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최승정 신부님 대림특강

작성자빗방울|작성시간25.12.24|조회수83 목록 댓글 6

 

중계양업성당에서 진행된 대림 특강에 잘 다녀왔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미사 후 함께한 대림 특강,

예수님 성탄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보살펴주시는 은총도 체험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계획하신 일에는 그 믿음과 열정을 보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

무언가를 찾고 발견하는 기쁨은 감출수 없습니다^^

최신부님과 중계양업 성당 본당 신부님과는 사제평생교육원에서 3~4년 정도 함께 지내셨어요.  본당신부님이 최신부님의 후배 신부님이셨지만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중계양업성당으로 소임이동 하실 때에도 훌륭히 잘하실 거라고 기대하셨다고 합니다.

몇 달전 통화로 본당신부님께 대림 특강을 부탁받으시고 존경하는 마음만큼, 기쁜 마음으로 오신 대림 특강.

 

미리 오셔서 대화를 나누시다가 본당 공동체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의 선물인 중계양업성당 공동체와 함께 얼마나 많은 신앙의 체험들을 나눌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더 뿌듯하시고 몽글몽글한 마음이 드셨어요.

 

신자분들에게  "새본당 신부님을 만나서 복 받았다, 생각하시나요?" 하는 물음에 큰 소리로 "네!"하시는 교우분들..

하느님께서 선물처럼 주신 본당 공동체와 본당 신부님과의 만남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이 되시길 기원하며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성탄, 대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한 가지 면에 고정되어 있는 듯합니다.

 

신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대림시기가 어떤 시기입니까?" 하고 물으면 "아기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시기죠. 그래서 기뻐하고 기념하는 시기요."라고 많은 분들이 대답하십니다. 그런 생각이 대부분의 신자분들의 인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림과 성탄이 갖고 있는 한 면입니다.

반대쪽 면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아, 그렇게 아기가 되어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지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그 재림에 대한 희망이 이 성탄, 대림 시기에 녹아있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는 기쁨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그렇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라는 재림에 대한 희망.

대림과 성탄이 주는 동전의 양면처럼.

 

 

재림?

다른 말로 어떤 표현이 있을까요?

 

바로 재림과 함께 쓸 수 있는 종말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산 이와 죽은 이들이 모두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상 받을 이들은 상을 받고, 벌 받을 이들은 벌 받고 그런 모습이겠죠. 시험공부 열심히 했는데 시험 볼 날이 된 것처럼.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즉,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는 종말론적인 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종말론적인 희망을,

묵시록 마지막 장에서 "주님, 어서 오소서." 묵시록 저자의 고백같은 요청으로 표현합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를 아람어로 "마라나 타"라고 합니다.

 

마라나 : 오십시오

타 : 당신(주님)

 

 

이 대림시기에 어울리는 기도적인 탄성과 같은 "마라나 타!" 고백입니다.

오셔서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 세상의 옳고 그름도 가려주시고 하느님의 뜻이 이제 풍요롭게 시작하는 그런 하늘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제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종말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게 또한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종말론적인 희망을 세상 안에서 지켜나가야 합니다.(교회 공동체의 본질)

 

 

그런데 우리가 그 본질로부터 조금 멀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주님, 어서 빨리 오십시오. 이 세상에 종말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시는 분들????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으신 듯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이 왜? 약해졌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살만한 것입니다.

 

사실 "마라나 타!"하고 기도하는 이들은 초대 공동체였습니다. 박해받고,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불평등함 속에서 질시받고 목숨을 잃기도 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지켜나가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 빨리 오셔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 달라는 종말론적인 희망이 강했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교회가 세상 안에서 자리 잡기도 하고 문명도 발전하면서 살만 한 세상입니다.

여러 가지 고통도 있고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즐거운 일도 있고 편안하고 재밌기도 한 현실 안에서 우리는 

"주님, 더 빨리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는지도....

