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정베네딕토 신부님 사순특강2( 3월 27일 장안동 성당)

작성자빗방울|작성시간26.03.28|조회수80 목록 댓글 4

 

지난주에는 노아의 방주, 노아의 홍수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약해 본다면, 노아의 홍수가 하느님의 심판인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는 세상을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가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노아의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기까지 수없이 넘어집니다. 그리고 넘어져서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지만 우리는 곁에서 "잘한다! 잘한다!'하고 격려해 줍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언젠가는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우리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 신앙의 모습도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이번 사순은 잘살아 봐야지! 회개해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야지!'하고 마음을 먹지만 살아가다 보면 잘 되지 않고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20대 때 신부님은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우셨어요. 그러다 30대 때 담배를 끊으셨어요.

담배를 끊으실 때 몇 번 담배를 끊으셨을까요? 대략 100번 정도 끊으셨다고, 그 100번의 실패를 딛고서 결국 끊으셨어요. 

교우분들의 뜨거운 박수에 신부님은 "말만 하면 지자랑이죠??!!"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갖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앞으로의 삶 안에서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거야. 왜냐면 하느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

첫 번째 강의에서 말씀하시고 싶은 이야기셨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1959년에 제작되어 뉴욕 유엔본부 앞에 있는 상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소련 사람이었습니다. 소련은 그 당시 공산주의였지만 작품의 내용적인 부분에서 성서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칼을 두드려서 쟁기를 만들고 있는 모습.

Let Us Beat Swords Into Ploughshares

이 작품을 만들 당시 작가의 염원은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랬습니다.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공산주의를 일으켰던 스탈린이 "소련에 프란치스코 같은 성인이 세 명만 있었다면 공산주의 혁명은 필요 없었을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아! 이 세상 안에서 정녕 교회다운 모습으로 있었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분쟁들, 숱한 전쟁들 없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들 또한 혹시 교회가 조금 더 교회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갔다면 전쟁의 모습들을 우리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세상 안에서 회개하는 모습,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가 겪은 것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모두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굉장히 부정스러운 사람은 이러다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 있었던 미얀마, 아프리카의 일들, 그런 폭력에 놓인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가 아닌 세상 곳곳의 문제들이 어떻게 하면 잘 해결돼서 우리 온 인류가 좀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기도 안에서 찾고 하느님의 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요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나!

노아의 이야기는 창세기에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는 구약 성경을 보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 명의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예언서 다음에 나오는 열두 소예언서 나옵니다.

소예언서 의미는 예언서의 내용이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제키엘처럼 두껍지 않아서 소예언서라고 부릅니다.

그 열두 명중에 요나 예언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예언서는 예언자의 예언을 전하고 있는데 요나 예언서는 요나 예언자의 예언을 전하기보다는 요나 예언자에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뜻! 그게 요나 예언서입니다.

 

 

요나 예언서는 예언서라기보다는 예언설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서에도 40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나 예언서의 주인공은 당연히 요나입니다. 요나는 히브리말로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요나 ; 히브리말로 비둘기

비둘기 우리에게는 좋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와 서양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까치는 길조로 까마귀는 흉조로 느끼는 반면, 서양에서는 까마귀는 길조로 까치는 흉조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비둘기는 우리와 비슷하게 받아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비둘기에 관해서 굉장히 평화롭고 길한 새로 생각을 하면서 요나 이야기에서는, 

 

잠깐!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비둘기를 몇 번 날립니까? 세 번 날립니다. 일주일씩 세번 날려서 (20일 정도)

그처럼 비둘기는 상징적인 동물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예물입니다. 보통 이스라엘의 중산층에서 드리는 예물은 양을 한 마리 드렸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비둘기 한쌍씩을 예물로 준비했다는 내용을 레위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약하다, 겁이 많다는 내용으로 구약성경 안에서 등장합니다. 뱀과 비슷합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도 비둘기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양면성이 드러납니다.

 

요나 

1,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1,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언제 어디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략돼있습니다. 갑자기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라는 이름이 구약 성경에는 등장합니다.

 

 

2열왕 14,23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의 제 십오년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예로보암 2세)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예로보암 1세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분리시킨 임금이에요.(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

다윗이 왕국을 주전 1000년경에 세우고, 다윗과 솔로몬 시기를 지나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930년경)

그때 북이스라엘을 세운 임금이 예로보암 1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예로보암 2세 때의 이야기가 2열왕 14장에 나오는데, 이 예로보암 2세는 구약 성경에서 굉장히 문제의 인물입니다.

