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마을 향우님이신
강성태(부: 강복동 님) 형님이 직접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마을 유래 입니다.
혹시 우리 마을에 대해서 관심있으신 분들께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雙龜마을 유래-
쌍구마을은 곡성쪽에서 죽곡쪽으로 통명산을 넘어가는 지름길인 진둔치(陳屯峙)아래 첫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구성1리에 속한다.
쌍구(雙龜)
즉, 두마리의 거북이라는 뜻이다.
마을형국이 풍수지리학상 쌍구혈(雙龜穴)이기에 마을명으로 작명했다고 전해 온다.
거북이는 머리, 꼬리, 네발을 한꺼번에 감출 수 있다하여 장륙이라고도 부르며 장수하는 동물, 보은하는 동물로 용, 봉황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기에 집을 지으면서 상량할 때 대들보에 거북이를 뜻하는 하룡
또는 해귀라는 문자를 써 넣기도 하고 비석에 귀부(龜趺)를 받쳐 장생(長生)과 길상(吉祥)을 염원하기도 하는 우리 민족과 매우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쌍구마을의 지형을 명쾌하게 설명 해 줄 수 있는 풍수 전문가를 아직 만날 수 없어 매우 아쉽기도 하다.
쌍구마을은 현 오곡면사무소에서 7km쯤 통명산 동쪽자락에 위치해 있다.
통명산에서 흘러나오는 금천을 따라 난포장도로를 오르다 구성저수지가 나타나고 이어 나타난 폐교된 명성초등학교를 왼편으로 돌아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길끝에 맺친 마을이다.
쌍구 마을명 및 마을의 유래는 한때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경주 빙씨(慶州氷氏) 가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쌍구 마을에는 빙씨 가문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내려오고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주 빙씨의 시조는 1467년(세조30년)명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빙여경(氷如鏡)으로 사신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다가 귀화한 중국인 인데 이조참의와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해졌던 사람이다.
그의 8세손인 빙한익(1651-1674)은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하자 실의에 빠져 지내던 중 전라도 곡성(谷城)땅에 명나라를 기리는 대명산(大明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솔들을 이끌고 내려와 지금의 쌍구마을에 살집을 세워 "쌍구암"이라 현판하고 쌍구암 처사라 자처하며 자손들에게도 청나라 연호가 기록된 교지 밑에서 벼슬 살지 말기를 일렀다 한다.
자기 조국인 명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대명산 즉, 통명산 자락에서 일생을 마친 한 중국인 후손.
명나라에 대한 애뜻한 향수와 충성심이 매우 갸륵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어째든 빙씨 가문은 귀화인으로서 병역과 부역 및 세금 등을 면제받고 특별대우를 받으며 열두대문을 짖고 큰 부자로 살았다 한다.
그 집의 규모가 「대문 안베미 논」등의 지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나 제일 바깥대문이 서 있던 자리는 쌍구마을 유산각 바로 뒤편으로 그 안쪽의 논들의 모두를 지금도 대문 안베미 논 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대에 양질의 고령토(高嶺土)와 도요(陶窯)터가 많고 전문가들이 중국식 도자기모형도 더러 발견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어 혹 빙씨 일가에서 농사와 더불어 혹 도자기를 굽는 사업을 시도하지 않았나 추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잘 살던 빙씨 일가가 몰락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현재 통명산 상상봉에 올라가 보면 일명 큰메퉁거리 라는 매우 큰 묘가 있다 이 묘의 주인인 빙한익의 손자인 빙수덕의 묘지라고 한데 배뜨는 형국이라하여 「배뜸」이라 불러오고 있는 곳이다.
후손인 빙대섭(곡성읍 대평2구)씨의 전언에 의하면 이 묘는 현재까지 좌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에 묘를 쓰자 곡성향교의 닭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지 않는다는 경이로운 이야기를 몇년전 필자에게 전해 준 바 있다
이 묘는 큰 명당으로 후손이 발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었다는데 곡성좌수(현재 면장격)였던 빙좌수(실존인물)의 권세와 실정이 심하자 이를 보지 못한 오곡면 승법리에 살던 한 풍수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이 산소는 배가 뜨는 형국이라 앞에 있는 돛대를 떨어내야 순항을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 빙좌수 역시 관운이 크게 트여 벼슬이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고 한다.