 

 "예수님이 재림하면 언제쯤이 좋겠습니까?"하고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손을 드시고 "제가 죽을 때쯤 오시면 좋겠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에 신부님도 "정말 정직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하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종말이라는 것은, 그렇게 어렵던 시기에는 이 세상의 열망, 어떤 새로운 세상의 시작으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교회의 신학이 계속계속 발전해 나가면서 오늘날에는 종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이 등장하는데,

그 신학적 해석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창조의지가 완성되는 것!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마치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라는 것들이 종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그 종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지켜가기 위해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계시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까만 옷을 입는 이유가 물론 까만 옷이 멋있어서 입기도 하시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었고 하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미리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시고, 신부님들도 역시 신앙 공동체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하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중계양업 성당 교우분들이 훌륭한 본당 신부님과 함께 늘 가져야 할 질문이 있다면?

우리 지금의 공동체 모습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해나가는 것이 우리 공동체가 점점 하느님 나라를 닮아가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탄생과 재림에 대한 주제와 함께 먼저 되짚어 봐야 할 것은 과거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어떻게 하다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과거로 뒤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주전 15-13세기는 유목시대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시대

 

주전 12-11세기는 그들이 이집트로 갔다가 이집트에서 모세와 함께 나와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서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을 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눠서 살아갑니다. 그 시대가 부족 시대이고 성경의 용어를 하면 지파들의 시기입니다. 물론 열두 지파에서 요셉에 이은 므나쎄와 에프라임 지파로 세어보면 열세 지파가 되지만 전체적인 숫자로는 뭉틀거려서 열두 지파라 합니다.

 

 

주전 1000년 경에 이스라엘에는 국가가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이라는 예언자를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이 되는데 사울은 자신을 임금으로 만드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하느님은 사울에게 이사이의 아들 중에 막내 아들인 다윗에게 도유를 하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임금이 됩니다.(주전 1000년 경)

 

주전 1000년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철을 다룰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룰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윗 왕의 초기였던 이스라엘은 아직 철을 다룰줄 몰랐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당시에 철을 다룰줄 알았습니다. 그때문에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를 무서워하고 계약궤도 빼앗긴 것입니다.

 

다윗와 골리앗의 싸움을 문학적으로는 다윗과 팔척 장신과의 싸움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골리앗은 쇠로 된 갑옷과 쇠로 된 무기로 싸웠고 다윗은 돌팔매로 싸운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부대 중에 특별한 부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부대가 바로 돌팔매 부대입니다.(과거에 적들과 싸울때 멀리서 공격할 때 유리한 부대)

결국 돌을 들고 나온 다윗이 철로 만든 갑옷을 입은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 본질입니다.

 

다윗이 임금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왕궁을 짓고 그의 아들인 솔로몬은 성전을 짓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시기가 가장 번성했을 때인데 솔로몬 이후에 바로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이 됩니다.

 

솔로몬 이후에 왕국이 분열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인 이유,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이유였습니다.

 

세속적인 이유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지나치게 화려하게 짓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예산이 전년도 대비 8.1% 증가한 727.9조원 규모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우리 성전하나 지읍시다! 800조짜리로~"라고 말한다면, 국민들은 "무슨 소리하는 거지?" 하고 불만을 표출하겠죠?

그와 비슷하게 솔로몬은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열두 지파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시켜야 하는데 유다 지파였던 다윗과 솔로몬은 유다 지파에게는 쉬운 일을 전담하게 하고 다른 지파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일을 시켰어요.(돌이나 벽돌을 움직이고 나르는 일들...)

따라서 다른 지파들은 불만이 쌓여갔고 예로보암이 솔로몬에게 찾아가 평등하게 대해주기를 청하였지만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돌아오게 되었어요.

솔로몬이 죽자마자 예로보암은 다른 지파들을 모아서 독립을 하게 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두번째 이유로는, 신학적인 이유입니다.

임금이라는 왕정제도가 이스라엘에 자리잡은 신학적 이유에는 왕정제도 이전에는 각 지파들이 있었고, 그 각 지파들에는 판관들이 있었습니다.

그 판관들이 등장한 시기는 백성들이 제멋대로 해서 하느님이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을 때였고, 그래서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느님께 싹싹 빌면서 "하느님, 다시 한번만 마음을 돌이키시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기도드리면 판관들이 나와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고나면 판관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형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났어요. 판관기를 읽다보면 마지막 부분에 "그때까지는 아직 임금이 없었기때문에 백성들이 제멋대로 하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임금이 있으면 공권력을 가지고 백성이 제멋대로 할 수 없게 할 것이다. 라는 것이 왕정제도가 생긴 신학적인 이유입니다.

