해서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했어요.
부자들은 "만약 그 사람이 재무장관이 되면 나는 프랑스를 떠나 세금 적게 내는 나라로 가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찌야의 시대와 예로보암 2세 시기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렸지만 거기서 사회적 계층이 일어났고 그 다음에 나라가 어려워지자, 사회적으로 힘을 얻은 계층들이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그 시기인 주전 8세기에 사회 비판을 하는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언자가 아모스 예언자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비판하고 고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조금 다릅니다. 미카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소외된 이들보다 조금더 잘사는 소작농은 아닌 소농들을 위한 관점에서 자신의 예언을 합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소기업,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예언을 하는데 그래서 오늘날 주석학자들은 미카가 모레셋 사람인데, 그 모레셋의 구청장정도 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무슨 읍장정도 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중앙정부를 향해서 "너희들은 자영업자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정말 부자들에게는 조세제도 하지 않고....!!"라고 불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의 모습.
이 시기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2열왕 16,5
그때에(735년)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르말야의 아들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아하즈를 포위하였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역대 28,20
그리하여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아하즈에게 왔지만, 힘을 보태주기는 커녕 오히려 아하즈를 포위해 버렸다.
21 그래서 아하즈가 주님의 집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에서 재물을 빼앗가 아시리아 임금에게 주었으나, 그는 아하즈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하즈가 자신의 돈을 주지 않고 주님의 집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에서 재물을 빼앗아 주었어요. 예를 들어 정부가 큰기업에게 "세금을 더 내야겠어." 하고 말하니 큰 기업에서 "세금을 더 낼께요."하고 말하고, 더 작은 기업에게 "우리 세금내야 하니까, 너희가 그 세금 마련해와." 하는 식의 잘못된 착취의 구조로...
다음 지도는 8세기와 그 이전의 예언자들에 대한 지리적인 정보입니다.
미카는 모레셋, 아모스는 트코아 남유다의 사람이지만 북이스라엘의 베텔에 가서 예언을 합니다.
호세아는 사마리아 남쪽지역에서 예언활동을 했고, 위쪽에는 엘리사, 아래는 엘리야, 그리고 맨 위쪽으로는 요나, 짐작하건데 요나는 저 지역의 사람이지 않을까?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는 이사야와 에제키엘
예루살렘에서 조금 북쪽에는 아나톳의 에레미야
그런데 예레 26,18절을 보면 미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모레셋 출신 미카가 유다 임금 히즈키야 시대에 예언하였는데, 그가 온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 26장에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 가서 백성들에게 '너희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너희들이 살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아니면 유다도 예루살렘도 망한다. 너흰 잿더미가 될거야.'하고 예언을 하여라."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던 사제와 예언자들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고발해요. 그들이 그렇게 고발을 하지만 대신들과 원로들은 오히려 예레미야 예언자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예레미야 예언자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렇게 예언을 했는데 히즈키야 임금이 미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미카예언자의 예를 들어 예레미야를 따라서 우리가 벌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내용
예레미야의 시기에는 미카가 유명한 예언자였어요. 그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에 영향을 줄정도로,
모레셋 사람 미카는 남유다에서는 공인된 예언자였습니다.
반면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카 1,2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슬러 증인으로 나서
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나오신다.
들어라 : 말씀과 관련이 된것
미카 1,3
보라, 주님께서 당신의 거처에서 나오시어
땅의 높은 곳으로 내려와 밟으시니
미카 1,4
산들이 그분 아래에서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진다.
불 앞에서 녹아내리는 밀초 같고
벼랑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과 같다.
첫번째 문제는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 1,2절은 말씀과 관계되었고, 반면에 1,3절은 장면, 환시와 관련된 보는 것입니다.
2절과 3절 사이에 약간의 불일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불일치는
2절에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3절에서는 당신의 거처는 하늘에 있는 거처에요.
따라서 이 안에서 무언가 어긋나있다는 것으로 보고서 많은 주석가들이 "1,2절은 더 후대의 문체와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예언자인 미카의 예언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따라서 3절부터 읽자! 거기에서부터 역사적 예언자인 미카의 음성을 우리가 들을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1,2절은 나중에 편집적으로 추가된것으로 생각하고 1,3절부터 의미를 만들어 봅니다.
