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와 은사활용에 관한 연구
프뉴마티코스추천 0조회 2911.03.21 19:03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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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서론 A. 문제제기와 목적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가장 큰 관심을 준 것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받아들인지 1세기만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교회의 모습이다. 선교사상 기적이라고 하는 이 성장은 1970년대에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고, 그로 인해 1973년 빌리 그레함의 전도집회와 그 해 9월 세계 오순절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의 초기 1907년대와 1970년대의 성령운동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데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성장은 성령운동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성령운동과 교회 성장의 관계성에 대하여 J. R. W. 스토트는 "모든 교회는 성령의 은사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성령의 은사의 결과로서 성장한다"고 하였다. 맥가브란 교수도 "교회 성장은 성령의 활동에 의존한다"고 하였으며, 거버 교수도 "성령은 믿는 성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스토트는 "오순절 이래 끊임없이 퍼져나간 카리스마 운동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교회 성장을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루는데 공헌을 한 요소 중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운동(Spiritual Movement)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운동은 은사운동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그것은 이 성령운동이 특별히 은사들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성령운동이 교회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나 부작용도 적지 않아 교계의 주목과 함께 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렇게 문제점으로 나타난 현상들에 대하여 조병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을 한다. 첫째는 은사의 성격에 대한 오해로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생각하면 우선 특별한 현상만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는 것이다. 즉, 병을 고친다거나, 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앞날을 미리 알게 된다거나 하는 소위 은사의 기적적인 현상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의 은사를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은사에는 재능과 결부된 어떤 예술적인 일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어떤 예술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선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편에서 많은 연습과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은사 가운데는 아주 일상적인 은사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은사들은 사람의 성품과 잘 조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되 때때로 사람의 성품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들이 일상적인 모든 일을 충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은사의 성격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은사만을 지나치게 선호하며 강조하는 현상이 있다. 앞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은사를 그 성격에 따라 분류해 보면 참으로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적적인 은사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신유나 방언 그리고 예언과 같은 은사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한국 교회를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크게 편중화시켰으며, 또한 획일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런데 더 문제되는 것은 이렇게 몇 가지 은사에만 집착하게 되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건조하고, 단조롭고, 고집스런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교회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명해 낼 수 있는 일인데, 예를 들면 주후 2세기에 활동했던 몬타누스나 그의 추종자들(몬타니스트), 중세 시대를 어지럽게 했던 종말론적 환상가들, 개혁시대에 일어났던 재세례파의 예언 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모습들이다. 셋째는 성령의 은사들의 의미와 성격, 목적 등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적용 및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은 물론이고, 예술적이며, 일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현상적으로만 감지하며 체험할 뿐 은사가 본래 목적하는 내용에 대하여는 상당히 무지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안에는 은사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잃어버린 채 걷잡을 수 없는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넷째는 은사를 개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생각하기에 은사 자체가 일종의 표준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은사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평가할 표준이 있을 수 없게 된다. 또한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객관적인 평가와 표준을 넘어서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문제점이 대두되는데, 우선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 앞에서 교회의 평가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즉, 교회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어떤 제재도 가할 수가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적인 평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즉, 성경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무슨 발언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어떤 것에도 평가를 받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은사는 스스로 표준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은사는 오히려 교회를 평가하게 되고, 심지어는 성경을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성경(text)을 가지고 현상(context)을 이해하지 않고, 현상(context)을 가지고 성경(text)를 이해하는 무서운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즉, 이것은 성경 진술이 은사 체험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 체험이 성경 진술을 평가하게 되어 성경 진술이 표준이 아니라, 은사 체험이 표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현상이 표준이 되어 진리는 항상 불안하게 되고, 진리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함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 언제나 성경이 표준이 되도록 해야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사항들과 문제로 인하여 오늘날 몇몇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 가운데는 은사에 대하여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경멸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은사에 대해서 너무 과격한 입장과 태도를 보이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은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목양하며, 치리하는 목회자를 무시하며 불순종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이렇게 은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 더욱이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분당을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더욱 이런 현상들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결국 "은사"하면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은사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으려 하거나 아니면 아주 경멸과 배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에 나타난 성령운동, 은사운동은 사실상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익함보다는 더 많은 문제점을 초래하여 교회의 분열과 신자 개개인의 우월주의 사상 등을 초래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극단적 거부를 표시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형성시키게 하였다. 즉, 성령의 은사 문제와 관련하여 굉장한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에, 사실 이 시점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뜻깊은 일이라 사려된다. 특별히 "개혁주의 성경 해석학적인 해석 방법"을 통한 올바른 해석과 이해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보다 올바른 성령의 은사를 정립할 수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바로 이런 점검표를 통해서 자신들을 뒤돌아보고 진단할 수 있으며, 목회자들은 각 교회에서 은사를 받은 성도들을 통제하며, 동시에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양적 성장을 이룩했는데 지금은 그 성장이 둔화 내지는 감소되는 실정에 있으므로, 이러한 때에 본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참다운 이해 부족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 부분에는 바른 이해를 제공할 수 있고, 또 치료할 수도 있기에 더더욱 그 중요성이 크다고 사려된다. 한편, 필자가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를 본 연구에서 다루는 목적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현 한국 교회와 본인이 소속된 교회가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혼란과 갈등 그리고 분열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난무한데 특별히 필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제한을 두어 그 본문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들에 관하여 그 뜻과 의미를 규명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B. 연구방법과 범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성령의 은사)에 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라는 말씀을 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8가지(중복되어지는 것 포함해서)의 은사를 열거하며,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을 통해 더욱더 폭넓게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 현장에 나타나고 있는 교회의 불화와 분열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릇된 은사관을 바르게 정립하기 위해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말씀하고자 했던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그 의미와 활용 방안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연구 방법에 있어서는 먼저 성령론과 관련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는 성령론을 바르게 정립한 후,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사전과 원어를 통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주어진 성경을 통해 성경 속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연구하고자 한다. 또한 현재까지 연구되어진 성령의 은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을 중심으로도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연구의 범위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는 개론적으로 고찰하고, 특별히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18가지 은사에 제한을 두어,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좀더 구체적이면서도 체계적인 고찰을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올바른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진행 방법은 우선 Ⅰ장에서는 본 연구와 관련하여 문제제기와 목적, 그리고 연구 방법과 범위를 다룰 것이고, Ⅱ장에서는 성령론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르게 정립하기 위해, 그리고 또 본 성령의 은사 연구를 바르게 점검하고, 인도함을 받기 위해 개혁주의 성령론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사전적, 어원적 의미를 고찰하여 정의를 내리게 될 것이고, 또한 성령의 은사의 범위, 근원, 특성, 목적 등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역사 속에서 학자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고찰하는 작업도 진행될 것이다. Ⅳ장에서는 필자가 연구하고자 했던 가장 문제시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은사들에 대해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해되어 지고 있는 내용과 의미를 연구하여 제시할 것인데, 특별히 이것을 다룸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고찰하는 작업도 시도할 것이다. Ⅴ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의 올바른 활용 방안에 대해서 고찰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중심으로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점과, 문제를 발생시키는 점은 무엇인지를 진단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올바르게 활용 및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Ⅵ장에서는 모든 연구를 종합하여 얻게 될 교훈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Ⅱ. 개혁주의 성령론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본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연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혁주의 성령론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왜 굳이 은사 연구로 바로 접근하지 않는가란 물음을 던질 수 있겠으나, 필자가 이 고찰을 먼저 시도하는 이유는 첫째,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본 성령론과 관련된 많은 이론들이 다양하게 소개는 되고 있으나 바른 정립 및 이해는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교회에서 조차 바른 정립과 이해가 되어 있지 못해 오순절 계통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하여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는 본 연구의 주제인 "성령의 은사"라는 것이 성령론과 관련하여 성령의 사역적인 면에서 다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바로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본 성령론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취급을 하든지 혹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바로 본 성령의 은사 연구로 진행을 시도하고 있기에 잘못된 은사론을 표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 성령의 은사 연구와 관련하여 먼저 오늘날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나타나고 있는 성령론의 문제들에 관한 사항을 몇 가지 지적한 후,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바른 성령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A. 성령론과 관련된 문제점 성령론에 관한 논쟁은 최근들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진행된 모든 성령론을 여기서는 다 검토할 수 없기에 본 연구와 관련된 사항으로 조병수 교수가 지적한 두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최근의 성령론은 지나치게 편중되어 성령론만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의 삼위 일체 구조를 파괴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성부와 성자 없이 이해되는 추세이다. 이것은 곧 신론과 기독론에 무관하게 성령론이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교회사에서는 열광주의를 경계하여 때때로 성령이 의붓자식처럼 취급되어 온 반면에, 현대 교회사에서는 오히려 열광주의에 심취하여 자주 성령이 홀어머니처럼 여겨지고 있다. 즉, 이것은 성령론이 삼위 일체론적인 균형을 잃고 있는 현상이다. 둘째는 최근의 성령론은 교회에서나 개인에게 주로 성령의 능력적인 기능과만 관련하여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가 중생 이전의 체험이냐, 아니면 중생 이후의 체험이냐를 놓고 논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결국 성령의 능력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이 교회나 개인을 신비한 영역으로 이전시킨다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그 이외의 넓고 깊은 활동에 대하여는 도외시하거나 아니면 제한 및 왜곡을 시켰다. 셋째는 최근의 성령론은 인간을 떠나서 자연의 문제를, 그리고 교회를 떠나서 사회의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자연을 통하여 일하시는 기능으로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성령이 사회에서 활동하시는 측면으로 교회의 진로를 결정하려고 시도한 것이다(예를 들어 불트만 파).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성령이 구원과 관련하여 행하시는 주된 활동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하였다. 이상이 오늘날 성령론과 관련하여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는 주된 사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오류를 범치 않기 위해서는 먼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는 성령에 대해서, 그리고 삼위 일체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또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바른 고찰을 시도해야만 하겠다. B. 성령이란 R. A. Torrey는 그의 『성령의 사역』이란 저서를 통해서 성령에 대하여 말하길, "성령은 인격이 있는 분으로 인격의 모든 특징을 소유하고, 행위를 행하며, 직무가 부여되고, 대우를 받는다. 성령은 하나님이 소유한 독특한 속성과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의 구별의 근거는 마 28: 19, 요 16: 7절이며, 세 분은 별개의 인격으로 계시면서 상보적(Mutual) 관계이다. 삼위의 관계가 상보적 관계이나 또한 성자는 성부에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한다. 성자에게 성령이 종속하는데, 그 증거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루이스 벌코프는 "성령은 삼위 일체의 제 3 위에 적용된 호칭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을 '영(Spirit)'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영'이라는 명칭은 좀더 특별하게 제 3 위에 적용되고 있다. 이 영을 나타내는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 )'이고, 헬라어는 '프뉴마( - )'인데, 이 양자는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와 같이 '숨을 쉬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또한 '호흡'(창 2: 7, 6: 17, 겔 37: 5, 6)이나 혹은 '바람'(창 8: 1, 왕상 19: 11, 요 3: 8)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구약은 '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사용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성령'이라는 용어는 단지 시편 51편 11절, 이사야 63장 10, 11절에서만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삼위 일체 중 제 3 위의 훨씬 더 일반적인 칭호가 되었다. 현저한 사실은 구약이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시 71: 22, 사 10: 20, 41: 14)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거의 하나님께 붙이지 않고 종종 성령을 특징짓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령과 그의 성화 사역 안에서 자신을 거룩하신 자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성별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주신다. 한편, 성령은 인격성을 지니고 계신다. 그런데 그 인격성은 성자(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처럼 사람들 가운데에서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격적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요 14: 26, 15: 26), 의지(행 16: 7. 고전 12: 11), 감정(사 63: 10, 엡 4: 30)과 같은 인격의 특징들이 성령에게 돌려지고 있다. 특별히 성령은 자신의 인격성을 의미하는 바,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성령은 사도들(행 15: 28), 그리스도(요 16: 14), 성부와 성자(마 28: 19, 고후 13: 13, 벧전 1: 1)와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면서 성령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한편, 성령에 대해서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먼저 벨기에 신앙고백서에서는 "우리는 또 성령께서 영원 전에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음을 믿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만들어지시거나, 창조되어지시거나, 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성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서, 순서에 있어서 성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이시며, 본체와 위엄과 영광이 성부 성자와 더불어서 하나이시오 똑같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그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에서는 "당신은 '성령'에 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물음에 첫째, 그는 성부, 성자와 더불어서 똑같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그는 나에게 보내지신 분이시요, 나로 하여금 참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나를 위로하시며, 나와 함께 영원토록 거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성령을 믿음에 관하여, "이러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은 혈과 육, 즉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인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성령께서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사,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 있거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하심을 고백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께서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우리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을 때에 성자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음을 고백한 것과 똑같이, 성령께서도 우리가 중생하기 전이나 중생한 후에 우리에게서 내놓는 어떠한 공로와도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중생케 하고 거룩하게 하심을 고백한다.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와 중생에 있어서 그 모든 영광과 존귀를 우리 스스로 망쳐 놓고 있듯이, 중생과 성화에 있어서도 우리 스스로는 선한 생각을 가지기에 충분하지가 못하다. 따라서 오직 그 분만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를 시작하시고, 또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지속하게 하사, 값없이 받은 은혜를 찬송하고 영광 돌리게 하신다." 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것들을 논하기 이전에 우선 바른 성령의 이해와 정립 그리고 고백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겠다. C. 삼위 일체와 성령 성령의 은사 문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삼위 일체와 성령에 관한 이해와 정리는 매우 중요하다고 사려된다. 왜냐하면 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론과 관련하여 왜곡된 발언을 하거나, 아니면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그 밖의 은사와 열매들에 대해서 극히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삼위 일체와 성령, 그리고 성령과 다른 위격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신적 경륜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등에 대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삼위 일체란 "삼위 일체(Trinity)"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말은 2세기말에 터툴리안이 최초로 사용은 했으나, 4세기까지 교회의 신학에서는 공식적인 위치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 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뚜렷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교리이다. 삼위 일체 교리는 세 가지 단언을 한다. 즉,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신다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독특한 인격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 일체 교리는 터툴리안,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어거스틴 등으로 이어지면서 완전한 공식을 정립하여 다음과 같은 형태로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는 삼위 일체에 관하여, "우리는 무한하시고, 유일하시고, 불가시적이신 한 하나님이 그 인격에 있어서 분리나 혼잡 없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되어 계심을 분명하게 믿고 가르친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영원 발생시키셨음으로, 성자께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되시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출 되시었음으로, 성부, 성자와 더불어서 경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세 인격이 계신다. 세 인격은 동일본질을 가지셨고, 똑같이 영원하시고, 똑같이 동등하시다. 그러나 그 인격에서는 서로 구분이 있으시다. 순서에서는 먼저와 나중이 있으나, 동등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그 본체 또는 본질은 서로 연합이 되어 있음으로, 오직 한 하나님이시다. 신적 본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공통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공유하시고 계시는 세 위격 이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다(요일 5: 7, 마 3: 16, 17, 28: 19, 고후 13: 14). 성부는 그 누구로부터 태어나셨거나 그 누구에게서 유래하신 것이 아니다. 성자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탄생하셨고(요 1: 14, 18), 성령은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유래하셨다(요 15: 26, 갈 4: 6)."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이해와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2. 삼위 일체론에 관한 진술 위에서 살펴본 삼위 일체론은 다양한 명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더욱 간략하게 가장 잘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명제들은 이런 점에 있어서 교회의 신앙의 개요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명제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사려되기에 필자는 루이스 벌코프 박사가 제시한 것을 토대로 그 내용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삼위 일체는 신적인 존재 안에 유일의, 구분할 수 없는 본체가 있다(ousia, essenta). 