 

 

그런 신학적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솔로몬이 임금이 된 이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것에는 인간의 세속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이기를 바랬고, 이웃 나라와 교역도 하고 영토도 확장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하나는 전쟁, 다른 하나는 외교를 통해서,

 

전쟁을 통한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외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솔로몬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혼한 나라들 마다 부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신상을 가져왔어요.(30cm정도의 길이)

그 각각의 신들의 축제의 시기마다 솔로몬에게 함께 하기를 청했고, 거절하면 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전쟁을 치뤄야 할게 뻔해서 솔로몬은 그 신상들과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는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 필요했는데, 솔로몬이 앞장서서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딜레마입니다.

그와 같은 솔로몬의 잘못된 판단은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결과를 맺게됩니다.

 

분열된 왕국은 당연히 약화되고 북이스라엘이 먼저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라는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반달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서 이집트까지 영토를 확장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이라크

 

아시리아 지역이 점점더 커지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북이스라엘보다 조금 더 북쪽에 위치) 제국이 연합을 합니다.

그런 다음 남쪽에 있는 남유다의 임금 아하즈에게 "너희도 우리와 같이 연합을 해서 아시리아에게 맞서자. 만약 너희가 우리 동맹에 거절한다면 너희부터 공격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하즈는 고민에 빠집니다. 고민에 빠진 아하즈에게 이사야 예언자가 찾아간 내용이 지난 주일 복음에 제 1독서였습니다.

"임금님, 지금 아시리아에 붙을까?  반아리시아 동맹인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에 붙을까?를 놓고서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야훼 하느님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습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하즈는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하느님께 어떤 표징을 청해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에 아하즈는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소." 하고 말합니다.

 

굉장이 기특한 표현이라 느껴지지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 "너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모르느냐?"고 사탄에게 맞서서 하신 말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겠다."는 뜻이고,

아하즈는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에 이사야는 "당신이 표징을 청하든 청하지 않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표징 하나를 내려보내주실 터인데, 이제 젊은 여인 하나가 아기를 낳을것인데 그 아기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이 예언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이성을 가지고 사리를 분별하기 전에 당신을 위협하는 아람(시리아)과 북이스라엘은 멸망해 버릴겁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 예언을 할 때 염두해둔 것은 아마 아하즈의 젊은 부인이 임신한 당시의 아기, 후에 히즈키야 임금이 된 아기였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예언의 깊이를 잘 모를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중에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 사건을 겪으면서 구약 성경을 반추해 보니까 '아! 그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었구나.'라고 생각했고,

요셉에 꿈에 나타난 천사가 요셉에게 "한 젊은 여인이(처녀가) 아이를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했습니다.

 

구약 : 히브리어로 씌여서 젊은 여인이라고 표현

신약 : 그리스어로 씌여서 처녀라고 표현

 

 

잠시 히브리어 표현을 배워볼까요?

임마누 : 우리와 함께

엘 : 하느님

임마누 엘 :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렇게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사건을 통해 구약의 예언을 재해석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것까지는 몰랐을테지만 아하즈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결국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북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주전 722년 사마리아가 멸망합니다)

이때를 전후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예언 운동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예언자들이 이때 활동했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카 예언자가 이 당시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왜? 힘을 갖고 있는 이들이 나약한 사람들을 핍박하느냐?

왜?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착취하느냐?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비판을 합니다.

 

남유다는 아시리아의 공격에는 어떻게 어떻게 버티고 견뎌서 예루살렘을 함락을 당하지 않았지만 유다의 많은 지역은 아시리아의 수중에 넘어갑니다. 그렇게 버티던 남유다도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합니다.(바빌로니아도 지금의 이라크 지역)

 

아시리아도 바빌로니아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주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남유다가 멸망할 당시 활동했던 예언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멸망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야훼 하느님이 바빌론의 신 마르둑에게 진것이 아니라, 남유다 백성들이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자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레미야의 심판 예고가 실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자의 훌륭한 점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셨다는 해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남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것은 하느님의 심판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정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생각해 볼까요?

