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실의 하권 제 5편(3-4)
* 5-4 중국 선비가 말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짐승의 몸에 있는 것은 본래 전생前生의 영혼에 의거한 것이다. 다만 그 (현재 짐승의) 몸이 (그 영혼과) 서로 걸맞지 않기 때문에 꽉 막혀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자기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있는 경우라면 그 본래의 (영혼은 사람의) 몸과는 서로 잘 맞을 것인데 어찌하여 또한 전생의 일을 기억할 수 없는지요?
저는 사람의 영혼은 ‘정신(神,spirit)’이라고 이미 일찍이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정신은 자기의 본래의 바탕(본정本情)대로 움직이지, 몸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이) 비록 짐승의 몸에 있다 해도 또한 본래 존재(본성本性)의 영능(영능靈能, 즉 추리력 intelligence)을 쓸 수 있으니 어찌 인식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천주께서 이런 윤회의 ‘아름다움(미美)’과 ‘추함(추醜)’의 변화를 만드셨다면, 반드시 착한 일을 구원하고 악한 일을 징벌하려는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생에서 저지른 선과 악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현세에서 맡고 있는 행복과 불행이 과연 전생에 인연에 말미암은 것임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다면 선을)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악을) 증거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윤회설은 결국 무엇에 유익한 것입니까?
2) 둘째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최초로 사람과 짐승을 창조하실 때에는 죄지은 사람을 반드시 짐승으로 변조시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나 짐승에게) 각각 자기 본래의 혼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의 짐승이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짐승의 혼과 (원초의) 옛날 짐승의 혼은 다를 것입니다.
마땅히 지금의 것이 영특하고 옛것은 우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짐승의 혼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짐승의 혼이 옛날에 그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셋째는 이렇습니다:
‘도道’를 명백히 하는 사람은 모두 혼魂에는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급低級이 생혼生魂입니다. 이것은 단지 부여받은 존재를 살게 하여 성장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초목들의 혼입니다.
중급中級은 각혼覺魂입니다. 부여받은 존재를 생장시키고 또한 눈과 귀로 보고 듣게 하며, 입과 코로 맛보고 냄새를 맡게 하고, 다리와 몸으로 사물들의 실정實情을 느끼게 하니 이것이 짐승들의 혼魂입니다.
최상급이 (사람의) 靈魂입니다. 이것은 생혼生魂과 각혼覺魂의 기능을 함께 하여 생장하게 하며, 또한 사물의 실종을 느껴보기도 하고 또한 (이것을) 받은 존재들로 하여금, 사물들을 추론하고 ‘이념(리理)’의 뜻을 명백히 분석하는 것이니, 이것이 사람들의 혼魂입니다.
만약 짐승의 혼과 사람의 혼을 하나로 하면, 이것은 혼에는 단지 두 종류만 있다는 것이니 또한 세상의 통론通論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르는 사물들을 (분류함에) 단지 겉모양으로 그 본성을 정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혼魂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본래의 혼이 있은 다음에 본성이 있게 되고, 그 본성이 있은 다음에 (각기) 이런 부류가 결정됩니다. 이런 ‘부류(종種,species)’가 정해진 다음에 이런 모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성의 같고 다름(동이同異)‘은 흔히 혼魂의 ’같고 다름‘에 말미암은 것이요, 부류(종種,species)의 ’같고 다름‘은 본성의 ’같고 다름‘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습의 ‘같고 다름’은 부류의 ‘같고 다름’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새나 짐승의 모습이 일단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들의) 부류나 본성이나 혼이 어찌 모두 다르지 않겠습니까?
사물의 사람이 사물에 이르러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격물궁리格物窮理)은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 겉으로서 그 속을 검증하고 드러난 것을 관찰하여 그 숨겨진 곳에 통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초목의 혼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들은 그저 크게 자라기만 하고 지각知覺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서, 그것들의 속은 다만 생혼生魂만을 가졌다는 것을 검증해 내는 것입니다.
세나 짐승들의 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들은 다만 지각知覺만을 할 뿐 이치를 추론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들은 다만 각혼覺魂만 가졌다는 것을 검증해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혼이 무엇이냐를 알려면 유독 사람들만이 만물의 이치를 추론할 수 있음을 보고서 오직 사람들에게 영혼(영혼靈魂, 즉 지능혼,intelligence-soul)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치가 이와 같이 변명하지만, 불교에서는 “짐승들의 혼과 사람의 흔히 똑같이 영험(영靈, intelligent)하다.“고 말하니 이치의 심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처를 따르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제가 늘 들어왔으나, “이치(fl理)를 따르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4) 넷째는 이렇습니다:
사람 몸의 생김새는 뛰어나게 준수하여 세나 짐승들과 다르다고 한다면, 이들의 혼魂 또한 다를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목수가 의자나 탁자를 만들려고 한다면 반드시 목재를 씁니다. 예리한 기물器物을 만들려고 하면 반드시 쇠를 씁니다. 기물(의 용도)가 각기 다르면 소용되는 자료 또한 상이합니다.
