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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보고서

2026년 06월 21일 서기 보고서 - 공관복음 강론 20

작성자강지성|작성시간26.06.22|조회수28 목록 댓글 0

1.주일 설교 내용 요약

 

공관복음 강론20

최근에 우리에게 새롭게 정리된 것이 새 문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각자도생하는 운명적인 몸부림의 삶이 옛 문명이라면, 성서에 계시된 삶은 새 문명이라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 이미 강론했던 부분도 다시 보면서 얼마나 더 깊은 의미가 우리 눈에 들어오는가를 체험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6장 전체를 다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6장 전체에서 각자도생하는 운명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의 모습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제목 : 각자도생의 운명적 몸부림으로부터의 해방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옛 문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그럴 듯한 사람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해겔이 말한 인정 욕구다. 주인공인 내가 조연과 엑스트라에 불과한 저들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삶을 이제 끝내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고 있으나 너희들은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의를 행하는 세 가지 예를 드시는 것이다.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의 경우이다.

먼저 구제할 때는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할 때 그들은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야 라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6:5)

그 다음에 금식 경우에도 나는 지금 금식하고 있어 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6:16-18)

이처럼 외식하는 자가 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실존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뭔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삶에서 너희들은 이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럼 어떤 삶으로 간다는 것인가?  오른손이 했는데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즉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절로 정해진 대로 작동하는 불수의근에 의해서 숨을 호흡한다든가 소화를 시킨다던가 그 심장이 펌프질을 해서 심장 박동을 해서 피를 순환시킨다든가 할 때 의식 자체가 없듯이, 구제도 그냥 하는 것이다. 구제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숨 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다 불쌍해 보이니까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도와주게 된다는 것이다. 도와주는 것이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고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이 바뀐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임했기 때문에 행해지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설명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럼 골방에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하는 것인가?

골방에 들어가서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위한 기도, 그리고 세상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지혜와 건강과 재물과 여러 가지를 또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즉 클레로스의 형성과 성장과 확산을 위한 기도, 즉 진리의 빛을 비추기 위한 기도와 세상을 향해서 평화의 빛을 비추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자 골방에 들어가서 하는 기도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기도를 하는 목적도 똑 같은 것이다. 골방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네 소원을 빌라는 게 아니다.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 께서 아시느니라

떼쓰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다 알고 계신데 뭘 떼를 쓰고 기도를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부분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나중에 해결이 된다.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마 18장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와 연결

 

하나님이 엄청난 용서를 하셨는데 사람의 티끌 같은 것도 용서 못하면 네가 받았던 엄청난 용서도 취소된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프로세스인데 여기서는 후반부만 말씀하신 것이다.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각자도생하는 우주의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옴

 

금식도 사람들한테 "나 금식해" 하고 광고하면서 금식하는 그런 우물 속의 옛 사람의 삶에서 이제 너희는 빠져나오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앞에 있는 세 가지 케이스가 전부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다 남이고, 자기만 우주의 주인공이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이다. 모든 인간의 정상적인 삶이다.

이 말씀이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다.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 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6:21 네(너희의)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너희의) 마음도 있느니라

* 나를 위한 삶에서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위한 삶으로(진리의 빛)

* 우리를 위한 삶에 더해서 저들에게 긍휼과 친절을 베푸는 삶까지(평화의 빛)

 

제자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니고 클레로스에 그 재물이 쓰여져야 된다는 것이다. 클레로스에 온전히 소속된 성숙한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나를 위한 삶에서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위한 삶으로 변하는 진리의 빛이 안과 밖에서 빛나게 되는 그런 말씀이고, 우리를 위한 삶에 더해서 외부인들에게 긍휼과 친절을 베푸는 삶까지 평화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 클레로스 제자 공동체의 모습이다.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 나 더하겠느냐

 

이 말씀은 시력 이야기나 지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류가 소경이기 때문에 진리가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의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소경들이 성서를 놓고 읽어서 만든 것을 사람의 계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성서를 읽으면 사람의 계명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도생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를 만들어 가지고 개인 구원 교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는 또 휴머니즘이 극도로 강성해지니까 진보 기독교에 의해서 사회 구원을 만든 것이다. 개인 구원 교리나 사회 구원 교리나 다 개인 구원 교리이다. 개인 각자 자기가 주인공인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고밖에 전개가 안 되는 것이다. 눈이 성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세상 밖으로 그래서 우물에서 건져내지면서 우리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가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옛 문명의 시각과 언어와 관점/ 새 문명의 시각과 언어와 관점