하느님이 하늘에 있는 당신의 거처에서 내려오셔서 산들을 밟으시는 거에요.
산에는 뭐가 있을까요? 바로 산당들이 있죠. 그 산당에서는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이 있었고 그곳을 밟으셔서 산들이 그분 아래서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진다. 불 앞에서 녹아내리는 밀초 같고, 벼랑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과 같다.
=>하느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보게 됩니다.
미카 1,5
이 모든 것은 야곱의 죄,
이스라엘의 집안의 죄악 때문이다.
야곱의 죄가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죄악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야곱의 죄에서
죄?는 히브리말로 어감이 반항하는 것을 의미하고 반항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하셨는데 그 뜻을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것.
이스라엘 집안의 죄악에서
죄악? 어감은 하느님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계약에 대한 불충함을 의미
따라서 이미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약속한 것이 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 죄악과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에게 경고했는데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반항이 결국 문제가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죄가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죄악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바로 여기가 이상해요.
"야곱의 죄, 라고 하면 이스라엘 집안의 죄악이 무엇이냐?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유다라는 말이 나왔고 예루살렘이 조금 무리하게 언급되었다."라고 주석가들은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적 예언자 미카의 이야기는 1,3절부터 ~1,5절까지로 만날 수 있겠다고 오늘날 주석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언제 있겠느냐?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쳐들어 왔을때, 그때 미카가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환시로 보았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처에서 나오시어 땅의 높은 곳으로 내려와 밟으시고 산들의 그분 아래에서 녹아 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진다."라는 예언을 전하는 겁니다.
1,2절의 시작부분에서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하는 내용들이 나오죠? 이 부분이 역사서에서도 한번 나옵니다.
1열왕 22,28
미카야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
열왕기 상권의 편집자는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미카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레셋 사람 미카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서 미카예언서에 나오는 이 한줄을 인용한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합 임금때입니다.
따라서 미카야는 모레세 사람 미카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주석가들은 이것을 "열왕기 상권의 편집자가 실수한거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고 여기가 끝났어야 해!" 하고 생각합니다.
이랬다가 나중에 신부님이 세월이 흘러 하늘 나라에 가서 보니까, "아니야! 저 얘기 한 것 맞아!"라고 한다면....쑥쓰러우실 것 같다고^^
그런데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사 34,1
민족들아, 가까이 와서 들어라.
겨레들아, 주의를 기울여라.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거기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은
들어라.
이사 34,2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의 모든 군대들에게 분노하시어
그들을 전멸시키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이 살해되도록 버려두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동네 사람들, 내 말좀 들어주세요. 답답하고 억울한데 이럴수가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근데 우리나라의 현실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신부님이 본당 사목을 하실 때 십대들과 면담을 해보면 십대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의 마지막 결정체가 부모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십 대들과 면담을 해보면, 그들의 고민도 똑같아요. 자신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삼십 대와 사십 대도 똑같아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육십 대와 칠십 대도 마찬가지에요.
신부님이 신부가 되실 때 신품 피정을 가셔서, 마지막 날 즈음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 사람, 한 사람 면담을 하시다가 신부님 차례가 되셔서 말씀을 나누셨을 때 "자네는 잘하는 게 뭔가?" 하고 물으셔서
신부님은 준비되지 못한 질문을 받으셨지만 "열심히 듣는 것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을 하니 "그럼 됐네. 사제가 되면 제일 필요한게 열심히 듣는 거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나중에 신부가 되셔서 느끼신 게 열심히 듣는 것도 잘못하시는 것 같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있는데, 내 주위의 이웃들이나 가족의 이야기, 나와 함께 인연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것, 이게 굉장히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도 알잖아요. 누군가가 나와 얘기를 나눌때 열심히 들어주고 있는지 아닌지,
열심히 들어주는 그 사람들이 내 친구에요. 그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것 같아요.
하느님도 답답하신 거에요. "너희도 좀 들어줘."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태도에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할말만 하고 끝내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시간을 주지 않아요.
아모스서 1,2에서도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목자들의 풀밭이 시들고
카르멜 꼭대기가 말라 버린다."
