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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시 코르차크 Janusz Korczk (1878~1942)

작성자최성옥|작성시간26.04.03|조회수31 목록 댓글 1

야누시 코르차크 Janusz Korczk

(1878~1942)

 

유대계 폴란드인 작가이자 교육자, 의사인 야누시 코르차크(Janusz Korczak)는 “유럽에서는 안네 프랑크만큼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안네 프랑크처럼 그도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고, 일기장을 남겼다. 안네 프랑크와 달리 그는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택하지 않았다.”

 

생애

 

코르차크는 바르샤바의 폴란드화된 유태인 가문의 변호사인 유제프 골드 슈미트(Józef Goldszmit 1844년 ~ 1896년)와 겜비츠카(Gębicka) 가문의 체칠리아(Cecylia)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창기에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코르차크는 수 많은 책을 읽었다. 수년 후 바르샤바 게토(유태인 강제 거주지역)에서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독서에 완전히 미쳤다. 세상은 내 눈앞에 사라지고 오직 책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 부유했던 골드슈미트 가정의 재정은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 17~18세의 고등학생이던 코르챡은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

 

1898년에 바르샤바에 있는 제정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9년 여름에 첫 번째 외국 여행을 했는데, 이때 스위스에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교육 활동과 연구에 대해 배웠다. 대학 시절 자신의 경험을 통해 빈민, 노동자계층, 극빈 노동자 계층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의사로

 

1905년 3월 23일 코르차크는 의사 자격증을 땄다. 1905년부터 1912년까지 아동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였다. 왕진을 다닐 때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을 피하지 않았다. 돈이 없는 환자들에게는 냈다고 표시만 할 수 있는 수준의 진료비만 받았고 스스로 환자들에게 약값을 주기도 했지만, 부유한 사람들로부터는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이용해 많은 사례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1907년 ~ 1910/1911년 사이에는 경력을 쌓기 위해 외국의 여러 강연에 참석하고, 소아 클리닉에서 수련의로 근무했으며, 교육과 관계된 여러 연구기관과 복지시설을 방문하였다.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폴란드는 전쟁 고아들이 많이 발생하였고, 이후 그는 가정을 꾸리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라는 결심을 굳혔다. 1909년에 유태인 단체인 ‘고아 원조(援助) 협회 (Pomoc dla Sierot)”에 가입하였는데, 이 단체는 몇 년 후에 “고아들의 집”을 설립하여 코르차크에게 원장직을 맡겼다. 1917년에는 키예프 근처의 우크라이나 어린이 보호시설에서 의사직을 맡도록 소환되었다. 코르차크는 2년 전 키예프에서 짧은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키예프의 폴란드 남아 보육시설을 운영하고 있던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마리아 로고프스카 팔스카와 만난 적이 있었다.

 

교육자로

 

코르차크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동교육과 관련된 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존 듀이(John Dewey)의 진보주의 교육이론과 데크롤리(Decroly), 몬테소리(Montessori), 초기 교육학자인 페스탈로치(Pestalozzi), 스펜서(Spencer) 프뢰벨(Fröbel)의 연구를 통해 영감을 얻었으며, 또한 톨스토이의 교육 사상도 잘 알고 있었다. 아동 양육과 교육학에 관한 저서들을 출판했으며, 많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개인 교사로, 그 다음에는 사회운동가로, 나중에는 ‘고아들의 집(Dom Sierot)’ 원장으로 ‘우리들의 집(Nasz Dom)’의 공동 설립자로 아이들과의 경험을 쌓아 갔다.

 

코르차크는 어린이 인권 보장을 강조하며 어린이들이 자율과 권리,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르차크가 일하는 아동교육 시설에서 교사들은 어른과 아이들을 똑같이 대하는 민주적인 원칙을 매일매일 실행했다. “어린이는 어른과 똑같이 연상하고 판단을 내리지만 – 경험의 짐만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한 코르차크의 의견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어린이는 없다 – 다만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전통적 가족 구조 특히 보수적인 가톨릭이나 정통 유태교에서 제시하는 가족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코르차크는 ‘세상을 개혁하는 것은 교육방식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고아들과 함께

 