언어의 본래적인 기능은 사고의 수단이다. 인간은 사고를 언어로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언어가 그 사람의 사고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실제는 언어는 존재의 감옥이다. 그래서 자기 모국어 언어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인간은 모국어 언어로만 사고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모국어가 그 사람의 사고를 결정해 버린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기 때문에 성서를 읽을 때도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언어는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만든 언어다. 따라서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성서의 계시가 눈에 안 들어오고 독해가 안 된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언어인데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언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놓은 것이 성서이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러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놓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성서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이 말한 그대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이 성서의 계시를 독해를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 놓은 것이 성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해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이다.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 가히 이룰 수 없는 말을 듣고 내려왔다고 그랬던 것이다. 그게 무슨 외계어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 (신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사야 43: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다는 의미임)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참 문제가 많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는데 이 일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일어난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걸로 봐야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17절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까지도 구약의 인물들은 정확하게 본 자도 없고 정확하게 들은 자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가려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창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으로 딱 하나를 제시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이제는 싸르크스를 따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눈이 열렸다는 것이다.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재물을 위한 수호신/하나님을 위한 재물

* 재물은 섬김의 대상도 아니고 기피의 대상도 아닌 활용의 대상임

* 재물이 많은 형제는 재물이 많은 자의 사명이 있으므로 재물을 유지하고 증식해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하나님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경히 여겨야 한다는 말씀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재물은 섬김의 대상도 아니고 기피의 대상도 아니다. 재물은 활용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거냐 재물을 섬길 거냐 이 말씀이 아니고 재물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활용되는 것이다.

재물이 많은 형제는 재물이 많은 자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그 재물을 유지하고 증식해야 한다. 그런데 다 나눠줘 버리면 재물이 많은 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초대 교회에서의 유무상통은 낭만적 공산주의 사상으로 가라는 말씀이 아니다.

클레로노모스들은 각자 자기가 가진 재능에 하나님께서 달란트까지 부어주셔서 각자 자기가 배치된 자리에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들을 감당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재물이 많은 형제는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 주시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이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재물을 계속 더 늘려가야 된다.  그래야 더 큰 사명도 감당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애주의나 휴머니즘이 파고 들어오면서 성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 재물을 준다, 고아를 구제하는데 내 재물을 다 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 이런 식으로 사고가 전개되는데 그것도 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판단 착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를 세상에 파송하실 때 전대를 차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전대를 차라고 하셨다. 재물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 사용될 굉장히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재물을 가지고 있는 형제는 재물이 많은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되는 것이다.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 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우리도 목숨이 중하니까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반론을 일으키게 만드는 번역의 문제

* 형용사 플레이온은 폴뤼스(많은)의 비교급으로서 가치가 아닌 크기의 의미임 * 이어지는 주님의 논리 전개가 말하듯 이 말씀은 목숨(프쉬케,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이라는 작은 것은 당연히 주신다는 의미임

 

위 번역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 그래서 우리도 목숨이 중하니까 음식을 구하는 거지 음식 구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음식을 왜 구하는데요? 목숨이 중하니까 음식을 구하죠.” 이렇게 반론을 펴게 만드는 번역인데 이것은 번역 오류다. 어느 것이 중하냐 가 아니고 어느 것이 더 크냐 인 것이다. 목숨이라는 것을, 생명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 엄청난 것을 주셨는데 음식이나 옷 같은 가벼운 것을 안 주시겠느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가 아니고, 생명이라는 이 엄청난 것을 주셨는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안 주시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 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주기도문과 충돌?

* 여기서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킴(32절)

* 일용할 양식은 오늘 필요한 하루 치의 먹거리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핵심임

 

이 말씀은 주기도문 가르쳐 주실 때 6장 8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 말씀과 같은 논리인 말씀이다. 공중에 새 경우에도 그럴진데 하물며 너희 일이야?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일용한 양식은 왜 구하라고 하셨는가? 일용할 양식은 하루치 식량이다. 만나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틀치로 모으면 썩게 만드신다. 딱 하루치 식량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 라는 것은 약속하신 대로 오늘 치 음식을 주세요 하는 것이다. 주실지 안 주실지 몰라서 요구하는 게 아니고 당연히 주실 그 오늘 하루 치 식량을 오늘도 주세요 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것이 결론이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런 거 안 주시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신 것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 정신들 좀 차려라, 이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하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이방인들의 소원은 각자 자신의 우주의 주인공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임

 

그것은 이방인들이 각자 자기를 위해서 소원을 비는 우상 숭배이고, 너희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특별히 간청 기도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클레로스가 형성되고 성장하고 확산하는 것 그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은 다 따라오는 것이다.

 

*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형성된 새로운 존재의 이유는 클레로스의 형성과 성장과 확산이다. 여기저기에 새롭게 클레로스가 형성되고, 우리도 성장하고 다른 클레로스들도 성장하고 그리고 계속 다 같이 확산되어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너희 바뀐 마음대로 살아라, 너희 바뀐 소원대로 살아라, 다시 유혹에 빠지지 말고,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너희 마음에 온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너희 안에 들어온 새 마음에 따라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말씀하고 같은 것이다. 단 싸르크스의 방해만 막아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명사 카키아, badness)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우물 속 인간이 느끼는 모든 불안, 근심, 염려, 괴로움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상황을 향한 것임(큰일 났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인간의 모든 근심 걱정 불안은 내일 일 때문에 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오는 것이다. 지금의 불안과 염려가 아니다. 지금의 불안과 염려인데 알맹이는 내일 일이다. 내일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 클레로노모스들에게도 오늘 당장의 현실적 괴로움(통증, 배고픔 등)은 일어날 수 있으나 모든 일이 어우러져 앞으로 결국 선한(형용사 아가도스, good) 결과를 맺는다는 말씀(롬 8:28)을 수많은 경험상 당연한 사실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휘둘리지 않음

