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침실로 가는 길 73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여전합니다. 어느 가사나 음조에 쏠려 같은 음악을 한 자리에서 수 십 번 듣는 버릇도, 문득 보게 된 기사 내용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져 한 동안 아무 일도 못 한 채 고인 웅덩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버릇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도, 땅만 쳐다보며 하염없이 걷는 버릇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뚱딴지처럼 미술 책을 뒤적거리는 버릇도, 어느 누구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나지막이 가만히 살고 싶다가도, 내 안을 밝히는 반짝거림이 사방으로 발산되기를 바라는 모순된 바람도, 세상에 아무도 없이 혼자 존재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짐짓 그 고독을 즐긴다고 하면서도 외로움의 구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버릇도, 생이 아크로바트, 위험천만한 외줄타기 곡예라고 생각하는 버릇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놀랍고,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어떤 기운들이 나를 감싸며 이끌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버릇도, 그 기운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버릇도,
그, 신비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아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신비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한정지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The Wheel of Life>에서 “하나님, 왜 하필 나입니까?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하셨나요?”를 읽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울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은, 림 렌지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첫 장면, 끈끈하고 질척하고 뭉텅이진 붉은 딸기에 박혀있는 검은 점들이 녹이 슨 슬픔임을 알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은, 작년 정초에 처음으로 집 안 벽에 돋을새김 무늬처럼 떠오른 무지개가 야릇한 상실감을 흩뿌려주던 것에 비해, 이번에 찾아온 무지개 속에서 일치와 조화 같은 정제된 감정을 느끼게 된 무엇입니다. 또한, 그 신비는 매번 매 순간마다 무수한 생각의 꼬투리를 깨우치게 만드는 숱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유한한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 삶의 테두리를 벗게 되는 어느 날, 무한한 자유 속으로 날게 되리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해서, 지금 현재 순간순간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위트릴로,
불과 열흘 전이지만, 이제는 작년이 된 12월 막바지 날에 밤과, 아침과 다시 밤 근무를 하루 동안 연달아 한 사연은 기실 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눈 덕분에 그날, 다채로운 빛깔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렇게 동료애가 없냐며, 아무리 눈이 와도 다른 사람들은 다 왔는데, 출근을 못한다니 말이 되냐며 나를 대신해서 한마디 했지만, 저는 신기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힘들게 일해야 한다면, 나는 그 미안함에 견딜 수 없어하며 기를 쓰고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를 대신해서 하루 동안 두 번이나 근무를 대체했지만, 그 상대방으로부터는 인사 한번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이미 내 탓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눈의 탓도 아닙니다. 인사를 듣자고 한 일도 아니기도 했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근무를 하게 된 것은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재난상황이야! 위급한 상황이야! 정신 바짝 차려야 해!’라며 내 안의 목소리가 내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느 때 같으면 힘없고 혼미한 채로 퇴근하고 쉬는 시간에 환자들에게 투약을 하고, 새로이 약을 확인하는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었지요. 정오가 넘어 차편이 여의치 않아서 갓길로 걸어서 퇴근하는 한 시간 반 동안, 몇몇 차들이 달리면서 사정없이 눈보라를 일으켜 진흙과 범벅이 된 차디찬 눈발이 내 얼굴을 강타해도 흡, 한번 숨을 들이키고는 씩씩하게 걸어갔습니다. 오래 전, 폭풍우 치는 오후에 나는 이 길을 걸어간 적이 있었지요. 물웅덩이와 비와 하나가 되는 아찔한 경험에 비하자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이었지요. 그러면서 문득, 이 모든 것이 ‘눈’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눈 덕분이었습니다. 근무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하루 동안 아침, 밤 근무를 병행하는 파격적인 근무도, 쉬어야할 시간에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것도, 병원의 여러 업무들이 마비가 된 것도, 모두 눈 덕분이었습니다. 특별한 오차 없이 늘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던 일상을 마구 마구 헝클어뜨린 눈의 재기발랄한 짓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졌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요! 눈이 방방방방 내리고, 고리타분한 일상에 구멍이 빵빵빵빵 터지고, 덕분에 나는 초인적인 힘을 벙벙벙벙 내고! 모든 것이 한 순간 용서가 되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특별히 장식하는 눈의 유별난 악행!