즉,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존재나 본질적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한 신적 존재 안에는 세 위격들 혹은 개별적인 실체들(subsistences),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 일체론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다양한 구절들에 의하여 입증되어지고 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누어지지 않은 전 본체(질)가 삼위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적 본체가 삼위에 분배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서 각 위들 안에 전체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그 삼위는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적 성질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혹은 불가분리적으로 한 위격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적 성질과 구별된다. 넷째는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의 실존과 활동은 분명하게 정해진 순서로 표시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삼위 일체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 위격적 실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 성령은 셋째이다. 이 순서는 시간이나 본체적 엄위에서의 어떠한 선후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원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다. 성부는 어떤 다른 위격에게서 태어나시거나 발원하지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발생과 발출은 신적 존재 안에서 일어나며, 또한 위격적 실존의 방식에 관한 어떤 종속을 의미하지만, 신적 본체의 소유에 관계되는 한 아무런 종속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삼위가 구별되는 어떤 위격적인 속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또한 내향적 사역(opera ad intra)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사역들이어서 피조물에게는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위격적 사역들이며, 삼위가 공동으로 하지 않으며, 또한 나누어 줄 수 없는 사역이다. 발생은 성부만의 행위이며, 아들 됨은 독점적으로 성자에게 속하며, 또한 발출은 오직 성령에게만 돌려진다. 내향적 사역으로서의 이러한 사역들은 외향적 사역 혹은 삼위 일체가 외적으로 현현되는 그러한 활동들이나 결과들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독점적으로 어느 한 위격의 사역들이 아니며, 항상 신적 존재 전체의 사역들이다. 여섯째는 교회는 삼위 일체를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 일체는 이전에는 감취었다가 이제 계시된 진리라는 성경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이해시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비이다. 즉, 삼위 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 여섯 가지는 루이스 벌코프 박사가 삼위 일체론에 관한 것을 제시한 명제들로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진술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제들을 잘 이해하여 삼위 일체에 대한 바른 입장을 취하도록 해야 하겠다. 3. 성령과 삼위 일체의 다른 위격과의 관계 성령은 다른 위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시기 때문에 다른 두 위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 11절로부터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자의식과 동일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영혼이 사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도 성부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주(그리스도)는 인격성에 대해서가 아닌, 사역의 양식에 대해서 성령과 동일시되고 있다. 또 동일한 구절에서 성령은 "주의 영"이라고 불리고 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로 파송되셨던 사역은 성령의 성부와 성자와의 하나 됨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의 지상 사역을 행하시는 일, 즉 성자가 행하셨던 것과 같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증명하고,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로 오셨다. 그런데 성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계시적 사역이 성부와 일치하는 성자의 하나 됨에 기초하고 있다(요 16: 14, 15). 이렇게 성령과 삼위 일체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도 동일하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숙지해야 될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은사요, 또 그 사역과 목적도 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의도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사역으로 역사하지만, 그 속에는 이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하겠다. D. 신적 경륜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이제 성령의 은사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이것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그 주된 사역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것으로, 특별히 이 내용이 이해되어 질 때 우리는 비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그 목적과 의미를 바로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적 경륜뿐만 아니라 구속의 특별한 경륜 속에서 좀더 특별하게 성령에게 돌려지는 사역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임무는 피조물의 안팎에 직접적으로 활동하심으로써 사물들을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삼위 일체를 완성하는 위격이신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모든 분야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접촉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절정이다. 그리고 성자의 사역이 성부의 사역을 뒤따르는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을 뒤따른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이 성자의 객관적 사역과 떨어지게 되면 그릇된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숙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크게 두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계와 관련된 것으로 생명의 발생과 사람들의 일반적 영감과 자격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발생은 존재가 성부로부터 나오고, 생각은 성자로 말미암음과 같이, 생명은 성령에 의하여 매개된다는 것이다(창 1: 3, 욥 26: 13, 시 104: 30). 이러한 점에서 성령은 창조의 사역에 마지막으로 접촉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영감과 자격이라는 것을 그들의 직무적 과제를 위하여, 즉 과학과 예술 등의 일을 위하여 영감을 주며, 자격을 부여해 주신다(출 28: 3, 31: 2, 삼상 11: 6, 16: 13). 둘째는 구원의 영역에 관한 것으로 이 부분에서 성령의 사역은 훨씬 더 그 의미가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 박사는 여기에 포함되는 것으로, 먼저는 성령께서 중보적인 사역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시키고,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해 몸을 준비하셨으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눅 1: 35, 히 10: 5-7). 그리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으며(눅 3: 32), 또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한없이 받으셨다(요 3: 24)는 것이다. 그 다음은 성경의 영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영감을 주셨으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특별 계시(고전 2: 13, 벧후 1: 21),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사역에 대한 지식을 주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의 형성과 확장에 주되게 활동하신다. 성령은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을 중생과 성화에 의하여 형성하시고, 성장시키며, 또한 새 생명의 원리로서 교회 안에 거하신다(엡 1: 22-23, 2: 22, 고전 3: 16, 12: 4절 이하). 마지막으로 성령은 그 교회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그의 사역으로 하고 계신다. 즉,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또한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구세주에 관한 지식을 증가시키시며, 교회를 오류로부터 지키시며, 또한 교회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준비하도록 인도한다(요 14: 26, 15: 26, 행 5: 32, 히 10: 15, 요일 2: 27). 이상이 신적 경륜 속에서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은 삼위 일체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사역은 성자의 사역을 계속 잇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감과 자격을 주시는 것도 주되게 하시지만, 성령의 주된 사역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함께 하시며, 성경에 영감을 주고, 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형성과 확장 그리고 인도와 가르침 등을 주로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요약하면 성령의 사역은 크게 창조론과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에 포괄적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창조 사역 이후 구속의 완성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역 이후 계속될 그분의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성경을 영감하시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역사 하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령의 주된 사역은 창조와 함께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경의 기록과 전파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그 성도들에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성령은 창조와 함께, 성경을 영감하고, 종결하고, 전파하고, 증명하기 위해 은사를 주셨으며, 그리고 그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은사를 주셨다. 그러므로 필자가 연구하고자 하는 본 성령의 은사는 바로 이 부분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이 부분에 종속되어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필자뿐만 아니라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모든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인간 중심의 은사론과 문제, 그리고 혼란과 갈등은 쉽게 해결되고 탈피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연의 목적과 의도를 되찾게 될 것이다. Ⅲ.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 A.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 "은사"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의 " "를 번역한 단어인데, " "는 " (선사하다)"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은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膳物), 곧 은혜(恩惠)의 선물(膳物) 혹은 선사(膳賜)를 뜻한다. 이것을 줄여서 우리 나라 교회는 은사(恩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이 은사에 관하여 그 단어가 의미하는 사전적, 원어적 뜻을 고찰한 후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1. 사전적 의미 성서백과대사전에서는 이 "은사"란 단어에 대하여, "히브리어로는 ' (tub)', 그리스어로는 ' (charisma)', 영어로는 'Gift' 혹은 'Spiritual gift'로, 이것은 값없이 주어지는(내려지는) 것인데, 일반적인 윤리에 있어서의 은사는 임금이나 부모가 신하나 그 자식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특히 개역 성경은 이것을 선물로 역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에 대한 은사를 말하고 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 1: 17)'란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사에 대한 사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해진 것에는 '각양 좋은 것', 특히 '구원(롬 5: 15)', '영생(요 4: 10, 롬 6: 23)', '성령(행 2: 38, 고전 12: 4)' 등이 있는데, 최대 최량의 은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 16, 롬 8: 32)."라고 설명해 놓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은사란 헬라어로 ' (카리스마타, : '거저 주어진 선물' 의 복수형태)'란 단어로 원래 인간에게 어떠한 공적도 요구하지 않고 총애, 재질, 은사, 사명 등과 같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성서백과사전들은 공통적으로 성령의 은사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2. 어원적 의미 구약성경에 '은사'로 번역된 말은 1회 보여지는데(렘 31: 12), 여기에 씌어진 히브리어는 명사 ' (tub)'로서, '은총(사 63: 7, 호 3: 5)', '은혜(시 27: 13, 기타)', '선(출 33: 19, 시 25: 7)', '복(느 9: 25, 35, 시 128: 5)'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은사'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는 5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4회 사용된 단어들의 어근은 '도( : 주다)'에서 나왔다. 이 단어들의 일반적인 용법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 또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 (도론: 선물)'이라는 단어는 19회 사용되었고, ' (선물)'는 11회 사용되었으며, ' (선사, 膳賜)'는 2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일차적으로 모든 선한 것과 온전한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사)'로 해석하였다. 특별히 은사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3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 (은사)'와 ' (선물)'과 ' (선사, 膳賜)'이다. 신약성경 내에서 선물은 11번 나오며(요 4: 10, 행 2: 38, 8: 20, 10: 45, 11: 17, 롬 5: 15, 17, 고후 9: 15, 엡 3: 7, 4: 7, 히 6: 4), 선사 (膳賜)는 2번 나오며(롬 5: 16, 약 1: 17), 은사는 17번 나온다(롬 1: 11, 5: 15, 16, 6: 23, 11: 29, 12: 6, 고전 1: 7, 7: 7, 12: 4, 9, 28, 30, 31, 고후 1: 11, 딤전 4: 14, 딤후 1: 6, 벧전 4: 10). 여기서 이 세 단어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5절-17절의 한 문맥에서 ' (은사)'와 ' (선물)'과 ' (선사, 膳賜)'를 사용했다. 먼저 로마서 5장 15절을 보면, "그러나 은사( )는 범죄와 같지 않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선물( )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풍성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었으며, 16절에서는 "그리고 선사( , 膳賜)는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과 같지 않다. 한 범죄 때문에 온 심판은 정죄로 이끄나, 많은 범죄들 때문에 온 은사( )는 칭의로 이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17절에서는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면, 오히려 은혜와 의의 선물( )의 풍성함을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은사와 선물과 선사가 같은 의미와 같은 뜻 그리고 그 기원이 같음을 내포하고 있는 증거이다. 한편, 은사라는 단어의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은 카리스마( )라는 것인데, 이 말은 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은혜'라는 의미를 가진 ' '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이 두 단어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은혜(카리스)의 결과가 성령의 선물(은사: 카리스마)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근거로 하여 내용적으로 볼 때도 큰 연관성이 있는데, 그것은 이 은사가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롬 5: 15, 12: 6, 엡 4: 7). 그런데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은혜와 은사가 대단히 명백하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장 6절에 기록된 "우리에게 주신 은혜(카리스)대로 받은 은사(카리스마타: 카리스마의 복수형으로 은혜의 많은 결과들을 의미함)가 각각 다르니..."란 말씀과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기록된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카리스)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란 말씀,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4, 5, 7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너희가 모든 은사(카리스마)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란 말씀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위의 인용 구절들은 문맥에 따라서 거의 동의적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은혜가 은사보다 상위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사는 은혜가 외적으로 자연스럽게 현현되어 나타나는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은사만을 경험하는 일은 이런 측면에서 가능하지 않게 된다. 한편, 사도 바울은 은혜가 이렇게 외적으로 자연스럽게 현현되어 나타나는 작용을 때때로 성령의 사역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하였다. 즉,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고전 12: 7)'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 안에 거하시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 외적으로 현현되어 나타나신다. 성령이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볼 수 있게 나타나는 현현 현상들을 우리는 은사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은혜는 성령의 사역으로 동일시되는 것이 분명하다. 은혜가 보다 내적인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면, 은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볼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은혜를 성령의 내적인 사역으로, 은사를 성령의 외적인 사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결국, 성령의 내적인 은혜가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이 볼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특정하게 현현되어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은사들인 셈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여 은사들을 소유하게 되면 이전에 없던 현상들이 특정한 개인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은 쉽게 은사의 현현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정리하면, 성경에는 은사( )란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가 여러 번 기록되어져 있으며, 그리고 그 단어들은 상호 교체적으로 쓰였다. 또한 의미상으로는 은혜와 중첩되어져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은사와 관련된 단어는 은혜(카리스)에서 유래되었으며, 또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은사는 동일한 성령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다. 3. 성령의 은사의 정의 지금까지 필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은사의 사전적인 의미와 어원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또한 성령의 은사가 은혜에 기초하고 있고, 또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이젠 이것을 토대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그런데 필자의 사적인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몇몇 학자들의 객관적인 내용을 제시한 후 그것을 토대로 해서 필자가 이해한 은사의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먼저 마이클 그리피스는 은사에 대해서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을 비롯하여 바울 서신에 17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세속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말을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신약 성경 밖에서는 그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전후 문맥 안에서 실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은사에 대해 정의하길, "은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며, 또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리고 은사는 사람이 받고 싶어서, 간절히 열망한다고 해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성도에게 부어지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제임스 로빈슨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카리스마 혹은 카리스마타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신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목적을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기본적이며 내적인 경향성을 내포한다"고 정의했다. 또한 릭크 욘(Rick Yohn) 목사는 "성령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안영복 교수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게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특별한 속성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종선 목사는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란 많은 동의어를 대표하는 말로써,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다이아몬드가 저변에서 여러 빛을 모아 정점에서 조화시켜 가장 강하게 빛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란 말도 동의어의 각기 다른 특성을 다 품에 품고 그 빛을 강하게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한편,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이윤근 목사는 "성령의 은사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은사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지체가 몸을 위하여 있는 것 같이 각종 은사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령의 은사들이란 모두가 한 원칙에 관련되어 있을지라도 서로가 아주 구별되어 있고, 또 각자 자기에게 특별한 은사들은 자신들의 공로나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자유로운 기쁜 뜻을 따라 나눠주신 것이요(고전 12: 4-11), 따라서 그것들은 자만이나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동기나 근거가 될 수 없고, 아주 진실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이웃의 유익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영규 교수는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길,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전달하셨다. 넓은 의미에서 이 은사들은 모든 신자들의 분깃인 은혜의 은택들을 포함하나, 좁은 의미에서는 서로에게 유익된 다양한 수준과 정도에서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특별한 은사들을 가리킨다. 이 모든 은사들 중에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하시는 성령이 그 분배자 이시다.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의 백성에게 나누어주시되, 제멋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도에 맞게, 어떤 이가 교회 안에 차지하는 자리에 맞게, 그리고 그가 부름을 받은 과업에 맞게 그래서 각 은사가 성령의 나타내심이 되도록 나누어주신다. 이 은사들은 수에 있어서 아주 다양하다. 바울은 차이나는 것을 말하고, 결코 완전한 목록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여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정의를 내린다면, "성령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 된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특별히 신약의 바울 서신에 주로 사용된 단어로서 구원받은 백성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각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성도들이 성령(삼위 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B. 성령의 은사의 범위 '성령의 은사들'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의했으므로, 이제는 그 은사를 누구에게 주시는 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필자가 앞에서 정의한 성령의 은사는 몇몇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약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비록 지금 당장은 겉으로 표시되거나 사용되고 있지 않더라도)영적인 은사 또는 봉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확신은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영적인 은사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 다음 네 개의 성경이 모두 다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너희 중 각 사람에게(everyone)말하노니…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할 것이니라(롬 12: 3-8).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each one)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 11). 우리 각 사람에게(each)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 7). 각각(each)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 10). 여기에서 제시한 구절들 중에 진하게 쓴 글자들은 파스(pas=every) 또는 헤카스토스(hekastos=each)라고 한다. 이것은 은사들의 범위가 넓을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는 몸 비유에 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교회와 사람의 몸은 동등하면서도 각각의 뚜렷한 기능을 가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조직체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영적 은사들에 관해서 말하는 세 구절에서(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바울이 공히 이 몸 비유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과 카리스마타는 필연적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세 말씀 중에서 두 말씀 속에 그리스도의 몸과 은사들을 간단히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사람의 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각각의 기관과 지체는 어떤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각각의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다고 언급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으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카리스마티)가 각각 다르니… 할 것이니라(롬 12: 4-8).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 12, 14, 27). 이상의 근거를 통해서 볼 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과 어떤 기독교인도 은사를 받지 않고 지나치거나 은사를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받은 일꾼들을 세우시도록 기도하고,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행사하게 하고(딤전 4: 14, 딤후 1: 6), 또 그들에게 그 은사들을 행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C. 