하느님 심판의 엄중함에 관해서 미카서와 아모스서가 비슷하게 출발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죄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스켐에서 조금더 올라가면 사마리아입니다.
남유다의 수도는 언제나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수도가 몇번 바뀝니다.
1열왕 12,25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스켐을 세우고 거기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살다가 프누엘을 세웠다.
스켐, 프누엘이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중심도시였습니다.
1열왕 15,33
유다 임금 아사 제삼년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티르차에서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스물네 해 동안 다스렸다.
바아사가 예로보암 집안을 다 죽이고 나서 자신이 임금이 되었어요. 그리고 수도를 티르차로 바꿉니다.
1열왕 16,23
유다 임금 아사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섯 해는 티르차에서 다스렸다.
16,24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지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스켐에 있다가 프누엘로 갔다가 티르차로 갔다가 다시 사마리아로 옮겨가는 수도가 네 번정도 바뀌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9세기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되었는데, 아시리아 기록을 보면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통채로 멸망시켜버린 다음에 훨씬더 크고 훨씬 더 화려하게 그것을 복원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정복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살게 했다는 내용이 2열왕 17,24-41절에서 사마리아 기원이 나옵니다.
사마리아의 출신이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미카 1,5
그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인가? 사마리아가 아니냐?
에 이어집니다.
미카 1,6
그러므로 나는 사마리아를 빈들의 폐허로,
포도나 심는 곳으로 만들리라.
나는 그 돌들을 계곡에 쏟아붓고
그 기초들을 드러나게 하리라.
미카 1,7
그곳의 신상들은 모두 산산이 부서지고
그 모든 해웃값은 불에 타 버리리라.
나는 또 그곳의 우상들을 모두 조각내리라.
창녀의 해웃값으로 그것들을 모았으니
창녀의 해웃값으로 돌아가리라.
해웃값 : 화대, 서비스 요금
이방신들에 대한 화대로 그것을 너희들이 받았으니까 그것은 다 뺏겨서 다른 나라의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에 사용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는 내용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1,6-7절까지 나옵니다. 미카 1,6-7절의 "나"는 하느님이세요.
그런데 미카 1,8절부터 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을 예언자가 전하는 것으로 8절의 "나"는 예언자에요.
미카 1,8
이 때문에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승냥이처럼 슬피 울며
타조처럼 애처롭게 울리라.
미카 1,9
나을 길 없는 그 상처가
유다까지 다다라
내 백성의 성문까지,
예루살렘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그러한 행동 때문에 아시리아가 쳐내려왔는데 그때문에 유다까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예언자가 그 슬픔에 예언자적인 표징으로서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닌다."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닌 예언자가 미카만 있는게 아닙니다. 이사 20,1-2절을 보게되면,
이사 20,1-2
1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이 파견한 총 사령관이 아스돗으로 진군해 와서, 아스돗을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하던 해의 일이다.
2 그때에 주님께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를 시켜 이렇게 이르셨다. "자, 네 허리에 두른 자루옷을 풀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는 그렇게 하고서 알몸과 맨발로 다녔다.
누군가가 전쟁에서 비참하게 져서 알몸과 맨발로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표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부분을 이해하면 됩니다.
또한 사마리아에 대한 적대적인 모습은 미카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서 7장 1절, 호세아서 10장 7-8절, 호세아서 14장 1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호세아 예언자의 엄중한 경고를 볼수 있습니다.
아모스서 3장 9절과 아모스서 4장 1절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사야서 28장 1-4절에서 나옵니다.
아모 3,9
"너희는 아스돗의 성채들과
이집트 땅의 성채들에서 선포하여라.
'너희는 사마리아의 산들 위에 모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큰 혼란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행을 보아라."
아모 4,1
사마리아산에 사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빈곤한 이들을 짓밟으며
"우리가 마실 술을 가져와요." 하고
저희 남편들에게 말하는 여자들아!
8세기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수 있고, 그 비판의 첫번째 모습은 그들이 야훼에게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를 놓고 그곳에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면서 섬기고 신상을 만들기도 했고, 이방신들을 섬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사회저 비판의 모습, 그들이 약하고 힘든 사람들, 소작농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8세기 예언자들은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리고 미카 1,10절부터 봅니다.