예로보암 2세는 구약성경 역사 안에서 보면 굉장히 나쁜 임금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을 백성들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강하게 만들고 영토를 넓히고 부유하게 만들었던 임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판단으로 보면 굉장히 당혹스러워요. '이 사람을 꼭 나쁜 임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역사들도 있습니다.

예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이 외적으로 부유한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모두가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부유한 부류 중에서 특별히 잘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벌어졌어요. 이상하죠? 나라는 잘살게 되었는데 힘든 사람들은 사는 게 더 힘들어졌어요.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일어난 8세기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야, 열두 소예언자들 중에 호세아, 그리고 아모스, 미카 같은 예언자들이 8세기에 그 문제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돈이 많아서 부유해졌지만 이런 식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미카가 말합니다.

 

오늘날 그런 예언자가 나타났다면 어떤 신자분들은 "저 예언자들은 왜 그래? 신앙 이야기나 하지... 왜 정치적인 얘기를 해!"하고 말할 것입니다.

예로보암 2세를 오늘날 관점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양면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로보암 2세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스라엘은 부강해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 열왕기 하권의 저자는, 옛날 방식으로 설명하였는데.

사실 그 전에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부강하고 잘살게 될 거야!' 하는 약속이 있었기에 예로보암 2세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 그 시기에 부강해질 수 있었다. 고 전합니다. 그 부분에서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가 등장합니다.

 

2열왕 14,25절의 요나와 요나 예언서의 요나를 동일한 인물로 구약성경의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 하권과 요나 예언서의 역사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설화이니까...

 

우리가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하고 이야기할 때, 그 일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느냐?라고 얘기하는 데는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2열왕 14,24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예로보암 1세)의 모든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2열왕 14,25  그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 이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갓 헤페르 출신으로 당신의 종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그대로다.

 

그런데 이 요나 예언서의 요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하고 니네베로 갔을까요? 가지 않았습니다.

니네베로 가는 게 아니라 야포(요파)로 내려갔습니다. 타르시스로 가기 위해서(서울에 있는 요나에게 강릉으로 가라고 했는데 인천으로 가서 중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죠..)

이것은 이야기 내에 약간의 과장이 있습니다. 사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싫어요!" 하고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과장해서 "오히려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떠나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요나 1,3)" 하고 전합니다.

 

1,3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1,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요나 이야기가 사용하는 과장법으로는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과 함께 큰 바람, 큰 폭풍이 등장합니다.

 

 

요나 1,5절의 바다에 짐을 던지는 뱃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묵상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신부님이 아시는 분들 중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오면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한 달간의 짐을 싸서 걸으면서 매일 하는 일이 그 짐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작은 짐만 남게 된다고.....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데....

 

1,5절에서는 배를 가볍게 하려고 있는 짐들을 내던졌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짐들이 뱃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화물이었을 텐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생명.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네베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이 방향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앉아있던 또는 누워있던 요나에게 "일어나 니네베로 가라!"하시고 방향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요나는 야포로 내려갔고 그리고 배를 타고 그 배 안에서도 더 내려가 배 밑창, 그리고 나중에 큰 물고기의 뱃속까지,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갑니다.

요나는이 아니라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명령을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자 선장이 그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1,6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뱃사람들이 나왔고 선장이 나왔습니다. 정확히 구약성경에서 자주 만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간청하면 하느님께서 조금 더 참아주신다, 마음을 돌이키신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아브라함이 "열명의 의인만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어떤 여인이 자신의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고, 예수님은 "내 형제에게 먹일 빵을 강아지들에게 먹이로 주지는 않는다." 

여인은 "강아지도 빵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시고 여인의 딸을 구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바꿀 수 있는가? 이것을 잘못해석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이겨먹을 수 있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자신의 결정을 돌이키기도 하시는 분, 속된 말로...

우리는 무엇 팔린다! 하는 말을 하죠? 체면이 깎인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서 체면이 깎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돌이킬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요나 예언서에서 선장의 말합니다. "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바꿀 수 있지 않느냐?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거부해서 나간 요나에게 이방인 선장이 말한 것이죠)

 

뱃사람들이 말합니다.

 1,7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낮은 단계의 종교적 심성입니다. 제비를 뽑는 것.

탈출기에서 보면 사제의 복장을 입을 때, 하얀 튜닉을 입고, 그 위에 에폿을 걸칩니다.

에폿은 앞치마 형태입니다. 그 에폿 위에 가슴받이가 있고 그 가슴받이 위에는 열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그 열두 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가슴받이는 주머니 모양이고 그 가슴받이 주머니 안에 우림과 툼림이 있습니다.