비를 내리셔서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심판이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한 단면도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정화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신학적인 두개의 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신학의 출발점이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멸망한 유다는 바빌론으로 유배를 갑니다.

그곳에서 50년동안 유배 살이를 합니다. 우리의 일제 강점기가 36년, 그 시기는 참으로 끔찍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남유다의 백성들도 바빌론에서 5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에 바빌론으로 유배온 굉장히 많은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물론 세상 곳곳에 숨겨진 그들의 후손들을 DNA 검사를 통해 찾을 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낸 유다민족외에 다른 민족들의 이야기를 역사 안에서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유다의 야훼 신앙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지켜낸 것입니다.

 

 

50년이 지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바빌로니아 제국은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전체 제국을 정복하고 키루스라는 황제가 등장합니다.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는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이 넓지 않아서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통치했었습니다

반면에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한 지역이 지나치게 넓어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복한 모든 민족들에게, "너희는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너희들의 신을 섬기고 너희들이 알고 있었던 통치체제로 각각의 지역을 다스리고 살아가라. 단 제국에 반역하지 말고 조공도 잘 바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쳐들어 갈거야"고 알리며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총독들을 파견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 넓은 영토를 관용적인 정책으로 다스리게 되고 그러므로 유다 백성도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다시 짓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합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들이 유배때 활약했던 예언자는 에제키엘이었습니다.

 

이사야 :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주전 8세기

예레미야 : 남유다가 멸망한 주전 6세기 전반부

에제키엘 : 유배 생활을 하던 주전 6세기 후반부

 

그 에제키엘의 시기에 유배갔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왕국에서 이전의 왕정제도가 아닌 신정 정치를 꿈꾸게 됩니다.(theocracy)

그 신정 정치에 실제적인 통치는 사제들이었습니다. 잘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의 신앙의 체계에 종말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해도 저렇게 해봐도 안되니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하는 생각으로 "하느님, 옛날의 노아의 홍수때처럼 싹 훑고 다시 새로 시작해 주십시오." 라는 종말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안되기에 포기를 한 것으로,

신정 정치가 무너졌으니 그 이전에 갖고 있던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 사상을 종말론의 내용으로 삼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예언있잖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겠지만,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아오르게 하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새로 하느님 백성이 시작될거야."

새로운 세상이 시작할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

 

유배 후에 생겨난 메시아 사상이 유다 사상의 주류가 되고 그 메시아 사상을 예수 시대까지 이끌고 갔던 이들이 바리사이파입니다.

반면에 신정 정치가 실패했지만 그 정치에서 사제들에게 주어졌던 권력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들이 사두가이파입니다.

 

유배후 신정 정치의 흐름에 따라 예수님도 나중에 대사제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바리사이와 갈등을 빚으신것은 신정 정치와는 갈등이 있었던 종말론적인 메시아니즘을 꿈꿨던 이들과 갈등을 빚으셨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다 민족은 종말론적인 메시아니즘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습니다. 그 국가는 우리나라보다 더 국민 소득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자리만 있고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유다교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까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정화의 단계가 아니다. 우리들의 불결한 손으로 성전을 짓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정화할 수 있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 제사를 지내려면 성전이 있어야 하고, 성전이 없으니까 정화되지 않고, 정화되지 않았으니까 성전을 못짓는 겁니다.

다소 웃픈 이야기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가되면 성전을 지을수 있다고 생각할까요? 메시아가 오면...

그 메시아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정화된 인간이니까, 그가 성전을 지으면 그 성전을 통해서 자신들의 민족이 정화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는

"아!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아고  더나아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더나아가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고 그들은 유해후의 종말론적인 메시아니즘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페르시아시기로 돌아가서, 

페르시아가 잠깐 실수를 합니다. 영토 확장에 집착한 나머지 그리스를 공격하다가 쇠약해지고 맙니다.

 "300"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그리스를 공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에서 점점더 페르시아를 압도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킵니다.

 

그 알렉산더도 무리하게 인도까지 원정을 갔다가 병을 얻어 바빌론에서 죽습니다. 알렉산더가 죽고 나서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제국이 5개? 혹은 7개로 분열합니다. 그 분열된 제국 중에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리우코스 왕조가 가나안 땅을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 결국 셀리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황제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안티오코스도 무리하게 세력을 키우다 돈이 떨어지자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성전들을 약탈합니다.

