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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님

5.창조(생명)

작성자최성옥|작성시간26.06.07|조회수27 목록 댓글 2

Ⅱ. 시원의 물줄기

5. 창조-생명

(창세기 1-2장)

 

 

- 창세기 1장 저술 상황: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1,1). 창세기는 한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자신을 만든 존재가 없다. 이분이 바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우리는 이 선언을 ‘당연하지’라고 받아들이지만 창세기 1장이 쓰여졌던 배경, 즉 온갖 우상숭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절대 당연하지 않다. 이 상황은 오늘날 미신을 믿거나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창세기는 성경의 대문이고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서문에 해당한다. 창세기 자료들이 집성되고 편집되던 때는 유배 시기 또는 그 직후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보니 바빌론 사람들은 태양신, 달의 신, 별 신 뱀 신 등 온갖 자연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창세기 1장을 통해 “그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신을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신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일 이다”라고 대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는 천지개벽 선언이었다. 이제까지 이해해 온 신관이 180도로 바뀐 것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선언은 위험천만한 선언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불러일으킬 종교적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당시 기록자들의 용기와 비장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가 특히 천주교 신자인 내가? 이것을 진심으로 믿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개인적 생각에 창세기 1-2장만 완전히 통찰하고 믿는다면 성경은 더 이상 진도 나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즉 하느님의 존재存在와 임재臨齋를 진심으로 믿고 사는지... 문제는 문자로만 남고 실제로는 쓰러지고 넘어져 대부분 미완의 믿음과 신앙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존이라고 여겨진다.

 

- 한처음에:

“한 처음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베레쉬트)는 ‘집’, ‘안에’(베트)라는 말과 ‘처음’, ‘시작’(레쉬트)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로는 ‘큰 태초’라는 뜻도 있는데 이것은 그 가늠을 헤아릴 수 없는 시점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in the begining’으로 옮길 수 있다. 한 처음이란 말은 시간적 개념과 함께 공간도 아우르는 말이다.

 

-혼돈에서 질서로:

하느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바라(בָּרָא, Bara):절대적 창조:

창세기에서 주목해야 할 동사는 ‘바라(בָּרָא, Bara)’이다. 이것은 ‘창조하다’라는 뜻으로 창세기 저자들이 결정적으로 강조하는 동사이다. 성경은 감탄할 정도로 용어 사용이 정확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드는 주체가 하느님이냐 사람이냐에 따라 동사를 달리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셨어도 재료의 유무에 따라 다른 동사를 사용했다. 즉 같은 개념이라 하더라도 행동의 주체와 행위에 따라서 다른 동사를 사용했다.

 

동사 ‘바라’는 하느님만 주어로 받는다. 이 바라 동사는 창세기 1장에서 딱 세 번 나온다.

*1절: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1절: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27절: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바라’가 가리키는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나무를 잘라서 책상을 만들면, 그것은 나무가 변해서 책상이 된 것이다. 곧, 있던 것을 변화시켜 다른 무엇을 만든 것이다.

 

‘바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으면 무한한 영적 영감을 얻는다. 가령 진화론을 이해할 수 있다. 바라는 단계적 창조론으로 진화론을 수용하고 두 이론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인정하는 진화론이란 ‘小진화론’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면 유인원類人猿에서 출발했을 것이란 얘기다. 생각해 보라. 사람의 조상이 어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몇억 년이 걸렸을 무수한 종들의 진화 속에 그 자체로는 도저히 규명되지 않는 어떤 단절,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단어가 바로 ‘바라’곧 하느님의 창조적 개입인 것이다.

 

-바라(בָּרָא, Bara)의 하느님:

우리가 성경에서 창세기를 공부한다는 것은 신앙과 삶에서 밑천을 얻어내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 바라는 無에서 有의 창조, 절대적 하느님 창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바라’라는 주제가 성경 역사의 고비마다 새롭게 주제가 되고 있으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 바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빌론 유배라는 그 억압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의 역사는 완전 끝이 났었다. 그들은 끝이라고 생각되던 상황에서 처음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주 창조의 역사를 창세기 1장과 2장을 기록하면서 바라의 하느님을 회상하였다. 그 의도는 이렇다. “그러니까, 절망하지 마라 여기가 끝이 아니다.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하느님께서 새 역사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을 우리 개인의 삶과 연결시켜 보자. 건강 이상 또는 사업 폭망의 생존 기로에 있는 이들 이런 이들은 바라야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서 하는 수밖에 없다. 바라bara 하느님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셨으니까, 있는 데서 조금 더 만들어 주시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성이고 우리의 신앙이다,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막다른 골목, 끝장,밑바닥,골짜기......,

절망, 체념, 포기, 스러짐......,

불능,의기소침, 무기력.......,

오직 하나 매달릴 끈

바라bara!

건강의 바라, 사업의 바라, 역사의 바라.....,

오, 하느님!

 

-원축복原祝福:

하느님께서는 6일동안 창조하신 뒤 매번 ”보시니 좋았다“라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다. 이는 세 가지 의미를 뜻한다. “지금 이대로 좋다. 그대로만 유지하라” 나는 이것을 원축복이라고 말한다. 이 원축복은 세 가지 의미를 함의含意한다.

첫째, 원축복은 창조가 완전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둘째, 인간 타락이 하느님께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다.

