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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역사]]유럽의 그리스 띠우기 역사

작성자비키니를입은너의모습을보았을때..|작성시간07.06.09|조회수116 목록 댓글 0
 

유럽이라는 말

 

영국 역사학계의 경우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심이 크지 않다.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보수적인 <<English Historical Review>>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과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 잡지인 <<Past and Present>>에 포스트머더니즘 역사학에 대한 본격적인 노눈이 처음 실린 것이 1998년 정도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개념들이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지만 이에 대한 프랑스 역사학계의 관심도 크지 않다. 한국에서는 특히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큰 편인데 이는 이들이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이 인명이 아닌 지명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7세기 전반의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의 서사이에서이다. 그러나 당시에 그것이 가리키는 지역은 모호하며 오늘날의 유럽 지역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그의 <<아폴론 찬가>>에서 펠로폰네소스, 섬들, 유럽을 구분해 말했다. 그러니까 그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의 그리스 본토이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오면 크세노폰이나 이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통해 유럽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럽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항해 그리스 도시들이 함께 뭉칠 것을 주창한 아테네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이다. 그는 그리스를 유럽으로, 페르시아를 아시아로 명확히구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는 유럽(그리스)과 아시아(페르시아)를 나누던 이분법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리비아)의 삼분법으로 바뀌었다. 이때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아조프 해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는 나일강이었다.


15세기 까지 유럽이라는 말은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의 이념이 만들어진 것은 15~16세기 이후이다. 그것은 보편적 세계로서의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을 통해 무너지며 그 세속적 대치물로 등장했다. 또 18세기의 계몽사상이나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등이 그 정체성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유럽은 지리적 단위로서만이 아니라 합리성, 근대성,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가 되었고 이는 비유럽의 비합리성, 야만성, 정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후 우월한 문화 공동체로서의 유럽은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됨으로써 러시아를 포함하는 동유럽까지, 더 나아가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백인들이 사는 비유럽 지역까지도 포괄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농업을 위한 관개와 관련되는 주장은 유럽의 민주주의와 동양적 전제를 대비해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아시아에서는 대규모 관개를 위해 중앙집권과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했으믈 자연히 권위주의적인 정치, 사회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헤로도토스 등을 비롯해 고대에 기원을 갖고 있으나 18세기 중반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동양이라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안 연상했으므로 이 지역의 건조 기후와 관개 농업을 동양적 전제와 연결시켰다. 이런 생각은 논리적인 비약을 통해 그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비건조 지역을 포함하는 전 아시아로 확대되었다.


산업화나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나폴레옹 시대인 1806년 이후 프랑스의 귀족 계급은 다시 힘을 되찾았고 19세기 내내 지배 계급으로서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그리스 문명을 치켜세움에 따라 그것을 잇는 헬레니즘적 문명의 의미와 비중은 축소된다. 그것이 오리엔트적인 요소와 결합함으로써 고전 그리스 문명의 퇴화 단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발견 이후 유럽인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사는 미개한 사람들이 현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유럽의 과거에도 아주 다른 삶이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제 아메리카나 다른 지역에서 사는,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져 있는 원주민들의 삶을 보며 그들은 신대륙의 현재를 통해 구대륙의 과거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신대륙의 원주민이 혹시 그리스, 로마 이전의 유럽인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스터클리(Stukeley, 1687~1765)가 잉글랜드의 에이브버리 등 고대 유적을 석기시대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여 역사시대와 선사시대를 처음으로 구분했다. 1816년에 덴마크의 톰센(Thomsen)은 덴마크에서 발굴되는 선사시대의 연모들을 재질에 따라 구분하여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이전에 긴 선사시대가 있다는 생각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고고학이 학문적으로 결정적인 뒷받침을 얻게 된 것은 진화론에 의해서이다.


