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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보고서

2026년 06월 07일 서기 보고서 - 공관복음 강론 18

작성자강지성|작성시간26.06.08|조회수33 목록 댓글 0

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공관복음 강론18

 

주제 15. 산상수훈(8) : 주기도문 강해(4) (마 6:9-13)

 

13. 우리를 시험(페이라스모스/ 시험, 유혹)에(전치사 에이스) 들게 하지(에이습헤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다의 2인칭 접속법 과거 -> 미래의 결과) 마시옵고

 

<호크마주석>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압축하면 우리가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다시 각자도생의 구조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지금 막아달라는 것이냐, 아니면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려고 하시는 걸 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계속 묵상을 해야 될 문제이다.

이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는 기도와 서로 연결되는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유혹에 빠진다 또는 시험에 빠진다 하는 문제하고, 우리가 악한 일을 하는 방향으로 끌려 들어간다 또는 우리 스스로 그 길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 문제가 다 결합된 것이다. 하나는 시험과 유혹이라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악행을 하게 되는 문제인데 그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악은 죄의 결과다. 그리고 죄는 빗나감이다. 여호와의 길을 따라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했다고 그러셨는데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 죄다. 그리고 여호와의 길에서 빗나가서 하는 모든 생각과 언행이 악인 것이다. 실제로 여호와의 길은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고, 밖에서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에게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친절을 베푸는 삶인 것이다. 이 여호와의 길에서 빗나간 결과는 내가 소중하고 나만이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나의 이용의 대상이고 또는 배척의 대상인 삶이다. 즉 우물 속에서 각자도생하는 삶이 빗나간 삶이고, 그 우물 안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언행이 다 악한 것이다. 무슨 갸륵한 생각을 해도 악한 생각이고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악한 말과 행동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기적, 이타적, 공동체적 세 가지 타입이 있는데 공통점은 전부 자기를 위해서 판단하고 자기를 위해서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가를 계산하는 기본 공식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여호와의 도에서 빗나가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내 싸르크스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마귀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이 살아가는 추방된 감옥 속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관리하는 것이 사탄 마귀이다. 그것이 우물 속의 원리이며 악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악의 시스템의 바탕은 각자도생의 원리이다. 따라서 각자도생하는 자들은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페이라스모스는 시험보다는 유혹으로 봐야 한다. 각자도생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기 위한 방법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도는 우리를 다시 우물 속에 들어가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살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아주 첨예하게 드러난 것이 갈라디아 성회였다. 갈라디아의 형제들이 각자도생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각자 할례를 받고 각자도생으로 돌아가라는 유혹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이 각자 도생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그것을 막으려고 설득하고 호소하고 분노를 드러낼 정도로 막 화를 냈던 것이다. 그 형제들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고 하나가 되기 시작한 정말 금쪽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혹은 손할례당이 했는데 유혹당해서 그 유혹을 따라가는 것은 갈라디아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구의 책임인가?  손할례당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각자도생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손할례당은 갈라디아의 형제들을 위해서 고군분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 할례를 받는 것이 옳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볼 때는 유혹이다. 그들이 그대들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대들을 자기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볼 때는 사도 바울이 유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타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그것이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이타적인 헌신을 하는데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손할례당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오류이다. 손할례당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진리에 속해 있고 손 할례당은 비진리에 속해 있는 것이지 그들을 나쁜 자들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그런 손할례당이 빠져 있던 그 오류의 함정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이며, 갈라디아의 형제들이 그들에게 유혹당한 것처럼 유혹당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의미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인용하는 성서 요절

 

(약 1:13)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또한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는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이 야고보서가 말한 의도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페이라스모스, 유혹, temptation or test) 외에는 그대들을 붙든(그대들에게 닥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피스토스) 그대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시험이 올 때에 그와 동시에 헤어날 수 있는 출구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포이에오의 미래형)

하나님의 피스티스를 우리가 받아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피스토스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원래 피스토스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피스토스해지는 것이 복음이고 구원이다. 여기서 인간의 종교적 신앙심이라는 것은 발 붙일 곳이 없다.

여기서는 시험(테스트)이 아니고 유혹(템프테이션)이다

 

(약 1:2)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이런저런 시험(페이라스모스)을 만날 때마다 그것들을 모두 기쁜 일로 여기십시오

여기서는 시험으로 볼 수도 있고 유혹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혹이 왔을 때도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성장해 갈 수 있다. 따라서 그럴 때는 유혹이 테스트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유혹을 우리가 견뎌냈을 때 우리는 그만큼 또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더 교묘한 유혹이 온다. 그럼 그것을 또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혹이 오면 우리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한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막 14:38) 시험(페이라스모스)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는 테스트의 의미도 있겠고 유혹의 의미도 있겠다.

