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권 제 4장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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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18-23)
○요약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처리할수 있으되, 그가 어떠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이길수’ 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생각하는 태도와 방식을 분석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현세’와 ‘나타날’ 오는 세대로 바울이 구분하는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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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생에서의 삶과 오는 세대에서 있게 될 삶 사이를 대조하고 있다.
그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나타나실 때에 밝혀질 영광에 관한 두 번째 교리로 나아가게 한다.
그 영광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요 우리는 그 영광의 일부이다.
기독교는 결코 하나의 이미 만들어진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린느 다만 이 ‘생각함’의 과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만이 기독교의 위안과 위로를 즐길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저절로 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외형의 작용)
자기가 고난을 받을때에 그의 고난을 장차 있게 될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비추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비교할수 없도다’
그것은 가치와 값을 가리키는 문구이다.
여러분에게 비슷한 대상이 주어지게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비교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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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전에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이러한 수준에 갖다 놓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요 가치가 없게 되었다.
그 문구는 무게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전혀 무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있다.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난의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여러분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기독교의 방식과 세상에서 그 같은 일을 하려하는 또 다른 방식 사이에 매우 두드러지고 주목할 만한 대조를 밝혀주는데 도움을 준다.
세상은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힘을 내라. 움츠려 들지 말라. 얼마있으면 일이 잘 될거야.”
그러나 그것은 하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역시 이단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이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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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방식이 결코 아니다.
사도바울은....고난이 매우 깊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바울이 자기가 당했거나 당하고 있는 무서운 고난으로부터 어떤 사실을 뺀다든지 또는 그것을 작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바울이 비록 고난이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치어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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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의 한쪽에 그의 고난이 올려져 있다.
다른 한쪽에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무거운 것을 얹어놓게 된다.
그전에는 무겁게만 보였던 것이 이제는 깃털처럼 가벼워지게 보인다.
다른쪽의 저울 판에 훨씬 더 무거운 것을 놓고 대조해 볼때에만 가볍게 보이는 것이다.
고난을 가볍게 보지는 말라. 고난은 매우 실제적이다.
실제적으로 고통의 진상 그대로를 대처하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이 참아낼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위안을 주는 기독교 방식의 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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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고 십자가의 고뇌와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도록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주님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아셨다.
그가 그것에 비추어서 고난을 참으실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확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큼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방식은 그것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이 장차 올 영광의 위대함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가장 특유하게 영광의 그 위대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예기치 못했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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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시 마지막 날에 될, 곧 주님의 재림시에 일어나는 일과 그 주님의 재림이 가져오게 될 영광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살펴보았다.
세 번째의 주요한 교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어째서 세상이 이러한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떠한 사람도 최종적인 위안은 실제로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은....진화와 모든 것이 놀랍게 되어질 황금시대에 대하여 열심히 말하였다.
테니슨은 ‘세계연방 인간의회’가 올 것을 내다보았다.
전쟁이 더 이상 없고, 칼이 연장을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지고 곡괭이를 만들기 위해서 비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세기가 왔고....모든 것은 그들이 말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소망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해답이 있다.
사도바울은....두 가지 주요한 진술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첫 번째 진술은 모든 피조 세계가 장차 올 이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술은 어째서 전체 피조물이 그런 식으로 고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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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피조물’
‘전체 창조물’은....언뜻 듣기에 마치 아무것도 제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고대’
고개를 길게 빼고 앞을 쳐다보는 것을 암시한다.
‘기다리다’
피조물의 열심있는 기대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강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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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올 영광을 이 열심을 가지고 기대하며 목을 길게 빼고 고대하는 것이 피조물이다.
그 표현들은 분명히 천사들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복종하는 것처럼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바울이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탄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말은 타락한 천사들까지 내포할수 없다.
왜냐하면 타락한 천사들은 이 영광스런 날을 고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판의 날에 자기들에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사도의 이 표현 가운데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포함될 수가 없다.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뿐 아니라’와 ‘우리까지도’라는 말이 대조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그들 뿐 아니라) - 그는 피조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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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이라는 용어에서 배제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 사람들도 거기에 포함될수 없다.
자연적인 사람, 경건치 못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 영광스러운 날을 고대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을 배제시키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또한 배제시킨다.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비이성적인 피조물, 물질적인 피조물, 생물이나 무생물, 유기체나 무기체 같은 것들만이 남았다. 그것은 동물들을 의미한다. 채소, 꽃, 잔디, 강물, 산, 언덕, 땅 덩어리 자체,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늘들을 의미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 35: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사야는 그것을 의인화하여 말하고 있다.
(사 55: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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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답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린다’ 라는 것이다.
18절 마지막에 ‘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상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시될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통해서 우리 안에 행하신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우리의 영광을 입고 나타나게 될 때에 전시품이 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 위대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논증은 17절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바울의 마음 속에 우리의 영화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피조물이 그것을 이렇게 고대하는 것인가?
★그것은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해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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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과 전체 우주의 운명은 떼어낼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논지는 인간의 죄가 피조물이 현재 놓여져 있는 상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20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
‘허무한 데’ 라는 것은....‘쓸모없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
헛된 것! 쓸데없는 것! 텅빈 것! 바울은 피조물 전체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피조물은 원래 의도된 대로의 기능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피조물은 원래 그것이 창조될 때 뜻했던 그 수준까지 이르지를 못한다.
사도는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그 문제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
피조물은 썩어진 상태에 있다.
썩어졌다는 것은 ‘물리적 부패’ ‘사망과 멸망’ ‘부패’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역시 피조물이 썩어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자체로서는 피조물이 그 썩어짐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벗어날수가 없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부패와 자기 속에 있는 썩어지는 요소를 제거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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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피상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세상을 보고도 ’모든 사물에서 나는 변화하고 썩어지는 것을 보노라!‘ 고 말한다.
비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인생은 거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진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은....그 종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세상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그것은 안개와 같으니라‘
○무엇이 이것의 원인이 되는가?
‘지배를 받게 되었다’ 라는 말이 ‘굴복케 되었다’ 라고 하는 말로 더 잘 번역될수 있다.
그 동사의 시제는 부정과거로서 과거에 단번에 일어나버린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단일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 ‘그것은 굴복케 되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피조물은 허무하지 않았고 텅 비어 있지 않았고 부패하지 않았으며 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그것은 ‘굴복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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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수동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기의 뜻이 아니요’라는 말에도 역시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그 표현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어떤 행동의 결롸로써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 자체가 행한 어ᄄᅠᆫ 일의 결과로 인하여 썩어짐과 허무함과 종노릇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피조물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이암음이라’
새 영어성경의 각주 – because God subjected it (하나님께서 복종케 하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하신 이는 누구인가?
분명히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그 썩어지는 것을 제거할 도리가 없다.
그럼 누구? 마귀인가?
아니다. 마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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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땅과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 이 세상과 피조물을 본적이 없다.
우리는 피조물을 원래 창조될 당시의 그대로를 보고 있지 않고, 또한 그것은 원래대로 있지 않다.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발적인 죄와 모반과 타락의 결과로 뜻하지 않게 피조물에게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p80
피조물은 이러한 결과를 낼만한 하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오게 한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 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것이 그와 함께 타락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 그것에도 일어났다.
부정적인 측면이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계획속에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