전 세계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지고 고고학 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단일적 진화라는 도식이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새로이 확산주의적 시각이 등장했다. 이것은 어느 지역에서 이루어진 문화의 발전이 교역이나 이주, 문화적 접촉을 통해 세계의 다른 곳으로 전파된다는 가정이다. 이는 20세기 초에 매우 유행했던 이론이다. 그러나 지나친 확산주의에도 역시 많은 결함이 있다. 그것도 문화의 중심을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후에는 확산주의의 신회성도 줄어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중요해짐에 따라 고고학 연구에서도 민족주의가 점차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고고학은 이전에 그 초점을 인류의 발전에 두었던 것을 포기하고 특정 민족의 역사를 밝히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문화-역사적 고고학이다.


(아마 18세기 후반쯤 무렵인듯) 문헌학(텍스트)에 의한 고고학의 지배하는 것은 문헌학이 고고학의 기능화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이 독자적으로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리스 아싸


그리스사에서 기원전 1200년경에서 기원전 700년경까지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기원전 1200년경에 미케네 문명이 파괴되고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이 그리스 반도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며 그 후 500년간 문화가 단절된다는 것이다. 이게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슐리만이 1870년에 그리스의 청동기 문명을 발견한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그 전에는 기원전 700년 이전 시기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들을 빗대 영웅시대라고 불렀다. (영웅시대의 끝이 기원전 700. 기원전 700년?)


1890년에 저명한 이집트 학자인 페트리(F. Petrie)가 미케네 유적의 파괴 시기를 이집트 19왕조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그리스의 영웅시대의 끝인 1200년)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인 영웅시대는 500년 뒤로 소급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기원전 1200년과 기원전 700년 사이에는 공백이 생겼고 이 시기의 기록이 전무하므로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어른 남자와 청년, 또는 아주 어린 소년 사이의 동성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리스인 저자들의 설명을 따르고 있다. 플라톤은 이를 남자들 사이의 정상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로 주장하고 있다. 어른 남자와 소년이 그런 관계에 들어갈 때 거기에는 소년을 고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용기와 같은 남자다운 덕성을 가르치는 교육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회를 미화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이런 식의 설명은 크세노폰 등 그리스의 만흔 저자가 되풀이하고 있는 이야기이고 도기를 연구하는 현대의 고고학자들도 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왔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에서는 동성애조차 품위 있고 덕성과 관련이 있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도기 그림을 통한 최근의 한 연구는 이런 식의 설명에 대한 재거토를 요구하고 있다. 동성애는 항상 나이 먹은 상대와 젊은 상대 사이에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성행위의 파트너가 남자, 여자, 동성애자 등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파트너와 수동적 파트너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항상 전자에 대해 사회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군다나 남자 사이의 항문 성교는 수동적인 파트너에게는 그림으로도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다. (누구의 주장이더라.....M. Kilmer인가?)


크레타 인들은 제사에 사람을 희생으로 바쳤고 인육을 먹었다는 증거도 있다. 미케네 문명은 물론이고 고전기에도 동물 숭배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18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이집트를 보는 관점은 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저작을 통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집트가 641년에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된 후 유럽 지역과는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유럽 자체에서도 그리스, 로마 고전적 전통이 끊어졌으므로 고전을 통해 이집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세기 언어학자들은 햄족인 이집트인이 고도의 이집트 고대 문명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대안을 아리아족에게서 찾았다. 말이 끄는 마차와 우월한 무기를 가지고 북쪽에서 내려온 아리아족이 셈족과 지중해 연안의 종족들을 지배했고 이들이 다시 이집트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을 복속시키고 왕위를 차지하여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이를 왕조인종이론이라 함)


빙켈만은 이집트 미술은 ‘원시적’으로 규정되었고 이런 부정적 인식은 그 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몸을 묘사하고, 건축에서 기둥이나 아치를 만드는 데에서도 첫것을 떼는 데 불과했다. 그것을 완전하게 하고 체계화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라는 것이라 하였다.

 

고대 이집트가 토속 이집트인(흑인같은)이 아니라는 왕조인종 이론은 20세기 초까지 이집트학을 지배하였다. 

 

왕조인종이론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중반 무렵부터 시작했다.


