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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님

7.아브라함:축복

작성자최성옥|작성시간26.06.20|조회수34 목록 댓글 1

 

.시원의 물줄기

 

7.아브라함:축복

 

아브라함을 부르심

 

-주도권 전환:

아브라함 이야기는 극적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갑자기 그를 부르신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 이 구절은 바벨탑을 쌓으면서 인류가 했던 말 “자, 성읍을 세우고...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여기서, ‘나는’ 하느님이다. ‘우리가’는 사람이다. 극명한 주체의 대조와 전환이다. 바벨탑에서 인간이 잠시 주도권을 잡은 듯하지만 그것을 잠시이다. 주도권은 다시 하느님이다.

 

-영원한 약속: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한 영원한 축복)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1절)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2절)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3절)

 

창세기 1-3절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축복 세 개를 주신다. 첫째 땅, 둘째 아브람의 명예와 축복 부여 3.세상의 모든 종족의 축복이다. 세 개중 가장 중요한 절은 무엇일까? 3절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1-2절을 포함한다고 보인다. 1절 땅과 2절 부르심과 사명은, 3절 아브람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는 구세사적 계획이다.(입력자 개인적 이해)

 

-아브라함,인간적 믿음에서 절대적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믿음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평범한 신앙인처럼 하느님이 하시는 큰 일을 체험한 후 절대적 믿음으로 승화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하여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어여쁜 아내 사라를 앞세워 미인계를 써는 인간적 처세로 연명延命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가 제안한 인간적 방법으로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다.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대립적 불화 관계가 된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적통 약속(15,4절)을 이미 했지만, 아브라함은 믿지 않았었다. 아브라함의 무조건적 믿음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이사악을 낳은 다음이다. 나이 백 살에 탄생을 체험하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달으면서 결심했다.

 

‘아하 믿음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구나! 내가 75살에 하느님을 온전히 믿었으면 딴 짓을 하지 않았을텐테 인간적 방법을 쓰려하니 하느님이 역사하지 않으셨구나. 그러시다가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비로서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키셨구나. 이제 나이는 따지지 말자, 환경 따지지 말자, 이제 아무것도 보지 말고 말씀만 붙들고 말씀만 믿고, 말씀만 받아 들이자 하느님이 머라고 그러시면 나는 무조건 “예”하리라.’

 

아브라함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봉헌하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사악이 태어난 것이 100세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25년간 믿음의 학교를 다녔던 셈이다.

 

믿음의 시험

 

-시험하시는 하느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 아브라함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느님은 결코 그냥 졸업시키지 않는다. 졸업시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들 내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 22, 22)

 

사실 이 명령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말이 안 되는 이 말씀을 일부러 내리셨다. 이 명령의 깊은 뜻을 모르면 엉뚱하게 해석하게 된다. 이 명령에 대하여 지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해석하여 세상에 마구 뿌려댔다.

 

“결국 신이 농담을 했던 것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고 믿음을 시험했을 뿐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은 그러한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으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혈연적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참조)

 

이 해석은 너무나 짧은 안목이고 성경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해석하면 얼마나 위험한 오류에 빠지는지 잘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통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이사악의 번제가 아니었음을 밝힌다(창세22,1). 훗날 이스라엘 역사도 어린이 인신 제사 풍습에 빠졌을 때, 하느님은 그것이 당신이 명하신 것도 뜻한 바도 아니라고 하셨다.(예레 19,5; 레위 18,21;20,2-5)

 

이것은 일종의 ‘시험) 테스트’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지, 이사악을 더 사랑하는지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는지 조건적이 믿음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이미 이사악의 탄생 사건으로 아브라함은 중간시험에서 절대적 믿음으로 비약했다.

 

- 야훼이레: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공식이 생겼다. ‘난 앞으로 하느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조건 따를 거야,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겠어.” 이것이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은 머리야 산으로 간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아버지 제물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창 22, 7)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야훼 이레, 야훼께서 마련해 주신다.”(창 22, 8)

 

이 말은 아브라함이 할 말이 없어서, 궁해서 임기응변으로 한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뼛속 깊이 가득 찬 믿음에서 하는 말이다. 말뿐이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 야훼의 음성이 들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시험에서 통과하였다.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창 22,12-18).

 

어떤 분이 “믿음이 뭐에요?”라고 물었다. “믿음은요 미치는 거예요. 하느님께 하느님 말씀에 미쳐 사는 거예요” 이것은 미친놈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참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현대인은 참으로 반성할 일이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반만 믿지 말고 100% 믿으며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독백한다.

 

<아브라함의 독백>

 

나도 꽤나 영특한 사람이었소.

안 되겠다 싶을 땐 용한 잔꾀도 버릴 줄 알았소.

파라오와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 했던 것도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도

다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소.

돌연 나는 바보가 되었소

숨을 넘길 나이 아흔아홉에

이가 다 빠진 할망구의 뱃속에

아이가 태동하는 걸 보고선,

그만 말을 잃었소

그때부터 무조건이요

네, 네 네.

예스, 예스, 예스.

가라셔도 아멘, 오라셔도 아멘.

주셔도 아멘, 달라져도 아멘.

허, 거-어-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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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밥 러셀의 책에 한 농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기 농장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농장 안호수를 늘 관리해야 하는 것이 불평거리였다. 풀밭을 초토화시키는 살찐 젖소들도 이만저만한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울타리를 치고 가축을 먹이는 일도 지끈지끈 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농장을 매물로 내놓았다.

며칠 후 중개업자로부터 광고문을 확인해 달라며 농부에게 전화가 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굽이굽이 이어진 언덕이며, 부드러운 목초가 쫙 깔린 곳,

깨끗한 호수로부터 자양분이 들어오고, 가축은 무럭무럭 자라는 축복의 땅“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농부가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소. 농장을 팔지 않겠소. 그 땅이 바로 내가 평생 찾고 있던 바로 그 땅이요.“

 

축복은 창조의 일부이다. 이미 우리 삶에 스며 있는 것이 축복이며 복이다.

목회자 스펄 전은 이렇게 말한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하느님은 전등을 주시고, 전등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하느님은 천국을 주신다.”

 

지금의 축복을 감사드릴 때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620/pm19:57

출처:차동엽, 행복코드 1 (꿈의 성취를 통하여); 위즈앤 비즈,85-96p

<덧붙임: 내용에 약간의 편집이 있습니다. 원문은 직접 책을 통해서 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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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빗방울 | 작성시간 26.06.2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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