 

(갈 6:1) 또한 형제들이여 사람이 어떤 죄(파라프토마/ 과오, 범죄)에 빠져 있으면 성령에 의해 살아가는 그대들은 온유한 마음으로(영으로) 그런 자를 회복시키십시오 그때 그대 또한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되어 유혹에 빠지지(페이라조의 수동태) 않게 됩니다

여기서는 당연히 유혹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이라스모스는 시험인가 유혹인가는 문맥에 따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

그래서 번역도 그에 따라서 정확하게 시험으로 번역할 것인지 유혹으로 번역할 것인지 우리가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고민해야 될 문제다.

 

*페이라스모스는 시험(test)인가, 유혹(temptation)인가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페이라조의 수동태) 광야로 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그 시험하는 자(페이라조의 분사)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의 경우는 광야의 시험, 광야의 유혹이다. 40일을 주리셨으니까 떡을 먹고 싶은 유혹,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본능적인 유혹인 것이다. 그 부분을 사탄이 자극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진한 교인들을 사탄이 유혹한다는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유혹은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싸르크스가 여전히 남아 있는 우물 밖으로 나온 자들이 다시 우물로 들어가게 만드는 유혹인데 그것은 우물로 들어가게 만드는 유혹이지만 또 우물로 들어가고 싶은 자기 스스로의 유혹도 있는 것이다. 싸르크스의 유혹도 그 양면이 같이 가는 것이다. 괜히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한테 사탄이 와서 막 유혹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유혹 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것을 사탄이 건드리는 것이다.

 

(고후 13:5)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안에 있는지 그대들 자신을 시험하고(페이라조) 검증하십시오(도키마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들 안에 계신 것을 그대들 스스로 인식할 수 없다면 그대들은 아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13:6 그러나 우리들은 검증을 통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대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여기서는 순전히 테스트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약 1:12) 시험을 당할 때에 인내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검증이 되면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화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되는 부분이다.

1:13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또한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1:14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기의 욕망에 이끌려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에 빠지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싸르크스의 측면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고 사탄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1:15 욕심이 지배하면 죄를 낳게 되고, 죄가 완성되면 죽음을 초래합니다

1:16 속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여기서도 그 양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혹하는 자가 있지만 유혹당하고 싶어 하는 나의 본능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겨 나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 주먹 불끈 쥔 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고 회개와 간구로 이겨 나가는 것이다.

 

(히 12:4) 그대들이 죄(하마르티아/ 빗나감)에 맞서 싸워 왔지만 아직은 피를 흘리면서까지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달리)

12:5 그리고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향하여 아들들에게 말하듯 하신 권면(파라클레시스/위로, 격려)을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파이데이아(교육, 훈련, 양육, 징벌)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책망하실 때에 마음이 약해지지 말라

* 연단은 “도키메”의 번역임

12:6 왜냐하면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파이듀오하시고 아들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다(헬라어 70인역)“

12:7 만약 파이데이아를 통과하고 있다면 그대들은 인내합니다(휘포메노의 직설법 현재 능동태)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하듯 그대들을 이끄십니다(프로스페로/데려가다, 인도하다, 취급하다) 아비가 훈육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2:8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모두가 참여하는 파이데이아에서 떨어져 있다면 가짜(노도스/서자)들이요 아들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참여하는 파이데이아, 그래서 징계가 아니고 훈련 과정이다.

모두가 훈련을 함께 열심히 받고 있는데 그대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12:9 우리는 우리의 육신(싸르크스)의 아버지들도 훈육하는 분(파이듀테스, 훈련교사)으로 모시고 존중합니다 더욱이 영(프뉴마)들의 아버지께 복종하며 살게 될(직설법 미래) 것은 더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자굴 - 환난과의 관계

(호 5: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5: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시험이냐 유혹이냐에서 중요한 도구가 바로 환란이다. 환란이 사자굴로 쓰이는 것이다. 이 환란은 젊은 사자 같이 너희를 움켜서 사자굴로 쳐 넣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사자굴의 환란을 하나님이 기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지만, 사자굴의 환란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환란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환란으로 시작해서 환란으로 끝난다. 거기서 인격을 도야하든 더 담대해지든 아니면 절망하든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자굴로 쓰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하게 정리된 부분을 꼽는다면,

시험과 유혹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도 오류이고 사탄에게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더 큰 오류이다. 여기는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유혹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그 유혹을 당하고 싶은 욕망이 애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혹이라는 것은 멀쩡한 사람을 유혹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그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달콤한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든 아니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든 그 두 가지 욕망이 있는 것이다. 둘 다 유혹이다. 더 좋은 거를 취하고 싶은 욕망과,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망 그 두 가지가 그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혹의 본질은 나를 위해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애굽의 삶이었고 그것이 우물 속의 삶의 본질인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건져 내시고, 우리는 끌려 나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간구하는 노력이다. 우리 힘으로 우물 벽을 타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 쪽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끌려 나온 후에도 완성된 게 아니기 때문에 다시 우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것이다. 나를 위해 살고 싶다는 유혹이다.

회개하고 간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성장해 가면서 우리의 유혹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의 강도도 떨어지는 것이고, 거기에 호응하는 우리 안에서의 유혹도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이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것이 아니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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