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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님

6.여러 기원들:뿌리

작성자최성옥|작성시간26.06.15|조회수34 목록 댓글 2

. 시원의 물줄기

6.여러 기원들:뿌리

 

 

죄의 확산:

 

-카인과 아벨의 제물:

하느님은 왜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받으시고 카인은 제물은 굽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카인은 아벨을 죽였을까?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 반영이라고 한다. 확실히 정착민의 문명과 복지는 유목민을 앞서가고 그 결과는 하느님과 멀어짐을 초래한다. 정답은 이미 성경 본문에 드러나 있다. “아벨은 맏 배를 바쳤다고 한다. 맏 배란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 것이다. 반면 카인의 제물은 아무런 수식이 없이 ‘땅의 소출’이라고만 한다(창4,4;히브리서 11,4). 믿음은 마음보이다. 마음보를 잘 써야 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이다.

 

-카인의 범죄와 책임 추궁: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 4,9) 하느님은 이와 같은 질문을 창세기에서 두 번 하셨다. 먼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하느님의 아담에게 던진 물음에서 ”너 어디 있느냐?“(창3,9)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질문하신다.

 

카인이 대답한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여기서 ‘지키다’라는 동사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면서 ‘지키도록’ 당부하실 때(창2,15 참조) 사용한 것과 똑같은 동사 단어 ‘샤마르’다.

 

그런데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피조물을 지키지 않고 형제 관계와 공동체의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다. 또 이 대답에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명 반항이 깔려 있다. 하느님 명령대로 지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배어 있는 것이다.

 

-선처:

카인은 동생을 죽인 죄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쫓겨나게 된다. 그러자 카인이 말한다.”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 너무 큽니다. .....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카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표를 찍어 주신다. ‘동생을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 죄인을 일곱 갑절로나 보호하다니...’ 벌을 주시지만 끝까지 살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족보:아담에서 노아까지:

5장 족보는 매우 후대의 기록이다. 족보는 두 가지 기능은 한다. 첫째로 역사의 계승 곧 연속성을 드러낸다. 둘째로 후대의 사건이나 사태를 원인론적으로 설명해 준다.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그 근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최종 편집자는 셋 이야기(창 4,25-26)와 홍수 심판(창 7,6~9,29) 사이에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를 삽입함으로써 오랜 시간이 경과했음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노아 시대의 사회 현상을 원인론적으로 해명해 준다.

 

창세기 6장 5절과 13절에서는 세상에 죄가 만연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진술을 원인론적으로 규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앞에 제시된 족보다. 아담에서 시작된 죄가 역사와 시간의 족보를 따라 내려오면서 죄가 확대되고 있다.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노아 시대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노아 시대의 자행되었던 죄의 심각성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게 이르렀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성경은 그 사이에서 거인족인 나필족이 등장(창 6,1-4)하였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 사이의 대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 표현 가운데 ‘하느님’은 거룩한 분을 가리키고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를 말한다. 이러한 대조에 두 번째 대조가 추가된다. 즉 고대 시대와 문명에서 ‘아들’은 귀하고 ‘딸’은 비천하다는 구별이 가세 된다. 이렇게 사람에다 딸들이니 얼마나 문제인가? 결국 이런 수사학적인 대조법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들로 묘사된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로 표현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홀려서 결혼했다는 사실이 선정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순수한 혈통이 잘 보존되어 대물림되다가 이제 타락한 혈통과 피가 섞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로써 천상의 질서와 지상의 인간적 질서 사이를 분명하게 갈라 놓았던 더 포괄적인 창조 질서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곧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위계가 허물어져서 ‘순응’은 종식하고 ‘역행’이 창궐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창6,5),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창 6 ,12)는 언급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 준다. 즉 결혼할 때 그 사람의 인격은 꼭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저 사람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는지 아닌지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차츰 드러나게 되겠지만 복된 삶을 위해서 신앙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사화복과 흥망성쇠는 전적으로 만물의 주主 하느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홍수 이야기

-노아:

창세기 이야기는 노아가 주인공으로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인물이라고 한다(창 6,9).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다. ‘방주’가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이 이미 구원의 길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도 궁지에 몰리면 방주를 만들어 주시는 분은 누굴까? 하느님이시다.

 

노아는 하느님의 지시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성경을 은혜롭게 읽는 방법의 하나는 반복되는 단어나 문장에 줄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것이 어떤 의미를 품고 강조되는지 보아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서 어떤 영적 지혜가 있기 마련이다.

 

하느님의 명령 이후 노아의 반응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반복이 나타난다.

“노아는 그대로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창 6,22)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창 7,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창 7,9)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문장들은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이 말씀이 드러내고자 하는 영성적 의미는 무엇일까? 다름이 아니라 명령하신 대로 이행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2장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는 사람이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자꾸 핑계 대고 유보하고 이유를 대는 등의 행위는 주님이 반기시는 일이 아니다. 명령하신 대로 즉각적으로 이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하느님 눈에 들게 되어 있다.

 

-홍수:

노아의 홍수를 신약에서는 세례의 예표(1베드 3,20-21)로 여긴다. 곧 ‘정화의 과정’으로 본다. 하느님을 벌주고 죽이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회개와 정화로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다. 요즈음 말로 쇄신이다. 노아의 홍수는 적당한 쇄신이 아닌 ‘판 갈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홍수는 ‘재창조’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홍수 이야기 본문에는 창세기 1장에서 나왔던 내용이 다시 반복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창 9,1)=창세 1,28반복

”먹어라“(창 9,3)=창 1,29.30 반복

이렇게 창조의 원 축복 원 메시지는 노아의 시대 온전하게 회복된다.

 

-노아의 제사: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땅으로 올라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곧바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창 8,20) 우환과 축복이 올 때 믿는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제사)예배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제사를 원하실까?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아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며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미카 6,6-7)”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

 

제사의 요건은 제물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 즉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은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한 4,23-24).

 

-바벨탑(문명의 야망):

인류는 땅 위에 흩어져 살라(땅을 가득 채우라:창세 1,28)는 하느님의 명령을 역행하여,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창 11,4)힘을 합치려고 한다. 그리하며 탑을 쌓는다. 이른바 바벨탑 이야기다. 이 바벨탑은 돌 대신 벽돌을 진흙 대신 역청으로 만들었다.(창 11,3) 즉 문명이 발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어떻게 될까?

 

잠언에는 이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있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잠언 30,9)라며 배은망덕하게 되기 십상이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 11,4).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야 하는데 인간의 이름을 날리려고 하며 하느님의 자리에 있고자 한다. 결국 바벨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민족과 언어들이 제각기 분열되었고 서로 제 이름을 빛내려는 ’싸움터’(토머스 홉스)로 만들었다.

 

바벨탑은 오늘날 현대의 우리도 쌓고 있다. AI, 우주개발, 물질만능과 성공 지상주의, 신무기로 전쟁 불사, SNS와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촘촘히 연결되었음에도, 각자의 이익과 확증 편향 속에 타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않으려는 ’현대판 언어의 불통‘이 대표적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16/pm 14:06

출처:차동엽, 행복코드 1 (꿈의 성취를 통하여); 위즈앤 비즈, 85-101p

 

<덧붙임: 내용에 약간의 편집이 있습니다. 원문은 직접 책을 통해서 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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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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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성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제목의 일련번호를 똑같이 제시합니다. 혹 신부님의 책을 참조하실 때 불편심을 드릴까싶어서...
  • 작성자빗방울 | 작성시간 26.06.1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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