셋째,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무변무상無變無常 하신 분이기에, 태초에 ‘좋았다’라는 그 선언은 마지막이 없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

창조의 절정에 인간이 있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 1,26). 여기서 ‘모습’이라는 단어로 ‘셀렘selem’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겉모습이 닮았을 때 사용하는 ‘데무트demut’와 달리 본모습 ‘본질이 닮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겉모양이 아니라 속 곧 특성을 닮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특성을 닮았을까? 첫째,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적 특성을 닮았다. 전권자는 하느님이지만 인간도 어느 정도 창조적 특성에 참여한다. 특히 “다스려라”(창 1,28)에서 자연을 잘 돌보라는 창조 질서의 소명을 위임받았다.

 

둘째, 인간은 하느님 사랑을 닮았다:

하느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을 주고받는 분이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사랑은 자기 밖으로 자신을 분출하고 나누는 속성이 있다. 사랑하기에 만들 수밖에 없다. 이 나눔의 과정이 바로 창조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모상 모습을 지녔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사명과 연결된다.

 

인간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관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평생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하느님이고, 하나는 영혼靈魂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에 전념하련다. 영혼 연구에 전념하련다. 왜냐하면 영혼 속에 하느님이 숨어 계시기 때문에....,”

 

-선악과:

주 하느님께서는 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과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9.15-16)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명령이다. 태초에 명령 하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명령은 어떤 것인가? 하느님과 인간의 경계 창조주와 피조물 경계를 그어주는 명령이다. 창세기 저자는 왜 이 명령을 ‘선악과’로 그려냈는가? 이 명령을 지키면 선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지키지 않으면 악으로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 명령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부모와 자녀가 있다. 이 부모와 자녀는 사이가 좋다. 자녀에게 무엇이든 다 줄 수 있고 양보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요지부동 관계가. 가령 딸이 엄마에게 ”내가 엄마 만든 걸로 하고 이제부터 내가 엄마 합시다“라고 하고”좋다“라고 답변했다고 해도 천하없어도 이 생물학적 질서와 관계는 되돌릴 수 없다. 그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명령이다. “네가 무엇이든 다 해도 좋은데 내 영역만은 건드리지 마라,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인간이다. 이거 하나는 지켜라.“ 이것이 하느님의 명령을 막아주는 것이 선악과이다.

 

-‘된다’와 ‘안된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만은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 2,16-17)

 

욥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기 38,11). 하느님과 인간을 아무리 가깝게 여겨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 선을 창세기는 선악과로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자유는 ‘주는 자유’가 아닌 ‘선물로 준 자유, 주어진 자유’다. 이 말은 존재와 삶의 영역에 경계선(boundary)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는 이 영역을 지키는 한에서의 자유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난 여자:

왜 갈비뼈로 만드셨을까? 이것은 ‘옆구리’가 주는 상징. 즉 ‘동등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로, 여자는 ‘잇샤’이다. 한 단어를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변화시킨 명사이다. 그러니까 같은 뿌리 한 몸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종속적 관계가 아니다.

 

-‘아다마’에서 온 아담:

-한문에서 흙은 ‘土(토)’이다. 땅의 모습과 그 위에 생명이 돋아나는 모습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다. 맨 아래 긴 가로획은 단단한 땅을 의미한다. 그 위로 수직과 가로의 획은 땅을 뚫고 나온 초목을 형상화한 것이다.

 

아담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왔다. 인간이 흙에서 온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담이 생명체가 된 것은 하느님이 불어넣어 주신 ‘숨’ 때문이었다(창세 2,7).

 

(흙은 암석이 비바람에 수천 년 이상 풍화되어 부서진 무기물과, 동식물이 썩어 생긴 유기물이 섞여 만들어진 물질이다. 고대 시대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경 사회에서 흙은 만물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이해되었다. 모든 생명체의 기반이자 농작물의 영양분(75%)의 제공하는 유한한 생명 자원이다. 1 cm 흙의 생성에 200년이 걸리며, 생물의 정화작용 탄소 저장을 모든 만물과 특히 인간이 수명을 다하고 돌아가는 거처였다. 이렇게 흙은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임의 추가 부분임을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성경 진술이다. 창세기 2장 저자는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는가?“가 아닌, ’인간이 무엇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곧 인간은 흙이라는 물질로 된 존재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숨’이 살아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면 그들은 소스라치고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9-30). 성경에서 인간은 세 가지 기본 요소로 된 존재다. 즉, 육체basar 영혼nepesh 그리고 생명의 숨ruach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원론二元論 애지 삼원론三原論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을 이루는 다양한 특성이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은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고 분리하여 이해하였다.

 

‘흙에서 나온 인간 존재

하느님이 숨을 지녀야

비로소 생명이라 불리는 인간 존재

여기 인간의 이중적 사명이 있다.’

흙이 낳은 자연

생명의 숨을 품고 있는 하느님의 폐肺

그것이 내 사명이 놀아야 할 집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07;PM 22: 48

출처:차동엽, 행복코드 1 (꿈의 성취를 통하여); 위즈앤 비즈, 68-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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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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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빗방울 | 작성시간 26.06.07 감사합니다!
  • 작성자주안 | 작성시간 26.06.08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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