성령의 은사의 근원 필자는 앞에서 카리스마타의 여러 가지 본질과 또 광범위하게 주심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제는 성령의 은사의 근원, 즉 은사가 어디에서 오는가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령의 은사의 근원을 생각 할 때 일반적으로 성령께서 그 근원이 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귀하심으로부터 성령과 그리스도는 사역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으로서 모든 활동을 하신다(눅 24: 49, 행 1: 4, 2: 33).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 고린도전서 4절-6절까지에는 삼위일체의 삼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같고', '주는 같으며', '성령은 같고'라는 의식적인 언급이 나온다. 더 나아가서 로마서 12장과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영적 은사의 주체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신'(7-11절) 분이 승천하신 그리스도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은사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성령이 신성의 집행자이며,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시고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은사들을 성령에게만 속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에서 성령이 특히 강조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은사를 주심은 성령의 나타남이다(고전 12: 7-8). 성령은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 11). "신령한"이란 형용사적 용법은 은사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은사들"에 대한 동의어로써 복수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로마서 1장 11절에서는 "신령한 은사"란 표현을 함으로써 성령과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와 관련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지만, 특별히 성령께서 그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도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이 은사를 수여하고, 그들에게 분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그 위력을 나타내게 하는 것도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고 했다. D. 성령의 은사의 특성 성령의 은혜가 외적으로 작용하여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며 특정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은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을까? 이한수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몇 가지를 지적해 준다. 첫째는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독단적인 사역이 아니라 삼위 일체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은사는 성령의 단독 사연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은사는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가 관여하여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실례는 고전 12: 4-6에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으며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가람 가운데서 역사하는 하나님은 같으니." 위의 구절에서 은사, 직임, 역사 등의 표현들은 모두 은사의 다른 측면들을 묘사하는 술어들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은사라는 술어 속에 포괄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은 하나님, 주, 성령으로 불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적 선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은사를 거론할 때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제외시켜놓고, 성령의 사역에만 배타적으로 제한시켜 토론하는 것은 본문의 증거를 뛰어넘어 신학적 균형을 상실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특별히 오늘날 많은 은사 운동 참여자들은 성령의 사역에만 배타적인 강조점을 두다가 결국 그들은 은사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는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바울의 주장대로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기초해서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 은사를 경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전1: 4, 5).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기독론에도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엡 4: 7-12). 그렇다면 은사들은 성령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올리심을 받은 예수께서 자신의 통치권 실현의 차원에서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선물들이며, 그 궁극적인 출처는 성부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은사 신학을 정립할 때 우리는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 균형 잡힌 인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는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특별한 '믿음'을 준비해야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은사를 주신다고 믿거나 아니면 남보다 윤리적으로 더 거룩한 생활을 해야 그 보상으로 은사를 베풀어주신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 본문의 뒷받침이 없는 잘못된 생각들이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자연히 은사가 다양하게 나타나게끔 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2장 11절, 18절에서 이러한 은사 경험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로 표현하였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그 뜻대로"(kathos bouletai)라는 말을 좀 더 쉽게 부연 설명을 한다면, "성령이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또는 "성령께서 뜻하시는 바대로"라는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자 각 사람이 남다른 특별한 믿음을 준비해야 그 보상으로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셋째로는 성령의 은사는 개별화되어 있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상당한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는' (individualized)선물이다. 은사를 논의하는 고전 12: 4-11절에서만 바울 사도는 '각 사람에게(7, 11절)', 또는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이에게는(8-10절)'과 같은 진술들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은사를 몸의 지체에 비유하는 고전 12장 14절-27절에서도 몸에 다양한 지체들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라고 반문한다. 결국, 이것은 은사가 성령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은사가 이렇게 개별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떤 한 특정한 은사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에게 의무처럼 짊어지울 수 없고, 또 어떤 특정한 은사를 받으라고 교회 구성원 전체에게 명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고(고전 12: 11, 18), 또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개별화되어 있는 선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전 12: 7, 11). 은사는 이런 의미에서 명령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넷째로는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구절에서 확인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7). 한글 번역은 헬라어의 본 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본문은 오히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for the common good)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들이 몸을 지탱하고 세우기 위해 연합해 있는 것처럼(고전 12: 25), 성령의 은사들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유익을 주기 위해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목적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 바울에 있어서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는 장소였다(Kasemenn, Ridderbos). 교회가 다양한 은사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이 견실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은사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는 교회의 생명력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은사들을 어떤 모습으로든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도록 활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는 종말론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사가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선물이라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고전 1: 7-8절("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에서 은사와 재림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특별히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고', '신실하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신자들을 부르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마지막 재림의 날까지 신실하게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들을 풍족하게 주신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신실성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재림의 날까지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확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종말론적인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E. 성령의 은사의 목적 하나님의 은사는 사용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은사를 받은 대로 사용하라'고 했다(롬 12: 6-8).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은사를 사용해야 옳은 것인가? 이에 대한 답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은사에 대한 이해의 여러 부분들 속에서 설명되어졌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그 목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를 하고자 한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 자신(받은 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엡 4: 12, 16). 존 칼빈도 고전 14장의 주석에서 "은사의 목적은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덕과 유익을 주어야 한다. 또한 지체의 원리로 서로 연합을 이루고 사랑의 원리로 이타적인 은사가 되어야 하고, 질서의 원리에 따라 순서대로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장 1-16절을 통해서 은사를 주신 목적에 대해서 말하길, "첫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연합과 승천한 그리스도가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선물의 목적은 교회의 성장이다. 둘째는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함이다. 셋째는 영적 분별력을 길러주어 안정된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은 이 은사의 목적을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한 것(엡 4: 12 상)"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같은 온전함이란 다시 두 가지 방향을 가지는데, 하나는 "봉사의 일을 위한 것(엡 4: 12 중)"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세움을 위한 것(엡 4: 12 하)"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성경은 은사들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건설을 그 목적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은사는 다른 이들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는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F. 성령의 은사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 지금까지 필자는 성령의 은사의 사전적 의미, 어원적 의미 그리고 범위, 근원, 특성, 목적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렇게 고찰해 본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교회사 속에서는 어떤 입장들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몇 몇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2세기의 져스틴(Justin Martyr)과 이레니우스(Irenaeus)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기적적인 은사가 교회 안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둘째,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은 성령의 은사의 작용을 시인하였고, 그런 후 그는 스스로 몬타니즘으로 전향하였다. 이 몬타니즘은 3세기에 나타난 카리스마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역사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셋째, 4세기의 힐러리(Hilary) 감독과 크리스톰(John Chysostom)은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그 당시에도 나타나고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5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은사들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혹은 은사들이 계속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 모두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왕은 이 어거스틴이 기적에 관한 한 그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는 사실을 밝혀, "어거스틴이 처음에는 은사의 지속성을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은사의 정당성을 가르치고, 또 몇 몇 기적들을 목격하면서 그 은사들을 주장했다"고 지적하였다. 다섯째,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여섯째, 어거스틴 때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는 1000년 동안은 성령의 은사를 주장은 하나 그렇게 강한 언급들은 없었다. 일곱째, 종교개혁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그들의 주석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루터는 기적적인 은사들의 활용 가능성을 사도 시대에 국한시키지도 않았고, 또 그런 기적적인 은사들이 그 당시의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은사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에 동의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은사들이 주로 사도 시대에 주어졌다고 보았다. 여덟 번째, 17세기 영국의 존 오웬은 처음으로 은사들을 "일반 은사"와 "특수 은사"로 구별하였다. 그의 이 같은 구별은 후기의 개혁신학에서 보편화되었다. 여기에서 특수은사란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방언, 기적, 병 고치는 일, 사도, 예언, 전도자 등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들은 19세기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도 찾을 수 있고, 또 20세기 워필드(Benjamin Warfield)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은사 활용은 미국이나 세계 전역에 널리 파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은사 운동은 교회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넘어 기독교의 합법적인 부분으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에서는 이 은사에 대하여 너무 무분별하게 주장하고 활용하여 은사에 대한 편견과 물의를 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은사 운동과 사상을 바르게 정립하고 갱신하여 올바르게 은사들을 활용하고 전파해야 된다고 본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역사 속에서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를 크게 중지된 은사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은사로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성경의 계시를 위해 그리고 당시 교회를 위해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의미와 그렇지 않고 일반적으로도 사도 시대 이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성령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나타났다가 계시의 종결과 함께 사라진 것도 있고, 또 그것을 위해 주셨지만 현재에도 계속 교회를 위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있다. 특별히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주신 것으로 현재도 그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계속 은사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너무 극단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종결된 것으로 본 다든지 혹은 완전히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같이 동일한 은사들이 나타난다고 보는 오순절 주의자들의 견해들은 조심하도록 해야 하겠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중지된 것도 있겠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타나는 모든 은사들은 반드시 성경의 검증과 조명을 받도록 해야 하겠다. G.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의 종류와 이해 1. 은사의 종류와 분류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크게 나누어 보면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이다. 이 세 곳에서 은사가 가장 다양하고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곳은 은사의 전체 목록이 아니고 다만 대표적인 은사 목록이다. 특별히 성경 곳곳에는 독특한 은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살펴보면, 구약 성경과,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7장, 13장, 14장, 베드로전서 4장, 디모데전서 3장, 5장, 디도서 1장 등이다. 이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는 의미상의 은사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사가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의 본래 의미와 본질, 목적을 밝히면서 신자 개인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서 얼마만큼 활용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필자는 오늘날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은사들의 종류와 구분을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Rick Yohn은 그의 "바른 은사를 사용하라"에서 남을 돕는 은사로는 봉사, 구제, 자비, 솜씨, 신유의 은사, 남을 지도하는 은사로는 다스림, 믿음의 은사, 말씀의 은사로는 사도, 예언, 복음전파, 목사, 가르침, 권유, 지혜, 지식, 영분별, 음악 은사, 그리고 눈길을 끄는 은사로는 이적, 방언, 방언 통역 은사 등 20가지 은사를 구분하여 주장하였다. 둘째, 제임스 로빈슨은 "동인적인 은사"로,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침, 권위(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을 베품으로 나누었고, "직임의 은사"로 사도의 은사, 선지자, 전도자(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병고침, 서로 도움, 다스림, 각종 방언으로 구분했으며, "나타남의 은사"로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을 분별함, 방언 말함, 각종 방언 통역의 은사로 구분하였다. 셋째, 은사들에 관하여 교파와 학파들간의 주장을 살펴보면, 소위 은사주의 정통파인 오순절 계통은 대부분 기적적이고, 표적적인 사도시대 은사가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동일한 경향의 양상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개혁 신학자들은 대부분 보통 은사와 특수 은사로 분류하는 존 오웬(17세기)의 주장에 따라 기능이 끝난 은사로서 예언, 기적, 믿음, 신유, 방언, 방언 통역, 지식의 말, 지혜의 말, 영분별의 은사 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케네디 킹혼은 능력의 은사들, 봉사의 은사들, 방언의 은사들로 구분했고, 월리암 버드는 교사의 은사들, 초 자연적인 은사들, 특별한 교통의 은사들로 구분했으며, 잭 맥고우먼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능력, 영분별, 황홀경 등의 종류로 구분했다. 메릴 영거는 표적은사, 즉 신유, 이적 행하는 일, 방언, 통역, 예언, 사도 등과 같은 은사들은 교회 안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했으며, 죤 월부어드는 예언, 기적, 신유, 방언, 방언 통역, 영분별 등은 사라져 없어져 버린 은사목록에 포함시켰다. 존 스토트는 사도직과 예언, 기적 등을 제외시켰고, 존 맥아더는 기적, 신유, 방언, 방언 통역을 일시적인 은사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의 고찰을 통해 정리해 보면,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은사들의 숫자에는 제한을 두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즉, 이것은 각 신학자마다 성경에 나타난 은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학자마다 은사의 숫자가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은사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났던 은사의 남용으로 인한 극단주의, 파당, 육욕, 무절제 등을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은사를 사도적인 은사를 제외하고는 은사의 수를 제한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옳은 판단이라 사려된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되며,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며, 또한 성도들의 부족을 보충하고, 교회의 확장과 말씀 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져야만 하겠다. 2.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구약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라는 직접적인 말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역사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성령의 은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되었음을 확인할 수는 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구약에서 창세기의 시작부터 말라기의 마지막까지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성령이 창조의 신으로 역사 하였고, 말라기 3장 1-2절에서는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에 "언약의 사자로" 임하실 것을 언급하였다. 특별히 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하나님의 영은 생명력으로 간주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이 생명력은 그 창조물인 세계와 최고의 창조물인 인간 양쪽 모두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핑크(A. W. Pink)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통하여 역사 해왔던 모든 영적인 일들은 성령의 공로로 인정되어져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리실 기쁨에 비추어 성도들에게 사죄를 허락하신 것과 같이 구약의 백성들이 미래에 돌리 영광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다"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스토커즈(M, B, Stokes)는 성령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보살피시고, 관심을 기울이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동하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도덕적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하신다. 셋째, 성령은 선택된 사람들, 예를 들면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에스겔 등의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특별하게 활동 하셨다. 넷째, 성령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전반적인 이스라엘 백성 속에 계셨다. 즉,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유산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일하셨다. 다섯째, 성령은 아직 이르지는 않았지만, 메시아의 시대에는 지역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여섯째, 구약 성경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비적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분명히 그리고 충분하게 설명되지는 못하지만, 신약에서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스토커즈는 구약 성경에서 성령이 활동하셨다고 언급하면서, 그 당시 은사란 말은 없었지만 신약에서 나타났던 형태들의 은사들은 이미 존재하였다고 주장을 한다. 바클레이는 성령이 역사 하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을 통해 역사 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은사가 주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일상적 생활의 한 복판에 임재해 계시면서 그의 은사로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주신다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신약에서 성령이 역사 하시면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것 같이 구약시대에도 적어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는 은사를 주어 일하게 하셨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젠 좀더 구체적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신(루아흐: )으로부터 나타난 은사들을 분류하면,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솜씨의 은사, 그리고 지혜와 총명의 은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루아흐는 예언의 은사와 직책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 루아흐는 한 인간을 택해서 예언자로 만들고, 또 그에게 메시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힘으로 사물을 관찰하며 판단하였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진단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용감하게 선포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루아흐는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고, 한 별이 그에게서 나올 것을 예언하였다(민 24: 1-9). 그리고 여호와의 루아흐가 사울에게 임할 때는 그가 선지자들 사이에서 예언을 하였다(삼상 10: 10). 한편, 이사야는 여호와의 루아흐가 임함으로 예언자가 되었으며, 그는 위로와 약속의 메시지를 받았다(사 61: 1-2).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언할 수가 없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또 구약 성경에서 루아흐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볼 때 특수하며, 능력을 행하는 기적적인 일들과도 관련이 있다. 삼손이 소유한 위대한 힘의 근원은 머리카락에 있다기보다는 여호와의 루아흐에 있었다(삿 13: 25, 14: 6, 19, 16: 28-30). 루아흐의 나타남은 신비한 것이며 경이적인 것이었다. 특별히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를 이끌고 엘리야를 피신시키는 이야기와 풍성한 기름의 기적적인 사건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왕하 17-18장). 