그렇게 한 해를 마감하고 나서, 범상치 않는 일월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실, 삼 년 전부터 해오던 버릇이 있었지요. 일월이 되기 전에 미리 해맞이를 할 것, 성서서적을 파는 곳에서 구입하는 다이어리에 한 해 동안의 계획을 꼼꼼하게 적어 놓을 것, 미리 즐겁고 신나고 감사하게 내년을 맞이할 것. 해서, 올해도 어김없이 스스로 한 약속을 지켰지요. 해운대 바닷가에서 올올이 풀어지는 해의 기운을 눈빛으로 잡아 당겨 내 안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습니다. 일출의 빛은 월출의 빛과도 닿아 있었습니다. 그 은은하고 장엄한 기품으로 목쉰 영혼 속에 생수를 콸콸 들이붓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기운으로 한 해를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며칠 후, 동래 지하철 역 앞에서 행했던 프리 허그는 스스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육십을 훨씬 넘겼지만, 여리고 푸른 풀빛을 소담스럽게 품고 있는 내 안의 또 다른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우주의 어머니라도 된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리고 다정하게만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안고, 안지 않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삼십 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세상을 안았고, 세상이 내는 호흡을 귀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그 다음의 일들을 만나기 위한 예비였던 걸까요. 마치 앞선 종소리가 뒤에 울리는 소리들을 받쳐줘서 멀리까지 울러 퍼지듯, 내가 행하는 일들은 지금 현재 내가 하려는 일을 앞둔 전조음처럼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오후, 열여섯 명의 환자들과 첫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을 위해서 싱싱한 귤과 약간의 과자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드는 돈은 별로 아깝지 않습니다. 월급날까지 지내려면 약간 버겁기도 하지만, 언제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또 버텨나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전 검사를 하고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13일부터는 ‘마음의 빛을 찾아서’를 진행합니다. 그럼, 언제 학위가 나오느냐고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나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정녕 나는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심상 시치료’이고, ‘심상 시치료’가 ‘마음의 빛’을 찾는 너무나 멋진 방법이라는 사실을 모두와 함께 공감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그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당장 보이는 부정조차 결국 과정을 향한 아름다운 여정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온전히 알게 된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설레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합니다. 환자를 환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시각이 바뀐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얼마나 오만불손한, 보잘 것 없는 인간이었던지요.
집안과의 불화로 극도로 악화된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아이에게 기를 쓰고 찾아가서 겨우 위기를 넘겼던가 했지만, 그 아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선언하듯 제게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다가갔지요.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환해진 아이와 아이의 부모로부터 진정으로 다해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실망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묘미가 이러합니다. 살아갈수록 알게 되는 것이 가득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지요.
1월 13일부터 8명의 환자들과 한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저기, 저 섬에 멈춰서 놀아봅시다. 바다에 뛰어 들어 마음껏 헤엄치며 놀아봅시다. 이 섬에서 나는 맛난 과일들을 따서 먹어 봅시다. 자, 자유롭게 돌아다녀 보세요!”라는 것 따위입니다. 섬에 도착하는 이도, 신나게 노는 이도, 과일을 먹는 이들도 죄다 환자 개개인이지요. 해서, 심상 시치료의 주체는 바로 내담자, 환자입니다. 나는 그들이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당당하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신발 끈을 정성을 다해 고쳐 매어줄 뿐입니다. 이 세상은 숱한 배움으로 가득합니다.
위트릴로, 이렇게 그대한테 편지를 쓰면서도 분분히 신비스러운 기운을 느낍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말로 다 토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버릇도 여전하나, 여전하지 않는 것들은 아직 버릇이 없는 경황 중에 있습니다.
2013. 1. 9. tl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