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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스크랩] 2025년 4월 10일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작성자아모스|작성시간25.04.10|조회수48 목록 댓글 0

2025년 4월 10일 목요일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당신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2).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지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듯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보다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깁니다.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예.’라고 대답하고, 안락함을 주었던 울타리를 넘어 떠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계획은, 이 세상이 예수님을 믿어 은총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는 이는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예.’ 해야 할 것을 입으로만 ‘예.’ 하지 않고, 또한 ‘아니요.’ 해야 할 것을 말로만 ‘아니요.’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이끄는 대로 받아들이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그 모든 벽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고 일치를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 영원을 사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6,33)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17,21) 하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본당에 손님 사제로 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습니다. 수녀님께서 제의방으로 조용히 들어오시더니, 한 가지 당부 말씀을 제게 해주셨습니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제대 위에 연미사 지향이 몇 개 올라가 있는데, 한분 이름이 좀 웃긴다고, 다른 신부님들도 이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난감해하셨다고. 미리 마음 준비하시라고 말씀드린다고, 그러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가신 분 이름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미사 때는 있는 힘을 다해 꾹 참았습니다.

과거에는 한번 정한 이름을 바꾸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좀 웃기거나 어색한 이름, 놀림감이 되는 이름이라 할지라도 꾹 참고 계속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약간의 절차를 통해 이름을 쉽게 쉽게 바꿉니다.

이름을 바꾸는 전통은 교회 역사 안에 종종 있어 왔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아브람의 부인 사라이는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리고 시몬이 베드로로 바뀝니다. 회심을 기점으로 사울은 바오로로 개명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어 당신의 일꾼으로 유용하게 쓰시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런 주님의 강한 의지 표현에 부응하여 이름을 바꾼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인생의 전반전을 마무리 짓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한 인간 존재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이제 그를 당신 구원 계획안에 큰 역할을 부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삶과 결별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굳은 결심이요, 종래와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강력한 표시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친히 선택하시고, 큰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의 새로운 이름은 과거의 낡은 삶과 결별하고 주님 안에 새 삶을 시작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세례명은 주님의 제자요 자녀로서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이름 하나만 갖고 살아가지만,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세례명에는 이름에 따른 중요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각 성인의 영성과 생애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로 주어진 새로운 이름에 걸맞는 그런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롬비아에서 선교 사목하는 신부님이 ‘사순 특강’을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선교사 제로 10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까이 있다.’였습니다. 분명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테말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의, 식, 주가 걱정 없고,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과테말라에서 살고 있는 분들은 의, 식, 주에 대한 걱정이 많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여건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사진 속에 보이는 과테말라 교우들의 얼굴은 밝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몇 시간씩 걸어서 행진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빠서 하지 않는 일들을 그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사신은 ‘빨래터’에 대한 축성이었습니다. 마을 사람은 집에 세탁기가 없고, 물이 귀해서 모두 빨래터로 와서 세탁한다고 합니다. 1년에 한 번 이렇게 귀한 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신부님께 ‘축복’을 청한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선교사로 있으면서 본당 교우들과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붕이 새는 집을 찾아가서 양철 지붕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식료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주교님을 모시고 본당 설립 350주년 미사를 성대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 없기에 본당에 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본당에 와서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도서관을 만들고 나니, 독지가들이 책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장학금의 지급 기준은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주는 장학금이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받은 만큼 나누는 것입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성당 도서관에 와서 봉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책을 정리하고, 어린 학생들의 숙제를 도와주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고 합니다. 어렵게 마련한 장학금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주는 것이 맞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부님은 10년 가까이 교우들과 기쁘게 지냈고,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였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은퇴하면 다시 과테말라로 돌아가서 지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26년 전에 처음 본당 신부로 사목하던 성당이 생각났습니다. 34년 사제 생활 중에 가장 즐거웠고, 행복했던 3년이었습니다. 주일미사에 나오는 신자는 100명이 채 안 되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교우들과 더욱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는 약수터로 가서 물을 떠왔습니다. 큰 물통 4개의 물을 가득 가져오면 주일에 교우들이 마실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성당과 농산물을 직거래하였습니다. 배추, 꿀, 쌀을 팔았습니다. 교우들은 수익의 일부를 성당에 봉헌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7명이었는데 3년이 지날 무렵에는 100여 명이 넘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교우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운영했습니다. 4대의 승합차로 교우들을 모셔 왔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수녀님과 제가 운전해서 교우들을 모셔 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본당의 학생들에게 본당을 개방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연 속에서 지냈고, 농촌 봉사활동도 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예전에 정원에 있는 나무와 꽃들에게 매일 물을 주면서 그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고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내 정성의 결과로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생각을 해보니 그 나무와 꽃을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나무와 꽃들에게 주었던 물을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시며, 또한 나를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길 함께 기도합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성인

