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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상권 제 4편(9-10)

작성자최성옥|작성시간26.06.08|조회수35 목록 댓글 3

천주실의 상권 제 4편(9-10)

 

 

*4-9 중국 선비가 말한다:

 

이른바 천지를 생기게 하는 천주와 만물들을 존속시키고 길러주는 천상天上의 천주天主는 부처가 말하는 (진정한) “자아(아我)”입니다. 옛날과 지금, 위(天)와 아래(地)는, “자아(아我)”와 (본질적으로) ‘간격(간間)’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온전한 한 몸입니다.

 

단지 사대四大(땅,물,불,바람) 때문에 참된 자아가 침잠沈潛하게 되어서 우매하게 되고 어둡게 되었으니, ( 참된 자아의) 실상이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진 것입니다.

 

(자아의) ‘참된 근원(진원眞元)’이 날마다 쪼임을 당하여 (참된) ‘덕의 기틀(덕기德機)’이 날마다 풀어져 나가서, (참된 자아(아我) 천주도 아울러 쇠잔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자아로서의)’ 내가 만물들을 만들어내고 길러 낼 수 없는 것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흘러나간 폐단弊端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밤에 빛을 내는 진주(야광주夜光珠)라도 때가 끼면, 그 값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 원초의 (참된) 본체를 추구해야만, 비로소 그것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아뿔사! 이런 독毒을 가진 ‘침(타唾)’을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삼키고 있으니, (진실로) 슬픕니다. 타락하여 우매함이 극치에 이르지 않았다면, “만물의 근원이며 천지(를 창조한) ‘영험한’ (천주가 미천한) 만물들 때문에 타락하고 오묘하게 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의 덕성도 굳세고 결백하면 (아무리) ‘부벼대고 더럽히려’ 해도 오히려 그 참된 본체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물건이라도 엉겨서 굳어지게 되면 (아무리 그것을) 움직여 본다고 해도, 일정한 한도를 잃지 않습니다.

 

(천주처럼) 지극히 큰 존재는 (필적할 만한) ‘짝(우偶)’이 없으며, (천주처럼) 지극히 높은 존재에는 (그보다) ‘위(상上)’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참된 자아’가 곧 천주라고 한다면) 바로 ‘사람의 삶이라는 허망한 껍데기’를 연루시킴으로써, 그분을 더럽히고 미혹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부족한 지능의) 인간이 이런 식으로 (완전한 이성의) 하늘을 이긴다는 것이요, 사욕私慾이 이런 식으로 도리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神)’은 ‘육신(형形)’에게 부림을 당하게 되는 셈이며, ‘정욕(정情)’이 ‘본성(성性)에 뿌리가 되는 셈입니다.

 

(이제 무엇이) 본(本)이고 말(末)인지를 인식하는 일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 이 둘 사이(에 있는 만물들을) 비교해 본다면, 어느 것이 ’조물자造物者(조물자造物者=造物主)‘보다 뛰어나서, (땅, 물, 불, 바람) ’4원소‘속에 그것(조물자造物者)를 가두어두거나 빠뜨리게 하여서, 그것 (조물자造物者)를 우매한 것들에 함몰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하늘 위에 천주와 (우리 인간의) ’자아‘가 이미 함께 ’한 몸(一體)‘이 되었다면, 그것들을 일단 명철함과 혼미함 둘로 (구분)한다 해도 (서로)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비유하면 머릿속에 ’이성적 중심‘과 마음속에 ’이성적 정신(영신靈神)‘이 다 같이 ’한 몸(一體)‘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한 몸이라면) 때마침 고초를 만나거나 변고變故를 당했을 그 때에는, 머리의 정신(神)이 혼미해지면 ‘마음의 정신(心)’도 똑같이 혼미하게 됩니다. (한 몸이라면) 반드시 한쪽은 어지러운데(잡雜), 다른 한쪽은 ‘온전(치治)’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인간) 마음에 어지러움이 진실로 하늘 위에 창조의 영원한 ‘명철함’을 교란시킬 수 없으며, 저 (천주의) 영원한 ‘명철함’도 또한 우리 (인간의) 마음에 혼미함을 면제해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천주와 함께 ‘한 몸(일체一切)’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증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릇 “천주와 사물은 같다”고 말한다면, 어떤 이는 “천주가 바로 그 사물들이며,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천주가 사물 속에 있으며, (이런 사물들의) ‘내면적 성분(내분內分)’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사물이란 –마치 기계와 도구를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천주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 주장들은 모두 도리를 해치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 주장들을 조목조목 따지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천주가 바로 개개의 사물이다.”라고 말한다면, 우주 사이에는 비록 만물이 존재하더라도, (천주와 만물이라는) 두 가지 본성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일단 (이와 같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성들이 없다면, 이것은 (천주와 구별되는) 만물을 없는 셈이니, 어찌 ‘사물들의 이치’를 혼란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서로 다른 본성들을 가진 다양한) 사물들에는 ‘불변하는 본능(상정常情)’이 있는데, 모두 스스로를 온전하게 하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자기 보존 본능을 말한다/.)

