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엘 알라메인 2차 전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차대전 중에 유럽/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발발한 가장 끔찍한 지옥과 같은 전투들을 뽑는다면 가장 먼저 동부전선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크루스크 전투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보통 헐리우드 영화화 되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벌지 전투도 있지만 크루스크 전투야 말로 전차라고 불리는 새로운 무기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잔인한 살인 무기인지를 증명해준 사례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1942년 벌어진 엘 알라메인 2차 전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1943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약 한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소련과 독일 합쳐서
전사자만 107만명, 전차 7,000대, 전투기 2,300대가 파괴된 상상을 초월하는 대살육 전쟁이었
습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엄청난 숫자를 희생시킨 전투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었습니다.
(참고로 1955년~1975년 20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북 베트남과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파병국의 전사자 총합이 90만명인 것을 비교하면 얼마나 엄청난 전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 3호 전차를 지나가는 영국 M3 그랜트 전차)
(엘 알라메인 2차 전투가 1942년 10월 23일~11월 2일 단 11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과
추축군 합쳐서 45,000명의 전사자와 전차 1,000대, 전투기 170대가 파괴된 전투입니다.)
왜 "2차"라는 표현을 쓰냐하면 1942년 7월에 벌어진 1차 교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몽고메리 장군이 부임하기 전이었고 그가 부임한 후에 2개월 동안 꾸역 꾸역 지중해를 건너 보급되어오는 각종 전차들과 보급 물자들을 차곡 차곡 쟁여놓은 후에 10월에 시작한 대규모 전투(이것을 "2차 전투"라고 합니다.)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M3 리 전차는 강력한 장갑과 75mm 주포에 추가로 35mm 부포까지 탑재된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주력 전차가 3호 전차였던 점을 감안하면 기껏해야 50mm 주포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장갑으로 독일측은 크게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M3 리 전차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적으로 높은 키 때문에 다른 전차들에 비해서
명중시키기 훨씬 용이했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독일 3호 전차의 높이가 2.5m 였는데
리 전차는 3.1m였습니다. 이 약점으로 인해 리 전차의 별명은 "일곱 형제의 관"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몽고메리 장군이 부임한지 몇주 안되어서 롬멜의 정예 병력이 영국 8군을 공격했으나 불행히도 지독히도 많은 숫자를 파묻어놓은 지뢰들을 제거하느라 하룻밤을 꼬박 소비한 결과 애초 계획했던 시간보다 차질을 빚었고 영국 방어선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적의 공격 움직임을 간파한 몽고메리의 매복 작전에 걸리게 됩니다. 영국에 공급된 미국산 M3 그랜트 전차들은 지옥같은 지뢰밭을 간신히 통과하여 온 추축군에게 사정없이 포격을 가하게 되는데 영국의 마틸다나 발렌타인 전차와는 달리 보병들을 살상할 수 있는 유탄이 개발되어있던 그랜트 전차의 사격에 영국군 포병 부대의 포격 그리고 영국 공군의 공중 지원까지 가세하여 49대의 독일 3호 전차들을 파괴하고, 5,000명 가까운 아프리카 군단 병력들을 몰살시켜 버립니다.