우림과 툼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그들은 또 짐작해요.

"우림과 툼림은 점을 치는 도구였을 것이다..."

누군가 사제에게 와서 "하는게 하느님의 뜻일까요? 하지 않는게 하느님의 뜻일까요?" 묻는다면,

사제가 우림을 꺼내면 "예스"

툼밈이 나오면 "노"

 

우리들도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 어느 가톨릭 신자는 성경을 쫙 펼쳐서 거기에 무슨 말이 나오나?...

이런 전통이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등장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열한 사제가 되자, 사도들이 모여서 괜찮은 사람 두 명을 놓고서 제비 뽑기를 했습니다. 결국 마티아가 뽑혀 열두 번째 사도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도 본당에 계실 때 '사목회장을 한 번 제비 뽑기로..... 해봐 봐?'

계신 본당에서는 사목회장을 해주실 좋으신 분이 두 분이나 계셔서, 연장자 순으로 사목회장을 하시는 것으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제비 뽑기를 하는 전통,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심성에 낮은 단계인 것 같습니다. 낮은 단계에 머무른다면 곤란합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옳은 길이 아닙니다.

그 낮은 단계에 있다가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께 가까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강의 끝나고 집에 가셔서, "으음, 제비 뽑기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야." 하면서 일상 안에서 적용하시면 안 됩니다!!!^^

 

 1,8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1,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여기서 요나가 대답하는 행간의 의미는요, 좋게 말하면 자신감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오만함입니다.

 

신부님도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에서 이런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레지오를 30년 했는데요...."

대단하십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면서도 혹시나 신앙 안에서 이분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사제 생활 몇 년 했는데...."

요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히브리 사람이오."행간에서 자존감 내지는 민족적인 오만함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말과 연결해서 읽으면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보통 신이 아니야." 혹은 "우리 아빠 대단한 사람이야. 바다와 물을 만드신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야! 그리고 나는 그 창조주가 선택한 특별한 민족인 이스라엘, 그 히브리 사람이야."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요나 예언서가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태도가 올바른가?

 

1,10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자기가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1,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12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당당한 요나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요나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요나의 마음이 엿보인다는 의미에서, 하지만 신부님은 그 신학자들의 의견에 공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하셨어요.

 

신부님의 느낌은? 요나가 갖고 있는 오만함이 어느 정도로 극단적인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해석한다고 하셨습니다.

 

 

뱃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수가 없었다.

 1,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뱃사람들 참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1,15  그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 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요나서 1장은 그리하여 뱃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되었다로 마무리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뱃사람들이 야훼를 알게 됩니다.

 

똑같은 일이 신약시대에 반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선포하는데 유다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퍼져 나갑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불순종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뱃사람들이 야훼를 알게 되었고 이방인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어떤 행동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신다.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 하는 메시지로 이 부분을 읽습니다. 1장이 끝나고....

우리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성은 심, 이름은 청

구약에 요나가 있다면 우리에겐 심청^^

 

 

그리고 나서 요나가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갑니다.

어떤 분들은 고래라고 생각하는데 고래가 아닌 큰 물고기입니다. 큰 바람, 큰 폭풍, 큰 물고기.

큰 물고기 속에서 요나가 기도합니다.

 

2,3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고난에 찬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상당히 아름답게 하는 것 같았으나, 

마지막 부분에 다 망칩니다.

 2,9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10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요나가 갖고 있는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네베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요나가 배에 타고 있을 때, 뱃 사람들과 선장도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니네베 사람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루카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 

세리는 "주님, 저는 당신 앞에 죄인입니다." 하고 기도하자, 그 앞에 있던 바리사이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자선도 베풀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도 바칩니다.(주일 미사도 열심히 다닙니다).... 주님, 저를 저 세리와 다르게 해 주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원래 바리사의 기도는 그렇게 나쁜 기도가 아닙니다. 유다의 경전인 탈무드에 보면 바리사이의 기도가 "주님, 저는 당신이 명하신 대로 일주일에 단식도 하고 자선도 베풀고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18장에서 나오는 바리사이는, "저를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 있는 세리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우월감에 차있는 바리사이로 바뀝니다.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 우월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교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낮추어보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자꾸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나 어떤 학문 연구나 비슷합니다. 주위에 보면 공부 열심히 계속한 몇몇은 점점 더 교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보기를 우습게 봅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공부를 하면서 점점더 작아집니다.