그리고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구하였던 제자 엘리사도 과부의 기름병에 기름을 채우는 기적과, 기도로 죽은 아이를 살리며,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는 사건은 기적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왕하 4-5장). 한편,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는데, 그 때 모든 기구와 장식품들을 아름답고 적절하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만들었던 브사렐과 오흘리압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임하여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었기에 정교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 31: 1-6, 35: 30-35). 즉,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니엘도 루아흐의 역사로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다른 사람보다 지혜와 총명이 십 배나 더한다는 인정을 받았고, 또 이상과 몽조를 깨닫게 되었다(단 4: 8-9, 18, 5: 14).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구약 성경 속에는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은사는 여호와의 신 "루아흐"의 나타남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또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표현되어 그 범위가 다양하며 포괄적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체계적으로 다룬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복음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으리라고 사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입장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인격화 된 성령"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과 그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은사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사가 나타날 것을 예고하였다. 그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 11)"라고 하여 장차 성도들이 받을 성령의 은사와 함께 심판의 불을 예고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을 위해서 공생애 전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 3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성령으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받으신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공생애를 통하여 그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셔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신 것".... 등, 이 모두 것은 다 성령을 통해 나타난 은사들이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것은 능력 행함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과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를 팔 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예고의 말씀 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언의 은사가 행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허락하시니 그들이 그 사역을 감당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마 16: 21-27, 17: 22-23, 20: 17-34).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 17-1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곧 그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런 은사가 나타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서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체계적인 목록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이 오순절 이후와 거의 다름없이 나타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즉, 이것은 은사의 주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자로서 직접 행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시고, 또 그에게 능력을 주어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타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사도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이 사역을 이어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동일한 은사들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복음서에는 은사란 말과 구체적인 은사들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4.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세례(부어주심)를 묘사하기 위하여 "선물"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만(행 2: 38, 8: 20, 10: 45, 11: 17), 그 외의 단어들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사도행전에는 은사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어떤 행위들을 은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바울 서신들에서 은사로 규정된 몇 가지 내용들을 역으로 적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모습 그대로 실렸으며, 체계화된 은사 목록은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 본문에 나타난 대표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보면 성령이 구약 성경에서와는 달리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행전 2: 14-36)의 메시지와 같이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베드로가 요엘서 예언의 어구들을 끌어온 것은 단지 선물의 보편성을 논증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약속된 선물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예언의 영의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예언의 영의 성격에 대해서 이한수 교수는 "첫째,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예언의 영을 계시적 환상과 꿈의 원천으로 간주했는데, 이 요엘 인용문 안에서 꿈과 환상이 언급되는 것은 예언의 영이 회복되길 고대했던 유대인들의 대망과도 같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제자들을 인도하신다는 점에서 예언의 영은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 예언의 영은 계시적인 말씀이나 교훈 또는 인도하심을 제공하시는 영이시다(1: 2, 4: 25, 8: 29 등). 셋째, 예언의 영은 은사적인 지혜나 계시적인 분별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다(5: 3, 5, 10, 9: 31, 16: 18 등). 넷째, 예언의 영은 돌발적인 은사적 찬양을 터뜨리게 하시는 분이시며, 오순절 날 방언 현상을 통해서 이는 확인할 수 있다(1: 4, 10: 46, 19: 6). 마지막으로 예언의 영은 은사적인 설교나 증거, 또는 은사적인 가르침을 감동시키고 영감을 불어넣는 분이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누가는 요엘이 내다 본 예언의 영의 약속을 기독교화 시켜 신자들에게 주신 약속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요, 성령의 은사가 직접 나타난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교회가 받은 최초의 성령의 은사는 방언으로 나타났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의 은사, 예언, 영 분별, 섬기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 이적의 은사, 신유의 은사, 선교의 은사, 중보 기도의 은사, 순교의 은사, 구제의 은사, 전도와 가르치는 은사 등등으로 나타났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5장 32절에서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은사로 주셨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가 그들의 전체 삶에 대해 주어진다는 것을 체험했고, 또 그들의 삶의 전부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새롭게 주셨기에 그들은 언제나 기도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방언, 예언, 치병 등과 같은 비상적인 은사들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비다이다(행 9: 36). 그녀는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 누가는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을 위하여 속옷과 겉옷을 지어주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다비다의 은사는 그녀가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비로소 주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다비다가 회심 전에 이미 이러한 자연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회심 후에 본격적인 활용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이것은 재능이 은사로 활용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또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물건을 나누어 쓴 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 2: 43, 4: 32). 이들이 예수를 믿은 후에 갑자기 횡재를 하여 나누어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히 초대 교회 성도들은 회심 전에 이미 소유물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회심 후에 소유물의 목적을 바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인 재능을 주셨지만, 구원 후에 그것이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은사를 열심히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들을 잘 발견하여 효과 있게 은사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이것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이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자주 일상적인 평범한 삶을 통한 방법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상적인 은사만을 수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은사도 수여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로마서 12장 3절-8절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 한 단락을 이루며, 12장에서 16장까지 또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각 단락의 마지막이 동일한 송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가 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 36, 16: 27)." 여기서 바울은 로마서의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 2)"고 하였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한 뜻"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은사에 관하여 언급을 하였다(6). 이것은 곧 바울 사도가 의도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이 분별해야 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며 온전한 뜻 가운데 있는 한 가지 사항인 것을 보여주고 한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문 속에서 은사의 다양한 종류(12: 6-8)와 은사의 기초(12: 6),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12: 4-5)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은사의 기초,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는 이미 고찰해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은사의 종류과 그 은사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a. 은사의 종류(12: 6-8) 사도 바울은 은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6절). 그는 은사의 종류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은사의 종류로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나눠줌, 관리, 불쌍히 여김 등에 대해서 열거해 놓았다. 그리고는 이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실행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함께 제시해 주고 있다. 예언은 믿음의 유례를 따라서 해야 하고, 섬김은 봉사로 실행해야 한다. 가르침은 교훈으로 나타나야 하며, 권면은 위로를 가져야 한다. 나눠줌은 순결함으로 되어져야 하며, 관리는 부지런함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불쌍히 여김은 즐거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곱 가지 은사 중 예언만이 어는 정도 기적적인 성격을 가지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얼마든지 일상 생활에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열광주의(Enthusiamus)와는 비교가 된다. 이제 이 은사들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언(6) 예언의 본질에 대하여는 나중에 고린도전서를 해설하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예언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진술하고자 한다. 바울은 예언에 대하여 제한을 두고 있다. "믿음에 일치하게." 바울은 예언을 한다는 것이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예언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에 거슬리는 예언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믿음에의 일치성은 예언에 큰 제한이 된다. 만일에 믿음에 적당하지 않거나, 믿음을 깨뜨리는 예언을 한다면, 그것은 옳은 예언이 아니다. 예언의 내용이 기독교 신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거짓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믿음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도리는 어떠한 예언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믿음에 일치하지 않는 예언은 오히려 믿음에 적대적이다. 따라서 현금(現今)에 예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제한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2) 섬김(7) 바울은 은사들 가운데 섬김의 은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섬김의 은사는 "섬김으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섬김이란 목회를 가리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시중(식사 때 시중을 드는 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눅 10: 40). 그리고 이 은사는 다른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에 응하는 사랑의 실천을 말하며,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이의 필요에 응하기 위해 개개인의 필요를 찾아내며, 불편을 주의 깊게 살피는 능력이 있다. (3) 가르치는 자(7) 은사 가운데 가르치는 은사는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만일에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나오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것이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보다면, 가르치는 자의 은사는 모든 은사의 목록에 나오게 된다(고전 12: 28, 엡 4: 11). 사실 가르침은 예수께로부터 시작하여(마 4: 23, 9: 35), 예수의 처음 제자들과(행 5: 42), 이후 교회에(행 13: 1,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 그리고 사도의 제자들에게(딤후 4: 13-14, 디모데)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말하자면 가르침은 예수로부터 후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명이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은사는 이처럼 모든 은사의 목록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침이란 말은 행위보다는 내용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가르치는 자는 바른 내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는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성경 말씀과 교훈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는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4) 권면하는 자(8) 이 권면의 은사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나온다. 권면이란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본래 "곁으로 부르다, 초정하다(행 28: 20)"인데, 여기에서 파생하여 위로와 권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의 의미는 힘을 북돋우어 주는 격려이다. 성령은 힘을 북돋어 주는 분이시기 때문에 "보혜사( - )"라고 불리 운다(요 14: 16, 15: 26, 16: 7). 보혜사 성령은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여 붙들어 주고, 잘못된 자들을 권면하여 바로 세운다. 바로 이 성령께서 성도들에게도 권면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위로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모범적인 예는 레위인 요셉인데, 그는 사도들에 의하여 바나바라고 불리웠다. 이것은 "위로 또는 권면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행 4: 36). 바나바는 실제적으로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을 견고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도록 권면하였다(행11: 23). 위로와 권면은 말로도 글로도 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공식적으로도 될 수 있다. 아무튼 권면의 은사는 연약한 마음을 싸매고, 잘못된 마음을 고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은사이다. 특별히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5) 나눠주는 자(구제의 은사)(8) 바울은 나눠주는 것을 은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제 이상의 의미를 같고 있다. 사실 소유가 많다고 해서 잘 나누어주는 것도 결코 아니며, 또한 소유가 적다고 해서 못 나누어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고후 8: 1-2). 나누어주는 것은 은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면 실행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눠주는 일을 하기 위하여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한편으로 나눠주는 마음에 관한 한, "선전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나눠 줄 물건에 관한 한, 그것이 제 손으로 수고한 소득과 선한 일의 소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엡 4: 28). 한편, 여기서 이 주는 자들( : 메타디둔타스)이라는 단어는 자신들의 소유를 주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재물 분배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6) 지도하는 자(8) 이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무슨 일에 열심히 몰두하는 것을 나타내지만(딛 3: 8, 14), 가정적인 면에서는 아버지로서 "집"과 "자녀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며(딤전 3: 4, 12), 교회적인 면에서는 교회지도자(예를 들면 장로)로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5: 12, 딤전 5: 17).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들로부터 지도하는 은사는 일반적인 사무에서 일을 잘 이끌어 가고, 가정이나 교회 같은 사회에서도 잘 지도하는 것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지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열심으로(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7) 불쌍히 여기는 자(8) 바울은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은사라고 칭했다.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은사이다. 눈물이 많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은사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뒤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눈물의 은사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연약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많은 눈물로 글을 썼다(고후 2: 4).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은사이다. 하지만 이런 불쌍히 여김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이것은 결국 불쌍한 상황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불쌍히 여김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불쌍히 여김은 마땅히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상 이 일곱 가지 은사들은 영적인 은사(예언), 교훈적 은사(가르침), 물질적 은사(섬김, 나눠눔), 심적인 은사(권면, 불쌍히 여김), 지도적 은사(지도) 등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은사의 폭은 대단히 넓다. 그리고 은사는 단순히 신비하고 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은사는 영적인 체험과 더불어 교훈의 전달과도 관계가 되며, 물질적이고 심적인 도움과도 관계되며, 또 다스림과도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6. 에베소서 4장 11절-12절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됨"을 "그리스도의 선물"(엡 4: 7)과 관련하여 상론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의 시여자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도들에게 선물을 시여하는 목적은 바로 그의 교회의 하나됨과 부흥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특별히 이 선물 가운데는 교회의 직분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라고 이 직분과 은사를 주셨다. 그러므로 본 에베소서를 통해서는 이 직분과 관계된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직임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 목자들과 교사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11). a. 사도들과 선지자들 먼저 사도란 "아포스톨로스( )"란 말로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사도들에 관하여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로 이것은 좁은 의미로는 열두 사도만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시고 동행한 자들이다. 따라서 사도들이 사도를 보충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승천 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행 1: 21). 특별히 이들은 예수 부활을 증거 하였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을 열두 사도에 버금가는 예수의 사도라고 주장하였다(고전 9: 1). 바울은 특히 자신이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강조했다. 셋째로 그 밖의 사도들이 있다(고전 9: 5, 15: 5-8). 이들은 열두 사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열두 사도 이외의 다른 사도 그룹이다. 이들 가운데는 요한의 세례를 알고,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한 아볼로(행 18: 25, 고전 4: 9), 예루살렘 교회 출신 바나바(행 14: 4, 14), 예루살렘 출신 실라(살전 2: 7)가 있다. 넷째로 넓은 의미로는 디도(고후 8: 23), 에바브로디도(빌 2: 25)와 같이 보냄을 받은 사자들도 있다. 이런 사도들에 대하여 존 칼빈은 "하나님이 오늘날의 시대에도 역사하시는 것과 같이 특별한 경우 시대적 필요성이 요구될 때 하나님은 사도를 불러 세우신다"고 하였다. 선지자란 헬라어로 "프로페테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언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란 직임명이요, 예언은 그의 기능으로 이해되어 진다. 선지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문화되기 전에 구약 시대에 많았었다. 한편, 조병수 교수는 이 선지자들에 대하여 설명하길, "신약 성경은 선지자에 관하여, 첫째로 교회의 공직으로 세움 받은 선지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초대 교회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유다와 실라가 여기에 속하였고(행 15: 32),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에 속하였다(행 13: 1). 선지자들은 지도자라고도 불리웠고(행 15: 22), 교사라고도 불리웠다(행 13: 1).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선지자들은 다분히 속사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지자들이 맡은 역할은 미래를 알려주기 위하여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끌어가기 위하여 교육하며, 전도하는 것이었다.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로서 형제를 권면하고, 굳게하며, 위로하였다(행 15: 32). 바울과 바나바는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행을 하였다. 둘째로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 흉년을 예언하였고(행 11: 27-30), 바울이 결박당할 것을 예언하였다(행 21: 10).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미래의 예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할지 작정하고(행 11: 29), 준비할 수 있다(행 21: 13). 누가는 빌립의 딸들도 예언을 하였다고 말했다(행 21: 9). 바울도 일반적인 선지자가 있음을 표명했다(고전 14: 37)."고 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이들은 터라고 묘사하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엡 2: 20)." 바울은 이들을 터라고 부름으로써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선물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터는 한번 놓이면 다시 놓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있을 수가 없다. 이같은 사실은 사도와 선지자를 언급하는 바로 그 다음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비밀이 계시된 자들이라고 불렀다(엡 3: 5). 그리스도의 비밀은 영원부터 감취었던 것이며(엡 3: 9),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엡 3: 5). 따라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전의 어떤 시대의 사람들과도 구분될 뿐만 아니라,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 사도와 선지자는 더 이상 앞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보냄을 받는 자는 있을 수 있으나, 선지자는 있을 수가 없다. b. 전도자들의 및 목자들과 교사들 복음 전도자(Evangelist)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이런 전도자들은 주로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이들은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역지에 관한 한 어느 정도는 이동적일 수 있었다. 목자들과 교사들은 결합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한 정관사 사용!). 그리고 이들은 내향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이미 복음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한편으로는 목자로서 보호하는 기능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사로서 가르치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활동지에 관한 한 상당히 고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목사는 교회 직분과 관련되는데 일반적으로 감독과 장로의 직분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목사는 경계하고, 보호하고, 양육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일을 하였다. 7. 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베드로는 이 단락에서 "만물의 끝이 가까움"을 상기시키고 있다(7). 그리고 가까운 만물의 마지막을 인식하면서 성도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권면을 준다. 즉, 그것은 지혜롭게 생각할 것(7), 깨어 기도할 것(7), 사랑을 가질 것(8), 대접할 것(9), 섬길 것(10-11)이었다. 