미카 1,10
너희는 갓에서 이 일을 알리지 말고
울지도 마라.
벳 르아프라에서는
먼지 위에서 뒹굴어라.
미카 1,11
사피르의 주민들아
벌거벗은 채 부끄러워하며 지나가라.
차아난의 주민들은 나오지 마라.
통곡하는 벳 에첼은
더 이상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것들은 말장난과 비슷합니다.
벳 르아프라에서 벳은 집을 뜻하고 르아프라는 먼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장난과 같이 말합니다. 벳 르아프라에서는 먼지 위에서 뒹굴어라! 하면서...
사피르는 명품처럼 굉장히 화려한 것을 뜻합니다. 언어의 유희입니다. 사피르의 주민들은 벌거벗은 채 부끄러워하며 지나가라!
차아난은 어딘가로 나간다는 의미인데, 차아난의 주민들은 나오지 마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날이 오면 이촌동은 촌동네가 되고 서빙고동은 꽁꽁 얼어붙으리라" 라는 악담과 같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나오는 도시들이 아시리아 기록에서도 나옵니다. 701년경에 산헤립이 남유다를 쳐내려왔을 때 그가 정복한 46개의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들 중에 이 도시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앞선 북이스라엘에 대한 미카의 공격적인 예언(735년)을 배경으로 하는데, 여기서는 갑자기 점프를 해서 701년들의 사건에 이 예언들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카 예언자는 735년부터 701년까지 두루 예언을 했는데 나중에 그것을 함께 편집하는 사람이 하나의 예언처럼 붙여놓은 겁니다.
그 예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방법이 꼭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주석가들은 그것을 다시 분해해서 각각의 예언들이 어느시대에 예언인지를 원래의 자리에서 돌아본다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산헤립의 실린더 혹은 프리즘인데 흙을 구워서 만들었고, 쐐기 문자로 자신의 업적을 기록했습니다.(자신이 정복한 46개의 유다의 성읍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그 이름들이 미카서 1장에서 발견됩니다)
미카 1,16
귀여운 자녀들을 생각하여
너희는 머리털을 밀어라, 머리털을 깎아라.
그들이 너희를 두고 사로잡혀 가리니
너희는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되어라.
그리고 다시 북이스라엘을 향한 미카 예언자의 735년을 전후한 예언으로 1장이 마무리됩니다.(미카 1,16)
머리 깎는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는 삼손을 기억하게 됩니다. 머리를 깎음으로써 힘을 잃게 된 삼손.
우리가 역사서를 읽으면서 압살롬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 나중에 다윗을 거슬러서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압살롬의 외모에 관한 칭찬도 나옵니다. "그가 굉장히 머리숱이 많았고 머리가 길었더라."
따라서 고대 근동에서는 남자들이 머리숱이 많고 길었던게 멋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신부님이 예전에 두바이에 가서 강의를 하셨는데, 두바이의 광고판 대부분이 샴푸선전이었다고.....그들의 미의 관점이 머리결인듯 해요^^
다른 의미로 어떤 여인이 머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남자를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아랍 여성들은 외출할 때 머리를 다 가리죠.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고 합니다. 긴 머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요즘의 관점에서는 그런것이 없죠..ㅎㅎㅎㅎ
남성이나 여성의 미에 대한 관점에서 머리가 중요한데 이 말씀에서는 머리를 밀어라! 너희를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라는 것이죠. 요즘의 말로한다면 눈썹을 밀어라!
아이들이 잡혀갈텐데, 부모들아, 너희들은 수치스러움을 느껴라! 그렇게 슬퍼해라! 하는 내용으로 미카서 1,16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미카서를 알아듣기 위해서 미카서가 쓰여진 역사적인 배경과 그 텍스트를 알아듣는 방법에 관해서 자세히 그리고 쉽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다음부터는 미카서 2장을 읽게 될텐데....그때에 오늘 배운 미카서 1장을 기억하고 있을지!!!! (열심히 기억하고 복습해야겠어요^^)
영광송으로 마치셨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