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에서 없음을 인식하는 없음이 있으니, 이는 없음을 인식하면서, 없음이요, 없음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있음이다. 이 없음은 없음이면서 그 없음이 인식이 되면서 있음이니, 처음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의 세계이다. 처음에 물질이 있으면서, 우리는 이 물질안에서 회전하는 것을 보면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처음의 질량은 어떻게 없는 질량에서 있는 질량이 되었을까?
이 물질의 세계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이란 1+1=2와 같은 0을 제외한 법칙이다. 전체 수가 100이라고 가정하고 그 안에서 1+1=2를 하면 나머지 98은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나머지와 계산된 범위는 그 총계가 100을 유지하게 된다. 이 전체 수는 1일 수도 있고 100의 100승 일 수 도 있다. 어떻게 숫자로 표현하든 그 수는 현재 물질의 총계를 나타내면 되고 그렇게 물질의 총계는 0으로 표현 할 수 없을 뿐이다.
물질의 총계에도 0이란 의미가 있다. 즉 1-1=0이고 나머지는 100일때, 이 물질에서 0이란 의미는 인식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0이란 바로 이 물질의 총계내에서의 0을 의미한다. 하지만 0은 이 물질의 총계내에서의 0의 의미와 이 물질의 총계인 100이 생기기 전에 0의 의미로 나눠 볼 수 있다. 즉 질량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물질의 세계에서는 근원적인 0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0만이 있다. 그 0은 스스로가 원인이 될 수 없는 원인이 환경에 종속되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0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물질의 총계의 세상에서는 닭이 먼저일까? 아니면 닭알이 먼저일까? 진화론에서는 이 문제를 마치 닭이나 닭알이 아닌 그 보다 훨씬 작은 존재가 진화한 것으로 이해되게 하나, 이 질량보존의 법칙내에서는 그것이 알을 낳는 닭으로 진화한 것일 지라도 그것은 0일 수 가 없다. 이 질량보존의 법칙내에서는 처음부터 100인 것이지 그 법칙을 깰 수 는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0이란 이 물질세계에서 인식된 0이다. 즉 이런 의미의 0을 0의 절대성으로 인식하면은 우리가 인식하는 유의 인식은 있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인식의 경험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인식하는 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 불완전한 0의 의미를 0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의 0만을 고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질량보존의 법칙이 깨지는 0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없음에서현실로 인식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유지 될 수 있는 물질의 처음으로 있어왔던 질량총계의 합계인 100이나 알을 낳는 닭은 그렇게 물질의 처음으로 있었을 뿐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듯이, 물질의 총합계인 100은 늘어난 것이 아니고 0에서 100이 되니 여기서 0은 질량보존의 법칙 밖에 있는 0의 의미이고 이는 물질의 합계 100의 원인이 되는 의미의 0이니, 어떤 이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처음부터 있는 자연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닭은 닭이 없는 상태에서 생길법한 미세물질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고, 물질이 합계인 100이 물질의 처음으로 있듯이, 닭은 알을 낳는 닭으로서 처음의 닭으로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물질세계에서 있음으로 없음을 인식한다. 그저 질량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세계에서 배울 수 있는 없음을 인식하지만, 있음에서 없음을 반사적으로 인식하듯이, 처음부터 있어왔던 물질의 합계 100이 그 물질의 합계 100이 없을 때의 없음과 그 동시에 인식되듯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없음에서는 동시에 그 반대인 있음의 개념이 없음에서 스스로 인식되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있음의 개념이 없음의 개념과 함께 개념으로서 있게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으며, 그 말씀인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라는 성경말씀에서 보듯이, 없음에서 반사적으로 개념화 되는 있음이 없음의 개념과 동시에 존재하고 그 있음의 개념이 없음의 개념을 실증하는 실존으로 있으니, 그 개념이 있음의 실존이며, 없음의 개념에서 스스로 있는 그 실존이 없음의 반사적으로 없음과 동시에 존재하는 개념과 함게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