 

(그러나) 제가 천하의 사물들을 보니. 진실로 서로 해치고 서로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예컨대, 물이 불을 소멸시키고, 불이 나무를 태우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 먹고, 강한 새(조鳥)가 약한 새(조鳥)를 삼켜 버리는 일입니다.

 

일단 천주 (자신)이 바로 각각의 사물이라면, 천주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해를 끼치면서, (결코)한 번도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데까지 미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물들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진정 사물을 창조하신) 천주께서는 (사물들을) 죽이고 해를 끼쳐야 할 이치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천주와 우리 ‘자아’가 한 몸이라는) 그런 주장을 따른다면, 우리 자신이 곧 ‘하느님’이며, 우리가 ‘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하는 제사일 뿐이니, 이러한 ‘예식禮式’은 더욱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와 같다고 한다면, 천주는 나무나 돌 등과 같은 (한낱) 사물이라 말할 수 있는 데, 사람들이 그런 (천주)께 쉽게 순명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그들이 “천주는 사물의 내면적인 성분이다(內分).”라 말한다면, 이른 천주란 사물보다도 미미한 것입니다.

 

무릇 ‘온전(전全)한 것’은, 모두 각각 ‘나누어진 것(분分)’ 보다 큽니다. ‘말(두斗)’은 ‘되(승升’(로 나누어지니 그것) 보다 큽니다. ‘되(승升)’는 말(두斗)’의 10분의 1일뿐이며, 밖은 안을 싸고 있습니다.

 

만약 천주는 사물 속에 내재하며 그 사물 본연의 성분이라고 한다면, (밖에서 자기 속에 천주를 싸고 있는) 사물은 (당연히) 천주보다 크며 천주는 도리어 작은 것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이렇게 되면) 바로 그것에 의해 생겨난 사물들보다 작아지는데, 그것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찌 그것이 그러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천주가 사람 속에 있는 내면적 성분(내분內分)이라면, (사람 속에서) 높으신 주님이 되겠습니까? 천한 일꾼이 되겠습니까?” (천주가) 천한 일꾼이 되어서 (사람 속의) ‘다른 성분(타분他分)’들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본래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사람 속에서) 높으신 주님이 되어 한 몸의 ‘권력(병柄)’을 오로지 잡고 있다면, 세상에는 악을 행하는 이가 한 사람도없어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악인들이 이처럼 더욱더 많은 것입니까?

 

천주께서는 ‘선함(善)’의 본 뿌리이시기에, 덕이 순수하여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가) 이미 한 몸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사적인 욕망(사욕私慾)에 가리우게 되고, 사특한 행위를 멋대로 하려고 한다면, (천주의) ‘덕성(덕德)이 왜 (이렇게) 쇠잔해진 것입니까? 그 (천주)가 하늘과 땅(건곤乾坤)을 창제創制때에 절도에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째서 지금 (사람 속에서) 한 몸의 행위를 다스리는 데 조차도, 들어맞지 않은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한 (천주께서는) 모든 계율戒律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천주께서 지킬)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까?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까? 모두 (이렇게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만물을 몸체와 같은 것이니 – 마치 목수가 자기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 천주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천주는 더욱이나 그 사물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석공(석장石匠) 자기가 (돌을 쪼는 데 쓰는) ‘정(돌을 쪼거나 다듬는 도구)’이 아닙니다. 어부는 자기가 (쓰고 있는) 그물이 아니요, 자기가 (타는) ‘배(주舟)’가 아닙니다.

