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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이야기

몽고메리 장군의 등장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2.12.11|조회수2,892 목록 댓글 15

전쟁 이야기를 들을 때 지도 상에 어느 지점에서 이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지형적으로 왜 그 전투가 그렇게 중요했고, 전략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글을 읽는 분이 연합군 사령부 작전 상황실에 서있는 장군이 아니라도 이야기를 즐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당시 리비아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이태리와 그 동쪽에 이웃 국가인 이집트를 식민지로 갖고있는 영국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 위에 전쟁을 벌이지고 있던 지역을 보면 리비아에 있는 롬멜과 그의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 입장에서나 이집트에 주둔하고있던 영국군이나 본국들로부터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이태리 해군이 지중해(특히 남부 이태리와 북부 리비아가 마주 보는 지중해 바다)를 제대로 막아서고 있기만 했어도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은 보급이 막혀서 그대로 항복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태리 해군이 전혀 제 역활을 못했고, 심지어 1941년 5월에는 독일의 거대 전함 비스마르크호(일본 야카토 전함보다는 작았지만 유럽에서는 최대 규모의 괴물 전함이었음.)이 불과 몇달 전에 이태리의 군항 타란토를 공습했던 영국의 함재기 소드피시 복엽기의 어뢰 공격과 영국 해군 전함들의 집중 사격으로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독일조차도 지중해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독일이 자랑하던 거대 전함 비스마르크호, 50,000톤의 배수량으로 엄청난 괴물 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야마토 전함이 65,000톤이었던 것을 보면 야마토는 더 엄청난 괴물이었습니다. 문제는

비스마르크나 야마토나 2차대전에서 그 거대한 체구에 걸맞는 전공을 전혀 세우지 못하고 허망하게

침몰했다는 것입니다. )

 

그러다보니 이태리보다 훨씬 더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집트 주둔 영국군들은 비록 롬멜의 연전연승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었지만 지중해를 통해서 꾸준히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독일해군의 유보트 잠수함과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엄청난 수의 화물선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지만....) 

 

 

(1942년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롬멜 피로한 모습,

그는 이 사진이 촬영되고 얼마 안있어 신병

치료를 위해 독일로 향하는 신세가 됩니다.)

 

도리어 원래부터 보급이 부실했던 이태리 뿐만 아니라 독소전쟁으로 정신없던 독일 본토로부터 최소의 보급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던 독일군들 역시 어려운 상황에서 간신히 간신히 전쟁을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앞글에서 얘기했듯이 1941년 여름 유럽대륙에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것이라는 압박감에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독소전쟁이 시작한지 반년이 지난 1942년 1월 롬멜은 기습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영국군이 점령하고있던 밴가지와 아게다비아를 되찾고, 6월에는 토브룩을 점령하면서 이집트 국경을 넘어서 진격을 계속하게 됩니다. 사실 롬멜의 기습 작전에 대해서 그의 부하 참모들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무리수라고 말렸지만 롬멜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밴가지와 아게다비아과 토브룩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을

보면 무려 5개월 동안 영국군도 매우 치열하게 반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는 토브룩이 지중해로부터 영국 본토의 보급이

용이한 해안 지역이어서 비교적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오래 버틸

수 있었습니다만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롬멜은

부실한 이태리 군과 숫적으로 적은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어려운

 조건이지만 어쨌든 토브룩을 점령한 후에 이집트로 치고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오킨텍 사령관이 이끄는 영국군은 이집트로 들어온 독일-이태리 동맹군의 공격을 앨 알라메인 지역에서 악착같이 방어하자 롬멜의 진격은 멈추게 됩니다. 게다가 점점 보급선이 길어지는데다가 영국 공군의 공습이 강화되어 부족한 보급 물량마저 도중에서 파괴되어 사라져버리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롬멜은 더 이상 강하게 밀어붙힐 수 있는 힘을 잃게 됩니다.

 

(이집트 안쪽으로 들어와서 형성된 전선으로 앨 알라메인(별표)

에 팽팽한 전선이 펼쳐지게 됩니다.)

 

오킨텍 사령관은 앨 알라메인 지역에서 롬멜의 진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리비아 내에서 전투를 벌이던 상황에서 1년 사이에 이집트 내에서 전선이 형성될 정도 영국의 후퇴가 이루어진 책임은 피할 수 없었고,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를 해임한 후에 해롤드 알렉산더 대장을 새로운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게 합니다. 동시에 영국군 주력부대인 8군 사령관으로 새롭게 윌리엄 고트 중장이 부임하게 되는데 여기서 운명의 장난은 시작됩니다.

