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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보고서

2026년 06월 14일 서기 보고서 - 공관복음 강론 19

작성자강지성|작성시간26.06.16|조회수22 목록 댓글 0

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공관복음 강론19

 

산상수훈(9) : 주기도문 강해(5) (마 6:9-13)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그 앞에 기도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와 연결되는 것이다. 시험은 유혹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 강론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한 것은 사탄이 유혹을 할 때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싸르크스가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각자도생의 길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유혹을 건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데마가 좋은 예다. 사도 바울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을 때, 거기에는 사탄이 등장하지 않는다. 데마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그냥 제마 혼자 그렇게 한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데마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세상으로 간 것이다. 각자도생은 사실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핵심은 내 인생을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물 속에 있는 사람들은 100프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각자도생하는 우물에서 건져 내어져서 이제는 하나가 되기 시작해서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인데, 우리 싸르크스는 다시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사는 저 황홀한 우물 속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유혹이 계속 있는 것이다. 사탄은 그 유혹을 건드리는 것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람을 사탄이 와서 유혹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데마처럼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시작된 스토리인 것이다.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서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보내니까 아담이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로다 했던 것은 이제 하나 된 두 사람의 관계라는 말이다. 서로가 자기 자신으로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도,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열매를 먹는 바람에 각자 자기 인생이 독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외이며 그것이 모든 문제의 뿌리이고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된 것인데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먼저 우물 밖으로 꺼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하나가 되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된 모습을 향해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속에는 다시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좀 살아봤으면 하는 그 유혹이 계속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을 사탄이 건드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쌍을 이루는 기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유혹과의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내가 다 이룬 것이 아니라고도 고백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 아니고, 우리 안에 싸르크스의 유혹과 계속 대결하는 것이다.

 

14. 다만

 

<호크마주석>

다만(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15. 악에서(전치사 아포/ 격리의 뉘앙스)

 

<호크마주석>

악(투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악은 빗나감의 열매다. 원인은 빗나감, 즉 혼자됨이다. 원인은 내 인생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산다 라는 그 빗나감이다. 즉 나는 우주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 죄다. 그것이 여호와의 길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리고 빗나간 길에 있는 사람들, 즉 우물 속으로 추방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악하다고 예수님께서 정의를 내리신 것이다. 그런데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가 없는 것이다. 악은 혼자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악한 것이고 나쁜 것이다.

따라서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사는 자가 되어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모든 것이 악이 나오게 되니까 그렇게 하지 말아 주시옵시고, 악에서 옮겨 주시옵소서, 악과 분리시켜 주시옵소서, 이 말인 것이다.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순간부터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빗나가게 하지 마시옵시고 빗나감의 결과인 악에서도 떨어지게 하시옵소서 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기도인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기도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하나의 기도인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인용하는 성서 요절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악으로부터)(전치사 에크/ 출처의 뉘앙스)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그 성령 강림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기도를 하시는 것이다. 현재 제자들은 우물 속에서 치고 받는 자들이었으니까 성령 강림 이후에 우물에서 건져진 사람들이 드릴 기도를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물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데 그러다 보면 다시 안에 있는 싸르크스의 유혹이 발동을 하면서 내 인생 나 나를 위해 살고 싶어하는 유혹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악한 그 상황에서 격리시켜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사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빗나간 자들의 삶이다. 빗나감의 열매인 그 삶,  다시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서 격리시켜 달라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꺼내 달라는 그런 기도인 것이다.

성서의 진리를 깨닫는 만큼 우리가 진리의 사람으로 변하는 그 실제 변화와 성장이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개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다.

 

(살후 3:3) 그대들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악으로부터)(전치사 아포/ 격리의 뉘앙스) 지켜주시는 주님은 신실하십니다(피스토스)

and keep [you] from evil.  (KJV)

and protect you from the evil one.

여기서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단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요일 2:13) 아비 된 자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쓰는 것은 그대들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았기 때문이며 젊은 자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쓰는 것은 그대들이 악한 자를(악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2:14 아이 된 자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쓰는 것은 그대들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요 아비 된 자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쓰는 것은 그대들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았기 때문이며 젊은이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쓰는 것은 그대들이 힘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들 안에 있으며 그대들이 악한 자를(악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because ye have overcome the wicked one(KJV)

because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NIV)

 

*클레로스 주석

원인 : 빗나감(하마르티아)

결과 : 악(포네로스) 또는 허물(파라프토마))

 

*클레로스 주석 : 요한일서의 경우 악한 자(사탄)의 유혹을 이겨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음

 

