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일 주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홍보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뻐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시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 사도행전의 시작입니다. 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7-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4-28; 10,19-23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10,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24,46-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46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 머리말에서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에서 승천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 전하고,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의 일을 전합니다. 사도들의 인간적인 처지에서 바라본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 슬퍼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 기뻐하다가 이윽고 헤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주님께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에 슬퍼하기보다 크게 기뻐합니다. 이 땅 위의 희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희망’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내내 당부하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는 곧 이 새로운 희망의 선포를 뜻합니다.
파스카 사건의 증인으로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받은 사도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닌 희망(에페 1,18 참조)의 증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시련과 절망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신앙에 기초한 우리의 희망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올해 홍보 주일 담화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요 수동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수행적인 덕”임을 강조하십니다. ‘희망의 순례자들’인 우리가 희년을 지내는 동안 피해 갈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또한 모든 이가 이 희망을 함께 나누도록 한쪽으로 치우친 언론과 가짜 뉴스에 휘둘리지 않도록 다양한 홍보 매체 안에서 늘 깨어 있도록 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그분은 떠나셨지만,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 생생히 살아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대축제 기간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건너가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위대했던 신앙 여정을 묵상합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셔서 좀 더 우리 가운데 머물러 주실 것 같았던 그분께서 안타깝게도 선종하셨습니다.
살아생전 보여 주셨던 수도자요 사제, 주교요 교황으로서의 그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 그 소박하고 순수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찰나같은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그분을 알현했던 순간의 축복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분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연세의 다른 노인들에게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었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깊이 느껴졌습니다. 한없이 그윽하고 맑은 눈길, 아버지로서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담긴 미소 앞에 저는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잠깐 사이의 만남이 제게는 치유의 순간이요, 은총과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면,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살아생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교회나 수도원이 담 안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의 끝, 변방으로 나아가도록 부단히 촉구하셨습니다. 지난 세월 교회가 약자들에게 저지른 과오와 실책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셨습니다.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교황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고 탈권위적인 행보를 취하셨습니다. 극단적 청빈의 삶을 몸소 사시면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교회와 사회 앞에 온몸으로 저항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예수회 수도자,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 관구장,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 교구장, 교황직을 거치면서 한결같이 추구하셨던 삶의 모습은 가난이요, 작음이었습니다. 다들 크고 화려한 것, 엄청 대단한 것, 높디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데 혈안이 된 오늘 우리를 향해 그분은 생애 내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외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이제 더 이상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남긴 그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 사목자로서 보여주신 열정과 충실함, 선한 이미지는 더 생생히 우리 안에 남아 있고,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를 떠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남긴 미소, 그가 보여준 가난하고 고통받는 형제들을 향한 헌신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떠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시듯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한 부활 체험이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승천이 사랑인 이유: 희망과 믿음의 중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아픕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승천의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떠남이 곧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승천이 사랑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양들을 앞장서 주님께로 가는 목자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성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들 옆에만 있다면 그들은 너무 의지만 하려고 해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어떤 부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중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손으로 한 달만 일해서 월급을 가져오면 재산을 물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또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그래, 아버지는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라고 생각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며 아들은 인정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재산을 맡길 정도로 성장 시키려면 그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재산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돈을 벌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멀리 있어야 합니다. 코끼리 새끼가 걷기 싫다고 누워버렸을 때 코끼리는 그 새끼를 기다려줄까요? 그러면 잘못된 버릇이 들어 어른으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코끼리 부모는 새끼를 지나쳐 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시며 당신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골반이 골절되어 병원에만 계셔야 했을 때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재활 과정을 힘겨워하셨습니다. 저희는 어머니께 희망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집’입니다. 본래 살던 집은 빌라 4층이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이젠 골절된 것이 나으셔도 사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본당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모으신 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꿈꾸던 집을 마련해 드렸고 병원에서 가끔 모셔 와 보여드리고 주무시게 해 드렸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재활을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 희망을 주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오를 수 있도록 목적지에서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과 교회 사이에서 포도주, 곧 성령을 중재하십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둥지에서 떨어뜨리지만, 땅에 닿기 전에 날개로 받쳐줍니다. 희망이 있어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거기서 끝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집과 앞으로 다닐 성당에 머물면서 저를 도와주는 이들을 어머니께 보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줍니다.
농부가 아무리 맛있는 사과가 있어도 왕비를 통하지 않으면 임금에게 바로 봉헌할 수 없습니다. 왕비는 그 중재의 역할을 함으로써 왕의 은총이 농부에게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농부는 왕비를 통해 임금에 대한 믿음을 회복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희망과 믿음의 중개자가 되시기 위해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5일에 달라스에 있는 ‘보현사’엘 다녀왔습니다.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작은 선물을 드리고, 차를 마시고 왔습니다. 올해는 스님께서 드리는 ‘예불’에 함께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1시간 넘게 예불을 드렸고, 스님의 정성과 간절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모든 불자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며 불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삶의 고통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는 4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저도 14년 전에 아버지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어머니가 5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아버지의 임종도, 어머니의 임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원중회고(怨憎會苦))’가 있습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가 있습니다. 나는 선을 추구하지만, 악으로 향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천주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이 있기에 사람은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중에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양심이 있기에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양심이 있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양심이 있기에 배우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식별하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천사들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단지 예수님이 떠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희망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는 부르심이자, 이미 그 하늘 자리에 우리 몫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위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이 땅에서 ‘허공을 응시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더 깊은 함께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그 하느님의 형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을 통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 양심으로 우리는 아픈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 양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베드로처럼 잘못한 일에 회개할 수 있으며, 배우지 않아도 겸손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나처럼 하늘을 향해 걸어오라. 땅에 묶여 살지 말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라." 오늘 우리는 이 미사 안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겸손을 배우고, 회개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 유스티노(Justin)
신분 : 교부, 순교자, 호교론자
활동연도 : 100/110?-165년
같은이름 :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에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성 유스티누스가 에페수스(Ephesus)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은 130년경이다. 그는 이후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를 저술하였다. 그는 순회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가 있는 로마(Roma)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Prima Apologia, Secunda Apologia)을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는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하여 로마(Rome)의 집정관인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게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Hannibal Mary di Francia)
활동년도 : 1851-1927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 메시나(Messina)
같은 이름 : 프란치아, 한니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는 1851년 7월 5일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37-38; 루가 10,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그의 영성과 사목의 샘이었다. 187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안니발레 신부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서 일할 일꾼들을 교회에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로가테, Rogate)의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니발레 신부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치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가 ‘전세계가 성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성소주일)을 제정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복음의 덕을 평생 동안 산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6월 1일 메시나에서 선종하였다.
1990년 10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안니발레 신부는 ‘현대 성소 사목의 선구자’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2004년 5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그라시아노 (Gratian)
활동년도 : +250년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그라띨리아노, 그라띨리아누스, 그라시아누스, 그라씨아노, 그라씨아누스, 그라티아노, 그라티아누스, 그라틸리아노, 그라틸리아누스
황제군의 군인이었던 성 펠리누스(Felinus)와 성 그라티아누스(Gratianus, 또는 그라시아노)는 데키우스 황제 때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976년에 밀라노(Milano) 부근 아로나(Arona)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성 그라티아누스는 그라틸리아누스(Gratilianus)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