 

성녀 막달레나 데 카노사 (Madeleine de Canossa)

활동년도 : 1774-1835년

신분 : 설립자

지역 : 베로나(Verona)

같은 이름 : 마들렌, 막딸레나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남겨둔 채 재혼하여 떠나버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8세였다. 그의 형제들은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삼촌의 학대 때문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수녀가 될 마음으로 가까이 있던 카르멜회로 갔으나 성소가 없었던지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그 나폴레옹이 그녀의 카노사 성을 둘러보러 왔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텅 비어 있던 성 요셉(Josephus) 수도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착수하였다.

또 성녀 막달레나가 베네치아(Venezia)로 갔을 때에는 빛나는 옷을 입은 6명의 수도자들에 둘러싸인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 즉시 성모의 명을 따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모든 사업은 나폴레옹의 도움이 컸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비오 11세(Pius XI)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였다. “많은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가난해 지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녀는 실제로 가난하였다.” 그녀는 194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에제키엘(Ezekiel)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연도 : +6세기BC

구약성서 대예언서에 속하는 에제키엘서의 저자인 성 에제키엘(Ezechiel)은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을 전후로 20여 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였다. 에제키엘서는 총 4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에제키엘 자신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에제키엘은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었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사제’가 에제키엘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는 혼인도 하고, 자기 집에 원로들을 모아 놓고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를 보면 그가 매우 독특한 예언자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신비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는, 환시들을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진다(1,1. 4-28; 3,10-15; 37,1-10 등). 많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나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집에 앉아 있으면서 환시 속에 예루살렘을 돌아다니기도 한다(8장).

에제키엘은 하느님과 동족에 대하여 열정을 지닌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동시에 냉철하고 심사숙고하고 자기의 생각을 엄격한 논리에 따라 전개시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였다.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성전과 그 의식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40장 이하), 민족의 역사와 전통도 자기의 독창적 역사관을 내세울 정도로 깊이 알고 있었다(16장, 20장, 23장 참조).

그는 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나 동화 같은 것을 과감히 받아들여 자기의 가르침에 적용시키는 개방된 신학자였다. 그리고 세계정세(25-32장)는 물론,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티로의 교역 내용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27,12-25). 또한 조선 기술도 거침없이 서술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27,3-11).

이러한 박식함은 예언자의 사명 수행에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유다인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국제적으로 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스라엘은 ‘반항의 집안’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듯, 에제키엘의 청중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다(2,3). 그래서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예언자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하였을 뿐더러,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그 구성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려는 노력이었다.

사실 에제키엘은 사목자였다. 그는 ‘파수꾼’으로 세워졌다(3,16-21; 33,1-9). 파수꾼은 성안에 있는 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주변을 살피고, 작은 위험이라도 닥쳐오면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 준비를 갖추고 재난을 막거나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언자 파수꾼’은 외부의 위험만 알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개별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악인에게는 악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이 파수꾼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과 죽음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사목자인 것이다.

이 점이 에제키엘을 그 이전의 예언자들과 구분 짓게 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공동체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부르짖으며 또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의 시대는 기존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때였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종교, 정치,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민족 전체가 불행에 빠지면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18장). 그래서 예언자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각 구성원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예언자상도 바뀐 것이다. 에제키엘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달라진 예언직에 과감히 투신하였다. 어떤 면에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그는 주저 없이 말씀의 선포에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에서는 에제키엘을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복자 안토니오 네이롯(Anthony Neyrot)

활동년도 : +1460년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안토니우스 네이롯(Antonius Neyrot, 또는 안토니오)은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의 리볼리(Rivoli) 태생으로 피렌체(Firenze)의 산마르코(San Marco)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어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의 지도를 받았다. 서원을 한 뒤 그는 시칠리아(Sicilia)의 어느 수도원으로 파견을 받고 부임하러 가던 중, 그가 탄 배가 나폴리(Napoli)와 시칠리아 사이에서 해적들에게 나포되었다. 이때 그는 튀니스(Tunis)로 끌려가서 노예로 팔렸다.

다행히 그는 자유를 얻는데 성공했으나 코란을 배우려는 일념으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모슬렘이 되기까지 하였다. 7개월가량 거짓 예언자의 신앙생활을 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성 안토니누스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 즉시 그는 아내를 떠나 보속을 행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는 튀니스로 가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또 마호메트교의 부당성을 설파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돌과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후일 그의 유해는 제노바(Genova) 상인들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순교자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세기 중엽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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