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을 풀어주는 기도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에 관한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인데, 이 비유를 통해 많은 교회들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내용인즉, 기도를 끈질기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이며, 이 비유의 과부처럼 재판관을 괴롭힐 정도의 인내와 끈기로 기도하면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가르침이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무슨 신령한 존재이고 그 신에게 끝까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같습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 보면 얼마든지 그런 식의 생각-비록 정신차린 기독교인과 목사들의 생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을 할 수 있다고는 인정하면서도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은 성경해석에 놀라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더 중요한 가르침인 두번째 비유에 대해서는 별로 교회에서 강조하거나 설교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비유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매우 종교적이고 율법적인데다 적용하기가 쉽고 교인들에게 실제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많은 반면에, 두 번째의 비유는 해석이 쉽지 않은데다가 내용이 심오하고 교인들이 달가와 할 것같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들은 두 번째 비유의 그런 사람(기도많이 하고 십일조 잘하고 금식하고...하는 사람을 양성해 왔으므로)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으니 난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자기 편의에 맞게 성경을 인용하고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적 관습이며, 교회가 아니라 종교인을 만드는 조직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성경적용의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들은 한 장소에서 연결하여 가르쳐 주신 한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되는 내용들입니다. 만일 이 두 비유들을 문자그대로 두고 전혀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신 것처럼 따로 따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바른 의도를 놓친 셈이며, 이는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은 어느 말,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하신 분의 의도입니다. 특히 다른 서신서나 계시록과 달리 복음서에서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누가복음 18장 첫부분의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과 그가 무시하는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에서 재판장은 이 과부의 번거롭게 찾아와 원한을 풀어달라는 보챔에 대해 성가신 태도를 보이며 결국 그녀의 원한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원한’이라는 단어와 “자주 그에게 가서”라는 말의 등장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원한이라는 단어가 원문에 나온 뜻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에 네 번 (3, 5, 7, & 8절)이나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 εκδικησις인데 이 단어의 뜻은 “정의를 주다”, “정의를 실현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가 롬 12:19에서는 “원수갚는 것”(retaliation)으로도 번역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사전들은 눅 18:3-8절에서는 ‘원수갚는 것’ 이나 ‘원한’으로 번역되지 않고 ‘정의를 내리다’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한을 풀다”라고 한 번역은 바르게 뜻을 전달해 주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게 하라”라든지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헬라어의 여러 가지 뜻가운데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에 대해 심사숙고가 필요합니다.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과부의 원한 정도를-끈질지게 빌었다해서-무시못할 재판관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아마도 그 과부가 정의를 부르짓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5절에서 그가 “내가 정의를 실천하리라(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도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가 아니라 “(정)의를 주시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비유의 재판관이 불의(αδικιας)하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의롭지 않은, 불의한’이라기 보다는 “남을 속이거나 사기를 친”이란 말입니다. 만일에 이 비유를 기도와 응답의 내용으로 전환하게 되면 이 불의한 사깃꾼같은 재판관이 하나님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할 때 그러한 계속된 기도와 낙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그가 가르친 기도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원통한 일이나 원한에 가까운 일들을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어렵거나 원통한 일을 만나면 그런 기도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이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 “정의를 이루어 주시도록”기도하라는 것이며, 게다가 그 기도의 응답에 대한 기다림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불의한 재판관도 그 누군가의 정의로운 일처리를 들어주었다고 하면-끝까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원통한 일,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세계안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놀라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8절)고 한탄하신 것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날 신앙을 가진 자들의 기도나 종교적 염원을 볼 것같으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없어진 개를 찾게 해 달라는 기도,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 어디가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자기네 교회가 부흥되게 해 달라는 기도, 성전을 짓게 해 달라는 기도,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 어느 대학에 가게 해 달라는 기도,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등등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니까 기도해도 된다면서 온통 이런 일들만 기도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를 향해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에 대해서는 전혀 기도할 줄도 모르며 기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게 아닐까 합니다.
다음의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를 지적하신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자신을 변호하고 의롭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내용이 담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교회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그렇지 않은 대상들을 은근히 비하하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위의 비유의 재판관과 다를 바가 없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조금만 상황이 좋아지고 나아지면 이러한 자세의 교만과 우쭐함을 가지고 기도하는 내용들을 자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인가가 바로 예수님의 주요한 관점이며 누가가 이 글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의롭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비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의를 얻을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종교적 열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의 정의를 기다리며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도나 금식, 항상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공허한 종교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구하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예배안에서의 태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바른 의,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바른 의에 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모두 주님의 요구하시는 의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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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lankayoo 작성시간 12.03.22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니라 롬 8:8
그리스도 께서 너희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않으면 너희가 버리운자니라 (고후13:5)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볼때나 묵상할때나 기도할때나 항상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다면은
정말 미련한 해석이나 기도는 안할것이라고 100프로 확신합니다. 또한 뜻은 틀리더라도 영적 해석은 되어서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든지 마지막 한쪽발을 세상에서 빼지않는한 절대 옳은 해석은 나오지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순수한 복음에 더럽힘을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예수님의 피값을 더러운것으로 만들고마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