천주는 (자기가 창제한 사물이) 아닌데, 어째서 이것 (즉 천주와 사물)들을 똑같은 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만물은 천주가 사용하는 것이라는 ) 이 논변을 따라가면, 그 주장은 “만물들의 행동은 그 사물들에 달려 있지 않고 –마치 기계나 도구의 일이 모두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공功인 것처럼- 모두 천주가 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쟁기가 밭(전田)을 간다고 말하지 않고 농부가 밭을 간다고 말합니다. 도끼가 나무를 벤다고 말하지 않고, 나무꾼이 나무를 벤다고 말합니다. 톱이 목판을 자른다고 말하지 않고 목수가 자른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만물이 아니라 천주가 ‘직접’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 말은 불은 스스로 탈 수 없고, 물은 스스로 흐르지 못하며, 새는 스스로 울지 못하고, 짐승은 스스로달리지 못하며, 사람이 ‘말(마馬)’을 타거나 수레에 올라탈 수도 없는 셈입니다. (그런 것들은) 바로 모두 오직 천주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인小人들이 벽을 뚫고 담을 뛰어넘어 (도적질을) 하고 들(야野)에서 행인들을 못가게 막아 강도질하는 것도 그들의 죄가 아니고, 또한 천주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죄를 짓게 한 것입니까?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사람들을 마땅히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런 사람들을 징벌하고 죽여야 합니까? 선행을 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그들의 공功이 아닌데, 어째서 그런 사람을 마땅히 상償 주어야 합니까?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에, 이 (세 번째) 주장을 믿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물들은 천주를 본분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죽거나 파괴되면) 흩어지는 것이요, 천주께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오직 그들과 연관된 사물의 분류에로 돌아갈 뿐입니다. 만약 사물들이 파괴괴거나 죽어서 모두 (천주의) 본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면,(그것들은) 장차 천주께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파괴되거나 죽는 것이라 말할 수 없고, 바로 생명을 더 보태주는 것이요 사람을 온전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누가 또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효자는 어버이를 위하여 관棺과 곽槨을 두텁게 준비합니다. 어째서 (효자들이) 돌아가신 부모님으로 하여금 (천상의) ‘존귀한 분(상존上尊)’으로 빨리 변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천주란 만물을 창시創始하고 제작制作하신 분임을 (저는) 이미 (앞의 제 1편에서) 증명하였습니다. 그분의 본성은 혼융渾融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그분에 의해 창제된 사물들이 다 헤아려서 미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 사물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것과 ‘이치(리理)’가 ‘정밀精密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천주의 흔적이라고 말하면 옳습니다. 천주하고 말하면 그릇된 것입니다. 커다란 흔적이 길에 찍혀 있음을 보고 (그에) 따라서 큰 사람의 발이 이 곳을 지난 적이 있다고 검증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 ‘그 흔적이 (바로) 큰 사람이다’라는 데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림(도圖)의 정묘精玅함을 보고 그 화가를 사모思慕하여 말하기를, “고수高手의 솜씨”라고 하지만, 이 그림이 곧 화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주는 삼라만상에 사물을 생기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근원을 미루어서 따져 보면 지극히 정교하고 성대盛大하여 우러러 생각하고 애모하는 (마음을) 버려도 되는 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혹시 ‘올바르지 못한 이론’들에 빠지게 하여서 그 본래의 근원을 잊어버리게 한다면,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착오錯誤의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사물이 ‘그렇게 된 까닭(소이연所以然)’을 따질 수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사물에 내재하는 성분(내분內分)’으로 (사물을 구성하는) 음양陰陽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사물 밖에 있는 성분’이 있는데 ‘운동인(작자作者, casa efficiens)과 같은 부류가 그것입니다. 천주께서 만물을 지어 낸, 그것들의 보편적인 운동인이라면, ’사물 밖에 있는 성분(외분外分)‘인 것입니다.

 