(영국군 전차들의 포격으로 파괴된 독일측 88mm 대공포)
롬멜 장군은 끔찍한 패배와 귀중한 전차와 병력들의 희생 소식을 듣고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 물자를 고려할 때 현재 전선이 형성된 엘 알라메인에서 대치하고 버티며 더 이상의 선제 공격은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게 됩니다. 애초에 롬멜은 부족한 보급 물자 때문에 속전속결을 하기 위해서 시작한 공세가 이렇게 몽고메리 장군의 부임 직후 실패로 돌아가면서 바로 그가 가장 걱정했던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국군에서 밀려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판단이 내리자 이곳의 위급함을 롬멜 자신이 직접 독일로 날아가서 총통에게 보고하고 보다 많은 무기와 보급 물자를 얻어오고 독일 공군의 공중 지원을 요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로 떠나기 전에 방어선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끔찍한 발상을 하게 되는데 엘 알라메인 전선 60km에 걸쳐서 전방 8km 거리에 (즉 가로 60km, 세로 8km = 480 제곱 km 넓이의 벌판) 50만개의 지뢰와 다수의 대형 폭탄들을 매설하여 영국군의 공격을 막게 합니다. 이곳의 별명은 "악마의 뜰"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영국군이 추축군을 향해 진격하려면 이 끔직한 지뢰밭을 지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 지뢰들)
한편 몽고메리는 부임 직후 거둔 롬멜과의 정면 승부에서 승리한 후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10월까지 2개월 동안 4만명이 넘는 병력을 충원하고, 대포 800문과 미국에서 생산된 보다 우수한 성능의 전차들을 포함한 1,000여대의 전차를 보충하게 됩니다. 특히 최초로 2차대전에 투입된 미국산 M4 셔먼 전차는 300대가 도착하여 영국군의 마크를 붙힌 채 추축군 전차들과의 첫 교전을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전차들의 주력은 년초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M3 리와 그랜트 전차가 아직은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주력 전차로 운용하던 마틸다나 발렌타인 전차는 미국산 전차들로 신속하게 교체되면서 급격히 비중이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의 서막이 시작되는 10월에는 사실상 영연방군(영국 주력군과 함께 참전한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자유 프랑스 (드골 장군이 이끌던 망명 단체), 그리스 병력 포함)의 병력은 대치하고 있는 추축군(독일-이태리) 병력의 두배(195,000명), 중형 전차만 따져도 역시 1,029대로 적의 2배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원활한 보급은 반대의 상황인 추축군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조건이었고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영국 공군은 리비아 트리폴리 항구에 도착하여 트럭으로 운반되는 추축군의 보급 물량들을 공습으로 사정없이 파괴해버리곤 하였습니다.
추축군이 필요로 하는 보급 물자는 원 3만톤에 달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월 6,000톤에 불과한 보급 물자가 공급되는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히틀러에게 보다 많은 보급과 공군 지원을 요청하러 독일로 간 롬멜은 그의 건강 악화를 우려한 총통의 강권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신병 치료를 받게 되면서 그보다 훨씬 능력이 떨어지는 게오르그 스투메 장군이 후임자로 임명되는 악재가 발생합니다.
(롬멜에 이어 새롭게 임명된 북아프리카
총사령관 게오르그 스투메 대장)
부족한 보급으로 이미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추축군들 소식에 드디어 대공세를 결정한 몽고메리에게 총사령관의 교체와 롬멜의 신병 치료는 뜻하지 않던 행운이었습니다.
10월 23일을 드디어 운명의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의 대공세 개시일로 결정한 몽고메리는 영국 폭격기의 강력한 공습을 시작으로 이어서 약 900문의 대포들이 일제히 포격을 가하며 추축군 진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엄청난 폭격과 포격들로 독일 방어 진지로 향하는 진격로에 매설된 엄청난 지뢰들과 철조망들은 하늘 위로 치솟으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갑작스런 공격으로 진지를 지키던 병력들 역시 떼죽음을 당하는 지옥이 펼쳐지게 됩니다. 또한 엄청난 타격으로 추축군 통신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어 불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차게 진격하는 영국군 소속 M4 셔먼 전차)
이런 상항에서 전선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지휘 차량에 대령 한명과 함께 출발한 신임 총사령관 스투메 장군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지휘 차량을 발견한 호주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차량 운전을 맡았던 대령이 즉사를 하자 그것을 본 스투메 장군은 평소 지병이었던 심장병이 발작하여 죽게 되는데 그의 시체는 다음 날 발견됩니다.
추축군의 피해도 막심했지만 정작 선제 공격을 감행한 영국군도 자신들 앞에 펼쳐진 지뢰들 때문에 더딘 전진을 하면서 차질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지뢰와 함께 매설된 110kg 폭탄이 터져서 30명의 8군 보병들이 함께 폭사하는 참변이 벌어지기도 했고, 스코틀랜드 연대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7명의 장교들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피해가 발생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양쪽에서 앞 다투어서 매설해놓은 지뢰들 때문인데 엘 알라메인 지역은 전쟁이 끝나고 한세기가 바뀐 21세기에도 간혹 현지 주민들이 사막에 매설된 낡은 지뢰를 밟아서 무고한 생명을 잃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초기의 희생은 공격 시작 하루가 지난 10월 24일~10월 25일 사이에 더 심각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교전이 벌어진 엘 알라메인 지역은 어느 누가 이기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대혼란 속에서 살육전이 벌어집니다. 작전 시작 3일이 지난 25일까지 영국군측은 무려 6,000명이 사망하고 130대의 전차가 파괴됩니다.