이 가운데서 처음 둘은 성도의 내향적인 자세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도는 만물의 마지막 시대에 살면서 늘 지혜로워야 하며, 항상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셋은 성도의 외향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행위인 사랑, 대접, 섬김에는 다같이 "서로"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만물이 마지막에 이른 시대에서 서로 끈끈한 사랑을 가져야 하며, 불평 없이 서로 대접해야 한다. 따라서 베드로는 만물이 마지막에 가까이 가는 것을 인식하면서, 바로 여기에 은사와 관련된 섬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본문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에 은사의 활용을 통한 섬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자 하였다. 한편, 베드로는 여기서 바울과 마찬가지로 은사의 대상자가 각 사람임을 밝혀주고 있다. "각 사람이 은사를 받은대로". 그러면서 베드로는 은사가 필요한 것은 섬김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은사는 섬김을 목적으로 한다. 은사의 표현은 섬김이다. 그런데 "각 사람이 은사를 받은 대로"라는 말에 들어있는 또 한가지의 중요한 사실은 은사가 섬김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은사가 다양하듯이 섬김도 다양하다는 것을 베드로는 설명하고 있다. 즉, 이것은 한가지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듯, 한가지 섬김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다양한 은사가 있듯이 다양한 섬김이 있는 것이다. 받은 은사에 따라 섬김의 표현이 결정된다. 그래서 정확하게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정확히 아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런데 이 때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이 받은 은사 이상의 섬김을 함부로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런 방법으로 섬기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결국 욕심이며 과시 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다른 방면에 생긴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그에 맞는 은사를 간구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그 적당한 은사를 주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중한 간구와 응답이 있기 전에 자신의 은사의 적당량을 넘어서는 섬김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둘째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섬기지 않거나, 그 은사에 적당한 섬김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우리의 받은 은사가 제대로 활용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베드로는 하나의 비유를 통하여 은사를 표현하는 좋은 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선한 청지기의 모습이다. 그런데 청지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과의 관계이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청지기의 주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청지기로 세운 것은 "다양한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채로운 은혜를 허락하심으로써 청지기가 되었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않된다. 그리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한다. 선한 청지기는 지혜있게 주인의 뜻을 분별하며, 신실하게 주인의 뜻을 실행하는 자이다. 따라서 은사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이나 실력의 과시가 되어서는 결코 않된다. 오직 은사의 활용은 선한 청지기와 같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해야할 것이다. Ⅳ.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이해 A.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 1. 고린도 시 고대 헬라의 문화는 그 풍부한 도서(島嶼)들과 굴곡 심한 해안선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런 헬라의 지리적 우위성은 고린도에서 더욱 찾을 수 있다. 고린도는 발칸 반도의 남쪽, 그의 큰 섬을 형성하는(지금은 1893년에 완성한 고린도 운하로 인해 문자적으로 섬이 되었지만) 페로포네소스반도의 동북에 위치한다. 서방 3Km 지점에 레케움(Lechaeum)이 고린도만에 면하고, 동방 14Km 지점에 켄크레아(Cenchraea)가 살로니카만에 있어, 고린도는 이 두 항구를 발판으로 한 "두 바다 사이의 고린도(bimaris Corinthus, by Horatius)"라고 불리었다. 이런 지리적 장점은 자연 고린도를 교통, 상업,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어 그의 오래고도 화려한 역사를 엮어 내였다. 고린도는 테에베, 아덴, 스팔타와 더불어 고대 헬라의 도시국가의 한 맹주(盟主)도시였다. 그 전성기는 주전 7세기의 키프셀루스(Cypselus) 왕 시대로서 "전 헬라의 빛, lumen totius Graeciae"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전 146년 고리도는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Lucius Mummius)에 의해 파괴되고, 그 시민은 노예로 팔려 약 10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이것은 고린도의 번영을 질투한 로마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주전 46년, 영웅 시이저(Julius Caesar)는 고린도를 식민도시로 재건하였다. 그후 고린도는 급속히 재건되어 아구스토 황제에 이르러 아가야(Achaia)주의 수도가 되었고,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런 고린도의 주민은 대부분이 노예들로서 자유인은 약 20만명에, 그리고 노예는 4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의 다수는 물론 헬라인들이었으나, 각처에서 모여온 각종 인들도 많았고, 그 중에서 유대인도 상당수에 달했는데, 이것은 고린도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던 것(행 18: 1-17)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바울 당시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로 번창하였다. 고대 헬라의 전통적 철학이 이곳에서 성하였으나(고전 1: 19) 이런 현실생활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고대 철학의 깊이는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외 그들은 올림픽 경기를 본받은 이스므스 경기를 개최했고, 헬라의 여러 도시 중에서 로마의 검투 경기를 수입한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현세적 번창에 비해 고린도의 정신세계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다. 다른 헬라의 도시처럼 그들도 다신교적이었고(행 17: 1-6), 그 도덕 생활은 음탕 및 방종하였다. 고린도의 유명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딧트(Aphrodite)의 신전에는 1천명의 여승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바로 창녀들이었다. 그리하여 "고린도와 같이 됨"은 방탕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렇게 현세적으로 번창하며, 타락한 대 도시에 와서 전도한 바울은 자연히 심적 억압을 받아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다(2: 1-4). 2.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는 물론 사도 바울이다(4: 15). 바울의 고린도 전도의 상황은 사도행전 18장 1절-18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제 2차 전도여행의 절정을 이룩하였을 때며, 그리고 그 때는 주후 50년으로 믿어지고 있다(Emile Bourguet, A. Deissmann등, Godet은 52년 경으로 본다). 바울은 아덴에서 이곳으로 왔고,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두렵고 떨렸다고 했다(2: 3). 아마 앞서 지적한 바 고린도의 번창상과 죄악상에 심적 억압을 받은 것과, 같은 헬라의 대도시인 아덴에서의 철학적 변론을 통한 전도가 실패한 것(행 18: 16-34)에 대한 심적 불안 등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2: 2). 바울은 이런 외적 억압에 반하여 좋은 동역자를 얻었다. 그들은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이며, 로마에서 이주하여 와서, 바울과 동업자이므로 같이 주간에는 장막 깁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전도하는 방법으로 생활을 했다(행 18: 1-4). 그러던 중 마게도니아로 파견되었던 실라와 디모데도 돌아와 합세함으로 바울은 점차 안착하게 되었고, 복음전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행 18: 5). 고린도 전도의 초기에 있어 바울은 그의 관례를 따라 안식일에 유대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풀이하여 유대인을 상대한 전도에 힘썼다(행 17: 2, 18: 4). 그러나 유대인의 격렬한 반대를 만나 이 전도는 부득이 중단하게 되었다. 실로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줄곧 유대인의 핍박에 쫓겨다녔다(행 17: 5, 13, 18: 5). 그리고 여기서 유대인을 만난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 신자의 집에서 모여 1년 반 동안의 정력을 기울인 전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행 18: 7-11). 그것은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서는 긴 기간에 속하며, 그가 처음부터 이런 장기 전도를 계획한 것으로는 보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은 유대인의 반대가 결과한 섭리로 보여진다. 그러나 바울은 그 후도 유대인 전도를 단념한 것은 아니며, 유대인을 상대한 같은 방법은 계속되었으나, 제3차 여행 때 에베소에서 같은 반대로 인해 유명한 두란노 전도가 시작되었고(행 19: 8-10), 그것을 계기로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성격도 완연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유스도의 집에서의 전도는 대 성공하여 수다한 신자를 얻게 되었고, 대 고린도 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런 배경하에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은 자연히 이방인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일부 부유층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서민층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의 질은 그들의 역사적 및 지리적 배경에서 살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그 화려했던 헬라 철학의 흐름을 받아 사변적이었다. 더구나 그 철학도 황금시대는 이미 지났으므로 이제는 건전하게 이념적이기 보다 번잡하게 논리적이었다. 후자의 경우, 그들은 반도국가로서 또한 도시국가들이 할거해온 영향으로 극히 분파적이었다. 실로 대륙 국민의 자긍심, 도서 국민의 배타적 단결심, 그리고 반도 국민의 분파심은 세계를 통한 일반적 심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설립자 바울을 괴롭혔고, 그것이 본서와 같은 서신을 여러 번 저술해야만 했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역시 유대인의 방해로 인해 막을 내리우게 되었다. 그의 전도의 성공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그를 총독 갈리오에게 소송했으나, 총독은 거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게 되었다(행 18: 12-17). 바울이 떠난 후 아볼로가 이곳에서 전도하였고, 그것이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형성된 유래가 되었다(행 18: 24-19: 1). 한편, 고린도 교회가 숫자적으로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분명 은사문제였다. 열광주의적 황홀경, 육체성의 경멸, 성욕과 생욕과 같은 것이 거기에 속하고, 방언, 계시, 병고치는 기적들 모두가 이방 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러므로 풍족한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세속성 때문에 신령한 사람이라고 불리 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은사를 함부로 사용함으로 인해 고린도에는 수사학자나 철학자가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허망하고 자고하여 복을 경멸하기도 하고, 방언에 취한 현상들을 조장하려는 신령파들도 생겼다. 또한 은사를 함부로 사용하는 자들도 많이 생겼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은 본래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포세이돈 신전, 아폴로 신전, 아프로다이트 신전 등에 드나들면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속에서 받은 영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마술적이면서도 하늘에 있는 신들과 영들이 사용하는 신비적이고 독특한 음성을 방언과 혼동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B.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은사의 종류와 의미 1. 은사의 종류 여기에 나오는 은사의 종류는 전체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 등에도 나온다. 그런데 그것들은 이미 앞에서 고찰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수많은 은사들 가운데서 단지 고린도 교회의 형편에 어울리게 은사들의 종류를 열거하고 있다. 이 열거에 대소의 크기가 있는가? 아니면 이 은사들은 모두 균등한 크기인가? 실제로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자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은사의 규모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유익성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바르다. 말하자면 더 유익한 은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은사들의 종류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4절-11절에 나타난 은사로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이적(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 영을 분별하는 은사, 방언, 방언의 통역이다. 그리고 고린전서 12장 28절-30절에 나타난 은사로는 사도, 선지자, 교사, 이적(능력) 행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각종 방언, 방언의 통역이다. 2. 각 은사에 대한 의미 이제 위에서 제시한 각 은사들에 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그 은사들이 어떤 의미과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a. 지혜의 말씀 성경을 읽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지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혜라는 말이 붙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좀더 제한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이 그리스도의 몸의 특정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정한 영의 기능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의 그러한 특정한 의미는 고린도전서 2장 6-13절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이해가 된다. 고린도전서의 서두에서부터 바울은 자신을 아볼로(Apollos)나 게바(Cephas)와 같은 사도들이나 선생들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고전 1: 12, 3: 4-6).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들은 "비밀 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즉 감취었던 지혜"에 대하여 가르쳤다.(고전 2: 7). 특별히 이 구절들은 "비밀"과 "감취었던 것"과의 관련하에서 지혜를 언급함으로써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고 있다. 한편, 박윤선 박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대하여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하는 은혜, 곧 복음에 대한 영적 이해를 표현함이니 이것이 최고의 은사이다. 이는 그 소유자 자신과 남들을 살리는 영적 지혜에 속하는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놀드 비틀링거는 "어렵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혜의 말씀은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적을 물리쳐 준다. 지혜는 특정한 사람이 갖고 있는 것으로서 선천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진 지혜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라고 이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지혜는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은밀한 비밀과 고차원의 본질까지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들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 20장 20-26절을 보면, 예수님을 적대하는 무리들이 예수께로 와서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말씀으로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시고는, 그를 적대하는 무리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또한 요한 복음 8장 1-11절에서도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두 번이나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지혜의 말씀으로 대답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행 4: 8, 5: 29). 스데반도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논쟁했을 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저희가 능히 당할 수 없었다(행 6: 10)"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도 회심한 후에 동일한 지혜의 은사로 말했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 5)"고 하였다. 한편, 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불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논박할 때 특히 요구되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여러 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주장에 대하여 지혜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또한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솔로몬 왕은 한 아이의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구별해야 하는 어려운 난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지혜로써 해결하였다.(왕상 3: 16-28).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희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고 기록되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를 임명했다(행 6: 3).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지혜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정리하면, 이 은사는 가르치는 직분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그리고 이 은사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며,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들이므로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지혜가 계속해서 "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고전12: 8). b.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과 동일한 부류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지혜의 말씀이 직접 계시와 관련이 있는 반면에, 지식의 말씀은 객관적인 계시 자료를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적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권위를 부여해 주는 사도직(다른 측면도 있음)과 지식이 서로 겹쳐져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지식의 말씀과는 분명히 다른 좀더 일반적인 지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이면 누구나 공통으로 소유할 수 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령하는 것은 좀더 일반적인 범주의 지식과 관련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벧후 3: 18). 그런데 이 지식의 말씀은 성령을 "따라" 주어진다. 이것은 "지혜의 말씀" 안에 표현된 하나님의 진리의 올바른 노선으로부터 조금도 탈선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인데, 지식의 말씀은 그 위에 의존했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지식의 말씀이란 복음을 취급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역사적(歷史的) 방면(方面)의 재료들을 다루는데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변증하고 해설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말함에 있어서 일반 지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원리를 어기는 지식의 방법이나 지식의 재료들을 채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지식은 성령의 인도로만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지혜는 사물의 진가를 달관하는 것이고, 지식은 복음의 요의를 파악하는 것이다. 지혜는 내적이고, 근본적이고, 영원적인 것이나, 지식은 외적이고, 구체적이고, 임시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J. O. 센더스는 "지식의 말씀은 영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투시력에서 나온 것이다. 영적 진리란 연구하기보다는 직접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에 관한 지식이다." 라고 하였고, W. 바클레이는 "지식이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지식이다." 라고 하였다. 아놀드 비틀링거는 "지식의 말씀이란 이미 알려진 진리의 말씀을 그것 그대로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5장 - 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지식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본래 구약성경의 계명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구약의 계명들의 근본 목적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새로운 상황에서 확실히 나타내고자 하셨다. 그래서 이전에 이미 알려졌던 말씀이 새로운 상황에 이전의 모습 그대로 다시 전해졌던 것이다. 만약 이전에 전해졌던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했더라면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했을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상의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의 전지를 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많은 연구를 통하여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지식도 아닌 것이다.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우리의 환경 중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알려야만 하는 상황 일 때, 그 부분적인 지식을 성령을 통하여 또는 꿈이나, 환상이나, 묵시나, 혹은 사람을 통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주어지는 지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7장에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공격에서 참패하고, 그 참패원인을 알지 못하였을 때,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기도한 결과 저녁때 하나님으로부터 왜 이스라엘이 적군 앞에서 패했는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적인 연구를 통해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요, 또 어떤 사람들이 비밀히 알려줘서 그 정보를 통해 얻은 지식도 아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 계시된 지식이다. 또 사무엘상 9장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이 잃은 암 나귀를 찾아주는 사건, 열왕기하 6장 8절에서 엘리사에게 임했던 놀라운 "지식의 말씀"에 대한 언급 등은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대한 증거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사람이 소유하여 물 쓰듯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또한 성도들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나타내시는 것이다. c. 믿음의 은사 이 "믿음에 은사"에 대하여 로버트 토마스는 말하길, "믿음의 은사는 신뢰의 좀더 강렬한 나타남(현시(顯示), manifestation)과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특정한 그리스도인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능이다. 이런 비상한 능력은 수많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끔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장애들은 1세기 교회들에게 여러 다양성을 띠면서 부딪쳐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 장애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주실 정도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이 은사가 구원에 이르는 신자의 믿음이 아니라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산을 명하여 여기서 옳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마 17: 20, 21: 21, 고전 13: 2)"는 권능을 행하게 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사로써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믿음이 성도의 마음속에 부은 바 되어 통상적인 인간적 믿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렬하고도 예리한 믿음이 생겨나 큰 기적을 발생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근 박사는 "성령의 은사로서 주시는 믿음은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헌신과 권능이 믿음이 아니라 특수한 이적을 행하는 믿음이다."라고 하였다. 레슬리 비 훌린은 이 믿음에 대해 말하길, "거의 모든 상황이 아주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을지라도 이 믿음은 무의미한 것같이 보이는 것도 바르게 결정하게 하고, 절대적인 반대와 거대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갖는다. 또 이 믿음의 은사는 모든 자연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지는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릭 욘도 "믿음의 은사는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확신을 보여주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사, 즉 "산을 옮길만한 믿음"(마 17: 20, 고전 13: 2)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믿음의 은사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요한복음 11장 41-43절에는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셨고, 가버나움의 백부장(마 8: 10), 가나안 여인(마 15 :28) 등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서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11장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도 다 믿음의 은사로써 여러 가지 일을 행하였다. 결국, 이 믿음의 은사는 어떤 특별한 직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혹은 날마다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믿음의 은사는 교회를 전진해 나가도록 했으며, 교회가 어려울 때는 원수들을 무찌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믿음의 은사를 계속 행사할 필요가 있다. 이 은사를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교회는 더욱 튼튼해져서 확장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은사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이 믿음의 은사를 자기의 "믿음의 분수"(롬 12: 6)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케네디 킹혼(K. C. Kinghorn)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부족을 꾸짖어서는 않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 믿음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 믿음 역시 신자가 항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결단을 따라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성도를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d. 병 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 은사"("병 고치는 은사"의 헬라어를 보면 두 단어가 다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각색 병을 낳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은사들의 다양성을 지칭하고 있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인간의 방법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중개자로 봉사하는 역량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레슬리 비 플린은 그의 저서에서 "신유의 은사는 병자들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했다. 