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미국에서 생애를 마친 펠릭스 유스포프 후작은 러시아 혁명에서 고국을 버린 귀족이며 제정 말 군림하던 라스푸틴을 암살한 사람이다.
귀부인을 꿇어 앉히는 숫말같은 정력으로 궁정에 들어온 카리스마 적 위력으로 궁정을 압도했고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가라앉힐 수 있는 단 한 사람 라스푸틴의 말은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조종했다.
러시아 최대 유산 상속자로 유명한 29세의 유스포프 후작은 어느날 라스푸틴으로부터 '당신은 동성연애자다! 나는 동성연애자를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는 모욕을 들었다.
유스포프 후작이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과 라스푸틴의 암살을 시행한 것은 1916년 12월 29일 밤이었다. 라스푸틴이 평소 흑심을 품고있던 유스포프 후작 부인 이리나 공주를 이용해 후작의 집에 초대해서 공주는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라스푸틴에게 청산가리가 든 과자와 와인으로 대접했다.
그러나 와인 세 잔을 비워도 라스푸틴은 멀쩡했다. 이것은 알콜성 위염을 앓고 있어 염산의 분비량이 적었기 때문 아닌가하고 전해지고 있다.
초조해진 후작은 단도로 찔렀고 쓰러질 때 숨이 붙은 동료와 묶었으나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쪽으로 걸어갔다.
공포에 질린 유스포프는 총알이 다할 때까지 쏘았으며 쇠사슬로 묶어 얼어붙은 네바 강에 던졌다. 그러나 그래도 라스푸틴은 얼음을 깨고 강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폐에 물이 들어가 익사했고 시체는 2일 후 발견되었지만 그의 몸에는 궁정 여성들을 사로잡았던 30센티의 남근이 잘려져 있었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소는 나의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동안 그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자가 폐하와 친척 관계인 사람이라면,
폐하의 자녀와 친척 어느누구도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라스푸틴을 검색어로 인터넷 서핑하다 본 건데 그 때 받아논 사진... 잘생겼죠? 옆은 부인인 황제의 조카 이리나 공주입니다. 오른쪽 사진이 라스푸틴, 밑의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임다. 황제 옆에서 소년의 어깨를 안고 있는 소녀가 유명한 아나스타샤 황녀.
펠릭스 유스포프(Felix Yusupov)가 라스푸틴 암살을 시행하고 나서 황제에 의해 변방으로 쫓겨갔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하죠. 유스포프가는 몽골족 칸의 후예였는데 (아마 징기스칸의 정벌때 남겨진 후예) 엄청난 부자였다는군요.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안 갑니다.
이 유스포프 후작은 여자처럼 예뻐서 어머니에 의해 여장을 여러번 해야했다는군요. 미녀로 유명했던 펠릭스의 어머니 제나이다 유스포바는 후계자인 장남을 낳은 뒤 둘째는 예쁜 딸이기를 원했답니다. 그런데 낳아놓고 보니 아들이자 실망했지만 제나이다는 그래도 아들이 예쁘니까 인형놀이하는 것 처럼 여장을 시켰습니다. 펠릭스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하지요.
그는 10대엔 가발과 드레스, 모자로 여장하고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아주 예뻤다고 합니다. 한번은 여장을 하고 파리의 카페에 앉아있었는데 마침 거기 있던 세기의 바람꾼 에드워드 7세가 꼬신 적도 있답니다. 물론 거절했지만.... 어머니 초상화도 꽤 미인.
동성애자였단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너무 여자같이 생겨서 그런게 아닐까요? 양성애자란 소문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