뜻밖에 아군의 엄청난 피해가 보고되자 공포에 질린 몽고메리의 참모들과 군단장들은 더 이상 공격을 하면 안된다고 몽고메리에게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할 것을 건의하지만 이 고집불통의 전쟁광은 “아직도 사용 가능한 전차가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라며 "내가 만약 단 10m라도 후퇴할 때는 우리 병력의 절반을 잃었을 때일 것이다"라는 끔찍한 말을 했습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 중에 파괴된 독일의 3호 전차)
몽고메리의 공격 시작 3일 후인 25일 독일 본국에 있던 롬멜은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으로 급히 돌아옵니다. 여기서 롬멜은 영국군의 공세로 벌어지고 있는 대 살육전과 함께 또 하나의 비보를 보고 받게 되는데 바로 추축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적들을 상대하여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루가 지나 10월 26일 영국과 함께 참전 중인 호주군은 전선 북쪽에서 무려 8km 전방으로 펼쳐진 지뢰밭을 돌파합니다. 이들의 전선 돌파는 앞으로 겉잡을 수 없이 엄청난 연합군 병력이 뚫린 방어선으로 봇물 터지듯이 밀려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롬멜은 예비해놓은 1개 경기갑사단과 전선 남방 50km 지점에서 작전 중이던 3호전차로 구성된 2개 기갑사단을 급히 북부 지역으로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곳에 투입되는 기갑병들은 자신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교전을 치룬 후에 다시 돌아올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북부 지역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엘 알라메인의 사막은 점점 더 끔찍한 지옥의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롬멜이 자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북쪽 지역으로 출발시켰다는 정보를 듣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음을 느낍니다. 드디어 11월 2일 새벽 북쪽으로 집결한 영국 주력 부대의 대포 360문이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오는 독일 정예 전차들과 아프리카 군단 보병들을 향해서 발사됩니다. 엄청난 일제 사격으로 3분 간격으로 90m씩 전진하면서 커텐을 친 듯한 불기둥이 솟았고 그곳에 지뢰들과 철조망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전 5시 30분 보병 부대들이 먼저 진격로를 만들어놓자 그길로 전차들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 현황을 보여주는 지도, 위에서 말헸듯이 전선 북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집니다.)
여기서 롬멜의 88mm 대전차포의 위력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데 이제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영국 전차 2개 여단이 대전차포의 사격으로 순식간에 전멸을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몽고메리는 불같이 화를 내고 추가로 2개 여단을 투입하는데 롬멜도 2개 기갑사단으로 하여금 영국 전차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는데 드디어 사막에서 독일과 영국 전차들의 본격적인 전차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쟁 초기에 롬멜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되었던 영국군은 미국산 M3 리와 그랜트 전차들이 갖고 있는 강력한 주포의 화력으로 독일의 3호 전차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파괴된 독일 전차를 수색 중인 영국 8군 보병과
그 앞에 사망한 독일 기갑병의 )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연합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막상 그렇게 잘라 말하기에는 승리자라는 영국과 연합국들의 피해도 너무 엄청났습니다. 숫적으로나 보급 물량의 부족등으로 열악한 조건의 추축군이 비록 패배를 하는 상황에서 상대를 이정도로 치명적으로 파괴했다는 것은 다시 한번 롬멜 장군과 그의 정예부대가 얼마나 우수한 병력이었는가를 실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추축군의 전사자 숫자가 30,000명을 넘어서고 포병 전력은 전체의 90%가 연합군의 포격으로 전멸 당하게 되었습니다. 연합군 측도 15,000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우세하다고 자신했던 기갑 부대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는 추축군과 별 차이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을 내린 롬멜은 결국 나머지 병력들을 끌고 리비아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로 결정하고 후퇴 명령을 내립니다. 후퇴를 하는 중간 중간 롬멜은 연합군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매복하여 추격하는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몽고메리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무사히 후퇴하기 전에 철저하게 부숴버릴 절호의 찬스가 몇번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신속하게 영국 공군의 공습을 명령했다면 추축군이 튀니지에 도착하기 전에 전멸을 당했을 수도 있었는데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공습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롬멜의 군단은 가까스로 튀니지로 후퇴에 성공하지만 병력의 태반은 연합군의 포격의 불기둥과 지뢰밭을 지나오면서 희생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전차들도 파괴되어 사막 모래 속에 쳐박혀 버렸습니다.