요컨데,

사탄이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탄이 와서 유혹하는 게 아니고, 안에서 유혹 당하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을 때 그걸 톡 치는 게 사탄이다. 따라서 이 유혹은 쌍방향의 유혹이다.. 우리 안에서 유혹이 올라오고, 밖에서 사탄이 그것을 자극하는 그런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악을 이긴다, 악한 자를 이긴다는 것에는 양면이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싸르크스를 제압하는 면이 있고, 그런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을 제압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승리를 거둬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싸르크스를 억제하는 승리를 얻어야 하고, 밖에서 우리를 자극하는 사탄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검증 기준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시각이다. 안에서는 나 자신처럼 보이느냐, 밖에서는 나 자신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소중하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보는 시각이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체크할 수 있는 너무나 선명한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다. 우리는 내가 지금 회개와 간구가 필요한 시점이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시점이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너무너무 선명해진 것이다.

 

16. 구하시옵소서(뤼오마이/ 구출하다, deliver)

 

<호크마주석>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사탄 못지않게 이글이글 불타는 욕망으로 불타는 자들이 인간이다.

호크마 주석은 인간을 가련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싸르크스는 사탄과 짝짝꿍이 딱 맞는다. 그 문제를 봐야 한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호크마 주석의 논리는 “사탄을 물리쳐 주세요. 그러면 멀쩡한 우리는 행복하게 살게 될 거예요”, 이런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마의 경우에 사탄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다. 사탄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인용하는 성서 요절

 

(엡 6:16) 이 모든 것 위에 그 신실하심(the faith)을 방패로 삼아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고

우리의 믿음을 방패로 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방패로 삼는 것이다.

* 클레로스 주석 : 하나님의 전신갑주이므로 하나님의 피스티스임

 

(요일 3:12) 가인과 같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는 악한 자(악)로부터 비롯된(전치사 에크/ 출처의 뉘앙스) 자였고 자신의 형제를 죽였는데 그를 죽인 것은 자신의 행위들은 악했고 그의 형제의 행위들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빗나간 부모로부터 우물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고 부모와 똑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가인은 악으로부터 비롯된 자였다는 것은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각자도생하는 혼자된 존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가인을 사탄과 연결지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서 태어난 정상적인 큰 아들인데, 즉 그는 악으로부터 비롯된 자였고 즉 빗나간 자로서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악한 그런 존재였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 클레로스 주석 : 문법적으로 ”호 포네로스“는 악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악한 자로 번역할 수도 있음

 

* 클레로스 주석 : 악은 빗나감(하마르티아)의 결과물이므로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임

 

유혹을 당하고 있는 자는 아직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으니까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이고, 잠시 빗나가던 자는 다시 여호와의 길로 재 이동시켜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한 쌍의 결정적인 기도는 우리가 다시 빗나가지 않게 해 주시옵시고 빛나간 자는 다시 여호와의 길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17.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은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있는데, 마태복음은 마태 공동체에서 생산해 낸 복음이다. 마태 공동체는 유대인 출신 공동체이다. 유대 공동체, 유대주의에는 이 송영이 굉장히 일반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 원래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유대교 출신인 마태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마태복음이어서 유대 문화 전통을 따라서 송영을 끝에 단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호크마주석>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인데 이 고백은 우물 밖으로 나온 자들 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고백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자라고 해서 모두 완성된 자가 결코 아니다. 앞선 자들을 보면서 진리도 듣고 앞선 자들의 본을 보면서 나도 꼭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 라고 소망하고 있는 사람도 우물 밖으로 꺼내어진 사람으로 우리가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그룹, 하나가 되기 시작한 그룹과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그룹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나라의 실체는 앞선 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옆에서 눈으로 보는 것이고,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을 눈으로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는 자들도 이 송영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물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냥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현실이 아니고 완전히 현실과 분리되어 있어야 그게 종교이기 때문이다.  무슨 종교가 됐든 간에 현실에서 교리가 성취되면 그때부터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사상이고 철학이다.

 

* 클레로스 주석 : 우물에서 건져 내어져 그 나라 안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살아가고 있는 자들과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임

 

* 클레로스 주석 :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 형제들로 이루어진 마태 공동체에서 생산했음

 

<병행구절>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오페일로/ 빚진 자)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압히에미/ 면제하다) 우리 죄(하마르티아/ 빗나감)도 사하여 주시옵고(압히에미) 우리를 시험(페이라스모스/ 유혹, 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누가복음에는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없다. 이런 사본 간의 불일치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어마어마하게 고민을 한다.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으로 받아들이고 누가 복음은 누가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서 66번은 성령의 역사로 정리가 되고 결정이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 66권을 해부하는 듯한 접근을 하면서 무엇이 옳은지를 찾아내겠다는 태도는 우리는 옳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이 기도문은 인간론과 구원론 전체를 응축해 놓은 기도문인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이소영 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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