이 말에 혹한 빙좌수는 수많은 고을 사람들과 당시 비싼 폭약을 구해 산 속의 큰 돛대바위를 폭파하는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한다.
쌍구마을 위쪽 계곡에 있는 돛대바위는 이렇게 해서 두동강이가 나 아래 양쪽 계곡이 현재도 온통 자갈밭으로 뒤덮여 있다.
이 일이 있는 3일 후 빙좌수는 그의 방에서 즉사했다고 전하며 빙씨 가문은 그 후 그 빛. 청산 등의 뒷치닥거리로 골치를 앓다가 가문이 쇠해 졌으며 또한 모두 흩어져 나갔다고 전한다.
현재 마을에는 빙씨 후손이 5가구 살고 있다.
그러나 쌍구마을의 맨처음 설촌자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인 서록(徐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유래에 따르면 서록이 진주로부터 이거해와 18대 후손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마을 위쪽에 비석이 서 있는 1549년 30대 곡성현감을 역임한 서련(徐鍊)과 동일인이 아닌가 유추된다.
이천서씨 족보와 군사 등의 기록이 각각 달라 서현감에 대한 정확한 생목(生歿) 연대를 기술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현감 재직 연대와 서현감의 8대 후손인 서귀두(63.오곡면 오지리 거주)씨가 전하는 족보 내용을 근거로 추정해 본다면 1530년에 태어나 1586년에 생을 마감 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쌍구마을은 적어도 400년 이상된 마을인 것으로 내다 보인다.
마을 이장(장종수)에 의하면,
현재 마을을 지키고 있는 성받이는
경주 빙씨 외에 광산김씨, 옥천조씨가 각각 4가구, 진주강씨, 청주한씨 3가구, 밀양박씨, 경주최씨 2가구이며, 기타 능성구씨, 나주임씨, 밀양손씨, 목천장씨,이천서씨, 연안김씨 등의 각성받이가 각각 1가구씩으로 32가구 62명이라고 전한다.
60년대 말 후반 한창 마을이 번성기를 누릴때는 총 78가구에 이르렀다고, 쌍구 마을은 마을 유입구인 서쪽의 농경지를 비롯해 주변 계곡 사이에 꽤 전답(田畓)이 많아 옛부터 산골마을치고는 부유한 마을 이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죽곡면 신풍마을쪽과 고개하나를 사이에 두고 역사를 통해 수많은 행인이 오가며 곡성지역과 죽곡, 목사동, 지역간의 정보와 인정을 주고받던 가교적 마을로 더욱 친근한 마을인 것 같다.
진둔치(陳屯峙)
먼 옛날 왜구들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싸웠던 고개라하여 진둔치라 한다.
하지만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며 전투를 치루었던 시기가 고려말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인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는 없다.
현재 진둔치의 도로개설 공사가 한창인데 오곡면 구성리(쌍구마을)에서 죽곡면 신풍리까지 도로를 진난 2001년 11월 21일부터 공사를 실시,
2003년 11월 20일 완공을 목표로 개설 중에 있다.
걸어서 2시간 거리인 진둔치가 개설공사가 완공된 후엔 몇 분 안에 넘나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 되 신풍 지역 주민과 구성지역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 조만간 해결될 전망이다.
쌍구마을 앞에는 2001년 부락민들의 힘으로 오천여만원을 들여 쓰레기더미로 지저분한 공한지를 메우고 쌈지공원을 조성, 한결 산뜻한 느낌이다.
사시사철 별로 마르지 않는다는 마을 앞 시냇물과 당산, 우거진 당산나무 그리고 공원옆에 오롯이 서 있는 광산김씨 효열비, 옥천조씨 공적비와,일제시대 일본인들과 극한 투쟁으로 몰수당한 마을의 전답을 찾아내기 위해 옥살이를 서슴치 않았던 참봉 김영태(子 김관식) 실적비등이 한곳에 묶여 마을의 역사를 살려가고 있다.
또 마을 안쪽에 밀양박씨 제각이 있다.
쌍구마을의 주변에 바랑굴, 목탁봉, 절골, 불당골, 도시랑골 등의 지명과 운홍사 등 암자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주변에 절이나 암자가 많이 생겨났다 사라졌던 것과 같다. 특히 전근대적 시절엔 사람의 왕래가 많아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대략 쌍구 마을 지명에 대한 유래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가 이러한 유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텃밭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 글 옮기는 사람 강 성 태 -------
강성태(부: 강복동 님) 형님이 직접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마을 유래 입니다.