약탈의 명분은,

안티오코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별명을 에피파네스라 명명합니다. 에피파네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파노라는 이름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라틴말 스테파노스가 그리스말 에피파네스와 같은 말입니다. 

에피파네스는 현현입니다.

안티오코스 말로 표현하면, 에피파네스는 "나는 신이 현현한 인간이야. 나는 반신반인이야"라는 논리로 신전의 재물을 자신의 것이라며 약탈합니다.

참을 수 없던 유다인들은 안티오코스를 거슬러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마카베오 혁명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읽었던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

이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셀리오코스 왕조의 대군을 몇번에 걸쳐서 물리칩니다. 

결국 셀리우코스 왕조의 내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마카베오 집안을 가나안 지역에 하나의 왕국으로 인정해 줍니다.

유다 마카베오의 별명이 마카베오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망치"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조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망치파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들이 왕조를 이루게 되었고 왕조의 이름을 망치라 할수는 없어서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70년정도 계속되었고 처음에는 굳건한 왕조를 이루었지만 세속적인 인간의 욕심과 맞물리면서 내적인 갈등으로 인해 왕국이 무너집니다.

 

재밌는 점은,

마카베오 왕조가 번성했을 때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넓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남쪽에 있던 에돔 지역을 정복하게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거의 최초로 자신들이 정복한 에돔 사람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킵니다.

에돔 사람들이 유다교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개종을 통해서 할례를 했을 것이고 율법도 강요했을 것입니다.

 

에돔이 유다의 일부가 되었는데, 유다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가 내분이 일어나고 그들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에돔 지역에서 가장 힘이 세었던 헤로데 가문이 등장하여 권력을 갖게 됩니다.

세계사적으로는 헬레니스트 제국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하나하나 무너져 갑니다. 

결국 주전 64년 폼페이누스 장군이 이 전체 지역을 평정합니다. 전체가 로마의 제국이 됩니다.

 

당시 가나안에서 겨우 중심이 된 헤로데가 로마 제국과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가나안 제국의 임금으로 명명됩니다.

헤로데가 가나안의 임금이 된데에는 일화가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세력을 근근히 유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율리우스 시저가 죽고난 다음에 전체적인 로마 제국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요.

서쪽에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황제가 동쪽에는 율리우스 시져의 부관이었던 안토니우스 장군이 각각 세력을 나눠가져요.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다 안토니우스가 그 이름도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바람이 납니다. 시리아쪽에 있어야 할 안토니우스가 바람이나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와 살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인 야망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화가나서인지 모르지만 대군을 이끌어 이집트로 내려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연합해서 싸우지만 전쟁에서도 지고 죽음을 당합니다.

 

재밌는 것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할때 헤로데는 판단력을 잃고 안토니우스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안토니우스가 죽자 헤로데는 죽을 목숨이 되고....헤로데가 참 대단한 사람인게 죽었다 싶으면 도망을 갈텐데,

배를 타고 로마에 가서 옥타비아누스 발밑에 자신을 던집니다.

 

옥타비아누스 앞에서 고백성사를 합니다.

"제가 생각을 잠깐 잘못해서 안토니우스 편을 들었습니다. 황제여,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좀 괜찮았던 옥타비아누스는 솔직하다고 여겼나 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를 가나안 지역, 전체의 임금으로 임명합니다.

 

강한 권력을 갖게 된 헤로데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전체 제국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꿉니다. "아우구스투스"로

 

 

그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하나 태어나는데, 나자렛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모든 권력이 모였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사람이되셨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라틴말로 "드높은 자"라는 뜻이에요.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를 우리는 달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 중에 자신을 신격화한 사람이 둘 있습니다.

율리우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로마의 달력에 넣었습니다.

원래 로마의 달력은 1월~6월은 신들의 이름으로 되어있고 7월~12월은 숫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율리우스 시저가 자신의 이름을 7월에 넣어요. 그래서 7월이 July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름을 8월에 넣어요. 8월이 August

September의 Sep은 7을 뜻합니다. 그들의 의해서 두달이 밀리고 September는 9월이되고

Oct는 8인데 그것도 두 달이 밀려서 10월이 되고

Nover는 9인데 두 달이 밀려서 11월이 되고

Decer도 10인데 두 달이 밀려서 December, 12월이 됩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에게 문제가 생겨요. 로마의 달력이 7월은 31일이고 8월은 30일이었어요.