 

그가 탑승한 비전투용 수송기(타입 130 봄베이)가 이집트 카이로로 비행하던 중에 독일 공군 편대의 공격을 받고 간신히 지상에 비상 착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공군 메서슈미트 전투기들은 비상 착륙한 수송기를 다시 한번 무참하게 사격하여 수송기 기체가 벌집이 되고 그안에 탑승자 전원은 몰살 당합니다. 후에 그 수송기에 신임 8군 사령관이 탑승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파이에 의해 사전 보고 받은 독일 공군이 의도적으로 이런 집요한 공격을 하였다고 추측되었지만 끝내 진상이 밝혀지진 않습니다.

 

 

(신임 8군 사령관 윌리엄 고트 중장이 탑승했던 타입 130 봄베이 수송기)

 

어찌되었든 뜻밖에 고트 중장이 죽게되자 급히 후임자로 몽고메리 중장이 임명됩니다. 사실 불과 1년 사이에 주둔군 총사령관 두명이 불명예 해임을 당할 정도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 최고 명장 롬멜을 상대한다는 것은 직업 군인들에게 앞길이 막힐 수도 있는 위태로운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 장군은 롬멜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출세욕과 명예욕이 가득찬 이 장군은 이번 기회가 자신의 진가를 알리고 승진을 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1942년 11월, 대공세를 시작한 직후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은 M3 그랜트 탱크 위에서 찍은 사진. 다분히 홍보용으로

포즈를 취한 듯한 사진입니다.)

 

여기서 몽고메리 장군과 롬멜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의 차이를 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에르빈 롬멜 장군은 1891년에 중류층 학교 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장난꾸러기였지만 불우한 가정은 아니었고 부모와의 관계도 원만하였고, 특히 친구들이 많고 그들의 리더로써 나서곤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롬멜은 어린 시절부터 글라이더와 모형 비행기에 흥미를 갖고 당시 화제가 되었던 독일의 대형 비행선 제플린 공장 엔지니어로 취직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보다 나은 직장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군인이 되도록 설득하여 보병 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스타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 일찌감치 자질을 나타냈고, 

 

 

(롬멜은 히틀러와 만나게 되면서 큰 감명을 받고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전쟁 초기에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두사람의 운명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1차대전 보병 장교로 참전하여 첫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엉뚱하게 귀족 출신 장교들에게 훈장이 돌아가면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발동하게 됩니다. 얼마 후 그는 또 다시 전공을 세우고 결국 이번에는 훈장을 받게 되는데 그는 두고 두고 억울했던 그때 상황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 평민 출신인 그에게 히틀러와의 만남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그에게 보여준 제3제국의 환상은 야망으로 가득찬 롬멜에게는 새로운 돌파구였고 프랑스 침공 임박했을 때 보병 장교였던 그에게 히틀러가 기갑부대를 맡기게 되는데 그는 새로운 전투 방식인 전차전에 대해서 신속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프랑스 점령을 좌우하는 결전이라고 하는 아라스 전투에서 기동력있는 전술 운용 뿐만 아니라 88mm 대공포로 마틸다 전차 부대들을 무력화시키면서 불과 몇달 만에 독일 육군에서 가장 촉망받는 장군 서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평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야망을 가진 그였지만 동시에 북아프리카 사막 전선을 시찰하면서 기갑병들이나 보병들과 함께 통조림으로 식사를 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덕장의 이미지와 동시에 영국군들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전술 구사로써 불세출의 용장으로써의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는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됩니다. 게다가 그가 존경하는 히틀러였지만 전투 중에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면 총통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전투를 확대하고 과감하게 진격하는 스타일이 처음에는 히틀러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갈등의 골을 깊게 파게 되고 결국 "강요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불씨가 됩니다.

 

한편 영국 8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1887년 출생하여 나이로는 롬멜보다 4년 위였습니다. 롬멜이 덕장과 용장의 양쪽을 겸비한 지휘관이었다면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불통에 냉혈한으로써 쉽게 인간적으로 친해지기 쉽지 않은 스타일이었습니다. 부모가 불화가 심하였고, 특히 어머니는 어린 몽고메리에게 별로 사랑을 주지 않고 냉정하게 대했던 탓에 훗날 그는 그의 아들, 즉 그의 어머니의 손자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을 정도로 냉랭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 후에 자작의 칭호까지 받은 성공한 지휘관이었지만 실상은