혹시 우리 마을에 대해서 관심있으신 분들께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雙龜마을 유래-
쌍구마을은 곡성쪽에서 죽곡쪽으로 통명산을 넘어가는 지름길인 진둔치(陳屯峙)아래 첫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구성1리에 속한다.
쌍구(雙龜)
즉, 두마리의 거북이라는 뜻이다.
마을형국이 풍수지리학상 쌍구혈(雙龜穴)이기에 마을명으로 작명했다고 전해 온다.
거북이는 머리, 꼬리, 네발을 한꺼번에 감출 수 있다하여 장륙이라고도 부르며 장수하는 동물, 보은하는 동물로 용, 봉황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기에 집을 지으면서 상량할 때 대들보에 거북이를 뜻하는 하룡
또는 해귀라는 문자를 써 넣기도 하고 비석에 귀부(龜趺)를 받쳐 장생(長生)과 길상(吉祥)을 염원하기도 하는 우리 민족과 매우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쌍구마을의 지형을 명쾌하게 설명 해 줄 수 있는 풍수 전문가를 아직 만날 수 없어 매우 아쉽기도 하다.
쌍구마을은 현 오곡면사무소에서 7km쯤 통명산 동쪽자락에 위치해 있다.
통명산에서 흘러나오는 금천을 따라 난포장도로를 오르다 구성저수지가 나타나고 이어 나타난 폐교된 명성초등학교를 왼편으로 돌아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길끝에 맺친 마을이다.
쌍구 마을명 및 마을의 유래는 한때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경주 빙씨(慶州氷氏) 가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쌍구 마을에는 빙씨 가문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내려오고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주 빙씨의 시조는 1467년(세조30년)명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빙여경(氷如鏡)으로 사신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다가 귀화한 중국인 인데 이조참의와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해졌던 사람이다.
그의 8세손인 빙한익(1651-1674)은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하자 실의에 빠져 지내던 중 전라도 곡성(谷城)땅에 명나라를 기리는 대명산(大明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솔들을 이끌고 내려와 지금의 쌍구마을에 살집을 세워 "쌍구암"이라 현판하고 쌍구암 처사라 자처하며 자손들에게도 청나라 연호가 기록된 교지 밑에서 벼슬 살지 말기를 일렀다 한다.
자기 조국인 명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대명산 즉, 통명산 자락에서 일생을 마친 한 중국인 후손.
명나라에 대한 애뜻한 향수와 충성심이 매우 갸륵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어째든 빙씨 가문은 귀화인으로서 병역과 부역 및 세금 등을 면제받고 특별대우를 받으며 열두대문을 짖고 큰 부자로 살았다 한다.
그 집의 규모가 「대문 안베미 논」등의 지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나 제일 바깥대문이 서 있던 자리는 쌍구마을 유산각 바로 뒤편으로 그 안쪽의 논들의 모두를 지금도 대문 안베미 논 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대에 양질의 고령토(高嶺土)와 도요(陶窯)터가 많고 전문가들이 중국식 도자기모형도 더러 발견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어 혹 빙씨 일가에서 농사와 더불어 혹 도자기를 굽는 사업을 시도하지 않았나 추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잘 살던 빙씨 일가가 몰락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현재 통명산 상상봉에 올라가 보면 일명 큰메퉁거리 라는 매우 큰 묘가 있다 이 묘의 주인인 빙한익의 손자인 빙수덕의 묘지라고 한데 배뜨는 형국이라하여 「배뜸」이라 불러오고 있는 곳이다.
후손인 빙대섭(곡성읍 대평2구)씨의 전언에 의하면 이 묘는 현재까지 좌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에 묘를 쓰자 곡성향교의 닭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지 않는다는 경이로운 이야기를 몇년전 필자에게 전해 준 바 있다
이 묘는 큰 명당으로 후손이 발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었다는데 곡성좌수(현재 면장격)였던 빙좌수(실존인물)의 권세와 실정이 심하자 이를 보지 못한 오곡면 승법리에 살던 한 풍수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이 산소는 배가 뜨는 형국이라 앞에 있는 돛대를 떨어내야 순항을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 빙좌수 역시 관운이 크게 트여 벼슬이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고 한다.