일단 사람 몸의 생김새가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이 혼魂 또한 어찌 짐승(의 그것)과 서로 같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의 영혼이 혹시 다른 사람의 몸에 가탁假託해 있거나, 혹은 짐승의 몸에 들어가 ‘현세現世에로 환생(회생回生)’한다”는 석가모니의 말은 진실로 허튼 소리입니다.
사람의 자기 혼은 다만 자기의 몸과 합할 뿐이지, 어떻게 자기 혼으로 남의 몸과 합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다른 부류와 몸과 합하겠습니까?
또한 도刀(날이 한 면만 있는 칼)는 오직 도刀의 칼집에 맞고, 검劍(날이 양면에 있는 칼)은 오직 검劍의 칼집에만 맞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어떻게 도刀가 검劍의 칼집에 맞을 수 있겠습니까?
5) 다섯째는 이렇습니다 :
“사람의 혼魂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말에는 원래 다른 (특별한) 증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전생前生에 (저지른) 부정한 짓거리가 일찍이 어떤 짐승(의 짓거리)를 닮았기에, 천주께서 마땅히 쫓아가 저들을 벌하여 후세에 그런 짐승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형벌이 아니고, 자기들의 욕구를 (스스로) 쫓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천주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하겠습니까?
사특한 사람들의 성정性情이란 평생 자기의 (타고난) 인륜 도덕을 파괴하며 마음속에 멋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만 그들이 아직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얼굴을 하고 태어난 것이 악행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저들 악당들이) 내세에 가서는 자기들의 얼굴 모습을 고칠 수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찌 크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횡포하고 잔악한 자가 늘 (남을) 해치고 죽이는 일에 습관이 들었다면, 어찌 날카로운 발톱과 톱 같은 송곳니가 몸에 생겨나서, 호랑이가 되든 늑대가 되든, 밤낮으로 입에 피를 묻히고 다니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오만 불순한 자가 사람을 속이는 일에 익숙하고 겸양을 모른다고 하면, 어찌 자기의 몸이 크게 자라나서 사자로 태어나, 물(수水) 짐승들의 왕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남을 해치고 도둑질하는 자들은 남의 재물을 훔쳐서 생활하는데 여우가 되어 배까지 교태를 품수稟受 받아 자기의 성적을 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변화에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짐승으로 변하는 것을 형벌로 여기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혜롭게 여길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시고 지극히 분명하시기에, 그분이 벌을 주시 문 반드시 이와 같이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람이라는 고급 부류로부터 짐승이라는 미천한 부류로 들어가는 것이 곧 형벌이다’라고 말한다면, 제가 (말씀드리려는) 뜻은,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도리어 사람으로 살아 있는 것을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사람의 도리(인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의 (타고난) 짐승의 성정만을 멋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수치로 여기는 것은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저들이 사람의 얼굴을 벗어나서 고약한 짐승들 사이에 끼어들어 수치심도 없고 거리낄 바도 없게 된다면 (저 악당들은) 크게 뜻을 이룬 셈입니다.
따라서 윤회라는 거짓되고 허황한 말은 악을 맞고 선을 권하기에도 무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입힙니다.
6) 여섯째는 이렇습니다:
저들( 불교_이 살생의 금지를 말하는 뜻은, 우리에게 도살당하는 소나 말이 바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후생後生(즉 現世의 환생還生)이 아닌가 두려워하여 그들을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것에 의심이 간다면, 소를 몰아서 논밭을 가며 또는 무거운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은 어찌 견뎌낼 수 있단 말입니까? 말에 재갈을 물려서 그것을 타고 길을 다니는 것을 어찌 참아낼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것과 그들을 농사일에 수고롭게 고생시키는 것은, 죄질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기 부모를 죽인 것과 항상 안장을 짐 지우고 ‘저잣거리(시市)’나 조정朝廷에서 채찍으로 욕보인 것 또한 (죄질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농사일을 폐할 수 없고 가축의 사용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생금지의 계율이 (황당한 것임에)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18 PM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