 

*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장래 일”은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일을 가리키신 것으로 이해함

 

이것은 현실 이야기다. 믿음 신앙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나쁜 일들이 클레로노모스들에게도 일어난다. 그런데 그것은 그날, 결국 내일 해결된다는 것이다. 내일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일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겪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고통이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이 수많은 경험상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 일에 대한 걱정 근심 불안 공포가 실제로 일어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험이 누적이 되어야 한다. 표적이 누적이 되야 하는 것이다. 표적이 누적이 안 되면 그냥 이론일 뿐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내버려 둘 수 있는 자들로 경험이 누적된다는 것이다. 모든 일이 어우러져서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일을 수 없이 경험하는 것이며 그 경험의 누적이 어느 선을 넘어야 한다. 그래야 사실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증인들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증인들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가 되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가지 표적인데 하나가 우리 관계의 표적, 즉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표적이고, 두 번째 표적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즉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기록들, 우리의 체험들 이것이 두 번째 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나에게 필요한 표적의 양을 채워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기로 했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간구한다.

표적의 양이 쌓이면 종말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고 우리가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서 주님을 맞으면서 우리가 그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의심의 대상이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세에서 일어나는 표적이 그것보다 훨씬 불가능한 표적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새 창조 사건이 1차 표적이고, 2차 표적은 그런 자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게 2차 표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일어난 일들이 표적이다.

우리는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도 성공하신다는 이상한 이상한 논리가 우리한테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가 만들어 놓은 덫이기도 하다. 내가 망신을 당하고 대 실패를 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내 실패 때문에 진행되는 것을 내가 보게 되었을 때 이런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 강론에서 나온 내용들 정리~

1. 언어의 문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서 존재를 이해한다 - 하이데거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며 존재의 감옥이다 - 클레로스 신학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만든 언어에 억지로 구겨 넣어진 하나 됨의 진리 - 아이러니의 극치로서 이 언어의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은 필연적으로 사람의 계명으로 독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 창조에 의해 옛 문명에서 엑사이레오될 때 눈이 열리며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게 된다.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2. 인정 욕구의 문제

탐욕 : 타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나를 높이고 우물 속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다

공포 : 타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끝장이다

 

해답1. 하나님은 새 창조로 불완전하나마 신실해지기 시작한 나를 신뢰하고 보호하시고 성장시키신다

 

해답2. 하나가 되기 시작한 형제자매들은 새 창조로 불완전하나마 신실해지기 시작한 나를 신뢰하고 아낀다

 

해답3. 나의 실수나 잘못 또는 실패로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귀하게 사용하셔서 아름다운 결과를 만드시며 형제자매들은 나의 진심을 알기에 나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3. 장래 일과 표적의 문제

인간의 근심 걱정 두려움 공포는 모두 현세와 내세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지혜자 솔로몬조차도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으나, 신약시대의 클레로노모스들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장래 일을 알게 하심으로써 모든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신다.

장래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성서적 표적들이 누적됨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일이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으로써, 이는 이론과 실제의 교차 검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테라스, miracle)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표적(세메이온, miraculous sign)의 누적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세메이온)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표적이 없으면 이론만 남고 결국 뜬구름 잡는 교리로 무장한 종교가 만들어지고 만다. 기적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소원의 성취와 연결되지만, 표적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와 연결된다.

 

4. 재물의 문제

제자들에게 전대를 차지 말라고 하셨던 주님께서 때가 이르자 다시 전대를 차라고 하셨다는 점~

우물 밖으로 끌려나오면서 존재의 이유가 바뀌게 된 클레로노모스들에게는 재물은 지혜나 건강에 못지 않은 소중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재물과 관련된 사명을 받은 클레로노모스들은 재물을 잘 유지하고 증식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5. 자유로운 삶

우물 밖으로 엑사이레오되면서 존재의 이유가 바뀐 클레로노모스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담대하게 하면서 사는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물 속에 있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 못했던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

2) 주변의 비난 또는 조롱에 대한 두려움

3)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서 오는 두려움

4) 자신의 사악한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

5) 자신의 게으름에서 오는 두려움

6)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성숙한 클레로노모스들은, 자기의 소원이 성서적 소원으로 바뀌었고, 자신이 나날이 신실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이 항상 부어지며, 어떤 결과든 모든 결과는 결국 선하게 쓰이며,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믿어주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담대하게 실천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싸르크스를 항상 경계하여 그 준동을 감지하는 순간 즉시 모든 것을 멈추고 정확한 회개와 간구에 몰입하게 되므로 더욱 자유롭습니다. 성능 좋은 안전 장치까지 가지고 있는 거지요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이융희 집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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