"하면 할수록 나는 정말 어려운 게 많은 것 같아." 하는 겸손한 마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내 자신이 커지는 것 같고 점점 대단해보인다면, 그것은 조금 위험한 생각입니다.

반대로 우리들이 계속해온 신앙 생활을 통해서 내가 점점더 작아지고 있다면, 점점 겸손해지고 있다면, '내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있구나!' 하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하고 말하는 요나의 편견이 드러납니다.

19세기말에 영국의 문필가가 있었습니다. 제인 오스틴, 그의 유명한 작품인 오만과 편견.

그 작품을 보면 한 귀족 남성과 귀족이지만 조금 어려움에 처한 평범한 가정의 여성이 서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미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남성이 갖고 있는 오만과 여성이 갖고 있는 편견이 극복되면서 그리고 극복하는 과정 안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진다.라는 표면적으론 로맨스 작품인데, 그 유명도가 넷플릭스에서 만든 영화가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 얘기처럼 보이는 그 작품 기저에는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당시 영국 사회에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는 동력이 그들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서로가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가 갖고 있는 오만과 편견을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26년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문제는? 여러 사회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지역갈등, 그다음에는 노인과 청년의 갈등, 그리고 요즘엔 젠더의 갈등.

그 갈등 안에서도 오만과 편견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요나 예언서에는 그런 오만함과 편견을 가진 요나가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이상적인 기도는 아닙니다. 그 기도로 하느님께서 감동하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큰 물고기에서 나온 요나는 두 번째로 야훼의 말씀을 듣습니다.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외쳐라."

 

3,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왜 사흘일까요?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게 옛날 사람들의 시간을 세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 전통적인 나이 계산법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이가 2025년 12월 31일 23시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026년 1월 1일 새벽 1시가 되었을 때, 태어난 지 두 시간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 살입니다.

여기서 사흘도, 첫째 날 23시 55분부터 시작해서 둘째 날 지나가고 셋째 날 0시 5분까지도 사흘입니다.

그 말은 적어도 24시간은 지나갔다는 의미입니다.(적어도 24시간 10분은 지나갔어요)

우리나라에서 삼일장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옛날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누군가 돌아가시고 가끔 살아나기도 하는데, 그래서 하루는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로 삼일장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사실 효력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의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뇌사 판정을 받고도 살아나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난 것이 아니라,

진정 참으로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너머 부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3,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사흘이나 걸어야 하는데, 하룻길을 걸었으니까 이제 그 성읍의 중심쯤 와있는 겁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요나도 알고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는 40일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너희 40일이 시간이 지나기 전에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멸망시킬 거야.

그런데 요나는 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불친절한 예언)

 

요나는 니네베가 망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3,5  그러자 니베네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요나의 예언이 성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네베 사람들은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할 것은? 대조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로부터 벗어나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호세아, 아모스, 미카, 하바쿡..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그리고 유배를 갑니다. 바빌론으로....

 

하지만 니네베 사람들은 성의 없는 요나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믿고 회개합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열심히 차려 놓은 음식에 아이는 게임만 하고 있고 그 음식은 아이의 친구들이 다 먹고 있는 것처럼.

요나가 회개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

요나 예언서가 갖고 있는 그 문학적인 구조에서도 드러납니다.

 

1장에서 요나와 뱃사람들과 선장이 등장합니다.

 

2장에서는 요나만 등장합니다.(큰 물고기 안의 요나)

 

3장에서는 이방인들인 니네베 사람들과 니네베의 임금이 등장합니다.

 

4장에서는 요나와 하느님만 등장합니다.

 

 1장과 3장에서 이방인들이 등장하는데, 1장과 3장의 이방인들이 요나(이스라엘) 보다 더 하느님께 이상적인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요나 예언서가 갖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은 그토록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뱃사람들과 니네베 사람들인데 어찌 이렇게 쉽게 하느님을 믿지?

 

이스라엘 민족은 이 천년 동안 하느님을 알아왔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알아보지 못해! 그런데 그 이 천년 동안 하느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바오로와 그의 복음을 듣고 회개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그리고 임금이 먼저 나섭니다.

 3,7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마시지도 마라.

 

 3,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니네베의 임금이 선장과 비슷한 말을 합니다.

3,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3,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을 번복하십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대개 위신이 깎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보통 자신이 처한 어떤 곳에서 했던 말을 번복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신의가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해서 꼭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니네베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은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4,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4,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내가 이럴 줄 알고 도망간 거야~~)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게 요나는 불만입니다. '하느님은 나에게만 자비로우셔야 해!'