이 말에 혹한 빙좌수는 수많은 고을 사람들과 당시 비싼 폭약을 구해 산 속의 큰 돛대바위를 폭파하는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한다.
쌍구마을 위쪽 계곡에 있는 돛대바위는 이렇게 해서 두동강이가 나 아래 양쪽 계곡이 현재도 온통 자갈밭으로 뒤덮여 있다.
이 일이 있는 3일 후 빙좌수는 그의 방에서 즉사했다고 전하며 빙씨 가문은 그 후 그 빛. 청산 등의 뒷치닥거리로 골치를 앓다가 가문이 쇠해 졌으며 또한 모두 흩어져 나갔다고 전한다.
현재 마을에는 빙씨 후손이 5가구 살고 있다.
그러나 쌍구마을의 맨처음 설촌자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인 서록(徐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유래에 따르면 서록이 진주로부터 이거해와 18대 후손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마을 위쪽에 비석이 서 있는 1549년 30대 곡성현감을 역임한 서련(徐鍊)과 동일인이 아닌가 유추된다.
이천서씨 족보와 군사 등의 기록이 각각 달라 서현감에 대한 정확한 생목(生歿) 연대를 기술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현감 재직 연대와 서현감의 8대 후손인 서귀두(63.오곡면 오지리 거주)씨가 전하는 족보 내용을 근거로 추정해 본다면 1530년에 태어나 1586년에 생을 마감 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쌍구마을은 적어도 400년 이상된 마을인 것으로 내다 보인다.
마을 이장(장종수)에 의하면,
현재 마을을 지키고 있는 성받이는
경주 빙씨 외에 광산김씨, 옥천조씨가 각각 4가구, 진주강씨, 청주한씨 3가구, 밀양박씨, 경주최씨 2가구이며, 기타 능성구씨, 나주임씨, 밀양손씨, 목천장씨,이천서씨, 연안김씨 등의 각성받이가 각각 1가구씩으로 32가구 62명이라고 전한다.
60년대 말 후반 한창 마을이 번성기를 누릴때는 총 78가구에 이르렀다고, 쌍구 마을은 마을 유입구인 서쪽의 농경지를 비롯해 주변 계곡 사이에 꽤 전답(田畓)이 많아 옛부터 산골마을치고는 부유한 마을 이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죽곡면 신풍마을쪽과 고개하나를 사이에 두고 역사를 통해 수많은 행인이 오가며 곡성지역과 죽곡, 목사동, 지역간의 정보와 인정을 주고받던 가교적 마을로 더욱 친근한 마을인 것 같다.
진둔치(陳屯峙)
먼 옛날 왜구들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싸웠던 고개라하여 진둔치라 한다.
하지만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며 전투를 치루었던 시기가 고려말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인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는 없다.
현재 진둔치의 도로개설 공사가 한창인데 오곡면 구성리(쌍구마을)에서 죽곡면 신풍리까지 도로를 진난 2001년 11월 21일부터 공사를 실시,
2003년 11월 20일 완공을 목표로 개설 중에 있다.
걸어서 2시간 거리인 진둔치가 개설공사가 완공된 후엔 몇 분 안에 넘나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 되 신풍 지역 주민과 구성지역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 조만간 해결될 전망이다.
쌍구마을 앞에는 2001년 부락민들의 힘으로 오천여만원을 들여 쓰레기더미로 지저분한 공한지를 메우고 쌈지공원을 조성, 한결 산뜻한 느낌이다.
사시사철 별로 마르지 않는다는 마을 앞 시냇물과 당산, 우거진 당산나무 그리고 공원옆에 오롯이 서 있는 광산김씨 효열비, 옥천조씨 공적비와,일제시대 일본인들과 극한 투쟁으로 몰수당한 마을의 전답을 찾아내기 위해 옥살이를 서슴치 않았던 참봉 김영태(子 김관식) 실적비등이 한곳에 묶여 마을의 역사를 살려가고 있다.
또 마을 안쪽에 밀양박씨 제각이 있다.
쌍구마을의 주변에 바랑굴, 목탁봉, 절골, 불당골, 도시랑골 등의 지명과 운홍사 등 암자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주변에 절이나 암자가 많이 생겨났다 사라졌던 것과 같다. 특히 전근대적 시절엔 사람의 왕래가 많아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대략 쌍구 마을 지명에 대한 유래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가 이러한 유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텃밭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 글 옮기는 사람 강 성 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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