원래 직업은 의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코르차크는 스테파니아 빌친스카(1886년 ~ 1942년)와 함께 유태인 단체인 ‘고아 원조 협회’의 지원을 받아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들의 집”을 설립했다. 1912년 4월 7일에 고아원을 개원하고, 코르차크가 원장이 되었다. 코르차크는 이 고아원을 30년 동안 이끌었다. 1940년 10월과 11월 사이에 “고아들의 집”은 게토 구역인 흐워드나(Chłodna) 거리로 옮겨졌다. 나치의 개입으로 인해 강제로 이사해야 했을 때 코르차크는 사무실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보석금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1919년부터 코르차크는 마리아 팔스카와 함께 두 번째 어린이 보호시설인 폴란드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우리들의 집”을 설립했다. 고아원 “우리들의 집”에서는 혁신적인 교육 방법을 적용하였다. 두 시설 모두 7~14세의 아동을 받아들였으며, 아동들에게 직접, 자기들만의 기구 즉, 법정, 신문, 직무 분할체계, 공증사무소, 신용조합 등을 만들어 자치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마지막)천사의 행진

 

인생의 마지막 수 개월은 바르샤바 게토 구역에서 보냈다. 1942년 8월 5일 또는 6일 아침 게토” 구역에서 나치 친위대 일원, 우크라이나 경찰, 라트비아 경찰로 이루어진 그룹에 의해 포위되었다.

 

게토로부터 강제수용소로 유태인 강제 이주가 진행되던 날, 코르차크는 강제수용소까지의 운송 차량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자기 고아원 아이들 200여 명과 스테파니아 빌친스카를 포함한 수십 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행진을 가졌다. 그들의 마지막 행진은 전설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영화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1942년 8월6일, 독일군은 예고 없이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안에 있는 코르차크의 고아원에 이동을 명령했다. 1942년 8월 5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야누슈 코르차크 박사와 192명 아이들의 마지막 죽음의 행진을 해야했다. 나치는 그가 운영하던 고아원 아이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끌고 가 죽이려 하였다. 아이들은 처음엔 극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아이들은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질렀고, 박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살려주세요, 무서워요!"라며 울부짖었다. 오직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으로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그는 아이들의 공포를 씻어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얘들아,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배낭을 메거라. 우리는 지금 소풍을 가는 거란다.“ 박사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속삭였다. "선생님이 너희 곁에 끝까지 함께 있을께.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거니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다."

 

박사의 이 말이 끝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땅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울던 아이들이, 마치 새로 태어난 이들처럼 당당하게 일어섰다. 목격자 예호슈아 페를레(Joshua Perle)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아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박사님이 만들어준 초록색 '국왕 매트 1세'의 깃발을 앞세우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존엄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아이 192명과 어른 10명은 깃발을 들고 열차가 있는 집하장까지 행진했다. 코르차크가 아이들과 함께 열차를 타기 직전, “몇몇 사람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한 독일 장교가 인파를 뚫고 코르차크에게 다가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고 한다. (유대 아동 복지 기관) 첸토스의 한 유력 회원이 그날 아침 코르차크를 대신해 게슈타포에 탄원을 넣었고, 그 결과 코르차크는 열외 허락을 받았지만 아이들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코르차크는 고개를 젓고는 독일 장교에게 가라고 손짓했다고 전해진다”.

 

코르차크는 1942년 8월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그가 보호하던 아이들 192명과 함께 트레블링카 수용소행 ‘가축 열차’를 탔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 도착한 희생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아이들의 왕 야누시 코르차크>를 집필한 미국의 작가이자 심리치료사인 베티 진 리프턴은 코르차크가 설립한 유대인 고아원에서 살았거나 근무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그의 삶을 구현해냈다.

코르차크 기념비:마지막) 천사의 행진

 

평가

 

코르차키안’ 중 한 사람인 ‘미샤’는 말한다. 평생 도덕적 결정을 했던 코르차크가 마지막까지 고아들 곁을 떠나지 않은 건 “원래 그럴 사람”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코르차크의 마지막 모습을 본 고아원 교사 ‘미하우 브루블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말이죠. 다들 선생님이 아이들과 열차를 타기로 한 그 결정을 그렇게 대단하게 얘기하는데, 선생님은 평생 도덕적 결정을 하며 산 분이에요.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의사와 작가 일을 접고 가난한 고아들을 보살피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유대인 고아들과 함께 게토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트레블링카에 아이들과 같이 가기로 한 그 마지막 결정은, 그분이 원래 그럴 사람이었어요. 그분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유네스코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78~1979년을 ‘어린이의 해’이자 ‘야누시 코르차크의 해’로 선포했다. 책의 말미에 그의 ‘아동 권리 선언’이 부록으로 실렸는데, 이후 ‘유엔 아동권리선언’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출처:위키백과; 경향신문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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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6.04.0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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