 

 

 4,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으로 갔었습니다. "당신 같은 하느님을 따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요나의 극단적인 태도의 변화.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하느님께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문장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신부님 어린 시절 유행했던 노래 중에서 사람이라면 부르지 말아야 할 가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자기 삶뿐만 아니라 엄마의 삶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도도 하느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4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다시 말해 "네가 화를 낼 자격이 있느냐?"하고 물어보십니다.

요나 이야기의 마무리입니다. 요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질문으로,

 

지난 시간,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의 버전이 아니라 두 개의 버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극장판, 하나는 감독판,

요나의 이야기도 극장판이 있고 감독판이 있습니다.

극장판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요나 4,5부터는 감독판의 결말이 있습니다. 그것의 시작은?

요나 3,3부터 시작합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를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3,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고 나서 니네베가 회개하였는지 감독판에선 없습니다.

 

4,5  그리고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에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망하나? 안 망하나? 보려고)

 

그리고 니네베가 회개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4,6  그런데 그때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지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그 아주까리로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지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립니다. 8  그리고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는 뜨거운 동풍을 보내십니다. 거기에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앞선 내용과 흐름은 다르지만 문장은 같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4,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지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니네베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그들을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야훼는 그와 같은 하느님이다.라는 부분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마무리합니다.

 

요나 예언서는 이미 요나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요나 예언자가 자신을 소개할 때 히브리 사람이오,라는 말과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 세상의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요나 예언서의 예언자가 고백하는 야훼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민족 신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임금이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다. 배타적이었습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될 것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다른 애들은 몰라.

야훼는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역사의 여정 안에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배를 가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새로운 깨달음이란, 다음과 같아요.

 

"야훼 하느님, 한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전까지는 다른 신이 있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우리 신이고, 바빌론의 신은 마르둑이고, 이집트의 신은 라고, 각각의 부족과 각각의 신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흐름 안에서 아! 우리 하느님,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우리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따라서 야훼 하느님은 유일한 신으로서 세상에 창조주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본래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 야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고백과 함께 그러니까 우리 야훼 하느님이 창조주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전의 옛날 신관에서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만 구원하면 되었어요. 그런데 야훼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민사상에 변화가 옵니다. 그전에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야훼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면서 선민사상의 의미가 바뀝니다.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왜?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래서 선택하셨다.

 

그것에 대해서는 초등학생들이 제일 잘 압니다.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엄마 아빠가 누구야~ 하고 부르죠?"

 "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왜 부르죠?" 하고 물으면, 얘들이 답합니다.

"뭐 시킬 게 있어서요."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무언가를 시킬게 있어서,

그리스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그 출발점은 교회를 인식하는데 노아의 방주처럼 인식합니다.

하느님은 노아의 방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드신 거야. 그 방주에 타면 살고 아니면 죽어!

하지만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뀝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고, 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야.

그래서 우리들은 불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매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그 땅은 구원된 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이것저것을 청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 안에서 우리는 점점 성장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극장판도 감독판도 모두 하느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제 요나, 네가 갖고 있는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온전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새로 태어나지 않을래?라는 초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요나는  이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모릅니다. 쓰여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도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께서 데리고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셨어요.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초등학생이 답을 주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제가 알아냈어요. '너나 잘하세요!'하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오! 꽤 그럴듯하다!'

하지만 텍스트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사람들이 떠나가고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가라,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마라."

교회의 전승은 그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여인이 막달레나 마리아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성경외적인 전승으로 텍스트에서 보면 그 여자를 예수님이 떠나보내고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요한복음에서의 이야기와 요나 예언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 여인을 떠나보내고 난 예수 그리스도는, 또 그렇게 요나에게 질문하는 하느님은,

요나와 여인의 관한 믿음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회개할 수 있고 그 여인이 올바른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사람은 변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우리는 자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요. 하느님은 우리를 믿고 게시는데.....

이 사순 시기 우리에게 다시 한번 회개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내 모상대로 태어났으니, 너희는 할 수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아요. 이제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요나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요나는 그런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으로 새로 태어나라는 초대가 바로 이 사순시기 회개하라는 말씀과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40이라는 숫자와 함께 묵상하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또 이어지는 강의를 기다리며 은총의 시간을 살아가며 기대합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최신부님을 위해 주모경 부탁, 당부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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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6.03.28 아멘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28 네, 감사합니다^^
  • 작성자메밀꽃 | 작성시간 26.04.02 아멘,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빗방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2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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