다만 그분(천주)이 만물 속에 존재하는 것 또한 한 가지 방식만은 아닙니다. 천주께서 혹 사물 속에 계시다는 것은 - 마치 사람이 (자기의) 집이나 마당에 있는 것처럼 - 그 사물의 장소에 있음과 같습니다. (천주께서) 혹 사물 속에 계시다는 것은 마치 손발이 몸에 있고, 음양陰陽이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그 사물의 성분이 되는 것입니다. 혹 속성이 실체 속에 있는 것은 마치 흼(백白)이 말(馬) 속에 흰 말(백마白馬)이 되고, 차가움(한寒)이 얼음(빙氷)속에 있어서 차가운 얼음(한빙寒氷)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천주께서) 혹 사물 속에 계시다는 것은 - 마치 햇빛이 그것에 의해 비추어진 수정水晶 속에 있음이나, 불이 그것에 의해 달궈진 빨간 쇠 속에 있는 것처럼 – ’원인(소이연所以然)‘이 그 ’결과(기연己然)‘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끝(결과)‘로서 ’발단(원인)‘을 추론하여, “천주께서 사물 속에 계신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비록 수정에 있고 불이 비록 세속에 있다 하지만, 그러나 각 사물이나 강물체는 (그것들의) 본성이 뒤섞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천주께서 사물 속에 계시다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단지 빛은 수정水晶을 떠날 수 있겠으나, 천주께서는 만물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천주는 무형(無形,immaterial)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만물들과 딱 끊어서 별도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는) “모든 장소들의 온전하게 존재하고 계신다.”고 하면 옳은 것입니다. (천주는) “각각의 부분들에 온전하게 존재하고 계신다.”고 말해도 또한 옳은 것입니다.

 

*4-9: 중국 선비가 말한다:

 

명쾌한 논의를 들으니 먼젓번 의심이 풀렸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은 천하의 만물들과 모두 하나”라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서양 선비가 말한다:

 

사람을 천주와 같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지나치게 높인 것입니다. 사람과 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을 흙이나 돌과 같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지나치게 낮춘 것입니다. (인간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높이 보는) 전자 前者의 과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그런 인간들보다 못한) 짐승이 되려고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무릇 인류를 이끌어서 흙이나 돌이 되게 하는 것을 선비께서는 따르시겠습니까? 이런 주장들은 신뢰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변론辯論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주宇宙’사이에는 무릇 ‘같이 것이 되는(同類)’ 종류들이 많습니다. 혹 다른 사물이면서 이름이 같은 ‘같음(동同)’이 있으니. 예컨대 하늘의 ‘버들 별자리’(유숙柳宿,liushu)와 ‘버드나무(유수柳樹,liushu)가 그것입니다.

 

혹 무리를 같이 하는 같음이 있으니 ’많은 개체(다구多口)‘들이 모여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 우리 안에 양羊들은 모두 ’같은 무리(동군同群)‘가 되며, 소속이 동일한 군대의 병졸들은 모두 ’같은 군대(동군同軍)‘가 되는 그것입니다.

 

혹 이치를 같이 하는 같음이 있으니 예컨대 뿌리, 샘물, 심장이 세 가지는 서로 (이치가) 같습니다. 대개 뿌리는 온갖 가지들(백주百株)의 ’근본(本)‘이 되고, 샘물을 온갖 샘물의 ’원천(원源)‘이 되고, 심장心臟은 온갖 혈맥들의 ’유래(유由)‘가 되는 것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이런 (위에 열거한) 세 가지 (경우) 잠시 그것들이 ’같은 것(同)’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는 다른 것들입니다.

 

혹은 ‘종(宗,genus)’을 같이 하는 ‘같음’이 있으니, 예컨대 새와 짐승은 모두 지각을 함으로 각각 지각이 있는 부류의 배열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혹 ‘부류(류類,species)’를 같이 하는 ‘같음’이 있으니, 예컨대 이 ‘말(마馬)’과 저 말은 다 함께 말의 부류에 속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은 다 함께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대체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 몸을 같이 하는 ‘같음’이 있으니 예컨대 사지四肢와 한 몸통이 다 같이 하나의 몸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혹 이름들은 같지 않으나 실제로는 같으니 예컨대 방훈放勳과 제요帝堯는 두 가지 이름이나, 요컨대 한 사람입니다. 이 둘은 바로 참으로 같은 것입니다.

 

(중국에서 말하는) 무릇 “세상 만물은 모두 같다”는 주장은, 이 세 가지 등급의 (‘같다’는 논거들 중에서) 어느 것에 속합니까?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년 6월 8일 AM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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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성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천주실의를 입력하면서 한자어의 매력을 느껴봅니다. 한자를 더 깊이 많이 공부했더라면 이해도 한층 깊었을지도 한문 세대를 비켜가 유감입니다. 잠시 마태오 리치와 이벽 세례자 요한 두 어른도 생각하면서.
  • 작성자빗방울 | 작성시간 26.06.08 감사합니다!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6.06.08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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