박윤선 박사는 렌스키(Lenski)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길, "사도 시대에 병 고치는 이들이 병을 고친 것은 성령의 지시가 있을 때에만 실행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언제나 병자를 만날 때마다 그 권능을 자의대로 나타낸 것이 아니고, 다만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만 그 권능이 나타나도록 행동하였다."라고 언급했다. 특별히 개혁파 신학에서는 이 사도 시대의 은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지만, 다만 특별섭리 혹은 보통 이적 등과 같은 신유의 권능은 나타난다고 본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신앙이 있는 자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즉시 완쾌되지는 않아도 의외로 병세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도행전에는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의 이해를 돕도록 인도해 주는 예들이 있다. 사도행전 3장 6-8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고, 5장 15-16절에서는 각색 병든 자들이 나음을 얻었고, 8장 7절에서는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고, 9장 17-18절, 33-35절에서는 소경이 눈을 떴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었다. 19장 12절에는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고, 28장 8절에는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운 병자를 고쳤다. 이 모든 경우를 살펴 볼 때에, 병 고치는 은사는 인간 의술의 결과가 아니라, 특별한 신령한 능력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른 신령한 은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은사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가 아니라 일부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은 신체상의 문제점을 놀라운 능력으로 고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고후 12: 8-9). 그러나 그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기에 합당한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한편, 이 은사는 병 고침의 이적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6-8절의 경우에 있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키면서 이 은사를 사용했었다. 이 이적을 통해서 그는 그의 극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청중을 모을 수 있었다(행 3: 12-26). 베드로에게 병 고치는 이적이 없었다면 설교할 청중도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기적적인 병 고침을 통해서 이 중요한 날에 자신이 유대민족에게 했던 말이 하나님께서도 동의하시는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병을 고친 이적은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베드로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병 고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행 2: 22) 오순절 후의 그의 제자들(행 2: 43, 4: 30, 5: 12, 6: 8, 8: 13, 14: 3, 15: 12)을 통해서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아직 확증된 신약 성경이 없었던 시대에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병 고치는 은사를 소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며, 심지어는 우리들의 책임이 된다. 그 이유는 병 고치는 은사의 소유자의 시대는 지나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치유의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는 이것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 능력 행함( ) "능력 행함"에서 "행함( )"이란 뜻의 헬라어가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는 능력이 행해지는 각각의 경우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그리고 능력(miracles)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그 범위가 넓은 반면에(병을 고치는 것은 단지 능력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믿음만큼 일반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믿음의 은사가 능력 그 자체를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병 고치는 것 외의 능력 행함의 본보기를 직접적으로 살펴본다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행 9: 40). 그리고 또 다른 예는 엘루마(Elymas)를 소경이 되게 한 사실이다(행 13: 8-11). 적대자에게 이런 심판을 내리게 함으로써 얻으려고 하는 순수한 결과는 바울이 이적을 일으킨 후에 말하려고 하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데 있었다(행 12: 12). 이것은 이 은사을 통해 하나님의 대변자와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시켜주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A.D. 1세기의 상황과 같이, 교회가 그 자신의 권위 있는 기록된 계시를 갖지 못한 범위 내에서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칼빈은 이 은사에 대해서 "마귀를 대적하며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은 사탄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의 이적을 준엄히 행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일반 법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능력의 중재자로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의 자연 기적(Natural miraele)은 예수가 자연의 주 (Lorling miracle)되심을 나타낸 것이고, 치유의 기적은(healing miracle)은 그리스도가 인생 의 주(Lordship of Life) 되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기적은 계시와는 다른 은혜의 산물일 뿐이다. 한편, 능력 행함을 종류별로 열거해 보면, 병을 지배하는 능력, 악마를 지배하는 능력,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 물질을 지배하는 능력, 사망을 지배하는 능력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기적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권능( )이 9회, 기사( )가 16회, 표적( )이 70회 언급되었는데, 이중에서 표적( )은 60회 이상이 인간이 가시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권능( )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부터 오는 사건을 말하며, 기사( )란 항상 표적과 함께 복수로 쓰여져서 이상하고 놀랄만한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표적( - )은 결과적으로 거룩하게 임명된 사도들의 위치를 명확하게 하였다. 권능의 은사는 자연법칙에 상반되거나 또는 부과적인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성령이 주신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시는 자연법칙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자연법칙에서 분리된 다른 행위를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은사는 이적을 특징짓기 위해 그 사건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거나, 또는 감각 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막 2: 12) 그리고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을 때 제자들은 대단히 놀랐다(막 6: 51). 이와 같은 이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사의한 현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항상 공포감을 일으켰다. 또 이 은사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임명된 주의 종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이는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요 6: 14)"고 했고, 베드로가 다비다를 죽음에서 살렸을 때,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으며(행 9: 42),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소경되게 하는 이적을 행했을 때,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기이하게 여기니라(행 13: 12)"고 했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거짓교사들과 투쟁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임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나타낸 것이라(고후 12: 12)"고 말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도 말하기를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 4)"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적의 은사는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선교지역에서 절실하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방해자들과 사람들의 우둔한 감각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확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영배 교수는 "이적은 계속된다. 그는 중생과 성화와 영화를 통해서 몸 된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신령한 이적은 중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능력 행함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능력 행함은 마귀도 역사 할 수 있다는 것이다(살후 2: 9-11).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이름 없이 행하는 능력(마술, 요가, 최면)들을 조심해야 하겠다. f. 예언의 은사 "예언"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며(Understood God's Revelation), 과거의 것을 아는 것과 미래의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예언"이란 헬라어로 " "란 것으로 이 말은 과거나 미래의 비밀을 알아맞힌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의미로 번역해야 옳을 것 같다. 그래서 William Barclay는 예언의 은사란 예고(foretelling)한다는 뜻이 아니고, 앞장서 말한다(Forth telling)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의미의 예언의 은사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활용되었으며, 그들은 현재의 사건들을 통하여 장래를 예견하면서 현재에는 격려하고, 장래에 대하여는 경고하는 방식으로 예언했다. 바울이나 빌립의 네 딸 그리고 디모데 등은 성령에 의하여 이 은사를 받아 활용한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특히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예언에 대하여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알아"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서 이 "비밀"이란 말은 특별한 영감에 대하여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서 나타나는 예언자 역시 본질적으로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예언의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언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중의 하나였으며,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기적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영감의 확고부동한 기록인 말씀을 전달하는 지성적인 설교로 인정했다. 신약성서에서 언급된 예언의 은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예언까지도 예수를 증거 하려는 것이 올바른 예언의 영임을 확인하고 있다. 초대교회 이후 예언의 은사는 현저하게 쇠퇴하였으며, 다만 과거의 예언자들에 관한 것을 회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진정한 예언을 성경을 통한 그리스도 증거에 집중시킨 성경의 주장과,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진정한 예언의 은사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판단기준에 적용하고 있음은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더불어 신약성경의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 말씀의 예측적인 신탁(행 1: 27-28), 영감 받은 가르침과 판단(롬12:6), 그리고 성경해석 등을 반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사자는 하나님의 뜻의 본성과 실체를 밝혀내는 통찰력을 성령에 의하여 받은 사람이지만, 그들은 교회의 직무와 예배를 성실히 돕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의 기능 중에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예언 말씀은 그 자체가 성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과 결코 동등시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어떠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옳고 그름은 반드시 기록된 성서의 말씀을 따라 분별되고,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진 예언의 근본적인 직책은 미래에 다가올 일을 미리 말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다분히 목회적인 것으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된 생활을 판단하며, 마음에 숨은 일을 고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고, 신앙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자라게 하는데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박윤선 박사는 "예언은 미래의 될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일반에게 알려주는 사역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설교하는 일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g. 영들 분별함 이 "영 분별의 은사( )"는 "성령과 악령의 분별"에 관한 은사로, 이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사탄의 책략을 폭로하고 거짓 가르침을 간파하며, 거짓 교사들을 색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디아크리세이스( )"는 "디아크리노( - )"의 "구별하다", "심판하다", "인식하다", "가려낸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교회는 이단을 구별할 수 있었고, 또 악령의 시험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구약시대에 이 은사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필요했으며, 예수께서도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니이다" 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말하는 귀신의 말을 곧 분별하셨다. 또한 베드로가 장차 올 예수님의 죽음을 제지하려 했을 때, 그것이 사탄적인 근원에서 나온 것임 또한 분별 하셨다(마 16: 2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도 이 영 분별의 은사를 받았는데,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임수를 곧바로 폭로했으며(행 13: 10, 11), 사마리안인 시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이 가득한 것도 분별해 내었다(행 8: 20-23). 바울도 구브로 섬에서 박수 엘루마를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행 13: 10, 11)"라고 꾸짖었으며, 빌립보에서는 점하는 귀신들린 여자가 "이 사람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했을 때, 그 속에 귀신이 들어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행 16: 16-22). 에베소 교회는 자칭 사도라 고백하는 거짓된 자들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창찬 받았지만(계 2: 2),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구별하여 제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책망 받았다(계 2: 14, 20). 야고보는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 및 세상 지혜와는 구별된다고 말했으며(약 3: 14-17),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 1)"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영 분별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보다는 완성되기 전인 사도시대에 더 중요했었다. 한편, 이 은사는 모든 시대에 거짓 사도이면서 천사의 빛을 띠고 변형된 사탄의 간계에서 교회를 보호하기에 오늘날에도 이 은사는 확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h.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의 은사"는 은사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은사이다.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과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나타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용하는 방언이다. 이종성 교수는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언급된 방언에 관하여 지적하길, "첫째로는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서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비하여, 예언은 하나님에 대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므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나,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므로 그들이 알아듣는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예언이 방언보다 교회에 있어서는 더 유용한 것이다. 이것이 곧 바울의 견해인데,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의 중요한 요점은 바로 교회의 덕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14장 13-20절에서 바울은 또 다시 교회의 것을 세우기를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 방언을 하거든 반드시 통역을 세워 성령으로부터 받은 방언의 내용을 밝혀 교인들에게 덕이 되도록 하라고 강조한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거짓 예언자와 거짓 방언하는 자가 있어서 편안치 않았다. 통역을 세워 방언의 내용을 밝히므로 거짓 방언자를 가려낼 수가 있었다. 한편, 바울은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말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했다. 셋째로는 14장 21-25절에서 바울은 또다시 예언과 방언을 비교한다. 방언은 믿지 안는 자들에 대하여 성령의 은사를 알려주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다음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예언에 대해서는 권장을 한다. 왜냐하면 방언을 잘못했다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욕을 얻어먹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무식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는 14장 26-38절에서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을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할 것을 가르친다. 27절의 기록을 보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교회 안에서 방언 때문에 무질서해진 것 같다. 그래서 두세 사람만 하고, 통역을 하게 해서 다른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언도 무질서하게 하지 말고, 순서에 따라 덕스럽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방언도, 예언도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다섯째로, 바울은 결론적으로 39-40절에서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예언하는 것을 방언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지적 사항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이런 방언이 오늘날 존재하는가에 대하여는 세 부류의 학자들이 있다. 첫째는 현대에도 참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국 성공회의 하퍼(Michael C. Harper)와 스토트(John. R. W. stott), 프린스(B. Prince), 크리스 텐슨(Larry Christenson)이다. 둘째는 고전 14장과 기타 성경의 교훈을 지키면서 방언하는 것을 기독교적 체험으로 용인하는 학자로 칼빈주의자 리드 박사(Dr. Stanford, Rieid), 스코틀랜드 개혁협회 총무 호온 목사(Rev. A. Sinclain Harne), 미국 콜롬비아 신학교수 홉스 박사(Dr. P. E. Hughes)이다. 셋째는 현대교회에는 방언이 있을 수 없다는 학자로 칼빈, 미카엘 하퍼(Michael Haper)와 영국학자 J. W. Walker 그리고 침례교 목사 구르(Eric. T. Gurr), 모시만(E. Masiman)등이 있다. 이에 대한 박윤선 박사는 "오늘날 교회시대에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방언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유익을 받는다(고전 14: 14)"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방언 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에 대한 이종성 교수는 "첫째로 성령이 사역하시면 이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해서 성령이 필요 없다고 하면 사신론자와 같은 모순에 빠진다. 성령이 사역하면 언제든지 방언 활동이나 다른 이적도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기독교는 두 가지 힘에 의해서 발전되고 유지되었다. 성령의 사역과 성경이다. 1900년 역사에서 때로는 성령의 사역이 표면에 나타났었고(초대교회), 때로는 성경이 표면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종교개혁). 이 표면에서 활동하는 것 중 어느 한 쪽이 극도로 약화되었을 때는 다른 한 쪽이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전세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 표면에 나타난 것은 성경의 권위가 심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가 회복되면, 성령의 사역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셋째로 방언은 은사인 동시에 일시적인 현상이나, 항구적으로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소유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많은 오순절파 사람들이 방언 은사를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으나 잘못된 생각이다. 넷째로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간구 해서는 않된다. 그것을 신앙 생활의 절대 조건으로 생각해서도 않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을 좌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오늘의 교회는 고린도전서 12장 12-14절에서 가르친 것에 따라야 한다. 즉 방언은 자기의 신앙의 덕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할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질서를 지키며,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견해는 옳은 것이라 사려된다. 그리고 방언의 은사가 경건의 연습으로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요함을 안겨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소용없는 경우도 있다. 즉, 방언의 은사를 실제로 실행해 본 어떤 사람은 후에 가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던 일에 대하여 하등의 영적인 유익을 더해주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은사를 시작하고 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광대하고 깊어졌다고 고백한 경우도 있다. 두 간증 모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들의 경우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부과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만 못하다고 판단하거나, 혹은 자기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나 방언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나 모두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아서도 안되며, 반면에 방언을 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되겠다. i. 방언들 통역함 "방언들 통역함"은 자연스런 방법으로 배우지 않은 언어를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통역의 은사가 은사들의 목록 가운데서 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는 바로 그 은사의 기능이 "각종 방언의 은사"와 한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편, 이 통역의 은사는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로 바꾸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에서는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이 은사가 사용된 특별한 예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은사를 사용할 것을 강하게 역설하였다(5, 13-19, 27-28절). 그리고 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방언의 은사의 사용이 어떤 의미에서든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통역의 은사가 바로 뒤를 따라 나타나는 경우에만 한해서 였다. 이것은 방언 하나만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를 유익하게 하거나 덕을 세우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방언은 이 통역의 은사와 같은 수단을 통해서 메시지가 그들의 지성에 알려질 때에만 비로소 덕을 세우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통역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두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비밀들이 그것을 듣는 자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13: 2, 14: 2, 6, 30). 한편, 이 두 은사의 차이점은 "통역의 은사"는 먼저 행해진 방언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에, "예언"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내적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은 그 해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방언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한다고 해서 방언을 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그때마다 성령께서 주신 이 은사를 통해서 통역을 해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통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효과적으로 회중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수적인 은사는 방언이 아니라 통역이라고 본다. j. 사도 "사도( )"란 역사의 한 특정한 단계에 살았던 일단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직분을 획득하기 위해서 "당연한 필요 조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와 인격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가 부활하신 후 그를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행 1: 21, 22, 고전 9: 1-2). 더욱이 사도는 주 예수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아야 함을 필수 조건으로 가져야 한다(눅 6: 13, 롬 1: 1). 따라서 한 사람이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게 되었다면 역시 그는 사도라는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도들의 정확한 수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만약 교회가 사도들의 명확한 수를 알고 있었다면 당시 교회에서 자신들을 속일 수 있었던 "거짓 사도"들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후 11: 13, 계 2: 2). 물론 특별한 의미에서 사도라 할 수 있는 열 둘은 있었다(눅 6: 14-16, 예수님 승천 이후에 가롯 유다 대신 맛디아가 보충됨, 행 1: 26). 그 이외의 사도들의 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에베소서에서 설명했으므로 그곳을 참고하면 된다. 한편, 이 사도적 은사는 사도들이 사라질 때 없어진 하나의 직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목록에서 사도적 은사를 제외시키고 있다. 존 스토트 박사는 사도적 은사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은사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이 사도적 은사는 없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이 오늘날의 시대에도 역사하시는 것과 같이 특별한 경우 시대적 필요성이 요구될 때 하나님은 사도를 불러 세우신다고 했다. 