 냉혹하고, 불같은 성질의 고집불통 지휘관이었습니다.)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평생 술,담배를 하지 않았고, 동료들이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냉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차전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기갑부대 운용이나 전술적인 면에서 통찰력이 부족하여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몽고메리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몽고메리가 8군 사령관으로 북아프리카에 부임하였을 때 이미 롬멜은 개인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군단이 앨 알라메인 지역까지 진격하게 된 1942년 6월이 될때까지 만성적인 보급 부족 및 전력의 소진 등등 이미 기력이 빠진 상태였다는 사실에서 몽고메리의 승리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

어찌되었든 불우한 가정에서 편협되게 갖게 된 삐뚤어진 품성과 자신의 부하들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냉정한 리더쉽은 앨 알라메인 2차 전투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기를 잡게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휘했던 수많은 전차들과 병력들이 아프리카 사막 위에서 추축군의 공격에 숯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정된 소모품"이었다는 끔찍한 말을 할 정도의 인간이었습니다.

 

1942년 8월에 이집트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윈스턴 처칠 수상으로부터 어서 롬멜을 공격해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과 이태리 놈들을 내쫓으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중해로부터 공급되는 각종 무기들과 보급 물자들을 2개월 동안 열심히 받아서 비축하고만 있었습니다. 8월말에 시간에 쫓긴 롬멜이 먼저 공격을 해왔지만 몽고메리는 방어선을 철저히 지키면서 반격하여 막아냅니다.

 

한가지 특이할 내용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본격적으로 연합국의 일원이 된 미국의 풍족한 무기와 보급 물자들이 북아프리카 영국군에게 공급되기 시작하자 이미 보급 물자의 차질로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전력이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어가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비해서 영국은 10월까지 강력한 전력을 갖추게 됩니다. 무려 20만명의 병력과 1,000대의 전차를 갖추게 되는데 그 규모는 독일에 대해 2:1 우위를 점하는 규모였습니다.

 

 

(1941년 부실한 영국 전차들이 롬멜의 88mm 대공포에 속수무책이었으나, 1년이 지난

1942년 미국으로부터 공급 받은 M3 그랜트와 M3 리 전차는 영국군 전차 전력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41년 크루세이더 작전(비록 롬멜의 승리로 끝났지만)때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은 M3 스튜어트 전차가 북아프리카 전선에 등장하더니 1942년 5월말에는 M3 리 전차와 M3 그랜트 전차 (리와 그랜트 모두 남북전쟁 북군과 남군 총사령관 이름을 땄음.)가 투입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그해 10월에는 숫적으로는 아직 턱없이 적지만 2차대전 내내 미국 주력 전차로 활약하게 되는 M4 셔먼 전차까지 영국군에게 공급됨은 물론이고 드디어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하게 되어 동쪽 해안에 상륙하게 되는 미군들은 각종 미국의 우수한 전차들과 군용 차량들을 앞세우고 독일을 압박해오게 됩니다.

 

(타미야 M3 스튜어트 북아프리카 버전. 2차대전 미국 전차 중에서

가장 경량급입니다. 큰 위력은 없었지만 이태리 전차나 2호 전차

대비해서는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귀여운 외모 때문에

모델러들에게는 다양한 버젼으로 종종 작품이 되곤 합니다. )

 

 

(영국군 버전의 M4 셔먼 전차. 앨 알라메인 전투 중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또 1942년 접어들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롬멜 장군은 정작 몽고메리가 10월에 대공세를 시작하는 싯점에는 북아프리카를 떠나서 독일 본토에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고메리의 공세는 롬멜이 없는 독일-이태리 동맹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고 진격을 거듭하게 되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은 독일은 반격을 시작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롬멜이 없지만 독일의 유능한 지휘관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상대와 똑같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2:1의 우위이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무려 6,0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앨 알라메인 지역에서 첫번째 전투의 결과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몽고메리가 얻어낸 첫번째 승리는 롬멜에게 얻어낸 것이 아니라 그가 없는 상태에서 보급 부족과 전력 소모로 방어에도 급급한 상태의 추축군을 상대로 한 승리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앨 알라메인 전투 중 독일군 전차 기갑병이 영국 보병에게

항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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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2.12.12 흠... 진짜 흥미진진해요!!! 아~ 롬멜...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12 고맙습니닷!
  • 작성자binidad(정창효) | 작성시간 12.12.12 셔먼은 왜저렇게 피탄율이 높게 껑충하게 높게 만들었는지.... 독일군 전차들 보면 납딱한것들 많쟎아요?
    이제 롬멜과 몽고메리는 완전히 공부 다 했습니다. 덕분~...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12 아직 그들의 최후 결전 엘 알라메인 2차 전투 이야기가 안끝났는데요.....^^!
  • 작성자동호아빠(이홍갑) | 작성시간 12.12.15 오호 몽고메리....... 그런 사람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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