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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지

[스크랩]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춘천구교 양양성당(上)

작성자로사리아|작성시간06.08.28|조회수23 목록 댓글 0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춘천구교 양양성당(上)

옹기촌에 뿌리 둔 영동지방 신앙 '모태'
 시골 마을의 언덕배기에 서있는 성당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마당을 서성거리면 인심 넉넉한 신부님이 사제관에서 나와 반겨줄 것만 같다. 순박한 주민들이 한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무심히 내려다보면 그 정취가 마음 속까지 전해진다.

 남설악을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성당(주임 정원일 신부)도 그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언덕 위의 성당이다. 지금이야 시내가 제법 번창하고 군데군데 아파트도 눈에 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양양군청 옆에 있는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현대식 2층 건물 '디모테오 어린이 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이들이 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마당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옛날에는 성당 주변에 사는 코흘리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서 천사같은 수녀님을 친구삼아, 마당을 놀이터삼아 뛰어노느라 왁자지껄했을 텐데….

 성당 올라가는 진입로 중간에 기와 지붕을 얹은 순교각(殉敎閣)이 세워져 있다. 순교비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본당 공동체의 전체적 분위기가 1940년대 후반 공산치하에서 핍박받던 사제와 수도자들을 38선 이남으로 남하시키고 6·25 전쟁때 순교한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에게 쏠려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손때 묻은 유품들뿐 아니라 82년 본당 역사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잘 정돈돼 있다. 1930년대 공소회장단 피정 기념사진과 교리문답집 등 빛바랜 흔적을 쭉 더듬어 가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지만 끔찍한 정성으로 천주님을 모시고, 교우들이 친형제 자매보다 더 의좋게 살았던 그 시절 말이다.

 양양본당은 영동 지방 신앙의 모태(母胎) 같은 믿음의 고향이다. 영동지방은 백두대간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지형 탓에 타 지방에 비해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됐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은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때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재'(속초) 등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 설립된 본당이 양양본당이다. 인근 홍천군에 5개, 인제군에 4개 본당이 있지만 양양군에는 아직까지도 양양본당이 유일하다. 양양은 지금도 모든 면에서 외진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당은 예나 지금이나 굴곡없이 평온하게 신앙을 영위했을 것 같다. 그러나 군(郡)의 유일한 성당이라서 그랬던지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단 한번도 비껴가지 못했다.

 초기에 밭 한 뙤기 없이 옹기장이 신자들은 흙과 나무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잇느라 가난의 설움이 컸다. 공소 마을은 대부분 옹기마을이었고, 본당신부가 봄가을 판공성사 시기에 방문을 해도 공소 한 칸이 없어 교우집에서 성사와 미사를 거행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일본군이 성당을 빼앗는 바람에 신부와 몇몇 성당 식구들은 성당에 붙어있는 쪽방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후 36년 일본 압제에서 풀려나는가 했더니 소련군이 들어와서 또 성당을 짓밟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1909~1950)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두고 미사를 드리다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 부속건물로 쫓겨났다.

 소련군이 물러가서 성당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또 인민군이 들어와서 성당은 물론 부속건물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공산정부를 수립한 북한 공산당의 종교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이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핍박을 견디다 못해 월남할 생각으로 38선 부근까지 내려왔으나 이미 길은 막혀 버렸다. 특히 1948년부터는 경비가 한층 강화돼 목숨을 걸지 않고는 월남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38선 마을, 양양에 사목기반을 둔 이광재 신부가 걸었던 '순교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계속>  

(사진설명)
1. 양양성당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잿더미가 됐다. 현 성당은 1954년 공소 신자들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공사에 나서 완공한 것이다. 성당 구석구석에 82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2. 순교자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 기념비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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