그럼, 과연 사도의 은사는 사라졌는가 아니면 오늘날도 계속 나타나는 은사인가? 이 문제는 그들의 직무와 관련하여 살펴본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설립과 초기 성장에 있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도들에게 속한 임무였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친히 보냄을 받은 대표로서 큰 권능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권위로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 그들이 주님의 대변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전선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특별한 도구였으며, 그리고 그들이 특정한 한 지역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그 은사가 임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사도직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많은 신령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표적의 은사인 병 고치는 은사(행 5: 12-16), 이적 행함(행 13: 8-11), 예언(행 27: 25), 그리고 방언(행 2: 4, 고전 14: 18) 등이 그들에게 사도라는 징표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고후 12: 12). 특별히 그들은 신약 성경을 구성하게 될 계시의 매개체였기 때문에 지혜와 지식의 은사, 또한 예언의 은사도 소유하고 있었다(계1: 1-3). 그러나 사도들이 비록 이렇게 풍부한 은사를 갖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신약성경을 썼을 때처럼, 언제나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오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갈 2: 11-14). 결국,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사역은 끝난 것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사도적 은사는 아직도 그 기능이 남아있다고 본다. 즉, 공식적으로 사도의 직분은 사도들과 함께 끝났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늘날에도 선교의 은사로서 그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골딘게이(Goldingay)는 '사도'라는 단어를 가리켜서 "이것은 어원적으로 '선교사에 해당되는 말'로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지역사회가 구성되면 전도하기 위한 선교사로서의 개척자들이다."고 하였다. 또한 존 칼빈도 사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도들을 임명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특정 지역이나, 교구를 할당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모든 나라와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들 속에 들어가 주님을 위한 대사로서 일하기를 원하셨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정리하면, 사도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사라졌지만 그들의 직무와 사역을 통해서 본다면 아직도 그 역할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선교사들은 사도적인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최선을 다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k. 선지자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언급한 자들이 28절의 목록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10절에 언급된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와 동일한 은사로 본다. 왜냐하면 이 "선지자"란 단어는 "프로페테스( )"란 것인데 이것은 동사 "프로페테노( : 예언하다)"에서 온 것으로 고린도전서 14장 29-32절에서는 "예언하는 자"로 번역되었고, 마태복음 7장 22절, 26장 68절에서는 "선지자 노릇"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10절에서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고, 28절에서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본래 구약시대에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미래를 예언할 뿐 아니라 오히려 미래와 더불어 과거와 현재에 관련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공포하는 사역을 했다. 이들 선지자는 경고하고, 훈계하며, 약속하고, 견책하였다. 그리고 또한 신약시대에도 사도들과 함께 선지자들(남성 뿐 아니라 여성도 됨, 행 21: 9-10)은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는 수용자였으며, 그 계시를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고전 14: 30, 엡 3: 5). 한편, 이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선지자들이 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접촉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가 다 사도는 아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2장 19-22절에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연합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선지자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선지자들은 교회라는 건물의 기초를 형성하거나 혹은 그 기초를 놓는데 참여함으로써 사도들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여기서 기초란 앞으로 세워질 건축물의 가장 밑 부분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령한 건축물인 교회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 은사도 사도의 은사와 같이 초기 단계에서는 필요했으나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사 초기 시대를 책임진 사람들로 보고 있다. 칼빈은 이 곳에 나타난 선지자에 대해서 말하길, "선지자들이란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이하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성경 말씀을 제시하는 유일한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지자들에 관계되는 것에 대해서는 "예언과 경고, 약속, 그리고 성경의 모든 교훈을 당시의 교회의 필요성에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잘 알리는데 세련되고 경험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l. 교사 "교사"란 가르침의 은사이다. 이 "가르침의 은사"에 대하여 마이클 그리피스는 "이것은 예언과 권위와 중복되나 기본적인 뜻은 교회의 지덕(知德)을 닦고 그 몸을 세우는 것이다. 가르침의 결과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이 교사에 대해서 말하길, "교사의 직무(officium doctoris)는 제 1급에 속하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종교의 순수성이 교회에서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건전한 교리(sana dogmata)를 지키고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마음속에는 항상 가르치는 것이 먼저 떠올랐었다(고전 14: 19). 그는 믿음의 진리를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것이 받으실 만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에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선결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그렇기에 바울과 다른 사도들, 그리고 선지자들은 항상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던 것이다(행 18: 11, 19: 9-10, 골 1: 28, 딤전 2: 7, 딤후 1: 11).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칠 책임이 전적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과는 별도로 역시 일단의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특별 계시를 이해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자연적인 수준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성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진리들이 그 내용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고전 2: 14-15). 한편, 교사의 사역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과는 달리 한 지방에 더욱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사실상 지교회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보통 요구되는 조건은 장로나 감독으로서 이 은사를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엡 4: 11, 딤전 3: 2). 그러나 어떤 장로들은 이 은사를 가지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딤전 5: 17). 디모데가 맡은 책임의 대부분은 가르치는 일이었다(딤전 4: 11, 6: 2). 특별히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 자신까지도 친히 전념하신 일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가르치는 일에 강조점을 두어야 하겠다. 만약 교회가 가르치는 사역을 잘 한다면 그 교회는 든든한 교회요,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교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은사를 초기 교회 역사의 계시적 시대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일은 교회가 세워진 초기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취하시는 그 순간까지 그 기능을 계속해서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m. 능력 이것은 10절에 나타난 은사와 동일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특별히 이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항상 이 능력을 드러냈다(고전 2: 4, 4: 20, 고후 6: 7, 살전 1: 5).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이 능력이 듣는 자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하나님께서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계시다는 인상을 주도록 하였다. 한편, "표적과 기사와 ...... 능력" 이라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는 성경의 표현에서도 이와 동일한 단어가 능력으로 번역되고 있다(히 2: 4, 행 2: 22, 8: 13, 롬 15: 19, 살후 2:9). n. 병 고치는 은사 이 은사는 9절에 나타나고 있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o. 서로 돕는 것( ) 이 "서로 돕는 것"은 "다른 사람 대신에 자신이 짐을 진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돕고", 행 20: 35, "도우시나니" 롬 8: 26), 이 용어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키고 있다. 로마서 12장 7절에서는 이 은사를 "직임" 혹은 "봉사"라고 부르기도 한다(한글판 개역 성경에서는 "섬김"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일반적인 의미로 "직임" 혹은 "봉사"(고전 12:5)는 모든 신령한 은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좀더 특정한 의미로서 그 말은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베풀어주는 여러 종류의 물질적 도움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6장 1-3절에 나타나는 궁핍함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먹을 양식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사도행전 6장 1-3절에 나타난 긴박한 사태의 특징이다. 이러한 봉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궁핍함은 과부, 고아, 병자, 나그네, 여행자 그리고 일시적이거나 물질적인 도움을 원하는 자들의 궁핍함이었다. 특별히 말로 하는 은사들이 인간의 내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이 서로 돕는 은사는 인간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는 은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서로 돕는 것"은 디모데전서 3장 8-13절의 "집사들(종들)"이 갖추어야 할 특정한 선행 조건 중에 하나였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은사를 소유한 자들은 당시 바울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었다(예를 들면, 에바브로디도, 빌 2: 25-30, 오네시보로, 딤후 1: 16-18, 오네시모, 몬 10-13절). 정리하면, 이 "서로돕는 것"은 신자가 남을 대신하여 짐을 져 준다는 것으로 신자들은 물질적 구제를 통해서 그 받은 은사를 참되이 실행할 수 있었다. p. 다스리는 것( ) 이 은사는 "다스리는 것" 혹은 "통치"(government)라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2장 8절에서 "다스리는 자"로 표현된 은사와 동일한 것으로, 이 특별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 외적인 조직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행정상의 지도권을 포함한다. 28절의 "다스리는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배를 조정하는데 필요한 솜씨를 표현하는 말이다("선장" 행 27: 11, "선장" 계 18: 17). 즉,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도"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 헬라어는 영어의 "인공 두뇌학"(cybernetics)이라는 말의 어원인데, 인공 두뇌학이란 두뇌의 특성과 두뇌가 몸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의 어떤 이들은 신령하게 다스릴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지교회의 기능적 자원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배열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특별히 이들은 지도자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즉, 이 다스리는 은사는 특별히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요한 은사였다(딤전 5: 17에서 "다스린다"<rule>는 말은 롬 12: 8의 "다스린다"<lead>와 동일한 단어이다. 또한 살전 5: 12에서 "다스린다"<have charge over>는 말은 딤전 5: 17의 "다스린다"<rule>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에 "장로회"라는 것은 백성들을 바로 살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종류의 실제적인 지혜가 있어야만 하겠다(히 13: 7, 17, 24). 한편, 다른 모든 은사들이 그렇듯이 이 능력도 초자역적인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q. 각종 방언 이 "각종 방언"이라는 표현은 10절의 명칭과 동일한 것으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r. 방언 통역 이 은사도 앞에서 제시한 "방언들 통역함"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상 18개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한 지체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나타남의 특징이 바로 다양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은사들은 주님 안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이 모든 은사들은 초대교회 당시의 계시(성경)를 확증하고 종결하는데,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하고, 보호하며,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함을 그 목적과 성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은사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 성령의 은사들을 자기 욕구대로 남용하고 오용하였던 것이다. Ⅴ. 성령의 은사의 활용 방안 A. 성령의 은사의 유익과 문제점 1. 성령의 은사의 유익 한 몸에 많은 지체들이 있고 그 지체들이 각기 기능에 따라 활발하게 일할 때 그 몸은 온전케 되며 보람있는 일을 하게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많은 직임과 그 기능의 은사가 상호 협력하여 봉사할 때 더욱 성장하게 된다. 에베소서 4장 11-13절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나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여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교회의 연합과 성장을 강조하였다. 한편, 은사는 영·육간에 누리게 되는 최고 최대의 축복이며, 선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를 성도들이 얻게 된다면 그들은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은사는 참으로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고, 복되게 살 수 있게 하는 원인이며, 원동력이 되기에 바르게만 활용된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젠 이 지면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과 축복을 주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 상호간에 친밀한 교제를 갖도록 인도한다. 고전 12장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란 말씀과, 고전 12장 25절에서는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성령의 은사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고,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도들이 받게 되는 은사와 사명과 직임은 동일치 않고, 서로 다른 것이지만, 은사를 받으므로 서로 상호 보완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몸이 건강한 지체들이 서로 친밀하고 활발하게 일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면 성도의 교제도 더욱 친밀하고 활발하게 된다. 물질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그러하였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요 각 부분이다"라고 하여 바울은 교회 구조가 단일성과 다양성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역설했다. 바울은 이것을 인간의 몸의 구조로 비유했다. 교회를 몸에 비유한 것은 바울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몸이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하나인 것같이 교회도 하나이며, 또 하나로 된 몸은 지체로 나타나며, 한 지체는 다른 지체를 무시하지 못하며, 전체에 독립한 자가 아니며, 연약해 보이는 지체들이 더욱 보호를 받고, 요긴히 여김이 되나니, 이것은 각 지체들의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각 지체들은 동고동락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몸이요, 성도는 지체이므로 서로 돌아보아 친밀한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바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둘째, 성령의 은사는 성도가 능력 있게 교회 봉사를 하게 한다. 성령의 사역으로 직임이나 은사를 받으면 열심히 일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서로 돕는 은사나 가르치는 은사가 나타나면 교인들은 새 힘을 얻고, 확신 가운데서 더욱 능력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부흥이 바로 그런데서 시작된 것이다. 은사를 받은 자는 놀 수 없다. 은사는 주님의 명령인고로 쉴새 없이 일한다. 여기서 말하는 봉사란 복음과 주님을 위한 일을 기쁘게, 그리고 능력 있게 함을 말한다. 그리고 은사를 주심으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함은 은사를 교회와 지체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큰 은사일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몸 된 주님의 교회와 그 지체를 위한 섬김의 은사로 활용되어져야 한다. 은사는 쓰면 쓸수록 빛나고, 커지고, 강해지고, 새로워지는 동시에 더 아름답고 성숙한 은사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셋째,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도록 이끈다. 성령은 은사를 받은 성도들에게 불신앙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견고한 위치를 유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은사는 특히 초신자와 불신자로 하여금 믿음으로 오게 하도록 역사 하는 동시에, 견고한 믿음을 갖도록 인도한다. 지극히 작은 선물이라도 높은 사람에게 받으면 더욱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하물며 성령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은 것으로 깨닫기 때문에 감사하게 된다. 또한 은사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령의 함께 하심을 깨달을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돌릴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넷째,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교회 전체에 도움을 준다. 은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직무를 마치 편리한 도구를 가지고 일하듯이 이용할 수 있다. 부정적인 자세로 인하여 수렁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비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인간의 몸이 그 기능을 잘 발휘했을 때, 그리고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히고, 연락하고, 상합 할 때, 그 온 몸이 조화롭게 성장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하심은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말씀한 것이다. 다섯째, 성령의 은사는 신앙을 일깨우고 활동케 한다.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분발하여 열심히 활동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사도행전 2장 41-42절에 증언하기를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 교제하여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라고 말씀했다. 이는 성령의 부어 주심을 통해 은사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큰 일을 교회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고, 또한 더불어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는 능력 있는 증거를 할 수 있게 한다. 사도행전 4장 4절에는 베드로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아 성전 미문 곁에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면서 능력 있는 증거를 하자, 그 결과 많은 무리가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 12-16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속임수에 대한 능력 있는 증거는 결과적으로 남녀의 큰 무리를 교회로 인도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도행전 6장 60절에서는 스데반의 순교의 은사를 통해서 복음은 더 넓게 확장되어 갔다. 이와 같이 어떤 은사들은 복음 전파에 활력소가 되며, 복음 전파를 유익하게 해준다. 이상 지금까지 살펴본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유익한 점들은 각각의 은사들과 관련하여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은사의 주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문제점 한 성령의 은사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여야 하는 성령의 은사는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이므로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지만, 그러나 부패한 성품을 지닌 성도가 그것을 잘못 사용할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그 직분과 기능의 오용으로 말미암아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위험성이다.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오는 세 가지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 은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비상적이면서 일상적인 것인데, 특별히 이것을 특별하고, 기적적이고, 감각적인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오용될 위험이 있고, ㉡ 은사의 종류는 여러 가지 다양한데, 오직 하나의 특정한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오용될 위험이 있으며, ㉢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한 은사인데, 어떤 특별 계층이나 신분에 속해 있는 소수자에게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한다. 둘째로는 성령의 은사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오는 위험성으로, 브룬너(F. F. Bruner)는 그의 "성령신학"이란 저서에서, "㉠ 은사 받은 자들이 그 이상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애쓸 때 문제가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축복의 근원인데, '그리스도도 좋지만, 그리스도 외에 성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위험성이 있다. ㉡ 은사 받은 자들이 더 큰 능력을 얻으려고 애쓸 때, 교만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게 되어 위험하다. ㉢ 은사 받은 자들이 더 큰 증거를 요청함으로써 문제가 된다. 그 명백한 증거로써 방언, 신유, 기적 등을 모든 은사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취급하고, 이런 것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위험이 따른다."고 하였다. 셋째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용 때문에 오는 위험성으로서, 브리즈(D. Brige)와 피퍼(D. Phyper)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위치"란 저서를 통해서 은사들이 잘못 남용됨으로써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로써, "㉠ 낙심과 질투로 은사들이 교회 안에서 행해질 때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은 은사를 나타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낙심하게 되고, 질투하게 되며, 원망하게 된다. ㉡ 이기심과 교만으로 교회 안에서 은사를 사용하는 자들이 받은 은사에 대하여 이기심과 교만을 갖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며, 남을 과소 평가함으로 나타나는 위험성이 있다. ㉢ 무질서와 혼란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은 질서대로 하고, 방언은 특별히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혼란을 가져온다고 경고했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박아론 교수도 교회에서 은사가 남용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 말씀의 지식보다 초자연적인 체험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령의 은사로 교회가 성장할 때 지식보다는 신유, 방언, 축사 등의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므로 영적 은사를 지닌 개 교회는 은사 때문에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기 쉬운 말씀 사역과 신앙 지식도 균형 있고, 조화 있게 이루어야 성경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중요하되 "은사가 빚어진 광(狂)"이 되어서는 안된다. ㉡ 성령의 은사 신학과 은사교육의 부족 현상이 있다. 성령의 은사 운동의 급성장의 문제점 중에 또 하나는 양적 팽창과 병행하여 신학 및 교육의 정립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그러므로 목회현장과 신학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했다. 이는 비단 오순절 계통의 문제만은 아니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성령의 은사론의 신학적 정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 성령과 인격적인 교육의 무시 현상이 있다. 성령의 은사 운동은 은사의 체험과 교회 성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를 개인의 전유물처럼 생각하여 자기의 의지에 따라 성령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권대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동참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제 성령을 "만병 통치약, 혹은 문제 해결사"로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이기주의적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데 기여하는 신앙이 되도록 해야할 것이다. ㉣ 영적 은사에 대한 무지(無知)가 신앙에 혼돈(混沌)을 일으켰다. 성도가 지닌 영적 은사는 개개인이 이 은사를 통하여 더 좋은 교인으로 발전시키고, 교회성장과 부흥에 절대적 힘이 되지만, 정리되지 못한 성령 교리와 은사 신학은 신앙 생활에 많은 혼돈을 줌으로서 사실상 교회 분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 무시하고 미워하는 불행한 결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은사의 무지에서 교회와 성도가 깨어나야 하며, 올바른 신학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영적 은사에 대한 자기 합리화로 인한 문제점도 있다. 즉,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는 안타까움 보다 자기를 합리화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전도 은사가 없어서 믿기는 해도 전도하는 것과 그렇게 깊은 상관은 없다. 