선사시대에 초원과 늪지로 구성되었던 사하라 지역에서 높은 수준의 신석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사하라 아프리카인은 사하라의 사막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살수 없게 된 사하라인들의 목축, 농경, 도기, 석기 만드는 기술과 함께 기원전 5000~4500년경 나일 계곡으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사냥, 어로, 채집 생활을 하는 토착민과 합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의 이집트인을 정형화하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열대 아프리카인의 특징이 섞인 신체적 특징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이집트인의 기원이며 이렇게 형성된 바다리아인이 고왕국 창건 이전의 바다리아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왕조인종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아프리카 학자의 주장일껄...)



고왕국 이전 시기의 바다리아 문화를 발전시킨 나일 강 유역 주민에게는 열대 아프리카적 특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유럽인들이 보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오랫동안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문명을 그 후에 이 지역에서 산 사람들이나 그 문화와 분리시켜 화석화한 ‘죽은’ 문명으로 만들어 버렸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용어는 서양 학자들에 의해 7세기 이슬람 문명이 일어나기 이전 시대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이라크’ 문명이 되어야 하나 서양인 누구도 그것을 그렇게 부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라크와 이 지역의 고대 문명을 연결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문명과 다르죠.


그리스 비호는 아니지만 그리스에 대해 한마디 하면, 80년대에 그리스가 영국에게 유적을 반환하라고 하였는 데 이에 영국 측은 “현재 그리스인은 종족적으로 고대 그리스인과 다르므로 그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고고학과 관련된 서양인들의 편견은 걸프전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은 근대의 아시리아 왕으로, 그 나라의 유적들은 서양 공통의 유산으로 서구 미디어에 비쳐졌다. 그래서 서양 언론들은 현대 이라크인의 생사 문제가 아니라 고대의 지구라크 파괴에 더 신경을 썼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인물들로 대체로 보물 사냥꾼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물이나 유적의 복잡한 문화적 문맥에 대해서 무지했고, 단지 성서에 부합하는 그럴듯한 유물을 찾아내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커다란 가치가 있는 유물, 유적들이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본격적인 고고 발굴은 189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이집트 학자 페트리에 의해서이다. 그는 도기의 형태학과 편년을 시작한 인물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고학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규모 이루어진 고고 발굴들은 대체로 그런 목적에 맞추어 계획되었다.

 

 

아프리카


1880년대 이후 아프리카를 거의 식민지화한 유럽 국가의 식민 당국자들은 새 식민지를 탐사하기 위해 강력한 탐사대들을 조직했고 이 탐사대들은 종족, 언어, 관습, 전통, 지리, 지질, 고고 유물에 대한 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첫 고고학적 연구들은 고고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행정관, 군인, 관리나 지질학자 등 기술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고고학적 유물도 초기에는 계획적으로 발굴, 수집된 것이 아니라 군사적 원정이나 과학 탐사, 광산 채굴이나 건설 과정에서 우연히 나온것을 수집한 것이다.


짐바브웨에 있는 대규모 석조 유적인 ‘대 짐바브웨 유적’은 주로 초가로 구성되어 있던 큰 도시의 중심부분이나 중요 부분이나 중요 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 부분에 돌로 된 성벽을 둘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는 10세기 말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250~1280년대에 석조 성벽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석조 건물들이 제대로 들어선 것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의 도시 인구는 약 1만 8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런 큰 도시의 성립은 이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경제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과 국가의 형성까지도 암시 하는 것이다.


인류의 최초 발상지 아프리카가 빙하기에 나타난 거대한 기후 변화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랜 빙하기에도 비교적 온난했고 물도 풍부했으므로 그런 조건이 인류의 조상이 생존하며 진화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지역은 아슐리안 석기(모르면 인터넷 검색해보세요)가 가장 먼저 발전한 곳이다.


이집트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일찍부터 발전했지만 아프리카의 다른 곳에는 청동기시대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철기 문화가 발전한것을 보면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키워주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8세기에서는 철기 무화가 나타나는 데 사하라 이남에서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따라서 누비아보다도 이른 시기에, 철기 문화가 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소말리아 남쪽의 킬와 지역은 짐바브웨산 금을 수출하는 항구로 번창했다. 또한 그곳에서는 정교한 석조 건물을 짓고 수입 도기나 유리를 사용했으며 동전을 주조 했다. 1331년에 그곳을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 그곳의 생상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제가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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