하루가 딸린다고 느낀 아우구스투스가 그렇잖아도 하루 적었던 2월을(아마도 신들 중에 약한 신이었을까요?)

29일이었는데 하루를 더 빼서 28일이되고, 7월과 8월은 연달아 31일이 됩니다.

이 아우구스투스의 시절은 로마 사람들은 Pox Romana(로마의 평화)라 불렀습니다.

Pox :  Peace 평화

Romana :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절대권력을 갖고 있으니까 자신의 정복한 모든 민족들이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기를 로마의 엄마들은 좋아했습니다. 군대간 아들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을 일이 없으니까요.

Pox Romana시기, 아우구스투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시기로 로마의 여인들은 칭송해마지 않던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반면에 그와 같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예수님은 하느님의 평화와 다르다고 여러번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 나옵니다.

"너희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오는줄 아느냐? 아니다. 나는 칼을 주러 왔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는줄 아느냐? 아니다.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저 말씀에서 하신 평화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에요.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억누르는 그와 같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사가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잘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너희에게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이죠.

 

유다의 어떤 역사를 거쳐서 나자렛 예수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

잠깐 히브리 말을 배워봅니다. 

베들레헴이라고 적습니다만, 벧과 레헴이 합성된 것입니다.

 

벧 : 집

레헴 : 빵

예수님은 빵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신부님이 여행가실 때 비행기 안에서 혹시 신자분들을 만나면 쑥쓰러우실까봐 로만 칼라를 안하시는데, 어느 날 옆자리 분이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으셔서 "빵 장사 하는데요..?"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주일에 신자분들이 오시면 빵을 나누어 주시니까요.

 

 

예수님께서 빵집에서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의 생애도 빵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시고 "너희는 이 빵을 받아 먹어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못알아 보다가 빵을 쪼개어 주실 때 알아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 중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빵이라는 문학적인 표상이지만 생명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더욱이,

베들레헴부터 시작해서 갈릴래아 지역 그리고 사해 지역이 하느님의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역이 전체 지구상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지역입니다.

물론 가장 낮은 지역은 사해입니다. 사해 근처 지역이 해발 -420m로 바다 해면보다 더 낮은 지역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도 사해보다는 낮지 않지만 낮은 지역입니다. 베들레헴도 낮은 지역

 

베들레헴의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성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야 한다고 하는데 십자군 전쟁을 전후에서 군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니까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문을 작게 만들었다는 성문의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중앙 제대의 사진, 예수님 탄생의 구유의 사진

그 구유가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유를 생각하면 나무로 생각하는데 가나안 지역은 나무가 귀해서 돌을 파서 만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일반적인 풍광은 비옥하지 않고 척박합니다. 그곳의 생계의 수단은 주로 양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신 곳이 마굿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성경에는 마굿간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는지를 텍스트적으로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알수 있습니다.

가나안 지역에서 구유는,

여관같은 경우에 손님이 오면 말을 타고왔을 때 그 말을 묶어 놓고 무언가를 먹을때 그 구유가 여관 앞에 있을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셨을까가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마굿간이라고 규명된 것은 아닙니다.

 

사진을 보여주시는 이유,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살펴봤을 때

이러한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마태오복음서는 삼왕 그리고 루카복음서는 목동을, 그 감격적인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성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야합니다.

내일 몇시까지 인천 공항으로 모이십시오.라는 말이아니라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역사 지평 위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화려한 이집트도 있고 바빌론도 베들레헴도 있을 겁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가야할 베들레헴, 영적인 내면 안에 그곳은 과연 어디인가?라는 묵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 안에서 예수 탄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았듯이 우리들 개인이 갖고 있는 인생의 역사 안에서 나는 예수님을 만나기위해 어디로 떠날 것인가?는 묵상과 함께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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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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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5 성탄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5.12.25 아멘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5 성탄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메밀꽃 | 작성시간 25.12.26 아멘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6 성탄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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