나는 중보기도 은사가 없어서 그런 중보기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의 신앙의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것이다. 또 자기가 지닌 은사가 제일이라는 '제일파'와 연습을 하여 은사를 받게 하는 '착각파'도 은사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의 산물인줄 아는 무지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상과 같은 은사의 남용을 막기 위해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랑은 은사의 위험성을 방지할 수 있는 포괄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은사들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촉매 역할을 해준다. 바울은 사랑이 모든 은사의 중심이므로 사랑을 구함으로 열매 맺는 생활이 다른 은사 행하기를 구하는 것보다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즉, 그는 사랑 없는 방언, 예언, 신유, 환상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다고 했다. 사랑은 자랑도 교만함도 이기심도 없기 때문에 은사를 받았다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거나 남을 과소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대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성장시키고, 또한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사랑을 가지고 행하여야 할 것이다. B. 은사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 필자는 위에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유익한 점과 위험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이 고찰을 통해서 필자는 교회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은사가 인간들의 무지와 남용 그리고 오해와 욕심을 통해서 변질되고 타락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히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가 우리에게 상당한 기쁨과 유익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것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된 문제점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적용과 활용을 위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정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게 역사하고 있으므로 성도들 자신은 성령에 대한 바른 신학적 정립과 함께 성령의 사역으로써의 은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정립되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성령의 깊은 역사와 은사의 다양한 역사를 바르게 깨닫고 교회 내에서 적용할 수 있다. 성경적, 신학적 배경 없는 은사 체험은 자칫 잘못하면 은사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가져오므로 교회 내에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적, 신학적 배경에 위에서 은사에 대한 바른 정립이 요청된다. 특별히 성경 신학적 정립과 조명을 받아야 하겠다. 둘째, 성도들은 주어진 은사에 대한 계발과 노력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목회자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성도 개인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개발시키면서 그 은사를 교회 내에서 바르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주어야 한다. 아직도 교회 안에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 결과로 교회 안에는 귀중한 은사를 받고도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여 캐내듯이 은사 받은 성도를 발견하여 그 은사대로 교회 내에서 바르게 봉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하겠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런 목회자의 교육에 순종하고 따라야 하겠다. 셋째, 성도들은 받은 은사를 교회 내에서 혹은 사회에서 기능적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인 저마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교회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하겠다. 특별히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반 사회에서도 그 기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드러내도록 힘써야 하겠다. 넷째,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의 활용 목표를 반드시 숙지해야만 한다. 은사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서로 협력하도록 주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그리고 성도들은 이 몸 된 주님의 각 지체가 되었으므로, 이제 성도 개개인은 머리되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그분의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이므로, 각자가 하나가 되어 지휘자 되시는 성령에 인도에 따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더불어 지체를 섬기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성도들은 은사를 바르게 성장, 성숙시켜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은사는 마치 도구와 같은 것이므로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 성장, 성숙시켜 나가도록 힘써야 하겠다. 특별히 목회자가 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성도가 받은 은사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게 되면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은사의 정지성과 현존성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성도들에게 올바른 은사 교육을 하고, 그런 후 성도들이 받은 은사를 바르게 성장, 성숙시켜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런 목회자들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한편, 목회자가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은사 받은 성도들을 바로 인도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은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여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 성숙될 수 있도록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다. C.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지도 방안 현재 한국 교회에 나타난 은사 운동은 성령의 은사가 너무 은밀하면서 인격적이기 때문에 신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고 간과해 버리는 한 부류와 또 다른 편에서는 열광적인 카리스마 운동을 통한 개인적인 체험을 앞세운 반 신학적인 부류로 양극화 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신학의 영양실조 현상과 성령의 사유화 현상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낳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극단화되면 이것은 성령 없는 하나님 신학과 하나님 없는 성령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참으로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성령의 은사가 잘못 사용되는 이유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이세상의 생활에서 영적인 가치관의 변화없이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한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므로 과오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감사하고 증거해야 하는 증인들이다(고후 9: 15).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고백을 증언해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랑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문제들을 논의할 때 비로써 양극화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신자 개개인에게는 바른 지도와 촉구의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제 지금까지 고찰한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현 한국교회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지도해야 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지식이 결여되었기에 그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기피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광신주의자가 될까봐 두려워 서 혹은 은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맡기지 아니하는 불신으로 은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지는 은사에 대한 두려움과 반대를 초래한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전 12: 1)"고 전제하고, 은사에 대한 것을 전개해 나갔다. 교회가 영적인 은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의 불화와 분열은 성령의 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경쟁하며, 원망함으로써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상처를 입게 된다. 김진홍 목사의 책 "교회의 갱신"에 보면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연습한다고 한다. 그 곳에서는 방언 받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할렐루야'란 단어를 연습시킨다고 한다. 그것을 빨리 하라고 강요하면서 강대상을 치고 언성을 높이면 나중에 혓바닥이 굳어서 '얼럴럴' 하니까 방언이 터졌다, 할렐루야! 라고 외친다고 한다. 이것은 방언을 연습해서 배울 수 있는 하나의 말하는 기술과 같은 어떤 것으로 오해한 처사이다. 그리고 또 "많은 목회자들이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잘 믿다가도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는 바로 올바른 성경적, 신학적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통하여 은사에 대한 진리를 일찍부터 습득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 교회가 매일 구제를 관리하는 중에 헬라파 사람들을 차별대우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때 사도들은 성도들 가운데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신앙이 깊고 칭찬을 받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택하라고 하였다. 결국 그들은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선택해서 세웠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왕성하여 졌으며, 그리고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다(행전 6: 1-7).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케 하고, 상당한 유익을 주며,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러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에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그 관심과 교육이 너무 소홀했다. 아니 그것을 바르게 교회에서 적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인식되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내용과 사상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변질, 타락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특별히 현 한국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변질된 성령 운동을 통해 오순절 교단뿐만 아니라 장로교 간판을 달고 있는 장로교회들까지 그 사상과 내용을 수용하여 변질되어 타락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교회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성경적, 신학적 정립이 시급히 요청되며, 더불어 보완이 있어야 하겠다. 둘째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인격성 결여에 대한 참된 이해와 교육이 진행되어야 하겠다. 사도행전 8장에는 예수를 믿고 사도들로부터 세례까지 받은 신도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전 8: 19)"라고 하였다. 여기서 시몬은 성령과 은사에 대한 무지로 성령을 인격적으로 보지 못하고,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시몬과 같은 이들이 있어 성령의 은사를 단순히 배울 수 있는 어떤 기술적인 것, 또는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고찰한 대로 모든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요구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이다("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 11).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은사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특별히 방언만큼은 꼭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방언을 받으려고 갈망하다가 받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침체 혹은 그 이상의 악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주관성을 가진 인격자이신 사실을 무시한 처사이다. 방언 뿐 아니라 모든 은사를 다 받기를 소망하더라도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일 수 없다. 그러나 방언이라도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기계론적 논리는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인격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처사이다. 결국, 이런 현상은 성령론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신학적 무지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요구에 의해 역사 하시지 않고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 하신다(엡 1: 5-6). 그런데도 성령의 은사가 인격적으로 무시되는 처사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자들뿐만 아니라 은사를 받은 당사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인격적인 영이시다.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인격적인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수여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인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격성이 결여된 은사 이해나 은사 활용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점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은사에 있어서 인격성의 결여가 은사로 하여금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에 대한 대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신학적 지식의 결여에 대한 올바른 지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앞에서 성경적인 부분을 다룰 때 잠시 함께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현 한국 교회 성령 운동의 두 가지 기본 형태는 "외향적이고 근본적인 성령 운동"과 "내향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령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전자가 묵시 문학적인 신앙 운동인데 비하여 후자는 심령 치유적인 신앙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은사와 관련하여 교회에서 무리를 일으키는 것은 후자인 심령 치유적 신앙 운동이다. 한국 교회의 갱신과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서광선씨가 연구한 대표적인 교회는 성락 교회가 있다. 그의 연구를 보면 성락 교회를 리더하고 있는 김기동 목사의 경우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고 신자들의 믿음 없이, 또 성령의 도움 없이, '나가라'는 인간의 목소리 하나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은 아주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기동 목사와 그의 부목사들이 바른 신학적 기반 위에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귀신을 내어쫓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적, 신학적 기반 없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서광선씨는 김기동 목사가 성령론을 사용하지 않고, 귀신론을 사용한 것도 실상은 성령의 힘이 아닌 인간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기 위한 지식 내지는 비법을 터득하기 위한 실습을 하기 위함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이런 김기동 목사의 발상과 결과들은 그의 신학적 지식의 결여로 나타난 산물이다. 한편, 김기동 목사는 "선과 악의 이원론적 우주관과 정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질병에 관해서는 모든 병은 귀신이다"라는 대 전제를 가지고 교회를 주도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다분히 무속적인 축사 현상이나 정령주의(animism)에 무의식적인 근거를 둔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지식 결여의 헛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외에도 잘못된 은사주의나 편협된 은사운동으로 바른 신학의 근본을 변질시킬 우려까지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은 간혹 신문과 방송 등에서 대두되고 있는 안수에 의한 치사 등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모든 문제들은 바로 바른 신학적 결여와 관련된 성령의 은사 운동들이 이미 우리 사회의 곳곳에 깊게 침투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사레들이다. 한편, 김중기 교수는 "말씀 위주의 믿음은 열의가 없어 메마르기 쉽고 성령에만 의존하는 믿음은 근거가 없어 흔들리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신학은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바른 신학적인 기반 위에서 정립되고 나타나야만 된다. 신학이 결여된 은사는 건전한 신앙을 기복 신앙으로 전락시키는 매개가 되어, 결국 기독교를 샤머니즘화 할 주범이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박찬섭은 "성령 신학의 정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세 가지는 첫째로 은사에 대한 성서 신학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로 성령론에 대한 조직 신학적인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의 은사가 사회 선교와 민족 복음화의 분야에 함께 필요하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 있는 교회사적 연구 사례들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문제는 올바른 성령론과 함께 성령의 은사에 관한 바른 신학적, 역사적 정립과 규명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넷째는 은사 받은 성도들을 위한 목회자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케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지체가 몸을 위하여 있는 것과 같이 각종 은사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성도들에게 부덕을 끼치고, 심하게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등 은사를 수여하신 성령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성령은 해를 끼치려고 성령의 은사를 모방한 거짓 은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영 분별의 은사를 주셨듯이, 또한 모든 은사자들의 은사 활용이 전체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지도할 수 있는 권위를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은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교회의 분리와 침체, 또는 성장과 부흥, 그 어느 쪽이든지 문제는 바로 목회자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편, 성령의 은사들은 신자들마다 각각 다르게 주어진다. 이것은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으로서 결코 소수의 특권을 인정해 주는 매개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성도들의 은사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각각의 은사를 유익하게 활용하고 적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참된 관리는 억제가 아니며 방치도 아니고, 오직 적극적이고 건전한 활용과 적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활용되고 있는 은사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은사들이 모든 순간과 상황에 항상 유익할 수는 없기 때문에, 때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은사를 겨냥한 바울의 말과 같이 은사를 활용하는데 규제나 조정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목회자가 맡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은사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높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구분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는데, 목회자의 지도적인 관리는 이러한 면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여야만 하겠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지도와 대책을 수립하고, 수행해 나아가도록 힘써야 하겠다. 특별히 현 한국 교회와 같은 성령 운동, 즉 은사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에 대한 요청은 반드시 시행되어져야 한다. 교회가 부흥(?)만 되고, 성도들이 좋아만 한다면 성경이고, 신학이고 모두 집어 던져버리겠다는 사고를 가진 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는 반드시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성령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올바른 신학적 정립과 바른 이해를 교회에 정착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Ⅵ. 결 론 지금까지 필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에 관하여 그 종류와 그 의미들에 대해서 고찰을 해보았다. 특별히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성령의 은사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삼위 일체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그리고 성령의 주된 사역 가운데 하나인 은사의 이해, 또한 구약과 신약성경 속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 했는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그 은사들의 근원과 특성, 목적, 종류 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찰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나타나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신약 성경 속에서의 성령의 주된 사역은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영감하고, 확증하며, 증거하게 하셨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적용으로 인간의 구원과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형성과 보호, 인도와 유익을 위해 역사하고 계셨다. 그런데 오늘날 오순절 계통이나 그 밖의 은사 운동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은사를 성령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 은사가 인간의 노력과 요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많은 혼란과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바로 바른 성령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온 처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이해할 때,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 모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을 둔,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출해야 되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추구해야 되며,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이기에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감사해야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오늘날 어떤 자들은 이 은사가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 바램 등을 통해서 추구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처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성령의 은사는 사도시대 이후 종결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은사가 성경 계시를 위해서만 존재했기에 사도시대 이후 성경이 종결되면서 은사도 함께 종결되었다고 주장을 한다. 아니면 반대로 오늘날에도 성령에 의해 계시나 모든 은사가 사도 시대처럼 동일하게 열려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것은 모두 극단적인 처사이며, 연약한 인간의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극단을 피하고, 오직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날 수는 있는데, 그 주된 나타남은 오직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으며 소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은 반드시 성경의 조명을 받도록 해야할 것이다. 넷째, 성령의 은사는 교회 현장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 현장에서 바르게 사용될 경우와 오용되고 남용될 경우는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주느냐, 아니면 분열과 갈등, 파괴로 나타나느냐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임을 알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먼저 은사를 주신 성령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또 은사를 주신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 교회의 유익이 되도록 잘 활용해야 하겠다. 더불어 기도 생활과 기쁨, 감사와 성경 묵상, 매사에 활기차고 겸손하며, 경건하며, 타 성도들의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일한 흔적이 뚜렷하여 모두에게 유익이 되고, 본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하고, 성도를 유익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의 은사가 목회 현장에 주는 유익성에 대해서 그릴 목사가 그의 저서를 통해 "우리는 은사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분명히 인식하지만, 나는 위험성보다는 더 많은 유익성이 있다고 믿는다. 은사는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예배에 생기가 넘치게 하며, 성도들의 친교를 증진시키고, 전도에 불을 붙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고 확신했는데, 진정 이런 유익이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스 큉도 "개개인의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성도들의 모임과 교회에 역동적인 힘을 주게 되고, 또 생명이 넘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급속하게 성장해 나갈 것이다"라고 강조했는데, 진정 그렇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고찰한 성령의 은사는 삼위 일체 하나님 사역 속에서, 특별히 삼위 일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주시는 것이기에 성도 개개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 은사를 잘 발견하고, 적절하게 사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울 뿐만 아니라 교회 부흥을 위해서 바람직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도 바울 사도가 강조했던 것처럼 사랑을 통해서 바르게 활용하여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는 꼭 바른 성령론을 먼저 정립한 후, 그리고 이와 같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 나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 참 고 문 헌 ▣ 1. 사전류 성구 대사전 편찬위원, 성구 대사전. 서울: 아가페. 1988. 성서백과대사전 편찬위원회, 성서대백과사전 제 9권.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새성경 사전 편찬위원, 새성경 사전.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이성호, 간추린 성서대사전 제 1권. 서울: 성지원. 1982. 정인찬, 성서백과 사전. 서울: 기독지혜사. 1985. 2. 국내 서적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Ⅲ.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김남진, 어거스틴 삼위 일체론의 입장에서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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