간신히 서쪽으로 후퇴에 성공한 롬멜은 11월 8일 미국,영국, 자유 프랑스 연합군이 모로코의 오랑과 카사블랑카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하는 횃불 작전을 개시하게 되면서 동쪽에서는 몽고메리의 병력이 집요하게 추격을 하고, 서쪽에서는 방금 상륙한 새로운 연합군 병력들이 진격해오자 11월 2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철수를 결정합니다. 당시까지 절대 후퇴는 안된다고 고집을 부리던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히틀러도 다음 날인 11월 3일 롬멜의 철수 결정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단순히 역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면 이 다큐를
소개합니다. 다큐멘터리 "롬멜 VS. 몽고메리")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불세출의 전쟁 영웅인 롬멜을 더 이상 북아프리카 전역에 내버려두었다가는 동쪽과 서쪽에서 압박해들어오는 연합군들에게 포로가 되어 치욕을 겪게 될 것이고, 그러면 독일 국민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롬멜을 베를린으로 데리고 오게 하는데 이렇게 해서 불과 2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연전연승의 영웅이 되었다가 몽고메리가 이끄는 연합군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하며 추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무솔리니와 그 심복들의 최후-1943년)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을 떠난 후에 얼마 안되어 대부분의 독일과 이태리 패잔병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전쟁 포로가 되버립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의 항복은 지중해가 연합군에 의해 장악됨을 의미하게 되고 엘 알라메인 2차 전투가 끝난지 불과 8개월만에 연합군은 이태리 시실리 섬에 상륙하여 이태리 본토로 진격해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동부 전선에서 소련과 쿠르스크 대전투를 앞두고 단 한대의 전차가 아쉬었던 상황에서 히틀러는 이태리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전차와 병력을 일부 움직여서 이태리로 보내게 되는데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이태리도 1943년 9월에 연함군에게 항복하게 되며 독재자 무솔리니는 총살 당한 후에 광정에 자신의 부인의 시체와 함께 길거리에서 성난 시민들의 발길질로 얼굴이 짓이겨진 후에 담벼락에 매달리게 됩니다.
(1942년 10월 알라메인 2차 전투 종료 후에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수많은 추축군
병사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라고 불렸던 그들이었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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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12.13 제가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를 명확하게 정리해주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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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닉붕어(황선휘) 작성시간 12.12.13 인명피해가 걸핏하면 만 명 단위로 왔다갔다 하는군요.
2차대전의 양상이란 한 마디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전쟁이라는 것이 섬뜩할 정도입니다. 수치적으로만 봐도 공포스럽네요.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12.13 잘 만들어진 명품 디오라마에서 멋지게 재현된 독일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제 그 당시 얼마나 긴박하고, 지옥과 같은 상황이었는지를 느끼기는 쉽지 않지요. 하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렇게 공부해서 알게되면 같은 작품을 봐도 더 실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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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호아빠(이홍갑) 작성시간 12.12.15 전쟁에서 패배한 독재자들의 최후는 참 비참하네요~~~ 무솔리리도 성난 민중들의 발길질과 담벼락에 걸리는 ~~ 전쟁이라는것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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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12.15 솔직히 무솔리니가 총살 후 시민들에 발에 밟혀 뭉개진 얼굴 사진도 있지만 차마 못올렸는데 독재자의 말로는 그가 행한 잔학 행위만큼 비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거 보면 북에 김씨 부자는 참......